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5화
9레벨(23)
팔겁의 전당 위로 몰아치는 거대한 해일·
파도가 모여서 크기와 두께를 넓히고 압도적인 중량으로 지면을 내리찍는다·
쿠과과과과!!!!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지면 위로 폭탄이 터진 것처럼 흔들리면서 전당이 깨져 나간다·
결과로서 공간에 간섭하는 수압으로 공간을 터트리는 전술병기에 가까운 막대한 위력·
포혈공이 창백한 안색으로 피의 낫을 움켜쥐었다·
“견뢰···!!!”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모르겠으나 네놈 같은 술사에게는 찰나의 여유도 허락할 생각이 없다·]
알로건이 용의 눈동자를 들어 해일이 날뛰는 지상을 내려다보며 고했다·
[일어나라· 말레온에 대해 답해야 할 것이 아직도 잔뜩-?!]
근엄한 용왕의 포효가 쏟아지는 해일 속에서 레녹과 시선을 마주한 직후 뚝 멈췄다·
공간을 짓눌러 붕괴시키는 해류 속에서도 레녹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주변에서 행해지는 파괴에서 레녹만이 홀로 멀찍이 비켜선 것처럼·
물질적인 파괴와 충격은 더 이상 그 육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듯·
[이놈!!!]
노성을 지른 알로건이 수신술을 펼쳐 해류를 조작했다·
[육해(戮海) : 수라살(水羅殺)]
카가가각!!!
음속의 속도로 흐르는 물결이 날카롭게 일어서며 레녹의 몸을 엄청난 속도로 베어낸다·
인간의 나약한 육신 따위는 스치기만 해도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릴 흉험한 술식의 난사·
하지만 레녹은 눈을 감은 채 쏟아지는 모든 술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차갑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하다·
너무나 차갑고 시려서 이대로 서 있는 것만으로 신경과 근육까지 얼어붙을 것 같았다·
전신에 흐르는 피가 냉혈(冷血)이 된 것만 같은 지독한 위화감·
[모두 죽여··· 모조리 죽이자····]
[이제 죽일 수 있다··· 죽을 수 있어····]
[벌레들을 구축해··· 남김없이 도살해라····]
온몸에서 사이하며 저열한 사념이 메아리친다·
귀가 아니라 혈관과 신경을 타고 울려 퍼지는 저주와 원망의 속삭임·
육신을 이루는 모든 세포가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원하면서 발버둥 친다·
온몸이 썩고 부패해 가면서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향해 달려 나가는 기분·
하나 그에 비견되는 아주 방대한 감각이 레녹의 심신에 가득 차올랐다·
‘이런 기분이었나·’
승천의 비약을 복용한 직후 레녹은 니백스의 설명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복용자에게 승천자와 대등한 ‘상태이상’을 강제로 유발하는 극독·
그것은 바로 복용자 자신의 확정된 파멸을 조건으로 삼아 가능케 하는 기적이었던 것이다·
쩌저저저적···!!!
손가락 끝까지 모든 세포가 썩어 문드러지며 남아 있는 생명력을 모조리 끌어다 불태운다·
온몸의 신경이 말라비틀어지면서 더할 나위 없이 예민하게 모든 정보와 의념을 전달한다·
“후우-”
촤아악!!!
가볍게 숨을 내쉬는 순간 짙은 흑색으로 변한 레녹의 숨결이 물속에 퍼져 나갔다·
동시에 검은 빛으로 물든 바닷물이 순식간에 오염되면서 범위를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알로건 자신의 심해권역을 침범하고 대번에 잠식해 나가는 음습한 사념·
[대체 이게 무슨···!!!!!]
기겁한 용왕이 거리를 벌렸지만 레녹은 무시하고 허리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금까지는 감각을 정리하는 데 집중했지만 이대로라면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 터·
더 늦어지기 전에 레녹의 육체에 마지막으로 취해야 할 ‘조치’가 하나 남아 있었다·
찰칵!!
