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5화
잔향(3)
블랙컨슈머 프로젝트·
승천 계획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비밀이자 중앙도시 아르스노바를 멸망시킨 직접적인 원인·
그것이 세계의 모든 실패를 남김없이 걸러내고 남은 정답을 찾기 위한 여정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실패했는지는 레녹도 알지 못했던 바·
레녹은 선종과의 대담을 통해 그것이 회귀(回歸)의 형태가 아니었는지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카이세 바쥬르가 보유한 역천의 재능은 특정 조건 아래 의지와 시간마저 역행하는 힘·
폐쇄구역에서 과거의 카이세가 보여주었듯 극한으로 사용하면 특정 구역 전체의 시간을 완전히 역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그 힘을 특정한 시공간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역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면·
별 전체의 시간선을 되돌려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면·
레녹은 카이세가 그런 식으로 세계의 실패를 파헤치고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프로젝트의 비밀을 직접 전해 듣지 않았음에도 하나둘씩 무언가를 이해해 나간다·
모든 일이 너무나 복잡하게 엮여 있어 하나를 깨닫는 순간 삐걱대며 다음으로 이어진다·
침묵하는 올리비에라를 바라보며 레녹이 조용히 말했다·
“혈계능력은 흔히 태어나면서부터 한계가 정해져 있다고 하지만 그 고점을 높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
“선종의 사념이 그러했듯 기아스나 인신공양을 걸어 능력의 한계나 적용범위를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하지·”
혈계능력이나 초능력처럼 선천적인 체질이나 재능에 의존하는 힘은 기아스 같은 맹약에 극단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선종이 걸었던 두 번 다시 사상전역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기아스 정도라면 술식의 급을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한 바·
레녹은 카이세가 지니고 있던 역천의 재능을 그런 식으로 활용해 온 것이 아니었느냐고 묻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세 바쥬르는 세계를 대상으로 자신을 끝없이 회귀시켜 왔던 건가?”
[···글쎄·]
올리비에라가 등을 돌린 채 조용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꽤 오래전에는··· 그것을 그러한 이름으로도 부르곤 했던 것 같구나·]
“····”
[모든 것을 실패하기 전으로 되돌리는 공능이라· 거창하게 이르자면 그렇게 말할수도 있겠지·]
무표정한 레녹과 눈을 맞춘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하나 그것이 우리의 수단이었을 수는 있으나 마지막까지 우리의 본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이지?”
[네놈이 말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기적인지 너조차도 아직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지·]
올리비에라가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카이세가 지닌 재능은 굉장히 불안정한 힘이었다· 자신의 육체에 한정하여 그 재능을 다루는 것조차도 버거워하곤 했지·]
“····”
[그런 힘을 하나의 구역을 넘어 도시를 초월해 세계 전역에 펼친다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대가를 필요로 할지 생각해 볼 수 있겠느냐?]
타닥 타닥···!!
타들어 가는 불길을 등진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뻗친 열기가 발아래 수풀까지 불태웠지만 두 사람의 신형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알고 있다· 그 ‘비현실적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겠지·]
올리비에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마치 레녹의 생각을 굳이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처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형태로든 카이세의 재능이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수단이었음은 분명하니까· 하지만····]
베일 너머로 속삭이는 그녀의 전성이 잠시 희미하게 변했다·
[무한한 기회를 갖고 있다고 해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올리비에라·”
[그래서 그때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열쇠를 원했던 거다·]
올리비에라의 의념이 순간적으로 한없이 싸늘하게 변하는 듯 했다·
[다음으로 향하기 위한 단 하나의 열쇠를·]
“····”
침묵이 흘렀다·
카이세 바쥬르의 육체를 화장한 이 순간·
올리비에라가 레녹의 결정을 수긍하고 받아들인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답을 해주었다는 사실을 레녹 역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
올리비에라는 어떤 심경으로 레녹에게 그때의 일을 설명하고 있을까·
