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6화
9레벨(24)
쿠구구구!!!!
안개의 우주 위를 부유하는 다섯 체의 거대한 용종·
각기 다른 권역과 술식을 두른 8레벨의 용왕들이 팔겁의 바깥에서 레녹을 오시한다·
쿤다라의 환경에 구속받는 일 없이 그 존재만으로 권역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초월자들·
하지만 레녹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압도적인 기척의 폭풍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올려다보고 있자니 목이 아프군·”
검은 핏줄이 비치는 손을 들어 올려 헤일로를 전개·
“일단 내려와서 이야기할까?”
쩌저저적!!!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찌그러진 흑색의 고리가 레녹의 손을 따라 회전한다·
직후 헤일로를 중심으로 주변의 공간이 금이 가듯 일그러지고 엄청난 인력(引力)이 하늘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이익!!!!!
[···!!!!]
팔겁의 전당은 물론이고 바깥에 펼쳐진 안개마저 일그러질 정도의 강력한 집속력·
단순히 마법체계를 운용하는 것만으로 이 정도의 인력을 강제로 발생시키는 것인가·
그 비현실적인 현실조작에 다른 용왕들이 놀라 마력을 끌어올린 찰나·
다섯 용왕이 전개한 권역이 팔겁 아래로 끌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쿠과과과과과!!!!
육중한 사슬로 가득 들어찬 권역· 불길이 바다처럼 넘실대는 권역·
용종의 고유한 영토로서 안개의 우주를 유영하는 권역이 끌려 나와 팔겁과 충돌하고·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그 힘을 가감 없이 내뿜었다·
콰아아아아!!!!
사슬의 파편과 불길 유령처럼 일그러진 혼백·
용왕의 권역을 구축하는 강대한 힘의 파편이 그 반동으로 쏟아져 내린다·
지켜보던 레그누스와 포혈공마저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로 강렬한 힘의 역류·
하지만 레녹은 다섯갈래 권역에서 쏟아지는 파편을 보지도 않고 한 손으로 쳐냈다·
흑색의 파문이 수십미터 반경으로 터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레녹의 뒤로 멀리 밀려났다·
쩌어어어엉!!!!
“어처구니가 없군· 다섯 권역의 무게를 어떻게 혼자서···!!”
“···이미 술식의 법칙을 반쯤 무시하고 있는 거야·”
레그누스와 포혈공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녹을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팔겁 가까이 내려선 다섯 용들을 보며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에 비해 행동이 이렇게나 빠른 건가? 용종이 확실히 유능하기는 하군·”
[····]
레녹이 알로건과 조우하고 교전을 끝낸지 1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
하지만 팔대용왕 중 무려 다섯이 팔겁의 이변을 알아차리고 현장에 도착했다·
용왕 전원이 쿤다라 전역에 흩어져 있던 것을 감안하면 비현실적으로 빠른 속도·
[수신을 죽이고 그 모습을 우리에게 과시라도 할 작정이었느냐·]
새하얀 뿔이 달린 용왕이 안광을 번뜩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용살(龍殺)을 자랑거리로 삼는 단명종의 미개한 풍습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군·]
쿠구구구!!!
사방에서 새하얗게 얼어붙은 안개가 용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좋다· 은성을 되찾기에 앞서 이 전장을 수신의 죽음을 진혼하는-]
“알로건은 아직 죽지 않았다·”
[···뭐라?]
“마력회로가 손상되고 가사상태에 빠지긴 했지만 분명 아직 살아 있지·”
일각용왕이 멈칫한 사이 레녹이 발 아래 쓰러진 거대한 수룡을 가리켰다·
침묵하는 다른 용왕들을 바라보며 레녹이 물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경고가 되고도 남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
“그쪽이 나를 추궁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승천자의 감각과 상태를 손에 넣은 직후 레녹은 우로보로스를 사용해 알로건을 쓰러뜨렸다·
수신술을 정면에서 분쇄하고 알로건의 술식과 위계를 근본부터 해체해버린 압도적인 결과·
하지만 레녹은 교전 도중 했던 말과는 달리 처음부터 알로건의 목숨을 취할 생각은 없었다·
현재 팔대용왕이 레녹을 적대하는 것은 말레온의 폭주를 야기한 범인이 레녹이라 생각하기 때문·
허나 이 시점에서 굳이 알로건을 죽여서 다른 용왕들을 자극할 이유는 없다·
비약을 마신 뒤로 레녹에게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은 상황·
용왕들과 싸우기보다는 이 상황을 빠르게 마무리짓고 구겁에 올라갈 시간을 버는것이 낫겠지·
그렇다면 알로건을 죽이기보다는 살려두는 것이 더 수월할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수신(水臣)을 단순히 기절시켜 놓은 것이 아니로군·]
순간 유령같은 혼백을 두른 용이 입을 열었다·
허공을 유영하듯 전당 가까이 내려온 귀룡(鬼龍)이 유심히 알로건을 바라보다 말했다·
[마법사· 너는 그의 여덟 번째 위계에 손을 대었구나·]
[···위계?]
