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화
9레벨(20)
쿵!!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광선이 말레온의 손목을 관통한 찰나·
멱살이 잡혀 있던 레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올리비에라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윽···!!”
고오오오!!!
화려한 도포를 흩날리며 마안광을 번뜩이는 올리비에라의 신형·
싸늘한 시선으로 말레온을 바라보며 올리비에라가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자라 여겼으나 이런 식으로 기대를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녀의 시선은 말레온의 목 위로 늘어진 선종의 머리를 향해 있었다·
[죽은 머리라··· 그래 진체를 숨기고 사념을 먹어치우던 이유로는 가엽기 그지없군·]
“····”
말레온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파악한 것일까·
올리비에라의 독백은 그 하나하나가 지금 이 순간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말을 듣지 않는 신체 부위는 육체가 아니라 종기나 다름없지·]
천천히 돌아서는 승천자를 바라보는 올리비에라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도려내 주마·]
“무서워서 있지도 않은 오금이 저리는군·”
선종이 축 늘어진 머리로 물었다·
“그쪽도 십관에 보관된 시체를 노리고 찾아온 손님이었나?”
[····]
올리비에라라면 싫어도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밖에 없겠지·
순식간에 십관 내부의 풍경을 훑은 그녀의 시선이 옥좌에서 멈춰 섰다·
목이 잘린 채 옥좌에 앉아 있는 시체를 본 순간 올리비에라의 호흡이 잠시 멎었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올리비에라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카이세·]
“····”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예상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올리비에라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고 목적 역시 불분명하기에 레녹 역시 많은 것을 알지는 못했다·
다만 프로젝트의 이름을 지어주는 그 순간에 그녀가 함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프로젝트의 실패에 적지 않은 미련을 두고 있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
그러니 카이세를 마주한 지금 올리비에라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최악의 경우 올리비에라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달리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올리비에라가 지친 몸을 이끌고 어떻게든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는-
[····]
하지만 올리비에라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동요하지도 흔들리거나 냉소하지도 않았다·
대신 언제나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던 마안의 광채가 베일 너머에서 조금 희미해졌을 뿐·
그것이 올리비에라에게서 거의 보지 못했던 옅은 슬픔의 감정임을 레녹이 깨달은 찰나·
“이상한걸·”
그런 올리비에라를 보며 머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강력한 마안술사면서 선천이능이 아니라 광요마법을 다루는 건가· 그건 여러모로 재능을 깎아 먹는 짓일 텐데·”
[····]
“아 무슨 느낌인지는 알겠군· 채널을 바꾸는 것처럼 스스로의 재능을 시간선마다 다르게 변환해 둔 건가?”
잠깐 올리비에라를 보는 것만으로 선종의 사념은 그녀가 어떤 능력을 사용하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선종이 진짜 본인이 아닌 것과는 별개로 승천자에 준하는 의식과 안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지·
“마안의 특성에 기반한 회선 변경을 감안해도 효율이 좋은 능력은 아니군· 과거의 성취를 강제로 끌어오려면 그 몸에 가해지는 반동도 엄청난 수준일 텐데·”
“····”
“현실의 육체에 과거의 술식을 겹치는 거야· 사철로 온몸을 갈아내는 고통도 그것보다 덜하지는 않겠지· 효율을 버려가면서 고점을 높이겠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올리비에라를 바라보는 선종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건 승천자의 방식이다· 한낱 필멸자에게 허락된 방법은 아니지· 하물며 단명종에게는 더더욱·”
[네놈은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그 순간 올리비에라가 선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거기까지 입에 담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네놈이 현시대에 존재하는 지성체는 아니라는 증거겠지·]
“틀린 말은 아니군· 그것 또한 내 본질이라고 할 수-”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그 뒤틀린 기척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베일 너머로 번뜩이는 마안이 그를 비웃듯이 가늘게 변했다·
[파우드 올더· 그 이름을 이렇게 불러보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로구나·]
“····”
설명을 듣지 못했음에도 올리비에라는 상대를 알아보았다·
생명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비틀린 본질을 눈치채었던 것·
하지만 선종은 올리비에라가 이름을 불렀음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이 뚝 끊기는 것과 동시에 말레온이 화답하듯 안광을 흩뿌리며 돌아섰을 뿐·
올리비에라의 휘천에 관통당한 손목은 어느새 말끔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승천자이자 용종으로서 완성된 말레온 특유의 경이로울 정도의 재생능력·
쿠웅!!
