1116화
잔향(4)
“팔겁의 전당을 이용해 대가를 전해주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철쇄용왕의 말에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고위 용왕이 여럿 모여 있다면 이미 소실된 도시의 기능을 되살릴 수 있는 건가?”
팔겁에 전시되어 있던 창립자들의 조각상은 단순하게 기념품 따위가 아니다·
구겁에 올라가 죽은 창립자들의 허물을 재료 삼아 그들의 공능을 모방하는 신기·
하지만 팔겁에서 벌어진 전투와 쿤다라가 추락한 충격으로 전당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
성소의 능력을 빌리거나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철쇄용왕은 레녹의 말을 듣고도 거대한 머리를 돌려 시선을 바꾸었다·
[전륜·]
[네가 귀백이 말했던 구도자인가!!!]
차르르륵!!!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등진 거대한 황금빛의 용종·
팔겁의 하늘 위로 내려앉은 금빛의 용이 레녹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소식은 모두 전해 들었다 구겁에서 폭주한 은성을 홀로 멈춰 세웠다지?]
“····”
[고생이 많았군· 하나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있는 이상 너는 공적에 어울리는 보상을 누릴 수 있을 테니!]
쩌렁쩌렁한 전성과 함께 쉴 새 없이 마력을 터트리는 용왕의 거체·
찌푸린 표정으로 귀를 막고 있던 레녹이 손을 떼어내며 대꾸했다·
“그쪽이 바로 전륜용왕(轉輪龍王)이었군·”
[그렇다· 내가 바로 쿤다라의 법칙과 규율을 주관하는 존재!!!]
전륜이 입을 쩍 벌리고 우렁차게 포효하며 대답했다·
[쿤다라의 모든 장생종은 나 전륜이 보호할 터이니 너는 안심하고 보은을 받아들이도록!!!]
“···소리를 지르지 않고서는 정상적으로 대화하는 게 불가능한 모양이지?”
다짜고짜 포효할 때부터 평범한 성정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시끄러운 성격인 것 같다·
다른 용왕들이 전륜을 만류하기는커녕 대놓고 무시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성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
“포혈공의 말에 의하면 너와 귀백이 용왕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라 하던데·”
레녹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런 존재가 쿤다라가 추락하는 순간에는 뭘 하고 있었지?”
칠겁의 관리자인 허령과 포혈공이 다른 팔대용왕을 두고 나누던 말을 기억한다·
용왕 중에서는 전륜과 귀백만이 레녹과 싸움이 성립할 수 있는 상성을 지니고 했던 바·
두 명의 용종이 그만큼 용왕 중에서도 까다로운 능력을 지녔다는 뜻이겠지·
[본룡의 역할은 쿤다라의 중심에서 전륜을 회전시키며 법칙을 유지하는 것·]
하지만 전륜은 레녹의 말에도 당당하게 전성을 터트렸다·
[안개의 우주에서 중력을 구현하고 위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본룡의 힘이니!!]
“쿤다라 전역에 걸려 있던 중력이 네 작품이었다는 말이군·”
[추락하는 순간까지 우리의 아름다운 도시를 붙잡고 한 줌의 가루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 했지·]
전륜이 비통하다는 듯 거칠게 도리질을 했다·
[비록 도시를 지켜내지는 못했으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지켰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나!!]
“····”
의사소통이 아예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화의 핀트가 묘하게 어긋나 있다·
쿤다라의 고위 진혈종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떠날 생각이었는데 이대로는 진전이 없는 상황·
철쇄용왕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시끄럽게 소리치는 전륜용왕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전륜이란 법칙과 통치의 상징· 기존의 법칙을 존속하고 운용하는 것에 특화된 힘을 지니고 있다·]
쿠구구···!!