손등 위로 비치는 혈관마저 검게 물든 손 안에 묵색의 비늘이 쥐어졌다·
승천자 편람이 레녹에게 선물해 주었던 그녀의 본체에서 떼어낸 묵린(墨鱗)·
편람 본인의 의식과 결합해 육체를 조형하는 용도로 쓰였던 의태의 촉매를-
레녹 자신의 목에 꽂아 넣는다·
푸욱!!
검은 피가 흐르는 손이 너무나 쉽게 살점을 헤치고 잡아 벌렸다·
묵색의 비늘이 살점과 근육을 가르고 총경동맥에 박힌 순간·
[죽-]
[구축해 주-]
[벌레들이-]
레녹의 온몸에서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던 속삭임이 뚝 끊겼다·
동시에 썩으면서 무너지던 육체의 붕괴가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성공했다· 다행이군·’
비약을 복용함으로서 손에 넣은 감각은 남기고 그 반동은 억제하는 편법·
그 방법은 바로 편람의 묵린을 사용해 비약의 극독을 경동맥 아래서 억누르는 것이었다·
승천의 비약은 승천에 실패해 죽은 초월자의 내단을 니백스 오로시아의 진혈과 섞어 만든 것·
극독의 제조방식을 생각하면 내단의 주인과 니백스는 같은 이무기류의 장생종이 틀림없겠지·
그렇다면 탈태의 저주에 따라 내단의 주인과 니백스 모두 종의 정점에 선 편람에게 복종할 터·
설령 복종이 아니라도 편람의 본체가 남긴 비늘을 인지한 순간 모든 작용을 억압받을 가능성이 높다·
‘제대로 된 형태는 아니야· 이걸로도 오래 버틸 수는 없다· 하지만····’
천천히 눈을 뜬 레녹의 동공이 검은 고리를 띄고 회전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레녹 자신만의 대답으로 자격을 얻고 9레벨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본래 9레벨에 도달해서야 얻을 수 있는 감각을 억지로 먼저 깨우치고 그 반동을 편람의 위상으로 억누르는 편법에 불과할 뿐·
하지만 바로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 레녹에게 필요한 ‘결핍’이었다·
구겁에 다시 올라서기 위한 수단이자 그 안에서 멀쩡하게 활보하기 위한 수단·
말레온 그노시스와 다시 한번 ‘전력으로’ 대면하기 위해 필요했던 마지막 한 조각·
콰드드드득!!!
동공 바깥으로 비치는 실핏줄이 검게 물들어 눈동자를 감쌌다·
혈류의 색조차 검게 변해 버린 레녹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경악 어린 눈으로 레녹을 내려다보던 알로건이 중얼거렸다·
[내 평생 이런 기운을 지닌 술사는 본 적이 없다· 대체 무엇이 될 생각이길래···!!!]
“조금 위험한 수단을 사용하기는 했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물속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피부색까지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안으로 비친 혈관은 칠흑처럼 검은빛이다·
몸을 베어 상처를 낸다면 흘러나오는 것은 석유처럼 검고 차가운 피겠지·
“반동이나 부작용을 이것저것 따지면서 가릴 상황은 아니라서·”
[····]
“하지만 이건 또 이것대로 나쁘지 않군·”
눈을 감은 레녹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고요하고 적막해··· 그게 내 마음에 든다·”
9레벨의 승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수천 번은 넘게 상상해 봤지만 온몸과 정신이 폭발할 것만 같은 고양감은 없었다·
대신 죽은 듯한 적막과 고요만이 레녹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뿐·
하지만 레녹은 내면을 가득 채우는 이 고요함이 더할 나위 없이 깊게 와닿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
그제서야 레녹은 이 고요한 기분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9레벨에 도달해 자격을 얻은 승천자의 ‘감각’과 ‘상태’를 체험하고 있는 지금·
레녹이 느끼는 것은 초월적인 고양감도 끝을 알 수 없는 전능감도 아니었다·
그저 익숙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 감각을 알고 있던 것처럼·
그것을 이제서야 레녹의 몸과 머리로 기억해낸 것처럼·
아주 길고 험난한 시간을 넘어 비로소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온 사람처럼·
모든 것을 쥔 듯한 기쁨과 환희 고양과 영감은 없다·
단지 모든 것을 되찾은 듯한 나직한 안도만이 그곳에 있을 뿐·
제대로 된 방식으로 9레벨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편법을 통해서 반동을 멈췄기 때문인지·
어느 쪽이든 레녹은 비로소 이제서야-
“미안하지만 지금부터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천천히 눈을 뜬 레녹이 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말했다·
“그러니 죽고 싶지 않다면-”
키이이이잉!!!!!