한 걸음을 앞으로 내리찍는 것과 동시에 지축이 거세게 흔들렸다·
동시에 말레온의 머리 위로 열 개가 넘는 별이 떠올라 격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콰우우우웅!!!
하나만으로 십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별빛이 팔방에서 떠올라 번뜩였다·
별빛이 타오르며 뻗은 열기가 레녹이 쓰러진 머리 위로 낙하하던 찰나
화악!!
날카로운 빛과 함께 레녹의 곁에 내려선 올리비에라가 별빛의 열기를 막아섰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던 레녹이 힘겹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올리비에라·”
[네놈도 참 어리석기 그지없구나·]
올리비에라가 말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뒤틀렸다면 진작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어야지·]
“····”
[헐레벌떡 내게 달려와 목숨을 구걸해도 모자랄 판에 혼자서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용을 쓰고 있었더냐·]
아이러니하지만 레녹은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와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으려는 그 모습조차 참으로 네놈답군·]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지 못해·”
레녹이 이를 악물고 한 팔로 상반신을 지탱하며 말했다·
피부를 뒤덮은 용린갑이 아니었다면 진작 어디 한군데가 끊어지고도 남았을 터·
갑주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바라보던 레녹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선종의 의식과 말레온의 육체가 서로를 보완하며 완성되고 있다· 이대로 구겁에서 계속 싸우면 필패야·”
[····]
“정비하거나··· 후퇴해야 해· 최소한 십관에서 물러나 폐해를 수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엘릭서를 사용한 4초간의 공방에서 우위를 잡긴 했지만 그건 말레온이 레녹의 마법에 대해 몰랐기에 가능했던 일·
전격마법 특유의 폭발적인 순간출력으로 고점을 높여 말레온이 설정한 방어선을 강제로 뚫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말레온의 방비는 더욱 견고해질 테고 레녹을 상대함에 있어 더욱 신중을 기하겠지·
불완전하다고는 하나 틀림없이 9레벨에 도달한 승천자다·
정상적인 컨디션으로도 상대하기 어려운데 이만큼 소모된 상황에서는 승산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
“당신 역시 언제까지 광요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을 텐데·”
레녹이 물었다·
“이미 진작 한계에 도달한 것··· 아니었나?”
[····]
선종의 말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지금 올리비에라가 광요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결코 정상적인 일은 아니라는 것·
위계를 깎고 계통을 바꿔가면서 버린 광요마법을 이제 와 다시 다루기 위해 얼마나 막대한 대가가 필요할까·
레녹은 올리비에라가 전장에 개입하기 위해 엄청난 리스크를 각오했음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버리고 무언가를 얻을 것인지를 매번 직접 고를 수는 없지·]
침묵하던 올리비에라가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선택할 기회라는 것은 항상 적시에 오지 않고 때로는 그것을 고를 자격조차 없기 때문이다·]
“····”
[나 역시 마찬가지· 마법을 버리고 마안을 고른 것은 나의 선택이었으나 의지가 아니기도 하였으니·]
“···올리비에라·”
[하지만 네놈은 다르지·]
베일의 뒤편으로 올리비에라의 차가운 얼굴이 살짝 비쳤다·
번뜩이는 마안을 돌려서 레녹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광요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엄청난 소모를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
레녹이 직감적으로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뗀 그 순간·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도 내 결정에는 변함이 없구나·]
레녹을 내려다보는 올리비에라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부드럽게 변했다·
[만약 우리 둘 중에서 누군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
[멸성(滅星)]
쿠과과과과!!!!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십수 개의 별빛이 서로의 궤적을 겹치면서 힘을 키워 나간다·
한점으로 수렴하는 별똥별이 레녹이 쓰러진 구겁의 시공을 관통하듯 가속하고·
올리비에라가 떨어지는 빛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그건 역시 나보다는 네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광요계열 고유마법
신기루(蜃氣樓)
[요희신궁(曜熙身躬)]
쩌어어어엉!!
한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올리비에라의 신형이 수십 갈래로 나뉘었다·
빛을 분산시켜 환영을 만들고 만들어진 환영을 실재하는 분신으로 삼는 마법·
폐쇄구역에서 과거의 올리비에라를 상대하며 연구한 적 있던 분신 술식에 레녹이 눈을 크게 뜬 찰나·
말레온이 휘두른 멸성의 빛이 올리비에라의 분신을 휩쓸어 지워 버렸다·
콰아아아아아앙!!!
