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3화
잔향(1)
오오오오오오!!!!!
어둠의 문이 둥글게 회전하고 아득한 흑색의 파문을 흩뿌린다·
암흑의 바다에 돌을 던진 것처럼 세계가 일렁이며 거칠게 요동쳤다·
선종의 영혼과 의식을 파멸한 미래 저편으로 날려 보내고 닫혀가는 [문]의 형상·
다음이라는 의미를 잃어버린 실패한 결말· 종막을 맞이한 시간선의 미래·
승천자가 떠오른 하늘을 휘감고 검은 별이 회오리치며 현실에서 이탈한 순간·
텅 빈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던 레녹이 천천히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욱···!”
기침과 함께 검은 피를 앞섶 사이로 쏟아냈다·
양손으로도 모두 받아낼 수 없을 만큼 심해지는 토혈·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던 레녹이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하·”
자성영역은 술자의 근원심상을 현실에 투영하는 힘·
하지만 레녹이 타락한 분기점의 끝에 도달한 영역은 달랐다·
현실에 근원심상을 투영하는 형태로 영역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근원심상을 보여주는 형태·
문을 여는 능력 자체가 영역을 전개하는 형태의 일부일 뿐·
실패한 레녹이 손에 넣은 영역이란 이렇게 이름과 형태조차 잃어버린 채 변질되어 버린 걸까·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닫혀가는 [문]의 균열을 멍하니 바라보던 찰나·
····
끝을 알 수 없는 공허의 저편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엿보였다·
레녹이 아직 마주하지 못한 실패해 종말을 맞이한 미래의 편린·
스스로 도달하여 손에 쥐었음에도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문]의 저편·
“····”
레녹이 문을 들여다본다·
‘저편’에서도 레녹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을 오래 바라볼수록 저편에서도 이쪽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반응하는 것도 억지로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지’하고 있을 뿐·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닫혀가는 문 너머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냈다·
슈우우우우···!!!
문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뇌신전의 성역도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뇌전에 휩싸인 채 사라진 천뢰건· 불길로 흩어져 소멸하는 형혹성·
추락하는 구겁의 중심에 주저앉아 검은 피를 토해내는 레녹만이 홀로 남았다·
[문]과 사상전역이 동시에 소멸한 현실의 하늘·
말레온의 기척이 소실되었음을 깨달은 레녹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말레온·”
레녹이 손에 넣은 것은 스스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실패하고 타락한 분기점의 극한·
한계를 넘어 폭주하는 술식을 통제하지 않고 폭주하는 그대로 휘두르고 있을 뿐이다·
[문]을 열고 파멸한 미래의 심상을 펼칠수는 있어도 그를 통제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바·
그렇기에 레녹은 마지막 순간에야 말레온의 결말을 어떻게 지어주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말레온이 마지막까지 자신이고자 노력하며 최선을 다했음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헛되다 여긴 여정의 마지막을 레녹에게 맡겨두었음을 이해했기에·
레녹은 말레온의 결말을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라-
“쿨럭···!!”
끊어질 것처럼 숨을 내쉬던 레녹이 흐릿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종의 사념을 미래로 날려 보내며 결착을 지었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구겁을 탈출하지 않는다면 기껏 마련해둔 보험이 무색하게 이 자리에서 불타 죽을 터·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고 있는 이 전장을 탈출해야만 모든 것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녹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딘 그 순간·
쿠웅!!
중심을 잃은 레녹이 머리부터 넘어져 불길이 넘실대는 복도를 굴렀다·
“···큭!!!”
불타 녹아내리는 잔해· 격렬하게 흔들리며 열기를 높여가는 정거장·
산소가 희박해지며 호흡이 끊기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뇌신전을 열기 전 남아 있는 시간과 여력을 모두 끌어다 쓴 상황·
성역의 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움직일 수도 없었겠지·
[문]을 열고 승리한 것 자체가 레녹이 계산할 수 있었던 마지막·
하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안배가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우욱···!!”
검은 피를 토하며 헛구역질을 한 레녹이 힘겹게 품 안에 손을 밀어 넣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낡은 수첩을 들어 팽개치듯이 내려놓았다·
포혈공이 만든 혈성 데이터베이스 혈려서기· 피를 재료 삼아 응답하는 기록장치이자 통신기·
펄럭!