[저 인간종이 수신의 위계에 손을 대었다고?]
그 말에 다른 용왕들이 믿기 어렵다는 듯 입을 열었다·
[수신의 위계가 극위에서 한 단계 하락하여 성위급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귀룡은 차분한 눈길로 레녹을 바라보며 답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나 이미 벌어진 일을 부정하는 것도 당치 않겠지·]
“····”
[네가 감히 용종의 위계에 간섭해 그 성취를 깎아내었구나·]
“용종의 심신이 워낙에 터프하기 그지없어서 그 정도 충격이 아니면 기절시켜 두는 것도 어렵더군·”
레녹이 차갑게 웃었다·
“오해라고는 하나 나를 죽이려 했으니 그 정도 대가는 당연히 감수해야 하지 않겠나?”
[····]
승천의 비약을 마시고 변질된 우로보로스는 철저하게 ‘해체’에 특화된 힘·
레녹은 알로건과 싸우며 수신술을 해체하는 것은 물론 그가 평생 동안 쌓아 올린 여덟 번째 위계를 부숴 버렸다·
일전 편람이 니백스를 상대로 보여주었던 초월자의 절기를 그녀의 비늘을 빌려 흉내 내는 힘·
“합의된 사안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내가 한 말을 증거하기에 부족함은 없겠지·”
레녹이 자신의 발아래 쓰러진 수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로건을 데리고 물러나라· 그럼 나 역시 모든 일이 끝나기 전까지 쿤다라에 개입하지 않겠다 약속하지·”
[지금 쿤다라는 도시가 세워진 이래 전례 없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귀룡이 흐릿한 안광을 흘리며 말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쿤다라는 외해 바깥으로 이탈해 산산이 조각나 버릴 텐데 어떻게 네 말을 믿지?]
“그 부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면서까지 알로건을 살려둔 거다·”
레녹이 고개를 기울인 순간 등 뒤에서 검은 헤일로가 회전했다·
키이이잉!!!
“나는 이 자리에서 팔대용왕 전원과 싸워 승산을 논할 수 있다· 내게 남은 시간을 모두 소모하면 용종을 몰살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
“하지만 그런 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이렇게 경고하고 있는 것 뿐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레녹이 검은 안광을 흩뿌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말레온이 폭주하고 있는 원인은 내가 아니야· 나는 구겁에 다시 올라가 그를 만나려 한다·”
[그건····]
담담하고도 차가운 레녹의 전언에 다른 용왕들이 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 역시 저 검게 물든 헤일로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
찌유우우웅-!!!
기괴하게 찌그러진 타원형의 검은 고리· 뒤틀려 일그러진 어둠이 주변을 잠식하며 끝없이 일렁인다·
개기일식의 잔재처럼 불가해한 그 모습이 더할나위없이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자기개변이 아닌 파멸을 약속해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타락의 공능·
저 인간종이 목숨을 담보삼아 주어지지 않는 ‘자격’에 손을 대었음을 이 자리의 모든 용이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것이다·
[무저갱의 업을 내면에 품고도 의념과 의식은 고요하기만 하군·]
온몸이 사슬처럼 단단한 용왕이 입을 열었다·
갑주처럼 두꺼운 비늘 아래로 동공을 번뜩인 철쇄용왕(綴鎖龍王)이 말했다·
[인간· 구겁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를 한없이 그에 가까운 ‘상태’로 제련하였나·]
“····”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철쇄용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바로 쿤다라에서 보고 들은 쇄룡족의 우두머리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기 때문·
하지만 그런 레녹의 반응이 오히려 마음에 들기라도 했는지 철쇄용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멸을 담보하여 자신을 담금질하는 그 마음가짐은 존중할 가치가 있군·]
철컥!!
