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8화
9레벨(16)
주변의 광자를 긁어모아 열량으로 변환해 쏘아내는 광입자 집속술식·
술식을 영창해 받아치거나 막아낼 틈도 없었다·
말레온의 멱살을 쥔 채로 에낙필의 다섯 손가락을 꺼내 든 순간·
뻐어어어어엉!!!
천사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창백한 광선이 레녹의 뒤에 닫힌 격벽을 꿰뚫었다·
[아아아아악!!]
[그오오오오···!!]
직후 터져 나온 인어와 메기의 끔찍한 비명소리·
장생종 미라는 물론이고 침식영역의 힘에도 버티던 격벽을 한방에 관통하는 공능이다·
그 빛에 잠깐이라도 꿰인 순간 소멸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몇 미터 옆으로 이동하여 겨우 광선을 피해낸 레녹이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천사의 피를 이어받은 진혈종인가···!!’
이 여자 본인이 두 번째 세계에서 직접 건너온 천사 본인은 아니겠지·
그런 ‘선택’이 가능한 존재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이 진혈종이 두 번째 세계에 존재했던 천사의 ‘진혈’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레녹에게 교주를 비춰보고 다시 그를 통해 원인 모를 증오를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왜 버렸어?]
말라붙은 몸을 삐걱대면서 레녹에게 다가오는 진혈종의 모습·
하지만 레녹은 무의미한 문답에 대꾸하는 대신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말레온의 심신이 한계에 도달해 쓰러지기 직전까지 온 상황·
레녹이 이 자리에서 천사와 싸워서 길을 여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마력의 소모가 엄청난 수준이라 레녹조차 마력 고갈을 걱정해야 할 수준이라는 것·
당장 구겁에서 버티기 위해 결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활활 타들어 가고 있다·
지금 교전을 시작하면 바다처럼 방대한 레녹의 마력량도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낼 터·
그럼에도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찰칵·
품 안에서 황금빛의 약병을 꺼내든 레녹의 표정이 차분하게 변했다·
‘엘릭서를 사용해 마력량을 고정하고 4초 안에 승기를 잡는다·’
아리스가 선물한 엘릭서 희석액으로 마력량을 ‘고정’할 수 있는 시간은 대략 4초 미만·
레녹이 구겁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전력으로 술식을 운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한번에 찍어누르고 전투불능으로 만들어야 해· 그게 아니면 구겁 최심부까지 마력을 남겨둘 수 없어·’
확실하게 승기를 잡거나 천사를 전투불능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레녹의 마력이 고갈되기 시작할 터·
말레온이 혼절 직전에 이른 지금 일이 그렇게 된다면 구겁 내부에서 생존을 장담할 수 없어진다·
침식률의 수치를 생각하면 아마 눈앞의 천사가 마지막 진혈종·
천사가 막고 있는 격벽 뒤쪽이 바로 목적지인 구겁 최심부겠지·
엘릭서를 복용하고 술식을 전력으로 운용해 눈앞의 천사를 압살하고 격벽을 넘는다·
해야 할 일이 정해졌다면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복잡한 상황과 감정을 뒤로 밀어낸 레녹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하고·
천사의 손끝이 꿈틀거리기도 전에 엘릭서 약병을 입에 갖다 댄 그 순간·
턱!!
비늘로 뒤덮인 두터운 손이 레녹의 어깨를 짚고 몸을 일으켜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말레온?”
쿠구구구!!!