아무렇게나 펼쳐진 혈려서기의 페이지 위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떨리는 손으로 발아래 흥건한 검은 피를 찍어 종이 위에 문댔다·
글자를 그릴 수도 없을 만큼 어설프게 뭉개지는 검은 핏물·
하지만 그 너머에서 레녹의 혈액을 인지한 누군가가 응답했다·
[견뢰·]
“···한 번뿐이다·”
레녹이 끊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타이밍을 맞추지 않으면····”
[····]
혈려서기에 글자를 적을 힘도 없으니 포혈공이 대답을 듣지는 못했겠지·
하지만 수첩 너머에서 지금 이 순간을 인지하고 있을 흡혈귀는 망설이지 않았다·
촤라라락!!!
낡은 페이지 위로 새빨간 선혈이 떠오르며 수첩 안에 복잡한 혈법진을 형성하고·
그것을 흐릿한 눈동자로 지켜보던 레녹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결국 레녹은 마지막까지 잘 해낸 걸까·
마지막까지도 잘 해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쏟아부었음에도 완벽하지 않고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레녹 스스로 모든 것을 직접 선택하지 않기로 결정했기에·
그 가능성 자체를 이 안에 남기기로 정했기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만족스럽지 않고 불완전하며 어설프고 헛되더라도 이것만이 유일하다면·
다음으로 향하려는 마음만이 레녹에게 남아 있는 전부라면·
쿠과과과과과!!!!
녹아내린 유리창 아래 빠르게 가까워지는 지상의 풍경이 엿보였다·
너른 숲과 초원이 펼쳐진 중앙전선 외곽 경계지대·
타오르며 추락하는 구겁과 그 끝에서 흔들리는 레녹의 모습·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불태우며 흩날리는 화염의 폭풍·
수천 킬로미터를 추락해 지상에 떨어지며 한 점에서 만난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지평선을 가득 뒤덮은 아득한 빛이 레녹의 의식을 뒤덮었다·
* * *
흐릿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눈앞에서 일렁였다·
주변의 모든 것이 흐릿하게 가물거리며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떠도 초점이 잡히기는커녕 이물감이 심해지기만 할 뿐·
“····”
하지만 레녹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 대신 조용히 기억을 회고했다·
정신을 잃었을 때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순간을 떠올려보라 했던가·
다행히 레녹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비약을 마시고 구겁에 올라가 추락하는 전장에서 싸우고 ‘실패한’ 영역을 사용해 결착을 짓기까지·
아울러 레녹 자신이 직접 열었던 [문]에 대한 기억마저도·
“····”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 이후로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멍하니 시선을 들어 올린 레녹은 이내 자신의 시력이 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고 있던 것이 아니다·
젖은 수건 같은 것이 얼굴을 덮고 시야를 가리고 있었을 뿐·
그 순간 레녹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깨어났어?”
후욱!!
얼굴을 스치는 손과 함께 어느새 수건이 사라졌다·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흑발의 소녀가 레녹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제서야 레녹은 자신이 푹신하고 넓은 침상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손에 들고 있던 검진표에 작은 볼펜으로 체크를 하며 돌아선 포혈공이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의식을 차렸네· 부상도를 생각하면 보름은 더 기절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
“너 ‘한 번’ 죽었다 깨어난 거야· 알고 있어?”
“···마지막에·”
힘겹게 기침을 한 레녹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을··· 맞추긴 한 모양이군·”
현실과 허수차원의 경계선에 위치한 혈영궁(血影宮)· 그 심처에 위치한 수혈관리실·
포혈공은 이곳에서 의식을 잃은 레녹을 치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네 소환수로 계약되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지· 혈영궁을 열고 널 데려오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포혈공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깨어나자마자 그런 실없는 소리나 할 거야? 좀 더 그럴듯한 감상이 있을 줄 알았는데·”
“감상이라····”
힘없이 중얼거린 레녹이 물었다·
“라이프 베슬 쪽인가?”
