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4화
잔향(2)
외겁도시 쿤다라가 중앙전선 경계지대에 추락한 지 닷새째·
혈영궁에서 치료에 전념하던 레녹은 나흘이 되어서야 포혈공의 도움을 받아 병상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상태가 호전된 것이 아니라 체내 혈액순환을 포혈공의 보조를 받아 최소한의 운신이 가능하게 조치를 취한 것뿐이지만·
그럼에도 레녹에게는 구겁의 일에 완전히 마무리를 짓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산산이 부서진 외겁도시의 시설과 구역들을 쭉 돌아보았다·
쿤다라를 구성하던 여덟 개의 겁은 현재 층층이 쪼개져 경계지대 곳곳에 떨어진 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장생종들은 서로 떨어진 시설과 구역을 오가면서 도시의 재건에 힘쓰고 있었다·
쿵!!
거대한 본체를 드러낸 채 사방에서 건축자재와 소포를 옮기는 장생종들의 모습·
거리 곳곳에서 새롭게 발행된 신문과 대자보가 흩날린다·
노쇠한 학이 헛기침을 하면서 신문을 보고 거북이가 눈을 끔벅이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외겁도시 쿤다라의 중앙진출· 장생종들이 일선에 나선 이유는?]
[서부전선 경계지대 인근에 생활구역이 파편화되어 흩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앙전선에 추락한 초대형 도시를 두고 각지에서 격렬한 반응이···]
[현재 교단과 연맹 양측에서 공식적인 입장표명을 준비중인 것으로-]
[장생종들의 중앙전선 진출을 두고 세력구도 변화를 우려하는···]
거리에 세워진 스크린· 그 너머에서 송출되는 뉴스를 여러 장생종들이 모여서 듣고 있었다·
“속세의 단명종들이 우리에게 이렇게나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군·”
“이해해야지요· 이제부터는 같이 공생해야 할 동반자들입니다·”
“공생이라니· 같은 단명종끼리도 화합이 잘 이뤄지지는 않는다고 들었소만·”
뚱뚱한 도마뱀· 우아하게 다리를 모아 앉은 사슴· 심술궂은 인상의 두꺼비·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장생종들이 나란히 모여앉아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공생이라는 것이 별것이겠습니까? 수십 년 살고 죽는 것들· 그 정도 시간을 참고 기다려주면 그게 공생이나 다름없지요·”
“자네는 그 원로성이 아니라 팔대용왕 쪽에서 일해야 할 것 같은데?”
“팔대용왕과 원로성도 화합하지 못하는데 단명종을 묶어 생각할 이유는 없을 듯하구려·”
늙은 학이 날개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곤 하나 우리가 그들의 대지를 침범한 셈이니· 열린 마음으로 교류하는 것이 좋겠지·”
“흠 단명종의 습성이나 행태에 대해서는 본인도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렇게 된 김에 단명종을 반려동물로 하나 데려올 수 있을까요? 늙어 죽을 때까지 아껴줄 자신이 있는데·”
“····”
어딘가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는 듯한 장생종들의 대화·
뒤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돌렸다·
온화한 성품을 지닌 장생종도 많지만 별개로 단명종에 대해 무지한 이들도 많다·
중앙전선에 추락한 외겁도시를 향해 대륙 전역에서 관심과 열기가 쏟아지는 상황·
갑작스럽게 장막의 이면 밖으로 끌려 나왔음에도 많은 이들이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장생종들이 단명종에게 보이는 관심은 레녹이 보기에도 괴상한 부류가 꽤 있었다·
“···저쪽이군·”
오겁의 층계 바깥으로 펼쳐진 중앙전선 경계지대 평야·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중앙전선 경계지대의 압도적인 면적은 동대륙과 서대륙 간에 큰 차이가 없는 바·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레녹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 순간·
레녹의 머리 위에서 불덩이에 휩싸인 거대한 짐승이 떨어져 내렸다·
쿠우웅!!!
뜨거운 불길을 전신에 두른 거대한 도롱뇽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레녹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녹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도롱뇽이 레녹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목소리와 함께 빛에 휩싸인 도롱뇽이 그 자리에서 붉은 머리의 소년으로 변했다·
말없이 레녹을 바라보던 소년이 이윽고 레녹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앙그론·”
화예종의 수장이자 레녹에게 오백로를 배웠던 고위 장생종·
유달리 폭급하던 불도롱뇽을 기억해낸 레녹이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이 도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원로성에게 전해 들었을 텐데·”
“····”
“그런데도 아직 나를 선생이라 부르고 싶나?”