십관의 시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면서 요동친다·
별빛이 넘실대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 없애고 구겁의 내벽마저 녹이기 시작했다·
장생종의 유해를 재료 삼아 만들어진 우주정거장조차 버티지 못할 만큼 강렬한 열량·
하지만 올리비에라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빛의 폭격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멸성의 파도에 휩쓸리며 소멸하는 분신이 터트리는 강렬한 광원·
그 빛을 그러모아 다리를 만들고 원시마법을 넘어 말레온의 뒤에 내려선다·
파앗!!
그녀의 발아래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레녹이 함께하고 있었다·
“···쿨럭!!”
충격으로 땅바닥을 나뒹군 레녹이 힘겹게 기침을 토해냈다·
제때 대상지정 저항을 풀지 않았으면 술식효과를 받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버릴 뻔했다·
하지만 올리비에라는 그런 레녹의 반응을 무시하고 곧바로 말레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키이이잉!!!
사방에서 번뜩이는 빛의 물결이 올리비에라를 둘러싸고 춤을 추듯 회전한다·
빛의 덩어리들을 손으로 두들긴 순간 광채의 물결이 색채를 바꿔가며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광요계열 고유마법
성라신휘(星羅申暉)
[묘도서광(昴圖西光)]
파앗!!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이어진 빛무리가 순차적으로 가속하고 말레온이 즉시 돌아서며 손을 펼쳤다·
두 대술사의 의념이 거의 동시에 사선으로 교차하면서 충돌한 그 순간·
올리비에라의 술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과 충돌하면서 엄청난 충격파를 터트렸다·
쿠과과과과과과!!!!!
고유마력으로 ‘별’을 만들어 떨어뜨리는 말레온의 성련팔극식·
빛의 속성을 극한까지 구부려 연주하는 올리비에라의 광요마법·
서로 다른 빛을 지배하는 초월자들의 술식이 초당 수백 번에 달하는 속도로 격돌했다·
화려한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소멸하는 빛무리와 별빛의 파도가 어지러이 뒤섞인다·
눈앞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가 이내 시신경을 불태울 만큼 강렬한 빛이 되고·
온몸이 뜨겁게 타오르는 열기와 함께 모든 소리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콰아아아앙!!!!
“큭···!!!”
충돌에서 버티지 못한 레녹이 내벽 근처에 처박혀 나뒹굴었다·
하지만 레녹은 팔이 꺾이는 고통에도 떨리는 손을 들어 품 안에 밀어 넣었다·
언뜻 보기에 대등한 술식대결로 보이나 그것도 결국 결착을 미루는 유예에 불과하다·
올리비에라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억지로 광요마법을 사용하는 그녀의 몸이 언제까지 버텨줄지는 알 수 없으니·
그녀가 말레온을 상대하며 시간을 끌고 있는 지금 어떻게든 마력을 회복하고 전투에 참가해야 한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아주 작은 약병을 망설이다 움켜쥔 그 순간·
올리비에라의 신형이 별빛의 파도를 넘어 말레온의 앞에 내려섰다·
퍼버버벙!!!
말레온이 쥐고 터트리는 별빛에 올리비에라의 몸이 쉴 새 없이 터져나가지만·
그 빈 자리를 그녀의 분신들이 대체하면서 조금씩 숫자를 늘려나갔다·
수백에 가까운 분신들이 폭주하는 승천자를 향해 수인을 맺고 손을 뻗은 찰나·
사방에서 넘실대는 빛이 거대한 반구 형태로 이어 붙어 말레온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아앗!!!
광요계열 고유마법
대저광부 태상봉인
올리비에라의 분신 사이로 무수한 빛의 선이 이어지며 모든 분신이 결계를 구축하는 구심점이 된다·
결계의 구심점을 수백 번 중첩해서 서로 다른 시공을 동시에 가둬버리는 광요마법의 극의·
[전륜축성(展侖築聖)]
“오오오오오오오!!!!”
말레온이 거친 목소리로 포효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이 무수한 빛의 선에 휩싸여 지워졌다·
쩌어어어엉!!!!
시공간을 강제로 이어붙여 닫아버리는 듯한 기괴한 공명음·
동시에 말레온의 포효가 뚝 끊기고 구겁의 시공에 기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제서야 요희신궁을 거둔 올리비에라가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전륜축성····”
뒤에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중얼거렸다·
“말레온 그노시스를··· 봉인해 버린 건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오래 가지는 못할 게다·]
올리비에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 역시 알고 있겠지만 전륜축성은 신선의 태상봉인을 흉내 내는 술식· 그 술식구조를 처음 본 자라면 반드시 당할 수밖에 없지·]
“전륜축성의 위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임시방편으로 끝날 술식은 아닐 텐데···?”