전신이 벌겋게 그을린 채 체액과 피로 범벅이 된 용인이 레녹의 어깨를 짚고 걸어 나왔다·
그 눈은 아직 환각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처럼 흐릿하고 피로에 절여진 몸이 미약하게 경련한다·
하지만 말레온이 휘두르는 마력은 여전히 레녹이 아니라 눈앞의 천사를 향하고 있었다·
“···약속 했었지····”
말레온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무수한 창립자들의 사념·
그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들이마시면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는 고통 속에서·
말레온은 아직도 처음 그대로의 자신이고자 버티고 있었다·
“자네를 구겁의 끝까지····”
“너····”
진작에 한계를 넘었음에도 레녹을 구겁의 끝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고 있다·
9레벨에 도달하기 전에 품었던 결의와 도달하고 난 이후 바랬던 보은을 기준으로 삼아 자아를 이어붙인다·
승천자답다고 할 수 없는 그러나 승천자이기에 가능한 그 초월적인 의지력에 레녹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찰나·
“출발하지 반·”
흔들리던 말레온의 눈동자가 선명한 초점을 되찾았다·
“약속대로 자네를 구겁의 끝까지 데려다주겠네·”
원시마법(原始魔法) : 성련팔극식(星聯捌極式)
파앗!!
말레온이 양손을 앞으로 뻗는 것과 동시에 별을 휘두르는 원시마법이 다시 한번 이 자리에 펼쳐진다·
거대한 용인의 양 손에 쥐여진 아름다운 두갈래 별빛·
하지만 말레온이 사용하는 것은 그가 숨 쉬듯이 휘두르던 기존의 술식이 아니었다·
9레벨에 도달함으로써 새롭게 지평을 넓히고 감각을 잡아가며 얻은 초월적인 영감·
자신의 존재와 심상을 담아 휘두르는 아홉번째 외법·
구종(九種) – 외법(外法)
[창성순환(昌星巡環)]
말레온이 피워올린 두갈래 별빛이 허공에서 서로를 가리듯이 겹쳐진다·
일식과 월식· 두 별이 서로를 가리면서 하늘에 그리는 기적을 동시에 현실에 현현한 순간·
[일월성신(日月星辰)]
터엉!!
[침식률 93%] 라 써 있던 다음 격벽이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소멸했다·
격벽이었던 금속 파편이 떨어지면서 부서지고 사방으로 장난감처럼 튕겨나간다·
철퍽!
동시에 오른쪽 몸통만이 남은 천사의 시체가 끈적한 체액을 흩뿌리며 주저앉았다·
[···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얼굴 반쪽만이 남은 천사가 단말마를 내뱉었다·
두 별이 하나의 시공에 겹쳐지며 가려진 순간 반물질 현상이 발생하며 시공간이 소멸했다·
천사는 술식을 보자마자 회피를 시도했으나 좌표를 지정하는 외법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던 것·
“···!!!!”
말레온 그노시스가 사용하는 성련팔극식의 9레벨 주문·
그 진가를 바로 뒤에서 지켜본 레녹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던 찰나·
“처음 시도해 보는 술식인데 한번에 성공해서 다행이군·”
말레온이 웃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걸을 수가 없을 것 같네· 부축해 줄 수 있겠나?”