레녹의 뒤에서 황금빛의 헤일로가 회전하며 떠올라 뿌리 끝부터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영원을 상징하는 뱀 우로보로스·
무한히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의 마법체계가 레녹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발동·
그 근원부터 황금빛에서 저열한 사념으로 타락해 변질된다·
찌유우우우웅!!!!
흑색으로 변한 헤일로가 기괴하게 찌그러지면서 레녹의 등 뒤에서 느릿하게 회전했다·
청명하기 그지없던 공명음이 기이하게 늘어지면서 귀에 거슬리는 파열음으로 변하고·
일그러진 타원의 헤일로를 펼친 레녹이 알로건을 올려다보았다·
“알아서 머리를 조아려야 할 거다·”
[건방진-!!!!]
격노한 알로건이 몸을 뒤트는 것과 동시에 물결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백해(魄海) : 수어혼(水齬混)]
터터터텅!!!
팔겁의 전당을 메운 물길이 충돌하면서 폭발하고 물속에서 소리 없는 진동을 터트렸다·
물 밖으로 수십 개의 물기둥이 솟구치며 사방으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물속에 잠겨 있는 레녹의 육신을 직접 타격해 붕괴시키는 수신술의 응용술식·
하지만 레녹은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수류의 폭발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앞으로 내디뎠을 뿐·
콰앙!!
검은 헤일로가 폭발적으로 회전하며 레녹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기척에 알로건이 흠칫한 찰나 수룡의 뒤에서 헤일로가 펼쳐지고 레녹이 걸어 나왔다·
일체의 마력소모도 없이 사방에서 넘실대는 술식포격을 모조리 무시하고 시공을 넘는 기예·
[인간!!!]
그것이 의지로서 공간을 지배하는 기적임을 깨달은 알로건이 전력으로 마력을 둘렀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알로건의 머리 위로 검게 물든 헤일로가 둥글게 번뜩이며 수룡의 거체를 그 자리에 찍어눌렀다·
창조계열 고유마법
성질변화 천저(天低)
[타락(墮落) : 번연(燔燃)]
쩌어어엉!!!!
수룡의 머리와 등허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짓눌리며 뼈와 살점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끄어어어어!!!!]
수신용왕의 포효가 팔겁의 전당이 흔들릴 만큼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동시에 알로건의 아래 넘실대는 물길이 수백 갈래로 쪼개져 초음속의 속도로 사출·
[청색유인(靑色流引)]
[수계비탄(水計匕彈)]
두두두두!!!!
물기둥이 솟구쳐 회전하면서 사방의 지형지물을 갈아 없애 버린다·
검은 헤일로를 등지고 선 레녹을 요격하기 위해 쏟아지는 수탄(水彈)의 포격·
하지만 레녹은 쏟아지는 수탄과 물기둥의 폭격을 피하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
레녹의 손끝에서 피어난 뇌전이 헤일로의 칠흑처럼 어두운 마력과 맞닿은 찰나·
빠지지지직!!!!
말라비틀어지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번개가 뿌리 끝부터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저 저것은···!!!!”
