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3화
9레벨(11)
우우우웅!!!
외해의 어둠이 투명하게 비치는 유리천장 위에서 별빛이 격렬하게 회전한다·
공동에 자욱하게 깔린 어둠 위로 무수한 유성우가 폭격처럼 쏟아져 내렸다·
[키이익!!!]
콰과과과과!!
사선으로 떨어지는 은색의 별빛이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며 복도를 찢어발긴다·
전방을 막고 있는 두꺼운 격벽이 종잇장처럼 찢어지면서 증발했다·
아홉 번째 시련을 넘어 외해 바깥에 존재하는 구겁(九劫)·
그중에서도 격벽으로 격리된 외곽 섹터를 탐색하기 시작한 지 30분째·
우주정거장처럼 설계된 구겁 외곽에는 말레온의 설명대로 말라죽은 장생종들이 배회하고 있었지만·
정작 레녹은 구겁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제대로 된 교전에 단 한순간도 참가하지 못했다·
죽지 못하고 배회하는 것들이 일행을 보고 달려들기도 전에 말레온의 원시마법이 발동·
[으어···!!]
[크에에엑!!]
쿠구구구구구!!!
말레온이 손짓할 때마다 거대한 별빛이 회전하고 사방에서 배회하던 장생종들이 괴성과 함께 쓸려 나간다·
떨어지는 유성우에 저항도 못 하고 무기력하게 별빛의 바다 속에서 소멸한다·
[숱한 마경을 돌아다녔으나 이런 식의 길 안내는 오랜만에 받아보는구나·]
올리비에라조차 그 압도적인 폭격의 풍경에 기가 차다는 듯 냉소했을 뿐·
[네놈이 잡은 동아줄이 생각보다 훨씬 쓸만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겠군·]
“아까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단순하게 술식의 성능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인걸·”
그녀의 옆에서 말레온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레녹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용종이 사용하는 원시마법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로 편의적이어도 되는 건가?”
말레온 그노시스가 사용하는 원시마법 성련팔극식·
용종의 고유마력을 열원으로 가공하여 ‘별’로서 탄생시키는 마법이자 외법의 극치·
피격지점을 증발시킬 정도로 강렬한 열원을 쉽게 만들어낸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런 ‘별’을 술자의 위치와는 관계없이 어느 좌표에나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본래 술식이란 주문과 수인 영창이라는 일련의 공정을 거쳐 완성되는 것·
술식발동 과정에서 영창의 주체인 술자를 고려하지 않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술자의 머리 위에서 발동· 전방 몇 미터 앞에서 발동· 영창 후 몇 초 간격을 두고 발동· 이런 식으로 조건을 거는 것은 가능하지만·
말레온의 원시마법처럼 술식발동의 위치좌표를 술자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는 술식은 레녹으로서도 사실상 처음 보는 것·
그런 특성을 기아스로 특별하게 조정해서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술식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특성이라니·
축복받은 용종의 원시마법이라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으음 자네 같은 마법사에게 그런 칭찬을 듣자니 낯이 뜨거워지는군·”
앞장서서 구겁의 외곽 복도를 배회하는 것들을 청소하던 말레온이 대답했다·
손을 대충 휘저어 앞에서 달려드는 장생종의 시체를 쓸어버리며 말레온이 말했다·
“하지만 원시마법은 장점만 가득한 술식은 아닐세· 고대의 힘이기에 연비가 나쁜 데다 궤도에 오르기 전에는 컨트롤도 어렵지·”
퍼버버벙!!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별빛의 폭발에 장생종의 시체가 장난감처럼 날아간다·
“술식의 위치좌표를 자유롭게 지정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출력이 너무 강한 탓에 좌표를 지정하고 나면 변경도 어려워·”
“····”
콰아아아아!!!!