카이세와 자신의 실패를 고하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분명 레녹이 프로젝트와 직간접적으로 엮여 있는 존재임을 그녀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기에 레녹이 이렇게 집요하게 프로젝트의 흔적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녀 자신보다도 더 가까이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하나 네가 말한 예의 능력이 계획의 일부이자 수단이었음은 분명하겠지·]
그렇게 말한 올리비에라가 시선을 들어올렸다·
[카이세가 자신의 죽음마저 이용하려 한 이유는 역천의 ‘확장’을 위해서기도 하였으니·]
“역천의 확장이라····”
[마지막까지 변심하고 또 변절했지·]
순간 올리비에라의 전성이 흐릿하게 변했다·
[때문에 종국에는 나 역시 카이세의 저의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
[지금 이 순간조차 그러하지· 내가 아는 것이 네가 알아낸 것과 모두 같지 않기에 무엇이 거짓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
타오르는 구겁의 묘지를 응시하던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이미 실패한 기억으로 네놈을 호도할 필요는 없겠지· 흡혈귀 역시 그렇기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던 게다·]
“····”
[그녀와 내가 프로젝트에 대해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라곤 남겨진 회한밖에 없을 테니까·]
레녹이 침묵하는 사이 올리비에라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불타는 구겁에서 떨어지지 않는 눈길을 억지로 잡아내듯·
남은 미련을 저 불길과 함께 태워버리려는 듯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해··· 하지만·]
올리비에라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우리의 실패와는 별개로 이미 이루어졌을지도 모르지·]
“····”
[시간이 됐군· 우리가 부수어 떨어뜨린 도시로 돌아가자꾸나·]
레녹을 향해 돌아선 그녀가 말했다·
[발칸으로 복귀할 채비를 해야겠다· 준비가 끝나면 찾아오도록·]
* * *
“칠겁의 추락지점까지는 대강 둘러본 건가····”
추락한 구겁의 폭심지에서 카이세의 유해를 화장한 뒤 이틀·
레녹은 혈영궁에서 치료를 병행하면서 간간이 외겁도시‘였던’ 지역을 돌아보고 있었다·
중앙전선 경계지대에 추락한 충격으로 부서져 쪼개진 외겁도시 쿤다라·
원로성과 팔대용왕의 힘으로 사상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도시를 이루던 여러 시설과 생활권이 붕괴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말레온이 마지막까지 지켜내려 했던 도시인 만큼 쿤다라를 떠나기 전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도와줄 생각이었지만·
레녹은 오래지 않아 그것이 무의미한 걱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백 년을 넘게 사는 이들이라 그런지 적응이 빠르군· 아니 반대로 주변의 환경변화에 둔감하다 해야 하나?”
하루아침에 장막의 이면을 벗어나 중앙에 추락했음에도 도시의 분위기는 그렇게 혼란스럽지 않다·
완전히 박살 난 생활구역과 거리를 두고도 울부짖거나 하소연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부서진 자재와 부품들을 실어나르며 도시를 재건하는 장생종들이 가득할 뿐·
“그래서 우리는 언제부터 속세의 단명종과 교류할 수 있는 거지?”
“내 문헌에서 본 바로는 단명종들의 식문화가 그렇게 자극적이라더군·”
“빨리 속세의 오백로 기사들을 만나보고 싶네· 단명종의 대국은 그들의 짧은 수명만큼이나 재빠르다던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시비를 걸자는 뜻밖에 더 되겠는가?”
말레온의 실패· 추락해 부서진 도시· 잃어버린 외겁의 해답·
멸망을 회피할 대책을 잃어버린 것을 알면서도 장생종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 대해 흥미나 호기심을 느끼는 이들이 더 많아보이는 상황·
영원히 외해를 유영하는 외겁의 방식에 대해 크게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수백 년을 그렇게 살아왔듯이 어떠한 상황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일까·
[수백 년을 넘게 살았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게 없을 수도 있잖아요·]
“다비·”
얼굴을 가리기 위해 뒤집어쓴 로브 안쪽에서 다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른바 무서울 게 없는 나이라고 하죠·]
“···그건 지금 같은 상황에 쓸 말이 아닐 텐데·”
[어라 그런가?]
레녹이 타박을 주었음에도 신나서 로브 안쪽을 들썩이는 다비의 모습·
혈영궁에서 레녹이 깨어난 이후로 다비는 거의 언제나 이런 상태였다·
[헤헷 헤헤헤헷·]
“···그래 그래·”
꼬리를 마구 휘저으면서 머리를 부비는 바람에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었지만 레녹은 내버려 두었다·
구겁에 올라간 직후 정령과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 다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
“후우····”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근처 골목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조금 걷는 것만으로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전신이 미약하게 경련했다·
레녹의 이상을 알아차린 다비가 즉시 지팡이의 생명유지장치를 최대출력으로 활성화시켰다·
우우웅···!!