갑주처럼 얽힌 비늘을 움직여 천천히 뒤로 물러선 용왕이 말했다·
[좋다· 나는 여기서 물러나지· 본룡의 중쇄권역은 더 이상 너를 막지 않을 것이다·]
[철쇄 한마디 논의조차 없이···!!]
[이건 합의되지 않은 결정이다·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다분히 즉흥적인 철쇄용왕의 대답에 다른 용들이 섬뜩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철쇄용왕은 다른 용왕들의 반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
[저 인간종은 용종의 눈을 완벽하게 피해 팔겁까지 도달했다· 수신이 쓰러진 뒤에야 우리도 이변을 인지할 수 있었지·]
[그건 어디까지나 포혈공의 개입 때문에-]
[그 잠깐 사이 저자는 쿤다라의 장생종을 족히 수천은 넘게 죽일 수 있었어·]
철쇄용왕의 중후한 전성에 순간적으로 다른 용왕들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일이 잘못되었다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씨가 말랐을 거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 텐데·]
[····]
[이 인간은 수신의 목숨을 억지로 살려두면서까지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나는 그 강철처럼 굳건한 의지가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아·]
철컥 철컥!!
사슬처럼 단단한 비늘을 움직여 돌아선 철쇄용왕이 심유한 눈빛으로 레녹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내만이 구겁을 건너 말레온과 다시 마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지· 그것뿐이다·]
[으음····]
레녹의 말보다 그가 할 수 있었으면서 하지 않았던 일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세웠나·
다른 용들 역시 그 사실을 마냥 흘려넘기지 못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이대로 저 인간종을 보내주면 우리는 말레온의 폭주에 개입할 유력한 수단을 하나 잃게 된다·]
유령 같은 혼백을 두른 귀백용왕(鬼魄龍王)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자가 실패한다면 이 도시는 산산이 조각나 중앙전선 위에 추락하겠지·]
[····]
[철쇄· 쿤다라의 결말을 저 단명종 하나에게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 사내를 믿고 보내주는 것이 아니다 귀백·]
철쇄용왕이 육중한 전성을 울렸다·
[승천자가 되어서까지 답을 구하려던 말레온 그노시스를 믿는 것이지·]
[····]
[나아가 말레온에게 쿤다라의 명운을 맡긴 나 자신의 선택에 마지막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굳건한 대답에 귀백 역시 입을 다물었다·
그들 용왕 역시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이 있음이 틀리지 않기 때문이겠지·
[일이 잘못될 경우에는 나의 권역을 직접 바쳐 다른 이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지·]
쿠구구궁!!!
전신의 갑주를 움직이며 떠날 채비를 마친 철쇄용왕이 말했다·
[그것이 바로 위에 선 자로서 업을 짊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군·]
[고지식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친구야·]
[자네 혼자서 그렇게 점잔을 빼면 우리는 뭐가 되나?]
철쇄용왕의 말에 다른 용들이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용왕들의 기척은 아까보다 더 누그러져 있었다·
이 자리에 오지 않은 두 명의 용왕을 제하고도 그들이 레녹과 싸울 의지를 잃었다는 증거·
[하나 틀린 말은 아니군· 말레온의 폭주를 저지하는 것 말고도 할 일이 있었지·]
[본인의 권역을 일겁으로 이동시키지· 가능한 최대한 많은 장생종을 태워보겠다·]
[대기권을 이탈하기 전까지 최대한 속도를 늦춰야 한다· 나와 염천이 남아 보조하마·]
쿠르르릉···!!!
안개의 우주를 유영하는 다섯 용왕이 각기 거대한 동공에 레녹을 비추고 떠나간다·
이 자리에서 레녹이 한 말과 약속을 기억해두겠다는 것처럼·
누군가는 도시 아래로 누군가는 안개 밖으로 권역을 움직이며 사라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철쇄용왕의 거체가 쓰러진 알로건을 향해 기울어졌다·
차르륵!!