그 기이하게 뒤틀린 흑뢰(黑雷)를 본 레그누스가 두 눈을 부릅뜬 그 순간·
극한까지 압축된 흑뢰가 검은 실선으로 변하고 레녹이 허공을 가리키듯 손짓했다·
창조계열 고유마법
성질변화 천저(天低)
[흑해(黑解) : 직극(直極)]
팟-
흑색의 실선이 팔겁의 시공 전역을 가로지르며 펼쳐졌다·
마치 지평선을 다시 그려내는 듯 불길하게 일렁이는 흑선·
동시에 시공을 양분한 흑선의 위아래로 흑뢰가 터져 나와 눈앞의 공간을 잡아 벌리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직!!!!
천수· 수어혼· 청색유인· 수계비탄·
알로건이 전개했던 수백 종의 수신술식이 흑뢰에 맞닿는 것과 동시에 소멸한다·
거대한 물의 방벽이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레녹이 쏘아낸 흑뢰와 충돌·
검은 번개가 허무할 정도로 방벽을 관통하고 알로건의 거체를 벽에 처박았다·
쾅!!!
드르르르륵!!!
[컥!!!]
창립자들의 조각상을 부수고 벽 사이를 나뒹군 알로건이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흑뢰에 피격당한 육신의 회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용종의 강인한 재생력 자체를 아예 무위로 돌리는 듯한 기이한 힘·
그제서야 흑뢰의 능력을 알아차린 알로건이 경악한 눈빛으로 레녹을 노려보았다·
[문답조차 없이 법칙을 깨부수는 벼락인가···!!]
“용종답게 눈이 좋군·”
창조마법 우로보로스가 변질되고 왜곡되어 만들어진 흑색의 헤일로·
모든 술식과 법칙을 해체하여 해석하는 힘에서 ‘해석’을 빼고 술식대상을 강제로 확장시킨다·
그 결과 레녹이 손에 넣은 것은 물리법칙과 술식을 이해하지 않고 강제로 해체하는 뒤틀린 우로보로스·
비약을 마시고 레녹의 몸에 내려앉은 파멸을 동력으로 삼는 해체기관·
[실망스럽구나 인간!!!]
하지만 알로건은 레녹이 휘두르는 흑뢰의 공능을 눈치채고도 거세게 포효했다·
[그런 폭급한 권능에 심신을 내던지다니 네놈이 정녕 내게 오백로를 가르친 술사라 말할 수 있겠느냐!!!]
“틀린 말은 아니지·”
알로건의 비늘 위로 검은 실선이 새겨진 찰나 그 선을 중심으로 흑뢰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콰지지직!!!!
검은 벼락과 함께 알로건의 앞에 내려선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자기개변이 아니라 자기파멸을 전제로 하는 타락의 술식· 안전장치가 없었다면 나도 다뤄볼 기회는 없었을테니·”
자신의 의지로 파멸을 받아들였기에 레녹의 술식 역시 그에 따라 왜곡되고 변화한다·
외부의 변수에 영향을 받지 않는 레녹의 벼락이 검게 물든 것은 그 때문이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레녹은 여전히 의식을 잃거나 폭주하는 일 없이 서 있었다·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는 힘이라면 폭주하는 대로 다뤄내면 그만이다·”
손가락 사이로 제멋대로 튀는 흑뢰를 보며 레녹이 말했다·
“위력을 조절할 수는 없어도 반동이 튀는 건 억제할 수 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폭주하는 흑뢰를 서로 충돌시켜서 방향을 바꾸고 레녹에게 향하는 반향을 강제로 소멸시켰다·
검은 헤일로가 회전할 때마다 레녹에게 가해지는 모든 반동이 ‘해체’되어 사라진다·
예하술주에게 훔쳐배운 참격조작을 차원이 다른 경지에서 억지로 운용하고 있는 감각·
하지만 레녹은 용왕조차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힘을 다루면서도 미묘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네 말이 맞다· 확실히 이건··· 위험하군·”
승천의 비약을 먹고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몸과 심상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내면을 가득 채우는 충만함과 끝없는 이 안도감이 레녹에게는 더 위험했다·
승천자의 감각과 상태를 잠시 체험하는 것만으로 벌써 무언가를 깨달아 버릴 것 같다·
자신의 온몸에 내려앉은 경이를 이해하고 그대로 대답에 도달해 버릴 것만 같았다·