지상을 휩쓰는 별빛의 파도에 떨어져나간 가죽과 팔다리가 새카맣게 불타 증발했다·
“강렬하면서도 신중하게· 압도적이면서도 둔중하게· 매 판단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전장을 뒤덮어나가는 걸세·”
말레온이 레녹을 돌아보며 웃었다·
“자네와 내가 두는 오백로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
말레온의 손짓 한 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격벽이 박살 나며 순식간에 길을 열었다·
원시마법에 대한 약점을 설파하며 하는 일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손쉬운 학살·
“자네 같은 대술사라면 조금만 눈여겨봐도 그 한계가 눈에 보일걸세·”
말레온이 웃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술식을 설명하고 약점을 알려주면서도 말레온은 아무런 거리낌조차 없어 보였다·
“보고에 도착하면 성련팔극식의 구결을 알려주지· 자네라면 술식의 요체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 금방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걸세·”
“···원시마법의 구결을 알려주겠다고?”
“이미 자네에게 나의 탄생과 죽음을 한차례 맡기고 운명을 바꾸었거늘·”
말레온이 그렇게 말하면서 만족스럽게 턱을 쓰다듬었다·
“이제 와서 내 술식의 요체를 공개하는 정도야 거리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
술식만큼이나 그것을 사용하는 술자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9레벨의 승천자가 휘두르는 원시마법은 신의 권능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느껴진다·
저열한 연비· 막대한 마력소모· 조정이 힘들다는 한계는 승천자라는 압도적인 개념 앞에서는 단점조차 될 수 없으니·
말레온 본인의 성정이 온건한 편이기 때문인지 그가 사용하는 술식의 압도적인 폭력성이 더욱 위압적으로 느껴진다·
쿤다라의 다른 장생종들이 말레온을 그렇게 잘 따른 것은 어쩌면 그의 인품 때문만이 아니었을지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갈수록 술식출력이 크게 떨어지는군· 격벽의 강도가 너무 높아서 생각보다 힘을 더 써야 했어·”
하지만 말레온은 구겁 외곽을 초토화시킨 자신의 솜씨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가능한 구겁 내부 공간을 훼손하지 않고 원전대로 보존하고 싶었는데 어렵게 됐네·”
“애초에 구겁의 공간이 외해 바깥에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대체 무슨 재료를 썼길래 바다 저편에서도 멀쩡하게 버티고 있는 거지?”
세계의 경계선 바깥에 존재하는 암흑의 바다는 현실의 물리법칙이 통하지 않는 공간·
평범한 물질 따위는 외해 바깥에서 그 형상을 멀쩡하게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기이하게 변질되거나 무기물이 생명을 얻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소실돼도 이상하지 않은 마경·
하지만 이 거대한 유리공동은 외해 바깥에서도 수십 년 넘게 멀쩡히 그 형상을 유지하며 버티고 있다·
구겁을 건조하는데 사용한 자재 자체가 그만큼 특별한 것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기적·
그리고 말레온의 대답은 그런 레녹의 생각조차 뛰어넘고 있었다·
“그렇겠지· 구겁의 내부 시설 대부분은 고대 장생종들의 신체 부위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구겁의 시설 전체가 장생종의 유해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건가·”
“뼈를 깎아서 기둥을 세우고 가죽을 떼어 두른 뒤 피를 발랐지·”
말레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로 금기에 가까워지지 않고서는 외해 바깥에서 버틸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을 구축할 수 없었으니까·”
“····”
“창립자들이 죽음으로 이곳을 완성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야· 그들은 말 그대로 피와 살을 내주어 구겁을 완성하고 잠든 것일세·”
장생종 중에서도 수백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괴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죽은 장생종의 유해를 사용했다면 이렇게 거대한 시설 구조물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레녹은 그 말을 듣자마자 조금 다른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구겁의 시공 전체가 장생종의 유해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라면·
그건 애초에 이 공간 자체가 장생종의 유해를 재료로 삼은 아티팩트나 다름없다는 뜻이 아닐까·
“아 도착했군· 문헌에 따르면 아마 이곳이 틀림없을 걸세·”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지워 없애버리던 말레온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구겁 외곽 구역 어딘가에 존재하는 창립자들의 지보를 보관해 둔 보고· 이곳이군·”
말레온의 유성우에 무너지던 다른 관문과는 달리 복도 한쪽 외벽을 통째로 가로막은 거대한 장벽·
장벽 위로 박혀 있는 다섯 개의 보석이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오망성을 그리고 있다·
[크르르르···!!]