철쇄용왕이 가볍게 몸을 비트는 것과 동시에 육중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를 이용하면 소실된 쿤다라의 ‘기능’을 전륜의 순환 아래 억지로 운용하는 것이 가능하지·]
기능을 잃어버린 성소를 전륜의 공능으로 잠시나마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인가·
레녹이 그것을 깨닫고 시선을 들어올린 순간 여섯 용왕이 일제히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8레벨에 도달한 여섯 명의 극위능력자들이 전력으로 발하는 마력의 공명·
팔겁 전역을 뒤덮고 거세게 진동하는 마력광이 한데 모여 전륜의 수레바퀴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수레바퀴 위에 마력으로 무게를 더해 강제로 전륜을 돌리는 듯한 기묘한 형상·
[의미를 잃어버린 쿤다라의 기능을 바쳐 이 도시의 존속에 보답할 수 있다면 충분할 테지·]
레녹이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 철쇄용왕이 중후한 전성으로 말했다·
[우리 용왕의 마력과 생명력을 바쳐 전륜을 돌리고 팔겁의 기능을 잠시나마 되살려-]
하늘 위로 떠오른 철쇄용왕이 단호한 어조로 레녹을 향해 선언했다·
[그대에게 우리와 같은 장생종의 수명을 선물하겠다·]
“···뭐?”
차르르륵!!
찬란한 황금빛의 수레바퀴가 회전하고 그 정광이 전장 전역에 비춰진 찰나·
전륜을 중심으로 모여든 강렬한 빛의 파도가 일제히 레녹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폭포처럼 흘러넘치는 생명력이 수레바퀴를 타고 레녹을 휘감은 순간·
카아아아앙!!!
빛의 파도가 요동치다 레녹에게 흡수되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갔다·
레녹에게서 튕겨 나간 생명력의 정수가 스며들지 못하고 허공에서 모여 그대로 응축되더니·
이내 작은 성물함과 같은 형태로 변해 레녹의 눈앞에 떠올라 부유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으음·]
철쇄용왕이 눈매를 꿈틀거리고 다른 용들이 의문을 표했다·
하늘을 가득 채운 거대한 용들이 어리숙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묘한 모습·
[이게 무슨 일이지?]
[수명을 늘려주는 건 원래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건가·]
[단명종답게 재빠르게도 끝나버리는군·]
“····”
말없이 눈앞에 떠오른 ‘라이프 베슬’을 바라보던 레녹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미리 이야기를 해둘 걸 그랬군·”
보아하니 성소를 작동시켜 수명을 늘려줄 생각이었던 듯하지만 이미 말레온의 도움을 받아 시행착오를 거친 일이다·
페널티로 인해 레녹의 수명이 늘어나지 못하기에 그 보상이 다른 방식으로 발현하게 되는 것·
[···그렇군·]
적당히 사정을 숨긴 레녹의 설명을 듣고 납득한 철쇄용왕이 무거운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신에게 그대가 수명을 원한다는 전언을 들었기에 그를 보은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랬건만· 유감이다·]
“소식이 많이 늦었군·”
[원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그대가 원하는 대가를 전해줄 수 있도록 노력하지·]
철쇄용왕이 레녹의 눈앞에 그 거체를 가라앉히면서 말했다·
[다시 전륜을 돌릴 수는 없겠지만 용들이 가진 재보 중에서 그대가 만족할만한 물건이 있을 것이다·]
“···아니· 예상치 못한 일이긴 하지만 이걸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레녹이 눈앞에서 부유하는 라이프 베슬을 들어 올리면서 답했다·
“저번에는 워낙 급하게 써버리는 바람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하지도 못했었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연구해 봐야겠어·”
영귀의 성소가 부숴진 시점에서 라이프 베슬을 다시 획득할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이건 그 자체로 레녹에게 기회가 되어줄 수 있는 힘이다·
레녹의 육체에 쏟아지는 죽음에 이르는 피해를 단 한 번 대신 받아 넘겨줄 수 있는 성물·
선종과 싸우고 난 뒤 그 효험을 확실하게 체감한만큼 이번에는 그 원리를 확실하게 조사해 봐야겠지·
쿤다라에서는 여유가 없어서 시도조차 하지 못했지만 발칸으로 돌아가면 연구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이 시점에 라이프 베슬을 다시 획득한 것 자체는 굉장히 유의미한 수확이 될 터·
[모자라지만 착한 파충류들이네요·]
“····”
다비가 속삭이는 전성을 애써 무시한 레녹이 표정을 다듬고 물었다·
“쿤다라의 일부를 대가로 전해주려 한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군· 더 할 말이 남아 있나?”