레녹의 초월적인 재능은 선각(先覺)에 이르는 것과 동시에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힘·
그렇기에 레녹은 지금 이 자리에서 진정한 9레벨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자신을 억지로 붙잡고 있던 것이다·
‘지금 9레벨에 도전하면 안 돼· 이 분기점을 내 안에 남기는 선에서 멈춰야 한다·’
지금 레녹이 얻은 감각은 레녹 자신에게서 비롯된 기적이 아니다·
승천에 실패한 초월자와 니백스의 진혈을 섞어 만든 극독으로 인한 부작용·
지금 이 순간을 계기로 삼아 9레벨에 도전하면 레녹의 분기점과 대답 역시 이 순간으로 ‘고정’되게 된다·
그건 레녹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인과와 여정을 송두리째 물거품으로 만드는 일이나 마찬가지·
‘의식하지 않으려 하면 더욱 의식하게 된다· 오래 버틸 수는 없어·’
지금 레녹이 하는 일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 억지·
눈앞에 뻔히 보이는 답지를 두고 억지로 외면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의식하지 않으려 하면 더욱 의식하게 되는 모순·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아야만 겨우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슬슬 끝내지· 다른 용왕들이 오기 전에 널 죽이고 시체를 보여줘야 할 테니까·”
알로건을 바라보는 레녹의 눈빛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구겁에 다시 올라가는 사이 방해하지 못하게 경고를 해둬야 할 것 같거든·”
[외도를 이용해 초월성을 쥐었으나 그것이 진정 너를 위해 안배된 힘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룡이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동시에 사방의 물줄기가 거대한 수룡의 거체를 팔겁의 하늘 위로 높게 띄워 올렸다·
[주제를 넘어선 욕심은 언제고 화를 부르기 마련이니]
알로건이 레녹을 내려다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내 오늘 네게 그 사실을 직접 가르쳐 주마·]
[사해(死海) : 심중천(沈重川)]
쿠우우웅!!!
순간 알로건의 심해권역 전체가 짙은 남색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극한까지 압축된 물 속에서 염분이 한계까지 녹아들면서 색깔마저 바꿔낸다·
그렇게 만든 물줄기를 수십에서 수백 수백에서 수천 갈래 모아 하나로 이어붙였다·
수만 갈래 물줄기가 알로건의 입 안에서 모여드는 것과 동시에 일점으로 집중되어 사출·
한줄기 푸른 섬광이 되어 극초음속의 속도로 쏘아졌다·
심의·
[수적석천(水滴石天)]
콰아아아아아!!!!!
작은 물방울이 모여 하늘을 뚫는다·
권역에 존재하는 모든 해류를 동시에 조작해 발동하는 수신술의 오의·
심해권역의 모든 물길을 입자 단위로 응축시켜 강제로 발생시키는 공간융해(空間融解)·
특정한 시공간 전역에 수신의 성질을 극한까지 섞여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전이시킨다·
결과로서 공간을 다뤄내는 경지의 극한에 도달한 수신술식에 존재하는 하나의 도달점·
극한까지 압축된 수류(水流)가 수직에서 수평으로 방향을 꺾으며 한번 더 가속한 순간·
빠직!!
레녹의 손끝에 잡힌 검은 헤일로가 수적석천과 충돌하며 술식의 요체를 강제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쿠과과과과!!!!
레녹의 손을 중심으로 수신술의 심의가 사선으로 갈라지며 그 뒤로 비껴갔다·
물줄기가 산산히 분해되면서 흩어져 소멸하고 검은 번개가 모든 것을 갈아 마신다·
하지만 레녹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알로건의 심의를 해체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허공에서 여러 개의 헤일로가 어둠을 비추는 눈동자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공간융해의 술식을 정면에서 뚫어내는 레녹의 대처에 알로건이 경악해 소리를 질렀다·
[심해권역의 해류를 혼자 받아넘길 수 있단 말이냐!!!]