“···말레온·”
어째서 천사의 진혈종이 이곳에 남아있던 것일까·
구세계의 진혈종이 이곳에서 죽어간 것을 교주는 알고 있었을까·
원망하던 그 목소리 방향을 잃은 증오마저도 그가 우연으로서 안배한 결과일까·
알고 싶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무엇하나 알 수 없다·
하지만 저 격벽을 넘어서면 보이게 될지도 모르지·
지금까지 지나온 그 어떤 격벽보다 거대하면서도 화려하고 또 음습하게 느껴지는 흑문(黑門)·
“이곳이 마지막일세· 저 격벽을 넘으면 끝이야·”
레녹을 내려다보면서 말레온이 조용히 말했다·
“구겁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확인하러 가자고·”
* * *
구겁의 최심부를 막고 있는 격벽을 부순 뒤·
말레온의 말대로 더 이상 격벽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길게 이어진 광활한 유리복도 위로 침식률의 수치가 하나씩 써 있었을 뿐·
[침식률 94%]
날카로운 이명과 함께 귀가 멀었다·
[침식률 95%]
손끝의 감각이 마비되면서 천천히 사라져 간다·
[침식률 97%]
다리가 없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침식률 98%]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침식률 99%]
전신의 감각 중에서 멀쩡히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시각만이 흐릿하게 일그러지며 복도의 풍경을 비추고 있을 뿐·
끼이이이···!!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천천히 붕괴되어 가는 듯한 파열음이 들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이 아찔한 감각·
방사능의 바다 속을 무한하게 헤엄치며 자멸하는 듯한-
[침식률 100%]
“말레온·”
“····”
대답은 없었다·
아니 대답했음에도 레녹에게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말레온 역시 입을 움직이는 감각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말레온이 부축을 받고 있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구겁에서 버티기 위해 만든 결계도 말레온을 위해 남겨두었던 마력사도·
모든 것이 무너지는 풍경 속에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걷는다·
알고 있다·
원래라면 침식률 100%에 도달한 순간 레녹 역시 지금까지 죽인 미라와 같은 신세가 되었어야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레녹을 떠받치는 대상지정저항과 술식면역을 비롯한 여러 재능이·
그의 기원이자 기반이 되는 페널티가 그가 변해버리는 것을 멈춰 세우고 있음을·
레녹에게 이런 식의 ‘변절’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끼이이···!!
물질이 존재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
오직 9레벨의 승천자에게만 허락되는 저편·
이 공간을 만들고 설계했던 창립자들조차 버티지 못했던 사상의 지평·
한 발 더· 다시 한 발 더·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레녹을 이루는 기원의 저편에서 마지막으로 한 발을 더 내디딘 그 순간·
[침식률 101%]
화아아악!!!
모든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레녹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당탕탕!!!
머리부터 넘어진 레녹의 얼굴이 그대로 땅에 처박혀 나뒹굴었다·
바닥을 주르르 미끄러지면서 피부가 화끈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아 하아···!!!!”
무심코 손을 들어서 얼굴을 만져볼 정도로 감각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섬뜩함·
한참을 그렇게 숨을 내쉰 뒤에야 레녹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쿨럭·”
가볍게 기침을 뱉어낸 레녹이 힘겹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침식률이 한계를 넘어선 시점에서 오히려 원래대로 돌아온 감각·
처음부터 이래야 했다는 것처럼 한계 끝에서 반대로 멀쩡해진 심신·
어째서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구겁의 끝· 외해 바깥에 만들어진 물리적 공간·
이 광대하고 투명한 우주정거장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최심부 십관(十管)·
그 정체가 무엇인지·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카이세의 결말이란 무엇인지·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흐릿한 눈을 비비고 시선을 들어 올린 순간·
휘오오오···!!
적막한 공터 위에 핏물이 담긴 대야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대야 위로 늘어진 대롱에서 핏방울이 똑똑 떨어지면서 혈액을 보충했다·
대롱의 반대편은 어딘가로 아주 길게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레녹은 이내 대롱의 개수가 정확하게 열 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십관(十管)·”
열 개의 대롱을 언급하는 그 말의 의미·
포혈공에게 처음 이야기를 듣고 쿤다라를 여행하는 내내 찾아 헤매었던 그 장소가·
그 장소로 향하는 열쇠가 지금 여기에 있다·
레녹이 그 사실을 멍하니 되새기다가 뒤늦게 무언가를 생각해 내고 고개를 돌렸다·
“말레온·”
레녹을 구겁의 끝까지 데려다준 승천자가 아직 곁에 함께하고 있었다·
핏물을 줄줄 흘리면서 레녹의 몇걸음 뒤켠에 쓰러진 용머리 거인의 모습·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세운 레녹이 황급히 쓰러진 말레온에게 다가갔다·
“말레온· 도착했다· 이곳이 십관의 입구야·”
“····”
말레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호흡조차 하지 않은 채 죽은 듯이 쓰러진 채 어떠한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을 뿐·
남은 불꽃을 모두 태우고 쓰러진 것처럼 그의 마력과 의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을 깨달은 레녹이 힘겹게 품 안을 뒤적거리면서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말레온· 정신 차려!”