[거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오오오오!!!
음울한 귀곡성을 흩뿌리는 혼백을 휘감은 새하얀 용이 입을 열었다·
팔대용왕 중에서도 유독 이질적인 힘과 의념을 보유한 귀신을 다루는 귀백용왕·
[팔대용왕의 권역을 쿤다라의 외곽에 두르고 그 경계선을 영토로 삼을 것이다·]
귀백이 레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곳 중앙전선은 아르스노바가 멸망한 이후 소유주가 정해지지 않은 땅· 쿤다라가 정착한다 하여 행정적 문제가 생길 일은 없겠지·]
“원로성과 합의된 사안인가?”
[그쪽에서 먼저 의결된 안건이다·]
전륜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여전히 그들과의 협력은 마음에 들지 않으나 도시의 위기를 앞두고 사사로이 분열할 수는 없지·]
“····”
[쿤다라가 중앙에 자리 잡고 속세에 융화되기 전까지는 협력한다· 그것이 우리 용들의 방침이다·]
“그렇군····”
여기까지 와서도 서로 분열해서 뒤통수를 때리거나 배신을 생각하지는 않는 건가·
다른 도시였다면 진작 서로 죽고 죽이다가 세력끼리 갈라져 독립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터·
레녹에게는 무척 생경한 일이었지만 여태껏 본 장생종들은 생각보다 마음이 넓은 면모가 있었다·
단명종을 깔아보기는 하지만 성품 자체가 비열하거나 잔인한 이들이 많지는 않았으니·
레녹이 거쳐온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유달리 성품이 좋다고 말해도 무방할 터·
[그대는 쿤다라에 찾아온 재해를 수습하고 도시의 미래를 열어주었지·]
귀백이 흐릿한 눈동자로 레녹을 내려다보았다·
[원치 않은 방향이었으나 외겁을 포기하고 맞이하는 멸망보다 차선임은 분명하다· 우리 모두가 네게 큰 은혜를 입었구나·]
“····”
[그러니 팔대용왕의 권한으로 그대의 이름을 원로성의 최고위원직에 추천하려 한다·]
“···원로성의 최고위원이라고?”
예상치 못한 제안에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난 곧 외겁도시를 떠날 생각이다· 애초에 인간종에게 통치기구의 관리자 자리를 추천해도 되는 건가?”
[원로성의 최고위원은 쿤다라의 모든 시설에 허락과 자격을 불문하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지·]
귀백이 말했다·
[이 도시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대에게 있어서도 유의미한 이득이 될 텐데·]
“····”
대번에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레녹이 입을 다물었다·
쿤다라가 서부전선에 정착한 이상 대륙을 아우르는 초대형 세력이 되리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장생종들은 수백 년을 넘게 사는 것은 물론이고 살아 있는 것 만으로 위계를 쌓아 올리는 괴물들·
이런 초월자들이 중앙전선에 진출해 영향력을 펼치기 시작하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가치는 천문학적인 수준일 터·
자연스럽게 대륙의 온갖 자산과 인재가 쿤다라에 몰리기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귀백은 그때를 대비해 원로성의 위원직을 받아두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레녹에게 권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는 바를 보아하니 처음부터 미리 준비를 하고 나온 것 같은데·”
레녹이 물었다·
“이 제안을 내게 건네기 위해 일부러 자리를 마련했던 건가?”