[하나 상대는 승천자· 그 안에 깃든 것은 해묵은 선종의 사념이다· 구조를 파악하고 나면 힘으로 부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린 올리비에라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니 지금 말레온의 모습을 잘 기억해두거라·]
“···뭐라고?”
[말레온 그노시스는 은(銀)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용종· 자연히 그 능력과 재능도 태생을 따라가기 마련이니·]
올리비에라가 설명했다·
[은은 모든 금속을 통틀어 전도율이 가장 뛰어난 물질이니 그가 열량변환에 특화된 술식을 사용하는 것도 분명 그에 기반한 재능일 테지·]
“····”
[다음번에 그를 상대할 때는 이러한 사실을 주지하고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게다·]
“다음이라니· 그게 무슨-”
레녹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올리비에라가 곧바로 레녹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기 때문·
지금까지 이 전장에서 일체 휩쓸리지 않았던 카이세의 옥좌를 향하고 있음을 레녹이 깨달은 찰나·
옥좌 앞에 다가선 올리비에라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걷어냈다·
찬란하게 빛나는 칠채보의 마안이 진혈을 공급받는 카이세의 시체를 직시한 순간·
[칠색칠법(七色七法) : 마안상동(魔眼相瞳)]
[불변불능(不變佛能) : 인과고정]
[진정(眞停)]
쩌어어어엉!!!!
시공간이 얼어붙는 듯한 공명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옥좌를 타고 흐르는 대롱도 그 안을 타고 공급되는 진혈도·
목이 잘린 채로도 강렬한 기척을 내뿜는 카이세 바쥬르의 유해조차·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고정’되어 버린다·
레녹이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안을···!!”
[방금 내 마안을 사용해 시신의 인과를 ‘고정’시켰다·]
미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베일을 내린 올리비에라가 말했다·
[인과의 변화를 멈추었으니 당분간 어떤 식으로든 시신에 수작을 부리는 건 불가능하겠지·]
“····”
[카이세의 시신에 이변이 생겼으니 피의 계약이 작동해 ‘진혈을 보유하지 않은 존재’를 쫓아낼 거다·]
올리비에라가 그렇게 말하며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네놈 하나 정도는 무사히 구겁을 탈출할 수 있겠지·]
“···설마·”
그제서야 올리비에라의 의도를 깨달은 레녹이 얼굴을 굳혔다·
어째서 올리비에라가 말레온과 잠시나마 대등하게 술식을 맞댈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통해 결과적으로 무엇을 노리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
피의 계약으로 인해 구겁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진혈을 갖고 있지 않은 존재·
그렇다면 올리비에라는 이미-
[네 말이 맞다 견뢰· 일이 이렇게 된 시점에서 우리 두 사람이 저 승천자를 상대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지·]
“····”
[하다못해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교전을 시작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그런 무의미한 가정을 오래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올리비에라···!!”
[그러니 너는 구겁을 내려가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가져오도록·]
올리비에라가 웃었다·
[타락한 승천자는 내가 막고 있겠다·]
“안돼· 불가능하다·”
레녹이 이를 악물고 답했다·
“말레온은 지금 미쳤어· 억지로 버티면 네 마안이든 목숨이든 헛되이 사라질 뿐이다!!”
칠채보의 마안은 성능 자체는 막강하나 그 반동으로 몸에 막대한 반동을 주는 선천이능·
승급 의식에서 잠깐 사용한 것만으로도 버거워했는데 마안을 오래 사용할 수 있을 리 없다·
하물며 마안의 공능을 유지하면서 말레온을 막는다는 건 애초에 상정조차 할 수 없는-
콰아아앙!!!
그 순간 전륜축성으로 만들어진 결계가 폭발할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결계 안에 갇힌 승천자가 벌써 구조를 파악하고 힘으로 부수기 시작한 것·
[구겁에 올라오기 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올리비에라가 말했다·
[둘 중 하나만이 가야 한다면 그건 나보다는 네놈이 되어야 한다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올리비에라!!!!”
콰아아아앙!!!