어떤 약을 써야 여기서 말레온을 도울 수 있을까·
아니 척수신경자극제 같은 극약을 사용한 시점에서 말레온에게 통하는 약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머릿속으로는 최악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가망이 없다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면서도 레녹은 약을 찾아 헤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멈춰버린 말레온의 심장을 깨울 수 있는 물건이라면 접합술주의 생명권역에서 구한-
“반····”
그 순간 말레온이 레녹의 말에 대답했다·
“머리가 아파서 그러니 조금만 작게 말해줄 수 있겠나?”
“···살아 있는게 맞긴 한 건가?”
마력감지를 통해 확인해 보면 말레온의 심장은 여전히 멈춰 있는 상황·
그의 의지나 의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도 말레온은 의식을 되찾고 레녹과 대화하고 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레녹이 주저하던 찰나 말레온이 천천히 한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후우···”
쿠웅···!!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 말레온이 근처 기둥에 기대앉으면서 고개를 젖혔다·
“용종은 심장이 멈춰도 혈액순환을 이어나갈 수 있네· 인간과는 달리 죽음의 신호는 아닌 셈이지·”
“····”
“난 괜찮아· 적어도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낫군·”
천천히 자신의 어깨를 주무른 말레온이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구겁을 지나올때보다는 나아졌네· 굳이 따지자면 훨씬··· 차분해진 기분이군·”
“차분해진 기분이라고?”
“아주 부드러운 선율을 듣고 마음이 안정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말레온이 눈을 감고 대답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감정이 실제로 내 심신을 안정시키고 있네·”
“····”
“모든 것이 차분하고 선명하게 느껴져· 지금이라면 어떠한 일이든 명쾌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군·”
눈을 감은 채 컨디션을 점검하던 말레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움직이지· 시간이 남아 있을 때 모든 것을 끝내야 할 테니·”
“시간이 남아 있다는 말은····”
“지금 내 기분과 이 감정이 촛불이 꺼지기 직전의 기적일지도 모르니까·”
말레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십관 앞에 도착했지만 아직 그 안에 들어온 것은 아니야· 자네도 알고 있겠지?”
“····”
한계까지 몰린 채 환각을 보면서까지 미쳐가던 말레온의 정신이 멀쩡하게 돌아온 기적·
말레온은 이 순간 자체가 회광반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레녹이 침묵하는 사이 말레온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피가 떨어지는 대야 앞에 섰다·
“이 대롱과 대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네·”
대야 안에 떨어지는 피를 바라보던 말레온이 말했다·
“열 명의 진혈종이 함께 모여 맺었던 피의 계약· 결말의 끝까지 이 시공을 영원토록 보존할 것을 결의했던 결과물이지·”
“····”
“하나 그들 중 하나가 약속을 어기고 진혈을 빼돌리면서 이 계약은 의미가 없어져 버렸어·”
말레온이 레녹을 돌아보았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겠지?”
“···니백스 오로시아의 진혈·”
레녹이 대답했다·
“그녀가 승천의 비약을 만들겠다고 빼돌린 피 때문이겠지·”
“그렇네·”
말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의 계약을 다시 잇고 십관을 재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니백스의 진혈이 필요해· 그것이 구겁을 작동시켜 쿤다라를 움직이는 첫걸음이 되겠지·”
“····”
“니백스의 진혈을 이 대야 안에 넣어주겠나?”
침묵하는 레녹을 보며 말레온이 물었다·
어느새 레녹의 손안에는 푸른 피가 담긴 작은 약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편람에 의해 강제로 위계가 하락당한 니백스가 억지로 짜낸 스스로의 진혈·
대야 앞으로 다가온 레녹이 약병을 열고 천천히 그것을 흘려 넣은 순간·
쏴아악···!!