“해체하고 해석한다· 해석을 빼고 해체를 남긴다· 하지만····”
알로건을 향해 서슴없이 걸음을 옮기며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비틀리고 왜곡되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아· 망가져도 목적은 달라지지 않는다·”
찌유우우우웅!!!!
찌그러진 헤일로가 검은 빛을 흩뿌리며 회전한 순간·
“우로보로스 마법체계의 대전제를 포기하는 것을 조건 삼아 끌어올린 해체의 공능· 그러니 이제는-”
파아아앙!!!
심해권역의 모든 해류를 남김없이 분쇄하고 흩어낸다·
어느새 레녹은 거대한 수룡의 코앞에 한 손을 뻗은 채로 서 있었다·
“네 기원마저 해체할 수 있다·”
콰직!!!
레녹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알로건의 뇌리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오오오오?!!!!]
하지만 알로건은 단순한 파열음 이상의 반동을 느끼고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수적석천의 술식을 분해하고 해체하는 것이 아니다·
알로건의 내면에 쌓아 올린 수신술의 성취 자체가 갈려 나가는 듯한 섬뜩한 감각·
용종의 심지 자체를 통째로 깎아내는 듯한 이치의 반상(反常)·
편람이 니백스 오로시아를 상대로 보여주었던 초월성의 증거이자 편린을 흉내 내어·
레녹은 알로건이 평생 동안 쌓아 올린 위계를 강제로 깎아내려 하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다!!]
영혼을 울리는 비명과 함께 알로건이 거세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의 결의와 흉포함도 모두 잃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트는 용왕의 모습·
[감히 나의 위계에 간섭하려 하다니···!!! 네놈이 네놈이 정녕 승천자라도 되었다는 말이냐!!!]
알로건이 뒤늦게 격렬하게 몸을 뒤틀었지만 이미 늦어있었다·
수룡을 향해 하늘 끝에서 구부러진 흑뢰가 길게 휘어지면서 쇄도한다·
검은 만화경처럼 둥글게 구부러진 어두운 뇌광이 침잠하며 번뜩이고·
화악!!!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레녹이 알로건의 눈을 가리듯이 손을 펼쳤다·
[이건 안 된-!!!]
레녹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알로건의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 * *
천장이 사선으로 갈라져 안개의 우주가 비춰 보이는 팔겁의 전당·
거대한 수룡의 꼬리를 움켜쥔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쿵 쿵 쿵!!!
레녹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룡의 몸이 질질 끌리면서 굉음을 터트렸다·
반동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용의 꼬리를 끌며 걷던 레녹이 그것을 휙 내던졌다·
콰아앙!!!
푸른 비늘을 지닌 수룡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전당의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손을 가볍게 털면서 돌아선 레녹이 말했다·
“팔대용왕 알로건· 심해권역을 지배하는 수신족의 수장·”
[····]
“같은 용왕의 이름을 달고 있다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보겠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휘오오오오!!!!
그런 레녹의 눈앞에는 안개의 우주를 유영하는 다섯 마리 거대한 용이 떠올라 있었다·
유령 같은 혼백을 단 용 전신에 뜨거운 불꽃을 두른 용·
보석처럼 아름다운 비늘을 지닌 용도 사슬처럼 단단한 몸을 지닌 용도 있다·
하나하나가 8레벨에 도달한 대술사이며 장생종 중 가장 고귀하다는 용종으로서 경지에 도달한 초월자·
다섯 팔대용왕이 제각기 다른 감정과 의념을 담고 전당 아래 선 마법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으니까 한 번만 말하지·”
검은 안광을 흘리면서 용왕들을 바라본 레녹이 말했다·
“말레온 그노시스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비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