“···오늘날의 사고가 은성께서 자초한 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앙그론은 복잡한 표정으로 레녹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대답했다·
“선생님께서 은성을 종용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막아주셨다는 것도 전해 들었지요·”
“····”
“이미 이 도시에서 선생님을 대상으로 한 추살령은 모두 풀렸습니다· 더는 누구도 선생님을 원망하지 않을겁니다·”
“원망이라·”
레녹이 물었다·
감정의 대상이 바뀌었을 뿐 그 감정 자체는 남아 있음이 앙그론의 대답에 담겨 있었기 때문·
“말레온을 원망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앙그론이 말끝을 흐렸다·
언제나 성급하고 화가 많던 소년답지 않게 그 대답은 한없이 조용했다·
“은성께서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 결과는 이렇듯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
“의도가 좋았다 해도 결과가 나쁘다면 그것을 과연 옳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앙그론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느 쪽이든 이제 쿤다라에서 은성의 이름이 영광된 의미로 불리는 일은 없겠지요· 저는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렇군·”
레녹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예상치 못한 고난 속에서도 말레온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까지 레녹을 저버리지 않고 몸을 빼앗긴 뒤에도 레녹을 도와주었으며·
끝내는 자신의 결말조차 레녹에게 맡기고 떠났다·
자아조차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고자 했다·
하지만 말레온이 노력했음을 앙그론에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실패를 주워 담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노력이 결코 헛된 의미가 아니었다고 앙그론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따라오시지요·”
침묵하는 레녹을 보며 앙그론이 걸음을 돌렸다·
“구겁이 떨어진 폭심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며칠 동안 구겁 근처에 접근해 온 존재가 있나?”
“제 아이들이 폭심지 반경 5㎞ 인근을 봉쇄하고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앙그론이 앞서 걸으면서 대답했다·
“인근의 환경이 워낙 험악하여 저를 비롯하여 누구도 내부로 들어가지 못했으니 안심하시지요·”
“····”
“저쪽입니다·”
앙그론을 따라 시선을 돌린 레녹은 그제서야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쿠화아악···!!!
반파되어 부서진 거대한 유리구조물 위로 불이 붙은 채 끝없이 타오르고 있다·
화염 속에 뒤섞인 검은 뇌전이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무한히 장작을 보급하며 열기를 더하고·
구겁의 잔해를 휘감은 불길이 평야의 초목을 불태우고 인근을 사막화시키고 있었다·
“화염과 뇌전이 뒤섞이며 공간 자체를 연소시키고 있습니다·”
“····”
“조사단이 수차례 파견되었지만 내부 시설 조사는커녕 외벽에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더군요·”
침묵하는 레녹을 향해 앙그론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저 지옥도를 만들어낸 당사자가 아니라면 출입조차 허락되지 않겠지요·”
“그렇군·”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활활 타오르는 구겁의 잔해를 바라보던 레녹이 앙그론을 힐끗 돌아보았다·
“혼자 있고 싶군· 사람들을 물려줄 수 있겠나?”
“레그누스 님께 최대한 선생님의 의사를 존중해 드리라는 전언을 받았습니다·”
앙그론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와 제 아이들은 전원 오겁지역으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쿠르르릉···!!
그 말과 동시에 주변의 지면이 천천히 들썩이며 흔들렸다·
마치 땅 속에 존재하던 수십체의 무거운 기척이 일제히 이동을 시작한 듯한 위화감·
이 주변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저 기척들이 앙그론이 말한 화예의 장생종들인가·
시선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앙그론의 기척마저 깔끔하게 사라진다·
레녹은 말없이 활활 타오르는 구겁의 잔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휘오오오!!!
구겁을 휘감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물어뜯는 화염과 뇌전·
하지만 레녹이 다가서는 순간 검은 뇌전이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미 그 힘이 레녹을 떠났음에도 검은 벼락 자체는 레녹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처럼·
타탁 타탁···!!!
흑뢰의 파편이 소멸하는 것과 동시에 화염의 열기 역시 실드로 버틸 수 있을 만큼 약해진다·
레녹은 그제서야 주저앉은 구겁의 잔해 안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콰직!!