결계가 박살 나며 그 안에서 피범벅이 된 용인의 거체가 걸어 나왔다·
헤아릴 수 없는 빛의 파도에 익어버린 것처럼 매캐한 연기 속에서 안광을 번뜩이는 말레온의 신형·
천천히 다가오는 말레온을 보며 올리비에라가 레녹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네가 맞다· 어쩌면 처음부터 네가 되어야 했을지도 모르지·]
“···!!!”
[그러니 착각하지 말거라·]
주르륵·
마안으로 ‘고정’되지 않은 옥좌 아래 떨어진 피가 레녹을 중심으로 복잡한 혈법진을 그렸다·
그것이 혈마법의 공능임을 깨달은 레녹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탁···!
올리비에라가 단호한 손짓으로 레녹의 어깨를 밀어 넘어뜨렸다·
여력이 남아 있지 않던 레녹의 몸이 주저앉은 순간 혈법진이 발동·
[이것은 희생이나 변덕 따위가 아니라 오랫동안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론이니·]
올리비에라가 웃으면서 속삭였다·
[프로젝트의 실패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마침표인 셈이다·]
촤아아악!!!
바로 앞까지 다가온 말레온과 그를 등진 올리비에라의 모습이 눈부신 광채에 가려졌다·
동시에 레녹의 몸이 아득하게 낮은 고도로 하강하는 것처럼 붕 떠올랐다·
쿠과과과과!!!!!
“-!!!”
온몸의 내장이 자리를 잃고 부유하면서 뒤섞이는 듯한 구토감· 눈을 감고 흔들리는 충격 속에서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바깥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지옥같은 열기 귀청을 찢어발기는 바람소리·
우주 바깥에서 떨어지는 운석 위에 올라탄다면 이런 느낌일까·
본능적으로 그런 감상을 되새기면서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입술을 깨문 순간·
철퍽!!
뜨거운 핏물이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레녹의 몸이 낡은 보도블록 위로 넘어졌다·
“···!!”
어깨부터 처박혀 몇 바퀴를 구르다 멈춰 섰다·
전신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무어라 입을 열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어딘가 눈에 익은 골목길이 눈에 보였다·
외해 바깥에 존재하는 구겁의 시공에서 혈마법을 통해 하강·
장막의 이면에 존재하는 외겁도시 쿤다라로 돌아온 것인가·
“하아 하아···!!”
쓰러진 채 눈을 감으면 그대로 기절해버릴 것 같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레녹이 이를 악물고 담벼락에 등을 기대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연초를 꺼내물고 불을 붙인다· 연기를 폐 끝까지 빨아들인 뒤 내뱉었다·
순식간에 필터 끝까지 타들어 간 연초를 문 채 하늘로 시선을 들어 올린 순간·
“···저건·”
쿠르르르릉!!!!
쿤다라의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안개들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외겁도시 쿤다라를 둘러싼 안개의 우주·
그 무수한 안개가 엄청난 속도로 쿤다라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레녹이 그 이해할 수 없는 풍경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순간·
“쿤다라가 장막의 이면을 이탈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골목 저편에서부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레온 그노시스 님께 문제가 생겼다· 외겁 계획은 중단!! 중단이다!!!”
“이대로라면 쿤다라는 중앙전선 한복판에 추락한다· 막아야 해!!!”
“움직일 수 있는 장생종은 전원 방공호로 이동해라!!”
“팔대용왕 전원이 움직이셨다· 견뢰라는 단명종을 찾아· 지금 당장 추살해야 한다!!!”
“····”
쿤다라가 장막의 이면을 이탈해 중앙에 떨어진다·
팔대용왕이 레녹을 추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레녹이 굳은 표정으로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숨을 멈춘 그 순간·
귓가에서 조용한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
낡은 담벼락 위에 흑발의 소녀가 걸터앉은 채 레녹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빛내면서 레녹을 응시하던 흡혈귀가 말했다·
“말레온이 승천자가 되었다면 최악의 사태만큼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포혈공·”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담벼락에서 뛰어내렸다·
사방에서 가까워지는 경고음과 고함소리· 레녹을 찾기 위해 날뛰는 장생종들의 사나운 기척·
하지만 포혈공은 그 와중에도 태연하게 옷자락을 정돈하며 물었다·
“우리· 이렇게 만나는 거 벌써 세 번째인 거 알지?”
“····”
“그리고 이 세계가 그렇듯이 이번이 마지막이 되어야 할 거야·”
촤악!!
피 웅덩이 속에서 자신의 궁전으로 향하는 문을 연 그녀가 손짓했다·
“따라와· 이 외겁도시의 결말을 네 손으로 직접 지어줄 생각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