승천의 비약을 마신 이후 레녹은 자신이 반드시 한번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편람의 묵린을 사용해 독기를 억누르기는 했으나 온몸에 뻗친 독효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바·
시간이 지나면 레녹의 전신이 말 그대로 썩어 문드러져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겠지·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마련해둔 두 가지 보험 라이프 베슬과 부활의 술·
그 중 라이프 베슬을 소모해서 겨우 목숨을 건져냈다는 사실을 레녹은 깨달았던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고 있다면 설명이 편하겠네·”
의자에 기대앉은 소녀가 나른하게 대답했다·
“네 몸이 가사상태에 진입하는 것과 동시에 육체에 누적되어야 할 피해가 일부 사라졌어· 아마 라이프 베슬이 대신 소모된 거겠지·”
“····”
“하지만 그동안 네 몸 안에 쌓인 반동이랑 피해가 모두 사라진 건 아니라 이쪽에서 치료 중이었고·”
“···죽음에 이르는 피해를 한번 대신 받아낼 뿐 육체의 손상을 회복시켜주는 물건은 아니었군·”
쓴웃음을 지은 레녹이 말했다·
“그런 것 치고는 생각보다 몸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라이프 베슬이라는 게 그렇게 편리하기만 한 물건은 아니거든· 너도 그걸 알고 준비를 해둔 거 아니었어?”
포혈공이 물었다·
“결정적으로 네 경동맥에 박혀 있던 비늘· 어디서 구한지는 모르겠지만 말도 안 되는 물건을 갖고 있더라?”
레녹의 침상 옆에 놓인 묵색의 비늘을 가리킨 포혈공이 말했다·
“팔대용왕은 상대조차 되지 않을 만큼 초월적인 의념을 품고 있어· 고작 비늘 하나가 유물급의 법보나 다름없더군·”
“····”
“이게 네 머리까지 독기가 뻗치는 걸 막아준 덕분에 뇌신경계의 손상을 최소한으로 억누를 수 있었어· 여러모로 운이 좋았지·”
“···머리와 신경계를 보존하는 것만으로는 수습이 불가능했을 텐데·”
레녹이 힘없이 대꾸했다·
“한번 죽는 것을 상정하고 둔 도박수였다· 독기가 온몸의 세포 끝까지 퍼졌을 텐데 그걸 모두 뽑아냈다고?”
“그 방법까지 이미 네가 모두 마련해뒀잖아?”
파앗!!
침상 끝에서 꿈틀대는 무언가를 잡아챈 소녀가 그것을 레녹에게 내밀었다·
“네가 올리비에라에게 이 녀석을 맡겨둔 거· 영락없이 이것 때문인 줄 알았는데·”
“····”
쉬이익···!!
레녹의 침상 위에 내려앉아 거칠게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작은 뱀의 형상·
창백한 안색으로 누운 레녹을 보고도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하다·
한발 늦게 뱀의 정체를 알아차린 레녹이 중얼거렸다·
“니백스 오로시아·”
“이 녀석이 네가 마신 비약의 해독제를 갖고 있더라고·”
저항하는 니백스의 꼬리를 잡고 가볍게 들어 올린 포혈공이 말했다·
“양이 턱없이 부족해서 진혈을 좀 더 섞어서 네 몸에 그대로 들이부었어· 다행히 잘 먹히더라·”
“놔 놔라···!!”
포혈공의 손에 잡힌 니백스가 힘없이 소리쳤다·
“이제 이제 깨어났으니까 됐잖느냐···!! 난 가보겠다!!”
“가긴 어딜 가? 넌 이제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의 소환수잖아·”
“흡혈귀···!!”
빠득 이빨을 간 뱀이 파충류의 동공으로 레이시를 노려보았다·
“떨어질 대로 떨어졌구나· 인간종의 소환수를 자처하다니 자존심도 없단 말이냐!!”
“어라 그런가?”
포혈공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자존심이라는 거 오래전에 갖다 버려서 그런지 잘 이해가 안 되는걸·”
“네놈!!”
“너무 그렇게 미워하지 마· 따지고 보면 너나 나도 같은 처지잖아?”
니백스를 바닥에 떨어뜨린 소녀가 가볍게 손짓했다·
“올리비에라에게 부탁해서 널 소환한 거니까 그녀가 다시 널 역소환하겠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건 안 돼···!! 내가 원한 결말은 이런 게 아니었단 말이다!!”
포혈공의 손짓에 따라 혈영궁 바닥에서 일어난 피의 그림자가 니백스를 끌고 사라졌다·
“네놈 네놈들이 감히- 쿤다라를-!!”
쿠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수혈실의 문이 닫히고 순식간에 병상이 조용해졌다·
태연하게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린 포혈공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쳐서 네 몸을 어떻게든 살려냈다 이 말이야·”
“···그렇군·”
“넌 비약을 마시고 소생하기 위한 보험이 있다고 말했지만 악운이 겹쳐서 네가 죽어버리는 건 나도 곤란했거든·”
붉은 눈동자를 돌려 레녹과 시선을 맞춘 소녀가 말했다·
“너와 내가 계약으로 묶여 있는 이상 네 죽음은 어떤 식으로든 내게 리바운드되어 돌아올 테니까·”
“····”
“자칫 잘못하면 내 영성이나 혈계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고· 그런 불쾌한 경험 따위는 딱 질색이야· 알았어?”