담겨 있던 피가 순식간에 퍼져나가면서 정교한 혈법진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야 안에 아주 정교한 그림을 그리듯이 열 개의 자물쇠를 엮어 만든 혈법진이 그려졌다·
남은 피가 중력을 거스르고 떠올라 대롱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끼리리릭-
피를 머금은 열 개의 대롱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어지면서 내려선 그 순간·
촤아악!!!
대야 안에서 솟구친 핏물이 레녹의 눈앞에 거대한 피의 문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포혈공이 보여준 적이 있던 혈마법을 사용해 만들어내는 피의 문·
최고위 장생종의 진혈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진 공간균열·
그것을 깨달은 레녹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
이 앞에 카이세 바쥬르가 있다·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된 뒤로부터 쭉 쫓아왔던 그의 결말이·
폐쇄구역에서 과거의 카이세와 함께한 이후 공감해 왔던 그의 두려움이·
세계를 바꾸지 못하고 실패한 카이세의 말로가 저 너머에 있다·
레녹보다 먼저 구원을 꿈꾸었던 구도자·
프로젝트의 실패와 함께 끝내 변해버린 변절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되새기고 쫓아왔던 그 이름에·
실패한 뒤에도 의미를 다하지 못했던 그 계획에 이제서야 종지부를 찍어줄 수 있는 걸까·
“소리가 들려····”
말레온이 눈을 감은 채 속삭였다·
“저 안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느껴지네····”
“····”
“저 안에 있어· 느껴지는가?”
“···그래·”
선율인지는 모르겠지만 레녹 역시 직감하고 있다·
분명 저 안에 있다·
그것이 레녹이 바라던 결말인지 혹은 원하지 않던 실패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일 뿐·
그렇기에 레녹 역시 그토록 긴 여정을 거쳐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았던가·
종잡을 수 없이 방황하고 고민하던 그 모든 시간에 의미를 줄 수 있다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레녹의 발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저벅·
끝이 보이지 않는 진혈의 문을 넘어 단번에 공간균열의 너머로 들어선다·
구겁의 최심부· 외겁도시 쿤다라의 가장 은밀하고 위험한 심처·
화악!!
차갑고 뜨거운 공기· 축축하면서도 메마른 습도·
양극단의 모순이 혼재하는 공허한 우주가 훤히 비춰 보이는 우주정거장의 끝·
탐사선처럼 툭 튀어나온 돌출부의 안에 서 있었다·
벽면을 타고 늘어진 열 개의 대롱이 마치 혈관처럼 맥동하면서 피를 공급하고·
그렇게 흘러나온 피가 한데 모여서 무언가에게 진혈을 불어넣는다·
꿀럭 꿀럭···!!!
열 개의 대롱이 혈관처럼 복잡하게 얽힌 옥좌·
그 옥좌 위에 양팔을 걸친 채로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과 어딘가 눈에 익은 나른한 분위기를 보자마자 확신했다·
기억하던 것과 체격은 조금 다르지만 틀림없다·
폐쇄구역에서 과거의 환영으로만 마주했던 그다·
수십 년의 실패 끝에 현실에 버려진 카이세 바쥬르 본인이었다·
단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는데 이렇게나 친숙하다·
여전히 그가 레녹의 안에 남긴 대답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 얼굴조차 눈에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시선을 들어 올리면 기억하는 그 곱슬머리조차-
“···아?”
레녹이 멍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얼굴이 없었다·
대신 날카로운 검흔이 목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반듯하게 새겨져 있었을 뿐·
마치 누군가에 의해 목 위로부터 강제로 잘려나간 듯한 옥좌의 풍경·
카이세를 위한 묘지가 아니라 처형대 앞에 서 있는 듯한 기괴한 섬뜩함·
그제서야 레녹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옥좌 위에 앉아 있는 카이세 바쥬르의 시체에는 머리가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