묵직한 쇠사슬이 기절한 알로건의 신형을 휘감고 그대로 수룡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철쇄용왕을 향해 말했다·
“도와줘서 고맙군·”
[····]
“왜 내게 호의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쪽이 아니었다면 생각보다 시간이 더 소요됐을 거다·”
레녹이 알로건을 살려서 끌고 온 시점에서 어쩌면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을 다른 용왕들이 순순히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철쇄용왕의 말은 언뜻 듣기에는 지극히 원론적이고 외골수에 가까운 완고함이 가득했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다른 용왕들을 억지로나마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
철쇄용왕 본인의 강직한 성정과는 별개로 근본적으로 그가 레녹을 호의적으로 보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조력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불가능한 싸움에 임하는 전사는 싫어하지 않는다·]
철갑의 비늘 아래로 묵묵히 레녹을 바라보던 철쇄용왕이 입을 열었다·
[하물며 그가 동족의 허물로 만든 갑주를 입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지·]
“갑주? 아··· 그렇군·”
올버의 공방에서 구입했던 흑쇄용린갑· 쇄룡족의 비늘을 엮어 만든 갑주를 철쇄용왕은 진작 알아보았던 것인가·
그제서야 철쇄용왕이 레녹에게 보내는 호의를 이해할 수 있던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지만 나는 전사가 아니다· 쇄룡족의 갑주를 쓰고 있는 건 미안하게 됐군·”
[어떤 술식과 무구를 다루든 자신의 결말을 피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전사나 다름없지·]
철쇄용왕이 말했다·
[그리고 그건 말레온 그노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러니 인간· 말레온과 마주하는 자신의 선택에 긍지를 가지도록·]
쿠구궁···!!
철쇄용왕이 머리를 치켜드는 것과 동시에 그 압도적인 거체가 천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도시뿐만이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 응당 그래야 할 것이다·]
쿠과과과과!!!!
철쇄용왕의 거구가 거세게 솟구쳐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여섯 용왕 중에서도 유달리 장대한 체구를 갖춘 부유하는 강철의 요새와 같은 거룡(巨龍)·
반파되어 부서진 천장과 조각상· 엉망진창이 된 바닥· 흘러넘치는 안개·
용왕이 떠나고 난 뒤에야 팔겁의 전당 위로 고요한 적막이 찾아온다·
그 중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레녹을 향해 포혈공이 다가왔다·
“···견뢰·”
긴장한 표정으로 레녹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녀가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
승천의 비약을 마시고 전신의 마력과 혈액을 검게 물들인 마법사의 모습·
그의 등 뒤에서 회전하는 검은 헤일로와 전신에서 번뜩이는 흑뢰(黑雷)의 존재까지·
이 흑뢰를 일전에 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를 리가 없겠지·
그럼에도 레녹은 자신에 대한 미혹을 잠시 내려놓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니백스가 만든 독을 마셨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더욱 강해질 거야· 되돌리려면 차라리 지금-”
“괜찮아·”
레녹이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
“글세····”
천천히 포혈공을 향해 돌아선 레녹이 희미하게 웃었다·
“소환계약서를 사용할 대상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
“뭐?”
흡혈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구겨졌다·
“잠깐· 설마 내가 아니라 철쇄용왕이랑 계약해야 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성격이나 덩치도 그렇고 소환수를 삼는다면 저런 용종을 골라야 하지 않겠나·”
레녹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고 대꾸했다·
“소환 직후의 위압감 하나만큼은 어떤 소환수도 따라오지 못할 듯싶은데·”
“···기껏 팔겁까지 데려와 준 게 누구인지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네·”
포혈공이 차마 그 말은 반박하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
저만한 크기의 거룡이 소환되며 선사하는 위압감은 실로 말할 수 없는 수준이겠지·
“이래서 인간종은 안 된다니까· 비약의 독이 벌써 기억력까지 감퇴시킨 거야?”
“그럴 리가· 하지만····”
레녹이 웃으면서 걸음을 내디뎠다·
“네 말대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분명하군·”
“····”
탁!!
한 걸음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어둠이 소용돌이치는 구겁의 시련 앞에 내려선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차가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물끄러미 어둠을 바라보는 레녹과 몇 걸음 뒤로 물러선 흡혈귀의 모습·
“목숨을 버리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
침묵하던 포혈공이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오려면 마지막까지 너 자신을 우선해야 할 거야· 승천의 비약에 사용된 내단은 이미-”
“그 부분까지 포함해서 말레온을 상대하기 위한 방법이 여기에 담겨있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온몸을 타고 흐르는 차갑고도 검은 피·
손등 위로 비추는 핏줄조차 검게 변색된 타락의 전조·
하지만 레녹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처음부터 단서는 내 곁에 있었지· 하지만 이제서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게 된 것뿐이야·”
“····”
“그동안의 협력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하지· 차후 어떤 식으로든 보상하겠다·”
우우우우웅!!