그제서야 안색이 조금 돌아온 레녹이 힘겹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레녹의 품안으로 파고 드는 전뇌정령의 모습·
레녹은 그런 다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라이프 베슬을 사용하고도 비약의 반동이 워낙 심대해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다·
포혈공의 도움을 받아 혈액순환을 강제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면 몇 달간은 침상에서 움직일 수도 없었겠지·
타락의 분기점을 만화경에 새롭게 새긴 대가라 생각하면 외려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라 해야겠지만 그렇다 해도 언제까지 이 도시에 머무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쿤다라가 중앙전선에 추락한 사실이 대륙 전역에 보란 듯이 알려진 상황·
아직 제대로 된 소식을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바깥에는 난리가 났을 가능성이 높다·
조만간 연맹이나 교단 같은 초대형 세력도 쿤다라를 방문해 상황을 조율하려 하겠지·
그때까지 레녹이 이 도시에 남아 있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몸 상태로는 전투를 상정하고 움직이기도 어려우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할 터·
오늘이나 내일 안으로 외겁도시를 떠나 발칸으로 복귀해야 할지도 모른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다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찰나·
[아 마스터·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뭐지?”
[마스터가 저번에 만들어준 꼬리 있잖아요·]
다비가 그렇게 말하며 로브 안쪽에서 꼬리를 펼쳐 보여주었다·
새끼여우의 등허리를 타고 솟구친 흑뢰를 압축해 만든 ‘여덟 번째’ 꼬리·
[이거 사실 일곱번째여야 했던 거 아니에요?]
고개를 갸웃거린 정령이 물었다·
[그때 마스터가 여덟 번째라고 만들어주긴 했지만 저는 아직 일곱 번째 꼬리도 없잖아요·]
“····”
다비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요르타에서 유령함선의 힘을 계기삼아 만들어진 꼬리가 여섯 번째·
정상적으로 꼬리가 만들어졌다면 새롭게 만든 꼬리는 분명 일곱 번째가 되었어야 했겠지·
하지만 레녹은 그런 다비의 말을 듣고도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한산한 거리 인근의 벤치에 기대 앉은 레녹이 조용히 말했다·
“자기개변의 일곱 번째 위계는 스스로 완성해야만 하니까·”
[···네?]
“마찬가지야·”
레녹이 다비와 시선을 맞추었다·
“일곱 번째 꼬리는 너 스스로 만들어서 완성해야 해· 나도 도와줄 수 없는 영역이지·”
[····]
전뇌정령의 꼬리는 다비 자신이 쌓아올리는 위계를 상징하는 힘·
그렇다면 꼬리의 갯수 역시 자기개변의 이치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일곱번째는 자기개변의 완성이자 스스로 쌓아 올리는 하나의 도달점·
반드시 다비 스스로 깨우치고 완성하여 만들어야 하는 꼬리다·
그렇기에 레녹은 흑뢰의 힘으로 일곱번째 꼬리를 만들어주는 대신 하나를 건너뛰어 여덟 번째 꼬리의 기반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그것도 여덟 번째 꼬리를 직접 완성시키는 대신 언제든지 완성될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형태로·
“내가 사용했던 흑뢰는 변질된 힘이니까· 그걸 네 위계의 완성으로 삼았다면 분명 문제가 생겼을 거야·”
[마스터····]
“하지만 여덟 번째라면 괜찮겠지· 그때부터는 완성을 벗어나 초월하는 경지일 테니·”
다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레녹이 말했다·
“네가 일곱 번째를 완성하면 여덟 번째도 자연스럽게 완성될 수 있도록 해두었어· 그때까지 네 영능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겠지·”
비약을 마시고 외해를 바라보는 그 순간에도 생각하고 있었다·
타락한 분기점에서 이유 없는 익숙함을 느끼는 순간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레녹과 모든 순간을 보고 기억하는 이 정령이야말로 언젠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기를·
그것을 고대하며 이름을 지어주고 함께 세계를 돌아보며 모든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언젠가 그렇게 도달하게 될 다비의 답이 레녹과는 달라지게 된다 해도·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겠지·
다비가 손에 넣은 전뇌공간의 조작능력처럼 레녹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재능을 지닌 것처럼·
레녹 자신과는 다르면서도 레녹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
[···헹·]
그런 레녹의 생각을 눈치챈 정령의 표정이 뾰로통하게 변했다·
[전 마스터랑 일심동체에요· 마스터랑 다른 꿈을 꾸지 않는다구요·]
“그래· 그렇겠지·”
레녹은 다비를 쓰다듬으면서 얼굴을 가린 로브를 걷고 일어섰다·
“시간이 됐다· 슬슬 가볼까?”
[어디로요?]