소환사의 죽음이 소환수에게 타격을 미칠 수 있기에 포혈공이 직접 레녹을 살려낸 것인가·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험이라 말하긴 했지만 어떤 식으로 소생이 이루어지는지는 나도 잘 알지 못해· 최악의 경우 위계의 손상을 감당해야 했을지도 모르지·”
“····”
“내 몸의 상태를 감안하면 예상할 수 없는 변수를 회피하는 건 나로서도 환영이다· 그렇게 변명하지 않아도 좋아·”
라이프 베슬과 부활의 술·
두 가지 모두 레녹의 사망을 트리거로 삼아 발동하게 조치를 취해두기는 했지만
그 과정이 정확하게 어떤 원리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는 레녹도 확신할 수 없다·
비약을 마시고 손에 넣은 ‘감각’이 막대했던 만큼 그 반동 역시 심대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지금처럼 독기를 씻어내고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이 독액에 절어진 채 소생했다면 문제가 생겼겠지·
포혈공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레녹의 위계까지 그 반동이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네 몸의 상태라·”
하지만 포혈공은 레녹의 대답에서 조금 다른 부분에 초점을 둔 것 같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니백스가 없으니까 말해도 되겠지·”
손에 들고 있던 검진표를 두들긴 포혈공 레이시가 심각한 눈빛으로 레녹을 바라보았다·
“승천의 비약을 먹고 망가졌다기에는 생각보다 상태가 훨씬 안 좋아· 원래부터 몸이 이렇게 망가져 있던 거야?”
“····”
“순환계와 면역계 손상이 너무 심각해· 신진대사 효율이 지나치게 낮아서 체내에서 혈액을 제대로 돌릴 수가 없을 정도지·”
그렇게 말한 포혈공이 레녹의 머리 위에 드리운 링거 다발을 가리켰다·
“그래서 네 전신의 혈액을 바깥으로 빼내서 순환시키고 있어· 보여?”
“····”
수혈관리실에 존재하는 모든 링거가 레녹의 침상 위로 빼곡하게 드리워져 있다·
레녹의 양쪽 손목과 어깨 옆구리에 꽂힌 링거가 여러 방향으로 갈라져 수백 개의 링거를 드리우고·
그 안에서 정화된 혈액이 다시 레녹의 체내로 느릿하게 주입되고 있었다·
“내가 네 소환수로 계약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못했을 거야·”
포혈공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너 역시 계약이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 되도록 방치하지는 않았겠지·”
“····”
틀린 말은 아니었다·
레녹이 마지막 순간 포혈공의 힘을 빌린 것은 그녀와 맺은 소환계약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발칸의 의사인 머피에게 몸을 맡겨본 경험이 있는 만큼 소환계약을 맺은 포혈공에게 진료를 맡기지 못할 이유는 없다·
레녹의 몸에 새겨진 페널티란 이런 검진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간의 경험으로 숙지하고 있었으니·
“바깥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좀 알고 싶군·”
하지만 레녹은 자신의 몸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수혈실을 벗어나 움직이는 건 언제부터 가능하지?”
“너···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데 앞으로 일주일은 넘게 회복에 전념해야 하거든·”
레이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네가 지금 바깥의 상황에 신경을 쓸 처지야?”
“구겁을 외해 아래로 떨어뜨리긴 했지만 그걸로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겠지·”
레녹이 조용히 대답했다·
“선종의 사념이 소멸하고 말레온이 죽었다· 쿤다라에 미칠 여파는 그 이상이었을 거야·”
“····”
“쿤다라는 지금 어디에 있지?”
레이시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침묵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고르고 있기 때문이겠지·
비약을 마시고 구겁에 올라가기 전에도 그 후에도 레이시는 달라지지 않았다·
레녹이 이 도시의 결말을 전해듣을 자격이 있음을 그녀는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겁의 인력이 쿤다라를 끌어당기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늦었지·”
천천히 돌아선 포혈공이 수혈실 바깥으로 걸으며 말했다·
“네가 구겁에 올라가기 전부터 아슬아슬했어· 장막의 이면 안에 남는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거야·”
“···그렇다면?”