[팔대용왕의 입장을 대변하던 은성이 사라진 이상 용종의 편에 설 누군가가 필요해진 시점이지·]
귀백이 긍정했다·
[그대의 이름을 그 명분으로 원로성에 입적해 둔다면 원로성의 권한을 견제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
[철쇄는 이와 같은 안건을 좋아하지 않겠지· 강직한 그의 성품을 생각하면 이런 공작 따위가 무의미하다 여길 테니·]
귀백의 흐릿한 눈동자가 레녹을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하지만 나는 엘더 소사이어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형의 약속이 필요함을 인지하고 있다· 그걸 위해 단명종에게 권한을 넘겨주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군·]
“저번에 상대했을 때도 그렇고 은근히 정치적인 면모가 강한 용이로군····”
레녹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쿤다라의 출입권한을 얻어두는 용도라면 나쁠 것도 없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레그누스는 은성의 결말을 지어준 그대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따로 손을 쓰지 않아도 그대의 이름을 원로성에 들이는 것을 허락하겠지·]
귀백이 대답했다·
[그대의 술식이 하늘 끝에 닿았음을 본 자들이라면 모두 납득할 것이다·]
“···그렇군·”
결국 레녹의 힘과 술식이 있기에 복잡한 절차를 무시하고 강행할 수 있다·
팔대용왕의 앞에서 수신용왕 알로건을 압도하고 그 목숨을 붙여두었기에·
구겁의 끝에서 승천자와 싸워 외겁도시에 제대로 된 결말을 지어주었기에·
압도적인 결과 앞에서 과정에 대한 이의가 존재할 수 없음을 귀백은 넌지시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로건은 어디에 있지?”
[심해권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귀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역시 그대가 한 일의 결과를 받아보았을 테니 오늘날의 결정에 대해 원한을 품지는 않겠지·]
“그런 것이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지만····”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선 레녹이 말했다·
“채비를 마치면 쿤다라를 떠날 예정이다· 이번에는 심해권역을 거쳐가지 않도록 조심하지·”
[그렇군· 다시 한번 그대가 이 도시에 선물한 결말에 대해 감사를 표하지·]
귀백이 그렇게 답하며 부서진 전당의 하늘 위로 천천히 몸을 띄워 올렸다·
[오늘날 그대가 해낸 일은 수천에 이르는 장생종을 살리고 도시의 미래를 바꾸는 결단이었다· 이는 그대가 타고난 수명에 얽매이지 않고 위대한 구도의 길에 섰음을 증명하는 바·]
유령 같은 혼백을 두른 용왕이 고고한 전성으로 선언했다·
[쿤다라의 용왕은 차후 그대에게 은성의 빚을 갚을 것을 약속하겠다·]
“···말레온의 빚이라·”
[도시의 안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라면 한번 본룡의 능력을 빌려주지·]
전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본룡과 힘을 겨루는 영광을 누리는 것을 허락하마!!]
“···뭐?”
레녹이 그 뜬금없는 제안에 표정을 찌푸린 사이 전륜이 물었다·
[그러지 않아도 본룡과 귀백의 무력을 궁금해하지 않았던가?]
차르르륵!!
등 뒤의 수레바퀴를 회전시킨 전륜용왕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위대한 용종은 도전을 피하지 않으니 그 호기심을 해결하게 해주겠다!]
[속세의 소문에 의하면 그대는 혈쟁을 즐기는 구도자라는 말이 있었지·]
귀백 역시 거리낄 이유는 없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이것으로 은성의 빚을 갚을 수 있다면 전륜의 말대로 어울려주지·]
“····”
전륜용왕과 귀백용왕의 무력에 대해 레녹이 흥미를 보였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나·
방금까지 온갖 보상과 감사를 전하고도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
고위 장생종들이 다 그렇지만 행동이나 생각을 종잡기가 어렵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은 어렵군·”
황당한 듯 용왕들을 바라보던 레녹이 고개를 저으면서 돌아섰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받아주지· 이 상태로는 힘들겠어·”
[그렇군· 아직 몸이 편치 않기 때문인가?]