유리파편과 잿더미가 난자한 복도를 걷는다·
수천 킬로미터 상공에서 지상에 추락했음에도 그 형상 자체는 어렴풋이 남아 있다·
구겁의 시설이 외해 바깥에서 버틸 만큼 튼튼한 데다 이 안에 ‘남겨진 것’이 시설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 때문에 레녹은 복도 사이에 무너진 잔해를 치우는 것만으로 십관의 입구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부서진 대야·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말라붙은 대롱·
그리고 그 앞에 산산이 부서진 채 내부를 드러낸 십관의 풍경·
쿠구구구!!!
끝없는 불길 속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옥좌가 보였다·
그 옥좌 위에 앉아 있는 카이세 바쥬르의 유해·
구겁의 추락과 분쇄· 공간을 태우는 열기 속에서 유해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
어째서인지 이유는 알고 있었다·
저 옥좌는 마키나의 화덕진둔이 승천문의 원리를 빌려 만든 물건·
카이세의 죽음을 세계를 넘어서까지 보존하기 위한 관 그 자체다·
구세계와 연결되는 승천문의 능력을 빌렸다면 저 시체는 두 번째 세계에도 적을 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 세계의 물질적인 훼손이나 충격 따위로 카이세의 죽음이 훼손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선종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투의 여파를 신경 쓰지 않고 레녹을 죽인 뒤 시체를 손에 넣으려 했던 것·
그렇기에 레녹 역시 모든 싸움이 끝난 뒤에도 카이세가 이곳에 남아 있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남겨진 카이세 바쥬르의 죽음을 레녹 자신이 직접 수습해 주어야 한다는 것 역시·
철컥!!
불길을 헤치고 다가선 레녹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옥좌 뒤쪽 계기판을 만졌다·
기계도시 마키나에서 승천문의 설계도와 원리를 숙지하고 기억해 둔 상황·
어떤 식으로 옥좌를 조작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레녹이 어떤 식으로 그를 보내주어야 하는지도·
“카이세·”
철컥 철컥!!
계기판을 조작할 때마다 옥좌에 연결되어 있던 부품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그때마다 옥좌의 기능이 하나씩 소실되면서 주변의 불길이 거리를 좁혔다·
승천문의 원리를 빌린 옥좌의 기능을 하나씩 꺼가면서 불길이 다가오는 폭심지·
화르르륵!!!
옥좌를 휘감은 불길이 카이세 바쥬르의 육체를 서서히 태우기 시작했다·
레녹은 타오르는 옥좌에 기대 마지막까지 계기판을 조작했다·
철컥!!
옥좌의 기능을 완전히 꺼 버리고 몸을 일으켜 세운 레녹이 말했다·
“이제와서 네 죽음을 물질로 남기는 일에 집착할 이유는 없겠지·”
쿠화아아악···!!!
불길이 더욱 강해진다·
구겁의 시공을 휘감은 화염이 유리와 격벽을 녹이고 옥좌를 부드럽게 휘감았다·
“나는 계속해서 프로젝트의 결말을 쫓겠다·”
레녹은 그 안에서 서서히 타 들어가는 카이세의 유해를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네 죽음에 손댄 자를 찾는다면··· 이 모든 일의 내막을 마지막까지 파헤칠 수 있을 테니·”
구겁의 끝에서 마주한 카이세의 결말은 레녹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단서가 되리라는 사실을 레녹은 확신하고 있었다·
카이세 바쥬르의 목이 잘려 머리가 사라졌음을 알고 있는 사람·
구겁에 올라와 십관의 끝까지 도달해 카이세의 시신을 대면할 수 있는 사람·
승천문의 원리를 빌려 설계한 옥좌의 능력을 무시하고 그의 머리를 ‘잘라낼’ 수 있는 사람·
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초월자는 이 세계를 통틀어 다섯 명도 되지 않는다·
분명 그자가 프로젝트의 모든 결말과 실패를 손에 넣고 기다리고 있겠지·
알카이드라는 이름의 의미·
교주와 단장이 프로젝트에 엮여 있던 이유·
카이세 바쥬르가 실패해 죽은 이유·
세 개의 도시를 돌아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그렇기에 레녹은 남겨진 카이세의 시체를 어떻게 보내주어야 할지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아아아아악!!!!
불길 속에서 카이세의 시체가 파묻힌 채 사라진다·
동시에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구겁의 시설이 하나둘씩 녹아 무너지고 떨어졌다·
불길에 휩싸인 구겁의 잔해가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강렬한 진동이 지면을 타고 터져 나온다·
쿠과과과과!!!!