레녹이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검은 헤일로가 거칠게 회전했다·
동시에 레녹의 전신에서 파괴적인 기척이 숨 쉬듯이 주변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런 레녹의 모습을 응시하던 소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와 화덕진군이 카이세에게 협력한 건 그가 대답을 쥐고 있다 믿었기 때문이야·”
“····”
“우리는 실패하는 것조차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어· 그래서 금제라는 어설픈 목줄을 모두에게 채워야 했지·”
포혈공이 눈을 감았다·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아· 다시 돌아간다 해도 다른 결말을 꿈꾸지는 않겠지· 하지만····”
외해의 어둠 앞에 선 포혈공의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가 소녀와는 다른 성인의 형태로 변한 것을 레녹이 깨달은 순간·
천천히 눈을 뜬 포혈공이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우리가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어·”
쿠오오!!!
구겁의 시련 앞에 한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어둠이 엄습한다·
하지만 처음 발을 들였을 때와 같은 얼음 같은 서늘함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따스한 온기만이 어둠의 저편에서 어렴풋이 전해져왔을 뿐·
이미 레녹의 몸이 이 어둠보다도 훨씬 더 차갑게 식어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기에 레녹은 이 자리에서 약속을 해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내가 쿤다라에 돌아올 수 있다면-”
착잡한 얼굴의 포혈공을 바라보던 레녹이 웃었다·
“소환계약의 해지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지· 그 정도면 만족스러운 보상이 될 거다·”
“됐거든· 누구 좋으라고·”
뚱한 표정으로 변한 포혈공이 대꾸했다·
“철쇄용왕으로 옮겨 탈라고 하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렇게 들렸나?”
레녹은 더 이상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소용돌이 너머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딘 그 순간·
장엄한 암흑이 레녹을 품 안에 끌어안고 온몸을 휘감았다·
화아아아악!!!!
이번에는 어둠에 저항하지 않았다·
승천의 비약을 마신 레녹의 몸은 이미 이 어둠만큼이나 깊게 잠식되어 있었으니까·
아득한 천저(天低)의 끝에서 무한한 욕망과 감정의 덩어리를 남김없이 들이마신다·
외해의 어둠 속에 어지러이 뒤섞인 외신들이 남긴 끝없는 꿈의 편린·
하나 레녹의 정신은 어둠을 온몸으로 집어삼키는 도중에도 멀쩡했다·
알 수 있었다·
‘···그렇군·’
구겁의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 진둔이 설계한 항하사미궁의 모방품을 풀어낼 필요도·
외해를 건너기 위해 미궁을 부수고 억지로 쿤다라 위로 비행할 이유도 없다·
대신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처음부터 레녹의 한걸음 뒤에 있었다·
한발 물러서 돌아서면 손이 닿을 법한 그곳에·
마치 레녹의 변절과 변심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지금껏 쌓아 올린 모든 성취와 의지를 무너뜨리는 파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하핫·”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한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아 이렇게나 쉽고 간단하다·
힘을 얻는 것도 초월성을 쥐는 것도 모두 어린아이의 장난감처럼 가볍기만 할 뿐·
단지 그것은 레녹의 손안에서 무한하고도 무하하게 회전할 뿐이다·
쌓아 올리는 것도 무너뜨리는 것도 쉬워서 굳이 구분할 이유도 없다·
레녹의 내면에서 뒤섞여 일그러진 혼돈을 아무렇게나 쥐어 문고리처럼 잡고 돌린 그 순간·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레녹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시공간을 넘어섰다·
“····”
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거대하고 투명한 우주정거장의 복도·
아득한 암흑의 바다가 비춰 보이는 투명한 유리 격벽·
죽어서 먼지가 된 채 쓰러진 창립자들의 미라·
“하····”
영혼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영압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애초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온몸에 흐르는 검게 뒤틀린 마력조차 거칠게 맥동하며 포효한다·
우우우우우웅!!!!
“말레온·”
한발을 앞으로 내딛는 것과 동시에 새카맣게 일그러진 벼락이 레녹의 전신에서 터져 나왔다·
어느새 레녹의 입가에는 어둡고도 섬뜩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내가 왔다·”
세계에서 헤아릴 수 없이 멀리 떨어진 구겁(九劫)의 시공 위에·
쿤다라의 장생종이 외겁을 꿈꾸며 만들어낸 장엄한 묘지 안에·
승천의 경계선에 올라탄 타락한 마법사가 다시 한번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