“쿤다라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지·”
레녹이 차분한 시선으로 저 멀리 떨어진 너른 평야를 바라보았다·
“용들이 기다리고 있을거다·”
* * *
외겁도시 쿤다라· 팔겁의 전당·
한때 쿤다라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던 안개의 우주를 비추던 시공·
지금은 경계지대 인근에 추락해 부서진 채 그 잔해가 사방에 널브러진 평야·
창립자들의 조각상은 반파되어 쓰러져 있고 기둥과 내벽이 무너진 채 잔해가 산처럼 쌓여 있다·
그렇게 먼지가 흩날리는 복도 옆에 걸터앉은 레녹이 지팡이를 짚은 채 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파직 파직···!!!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매만질 때마다 새파란 뇌전이 손가락 사이로 터져나온다·
레녹의 손에 휘감긴 채 짙은 빛을 머금고 쉴새없이 형태를 바꾸는 벼락의 잔향·
고유마법을 배운 이후로 단 한순간도 레녹의 의지를 벗어나지 않은 속성마법·
하지만 전격을 바라보는 레녹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
육안으로는 차이점을 느낄 수 없지만 레녹의 감각으로도 희미한 거슬림이 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분명 틀림없이 위화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
언제나 직접 레녹의 손으로 다뤄왔던 전격마법이기에 느낄 수 있다·
파지지직!!!
푸르고 짙은 뇌전의 중심부·
레녹의 통제를 벗어난 적이 없는 벼락의 인과·
그 중심에 아주 어렴풋이 ‘검게’ 물든 벼락이 뒤섞여 있는 듯하다·
레녹의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는 레녹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의 힘·
선종과의 결전 이후로 완전히 놓아주었던 예의 흑뢰가 아직 레녹의 내면에 남아 있다·
레녹이 그것을 느끼고 손끝으로 번뜩이는 뇌전을 어루만지던 그 순간·
휘오오오!!
레녹의 머리 위로 아주 거대한 그림자가 일제히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저녁노을이 지는 하늘 위를 부유하는 여섯 체의 거대한 용종·
각자 다른 색과 질감의 마력을 두른 채 발광하는 용왕들이 하늘을 유영하며 다가온다·
붉게 물든 지평선을 아우르고 하늘 저편에서부터 전당의 상공을 물들이는 강대한 기척·
쿠구구구구!!!!
하늘이 거세게 떨리면서 그 진동으로 지축까지 크게 흔들린다·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부서진 전당 위로 뜨거운 바람이 몰아치고·
추락한 팔겁의 전당 팔방에서 각양각색의 빛이 기둥이 폭발하듯 솟구치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앗!!!!
팔겁의 전당을 향해 다가오는 용왕들에 반응하는 것처럼 전당 곳곳에서 솟구치는 빛의 기둥·
사방에서 솟구친 빛의 기둥이 기울어지며 레녹의 머리 위로 교차한 그 순간·
눈부신 광원의 아래 레녹을 두고 여섯 용왕이 전당 사방에 내려앉았다·
쿠우우웅!!
하나같이 강렬한 기척과 의념을 흩뿌리며 묵직하게 주변을 짓누르는 위압감·
하지만 저번과는 달리 레녹을 바라보는 용들의 눈에 더 이상 경계나 공포심은 없었다·
진중한 마력을 품고 공명하는 용들 사이에서 무거운 전음이 울려 퍼졌다·
[시간이 됐군· 모두 모였나·]
“쿤다라의 재건작업으로 바쁘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내려왔군·”
레녹이 주변을 바라보며 물었다·
“쿤다라의 현황에 대해 보고하고 정리하는 자리라 들었는데 왜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잡은 거지?”
[쿤다라에서 가장 많은 기능과 권한이 남아 있는 곳이 이 팔겁의 전당이기 때문이지·]
쿠구구구!!!!
너른 평야를 뛰어넘어 전신에 사슬처럼 단단한 비늘을 두른 용이 내려앉았다·
철쇄용왕이 육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창립자들의 신체 부위를 재료 삼아 만들어진 조각상과 성소가 위치한 이곳이야말로 네게 합당한 대가를 전하기 적합한 장소일 테니·]
“대가라고?”
[비록 시작이 그릇되었다 해도 너는 말레온 그노시스를 저지하고 도시가 외해 바깥으로 이탈하는 재해를 막아내었다·]
무거운 갑주 아래로 레녹을 내려다본 철쇄용왕이 말했다·
[이로 인해 네가 쿤다라의 존속에 기여한 바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바·]
“····”
우우우웅···!!!
그 순간 전당 곳곳에 부서지거나 쓰러진 창립자들의 조각상이 눈부시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전당에 내려앉은 여섯 용왕의 생명력에 반응하는 것처럼 발광하는 조각상을 레녹이 돌아본 찰나·
철쇄용왕이 중후한 전성을 터트리며 레녹을 응시했다·
[팔대용왕과 원로성의 권한으로 지금부터 쿤다라의 일부를 네가 이뤄낸 위업에 대한 대가로서 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