귀청을 터트릴 듯한 아득한 굉음이 끝없이 이어졌다·
장생종의 죽음을 쌓아 만든 거대한 묘지가 외해 바깥을 부유하던 전초기지가 불타 사라진다·
잿더미가 된 격벽 밟고 떨어지는 잔해를 받아내며 레녹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빠른 속도로 붕괴되어가는 시설을 뒤로하고 구겁의 잔해 바깥으로 걸어 나온 그 순간·
레녹은 화려한 도포를 걸친 여성을 마주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올리비에라·”
[····]
올리비에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시선을 들어 레녹의 뒤에서 불타 무너지는 구겁을 응시했을 뿐·
베일 너머로 번뜩이는 마안은 더 이상 그녀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타 사라지는 구겁의 잔해를 마지막까지 바라본다·
그 안에서 함께 화장된 카이세 바쥬르를 지켜보듯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렇군·]
멋대로 구겁을 불태웠음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레녹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추궁하지도 않았다·
그저 수긍하듯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물었을 뿐·
[보내주기로 하였느냐·]
“카이세의 시신을 이곳에 남겨둬봤자 또 다른 초월자들이 악용하려 할 뿐일 테니까·”
레녹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카이세의 육체를 이용하거나 연구할 생각은 없다· 인체실험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야·”
[····]
“기억하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천천히 올리비에라를 지나쳐 걸으며 레녹이 중얼거렸다·
“남은 건 내가 진정 옳았는지 확인하는 것뿐이다·”
[····]
타닥 타닥···!!
구겁을 불태우는 불길이 하늘 위로 솟구치며 거대한 불기둥처럼 변했다·
흩날리는 불똥이 붉은 비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며 주변을 어둡게 밝혔다·
한참 동안 그 광경을 응시하던 올리비에라가 말했다·
[폐쇄구역에서 네가 카이세 본인과 만났음을 알고 있었다·]
“····”
레녹이 걸음을 멈춰 섰다·
[카이세가 변하기 전에 꿈꾸던 비원을 네가 이어받았음을 눈치채었지·]
천천히 몸을 돌린 그녀가 레녹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네가 결말을 정해주는 것이 옳다· 그것이 카이세가 바라던 방식이었을 테니·]
“····”
[하나 마지막까지 유의해야 할 것이야·]
올리비에라가 조용히 말했다·
[카이세가 종국에는 실패했음을· 그에게서 너 자신을 겹쳐보고 있다 해도 그 방식까지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레녹이 과거의 폐쇄구역에서 카이세의 소망을 이어받았음을 그에게 공감하고 있음을 올리비에라는 알고 있었다·
카이세가 걸었던 길이 레녹 자신이 걷게 될 길일지도 모르기에·
그가 겪은 실패가 레녹이 맞이할 또 다른 결말일지도 모르기에·
레녹이 그의 행보와 비원에 공감하며 자신을 겹쳐보고 있음을 올리비에라는 눈치채고 있던 것이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는 구태여 다른 누군가가 되려 하지는 않을 거다·”
레녹이 웃었다·
“내게는 그와 같은 역천의 재능이 없지· 세계의 모든 실패를 돌아볼 능력 따위는 없어·”
[····]
언제나 레녹에게 주어진 것은 단 한 번의 기회뿐·
그렇기에 레녹은 선택할 기회 자체를 대답으로 삼아 무한한 가능성을 비춰보려 한다·
카이세의 비원에 공감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비원마저 담아내는 것이 레녹이 추구하는 구도의 길이라면·
“선종의 사념이 내게 말하더군·”
올리비에라를 돌아본 레녹이 말했다·
“자신이 지닌 재귀와 경정의 공능을 카이세의 역천과 합해 ‘무한한 기회’를 손에 넣으려 한다고·”
[····]
“죽은 그 자신조차 갖지 못했던 영원한 기회를 손에 넣고 이 세계의 결말에 도전하려 한다고·”
레녹이 눈을 감았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재귀·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고치는 경정·
섭리를 거슬러 법칙을 역행하는 역천·
그 세 가지 공능을 삼위일체의 묘리로 삼아 도달하는 단 하나의 기적·
선종은 설명하지 않았고 레녹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세 가지 재능을 합쳐 손에 넣는 ‘무한한 기회’라는 것이 무엇인지·
“세계의 시간선마저 역행하여 되돌리는 회귀(回歸)의 공능·”
침묵하는 그녀를 향해 레녹이 물었다·
“그것이 카이세 바쥬르가 세계의 모든 실패를 남김없이 파헤친 방법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