“원래라면 이 도시는 구겁의 인력에 이끌려 외해 바깥으로 이탈해 산산이 조각나야 했겠지·”
찰칵·
벽을 가리고 있던 붉은 커튼을 붙잡은 소녀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구겁을 떨어뜨려 인력을 지우고 용왕들의 권역으로 도시를 붙잡으면서 피해를 절반으로 줄였어·”
“····”
절반의 피해·
그 말은 외겁도시에 살아가는 쿤다라의 장생종 중 절반이 사망했다는 말일까·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하는 사이 힐끗 시선을 돌린 포혈공이 말했다·
“오해하는 것 같은데 사상자의 이야기가 아니야· 내가 말한 절반의 피해라는 건-”
촤악!!
커튼을 걷어붙이는 것과 동시에 그 너머로 혈영궁 바깥의 풍경이 비쳤다·
일전에 포혈공이 한번 보여준 적이 있던 혈영궁 내부에서 현실을 비춰보는 기예·
그를 통해 혈영궁 바깥에 비춰진 쿤다라의 풍경을 레녹이 확인한 순간-
“···도시가····”
안개의 우주 위를 유영하던 거대한 위성·
한때는 쿤다라 그 자체였던 위성이 산산이 조각난 채 평야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중앙전선 서부 경계지대· 드루이드와 헤드로 군벌이 격돌하던 장막의 안팎·
끝을 알 수 없는 벌판 위에 쿤다라였던 도시의 파편들이 비산해 있다·
레녹이 그 처참한 파괴의 잔상에 말없이 입을 다문 그 순간·
부서진 도시 파편 사이로 무수한 장생종들이 도시를 오가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쿤다라가 조각나 전선 위에 흩어졌음에도 그곳에서 살아가던 장생종들은 아직 남아 있다·
여덟 개의 겁으로 나뉘어 있던 각 도시의 층계를 쪼개어 복구하며 재건하며 움직인다·
박살 난 위성 파편 사이로 오가는 수천 명의 장생종들·
부서져 죽은 외겁도시와는 달리 그곳에서 아직 살아 있는 생명의 빛·
“도시의 핵심시설과 주요골자는 지켜냈지만 그 형태까지 지켜낼 수는 없었지·”
레녹의 곁에 서 있던 포혈공이 설명했다·
“위성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된 이상 다시 장막의 이면에 숨어드는 것도 불가능하게 됐어·”
“····”
“무슨 뜻인지 알겠어?”
흡혈귀가 묘한 표정으로 물으며 시선을 돌렸다·
“외겁도시는 이제부터 중앙전선에 진출해··· 속세의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게 될 거야·”
장막의 이면에 숨어 있던 외겁도시 쿤다라의 중앙전선 진출·
말레온의 계획은 실패했으나 그 여파는 도시의 방향성을 바꾸었다·
수백 년 넘게 안개 속에 숨어 있던 장생종들이 본격적으로 대륙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 * *
쿵···!!
어둠 속을 걷고 있던 묵색의 거체가 흐릿하게 일렁였다·
묵직한 굉음과 함께 발걸음을 돌려세운 무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
샛노란 파충류의 눈동자· 전신을 뒤덮은 묵색의 비늘·
장대한 악어거인의 형체가 그림자를 가르고 나타난 순간·
[왜 그러지?]
그 뒤에서 무기질적인 음성이 울려 퍼졌다·
[항구까지는 조금 더 가야 한다· 대륙의 왜곡된 시공간좌표를 감안하면 반나절은 더 필요하겠지·]
“대륙 어딘가에서····”
이빨을 드러낸 거인이 대꾸했다·
“불쾌한 것이 열리다 닫혔군·”
[···불쾌한 것이라고?]
“···크핫·”
어두운 지평선 저편을 응시하던 파충류의 샛노란 동공이 비웃는 듯 휘어졌다·
“끝까지 가지도 못하고 그만둘 거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말았어야지·”
[····]
악어거인은 그 이상 말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지축이 희미하게 기울어지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이 울렸다·
쿵 쿵···!!
목소리는 그런 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륙 밖으로 가기 위해서는 보다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지·]
“····”
[하지만 이번만은 예외적으로 네 존재를 인도하는 ‘길’이 열릴 예정이다·]
크로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살기 어린 동공으로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사이한 어둠을 바라보았을 뿐·
느긋하게 목을 꺾는 악어거인의 뒤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답천자(踏天子)가 기다리고 있다· 바로 출발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