“아니·”
레녹이 전당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지금 마법을 사용하면 아무래도 손속을 둘 수 없을 것 같군·”
* * *
쿤다라에 남겨둔 흔적을 정리하고 떠날 채비를 마쳤다·
가져온 짐이 없기에 신변을 정리하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던 바·
원로성의 최고위원직 추천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혈영궁에서 준비를 모두 끝낸 뒤·
“난 분명히 말했어·”
광대한 궁전의 로비 한복판에 선 포혈공 레이시가 퉁명스레 말했다·
“두달간은 요양하면서 꾸준히 수혈을 받아야 한다고· 그 전까지 넌 그냥 시체 1구에 불과할 뿐이야·”
“악담 고맙군·”
지팡이를 짚고 선 레녹이 레이시가 건네준 가방을 받아들고 돌아섰다·
“치료가 더 필요해지면 부르지· 어차피 소환계약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거리에 구애받을 일이 없을 텐데·”
“됐거든? 나더러 그 번잡하고 피냄새 나는 도시에 다시 들어오라는 거야?”
포혈공이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프로젝트가 아니었다면 평생 발칸에 발을 들일 일도 없었을걸· 딱 질색이니까 시도도 하지 마·”
“그렇군·”
“···내 말 전혀 안 듣고 있지?”
당연히 발칸에 도착하자마자 포혈공을 소환할 생각이었던 레녹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포혈공이 지닌 혈영궁은 레녹의 혈액을 세척하고 순도를 높이기에 최적의 장소였던 바·
발칸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이런 흡혈귀의 능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포혈공은 물론이고 발칸에서 일하는 머피의 도움을 받는다면 건강검진에도 유의미한 진전이 생길 터·
“당분간은 이게 있으니까 괜찮을 거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실력 좋은 흡혈귀가 만든 생명유지장치거든· 내 신진대사를 나쁘지 않은 수준까지 끌어올려 주지·”
“···흡혈귀라·”
“돌아가면 발칸에서 내가 알고 있는 흡혈귀들을 소개시켜 주지· 좋은 친구가 될 거다·”
“우린 만나자마자 친해지는 강아지 같은 게 아니거든· 흡혈종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작게 한숨을 내쉰 포혈공이 지친 듯이 손을 내저었다·
“됐으니까 가봐· 심해권역 쪽을 피해서 문을 열어달라 했었지?”
쩌어업!!
피의 궁전 내벽이 젖혀지며 수풀이 무성한 평야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풀밭 속에서 검은 도포를 흩날리며 레녹을 등지고 서 있는 올리비에라의 모습·
현실과 허수차원의 경계선에 존재하는 혈영궁· 그 출입문의 위치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힘·
그를 통해 포혈공은 레녹을 곧바로 쿤다라가 추락한 경계지대 최외곽에 내려주었던 것이다·
균열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올리비에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메이즈·”
레녹을 따라 혈영궁 밖으로 걸어 나온 흡혈귀가 올리비에라를 불렀다·
올리비에라 역시 베일 너머로 소녀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레이시가 말했다·
“네가 왜 그 마안을 손에 넣었는지 알아·”
[···]
“딱히 걱정하고 싶지도 않고· 너라면 어차피 알아서 잘하겠지· 하지만···”
소녀의 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죽지 마· 내 계약자에게 협력하는 동안에는 네 존재도 유의미한 도움이 될 테니까·”
[재미있군· 벌써부터 이놈의 소환수 노릇에 충실해진 것이냐·]
올리비에라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너는 여전히 어딘가에 얽매인 뒤에야 비로소 자유로워 보이는군·]
“····”
[하나 나는 그런 식의 공의존을 포기하기로 했다·]
미련 없이 돌아선 올리비에라가 말했다·
[헛되더라도 나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대답을 찾아야겠지·]
레이시는 대답하지 않았고 올리비에라는 기다리지 않았다·
함께 공유한 기억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듯 있어야 할 곳으로 걸음을 돌린다·
쿠우웅!!
혈영궁의 문이 닫히고 흡혈귀가 떠난 뒤· 레녹이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무사히 쿤다라 바깥으로 나왔다면 이쯤에서 헤어지도록 하지·]
올리비에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가야 할 곳이 있고 네놈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지·]
“····”
[그렇다면 굳이 발을 맞추어 발칸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전쟁마탑이 우리를 태워주러 오지는 않을 텐데·”
레녹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몸으로 혼자 돌아가도 괜찮겠나?”
선종과 싸우기 위해 레녹도 무리를 했지만 올리비에라가 입은 부상도 상당했다·
마안과 광요마법을 억지로 끌어다 사용한 것은 물론이고 몸이 창에 꿰여 대량의 출혈을 내기도 했으니 빈말로도 몸이 성한 상황은 아니겠지·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올리비에라는 그런 레녹의 말에 싸늘하게 반문했다·
[네놈이 지금부터 할 일을 생각하면 그 질문은 오히려 네놈이 답해야 할 것일 텐데·]
“····”
[대답하지 않을 셈이더냐? 뭐 좋다·]
올리비에라가 냉소하며 몸을 돌렸다·
[어느쪽이든 네놈이 직접 결정할 문제겠지· 마음대로 하거라·]
후욱!!
베일 너머로 마안의 광채가 번뜩이며 그녀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빠르게 희미해져 가는 기척 속에서 그녀가 남긴 전언만이 메아리쳤다·
[하나 그걸 진정 배려라고 할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군·]
“···”
레녹은 올리비에라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다 쓰게 웃었다·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레녹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던 것인가·
그녀의 유능함을 원해 쿤다라까지 동행했음에도 그 통찰력에는 가끔 놀라곤 한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했던 이번 여정이 이렇게 마무리된다면 나쁘지 않겠지·
발칸에서 시작되어 쿤다라로 향했던 이번 일은 오늘 이 자리에서 끝났다·
이제 다른 누군가의 미련에 비로소 제대로 된 결말을 지어줄 시간이었다·
철컥!!
몬스터 바이크를 소환하는 것과 동시에 스로틀을 당긴다·
레녹을 태운 바이크가 광대한 평야를 지나쳐 속도를 높였다·
부아아아앙!!!!
서부전선 경계지대 바깥에 위치한 어느 이름 모를 중소도시·
서대륙을 횡단하는 열차가 지나치는 경유지인지 도시를 관통하는 거대한 철도가 깔려 있다·
레일을 타고 바이크를 달려 열차역 안으로 들어섰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바이크를 수납하고 지상으로 올라선다·
역 곳곳에는 횡단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15분 뒤에 토커퍼즈로 향하는 횡단열차가 도착합니다·]
[금일 서부전선을 경유하는 모든 운행선이 취소되었습니다·]
“차표를 가지고 계시지 않은 분은 지금 즉시 인포-”
“열차에서 취식 가능한 보온도시락을 단돈 2만 셀에-”
열차역의 안내음성과 고함 소리 호객행위가 뒤섞여서 시끌벅적하다·
쿤다라에 있는 동안은 거의 느껴보지 못했던 사람의 소리와 열기·
가만히 서 있어도 많은 사람들이 레녹과 부딪히고 스쳐 걸음을 옮긴다·
인파 속에서 휩쓸리던 레녹이 이내 역 뒤편에 위치한 상업지구 쪽으로 돌아섰다·
열차가 거쳐 지나가는 도시라면 대륙 인근의 소식이나 정보에도 비교적 밝을 터·
‘할 일’을 기다리는 동안 쿤다라의 일에 대한 대륙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사람들이 오가는 번화가로 들어선 그 순간·
거리 사방에서 펼쳐진 스크린의 풍경에 레녹이 걸음을 멈췄다·
“····”
수십 개의 스크린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대륙 전역의 뉴스·
실시간으로 판매되고 있는 여러 회사의 신문과 잡지·
눈에 보이는 모든 언론매체가 단 한 사람의 이름과 사진을 연달아 내보내고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고 얼굴에 강렬한 노이즈가 끼어 있는 남성의 사진·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찍힌 사진이지만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발칸의 대마법사 반이 쿤다라 사태의 핵심 관계자로 알려져 충격을····]
[견뢰의 중앙전선 진출· 서부전선에서 드루이드를 학살하고 행방을 감춘 이후 두 번째 행보·]
[기계도시 마키나에 이어 또 다른 도시를 반파시킨 행적에 대해 성토의 목소리가···]
[중앙의 모든 언론과 세력이 견뢰의 행방을 찾고 있으니 목격자가 있다면 즉시 제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