장벽 앞에서 기다렸다는 듯 일어서서 다가오는 다섯 구의 거대한 시체·
도마뱀과 여우 개구리를 비롯해 원형을 알 수 없는 종족이 둘·
하지만 말레온은 멀리서 다가오는 장생종들의 시체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가 오늘 자네에게 받은 것은 우리의 약속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보답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축복이었지·”
“····”
“그러니 나는 오늘 승천자의 이름을 빌려 구겁의 보고에서 원하는 비보를 선물하려 하네·”
“승급 의식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너 스스로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말레온의 뒤에서 다가오는 장생종들의 주검을 보며 레녹이 말했다·
“내가 한 일은 의식이 실패하지 않도록 법진을 조정하는 것이었고· 성공의 원인에 집착할 필요는 없어·”
“나는 자네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한한 직관이자 영감의 총체를 보았어·”
말레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안에서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지· 그건 내게 있어서는 천금을 주고서도 얻지 못할 기연이나 마찬가지였네·”
파밧!!
말레온이 솥뚜껑처럼 두꺼운 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린 순간 장생종들의 시체가 동시에 달려든다·
이지와 지성을 잃은 시체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말레온의 뒤를 노리고 가속한 순간·
다섯 개의 손가락을 편 말레온이 그대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부아아아앙!!!
그 직후 말레온을 향해 달려든 장생종들의 눈코입 사이로 강렬한 은빛의 광채가 터져 나왔다·
그것이 장생종의 시체가 발하는 마력이 아니라 말레온이 불어넣은 별빛임을 깨달은 그 순간·
퍼버버버벙!!
장생종의 머리 안쪽에서 다섯 개의 별이 폭발하면서 유리공동을 눈부시게 밝혔다·
직후 말레온이 어떤 식으로 저 시체들을 처리한 것인지 깨달은 레녹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저들의 체내에서 술식을 발동시켜서 터트려 버린 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천재성의 편린을 보고 그것을 흉내 내면서 손에 넣은 새로운 감각·”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린 말레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마력과 술식을 조작하는 데 있어서 중간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결론에 이르는 직관·”
“····”
“자네에 비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것을 흉내 내어 술식을 조금 더 융퉁성 있게 다룰 수 있게 된 것이지·”
팔짱을 낀 채로 턱을 들어 올린 말레온이 말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자네를 보고 배웠다고 자랑해도 괜찮지 않겠나?”
“····”
레녹의 재능을 보고 자극을 받은 것으로 원시마법을 상대의 체내에서 강제로 발동시킬 정도로 조작능력이 향상된 건가·
원시마법 성련팔극식의 술식발동 위치좌표 강제지정·
단순히 폭격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달려드는 상대의 머리를 노려서 터트릴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술식조작·
승천자가 되면서 손에 넣은 직관인가 아니면 순전히 말레온 본인의 뛰어난 재능 덕분인가·
어느 쪽이든 말레온이 자신이 받은 것들을 레녹에게 돌려주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였다·
“이쪽일세·”
덜컥!!
자신이 터트린 장생종들의 시체를 건너뛴 말레온이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장벽 앞에 선다·
다섯 개의 오망성이 거칠게 번뜩이는 장벽 앞에 선 승천자가 굳게 닫힌 장벽의 균열 사이로 손을 맞댄 순간·
나직한 진동과 함께 말레온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장벽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활짝 열린 장벽의 균열 너머에서 비치는 눈이 아릴 만큼 찬란한 보석의 광채·
그제서야 말레온이 열어젖힌 창고 안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깨달은 레녹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이건····”
눈에 보이는 모든 공간이 황금과 보석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원을 알 수 없는 금화· 보석이 박힌 왕관· 팔찌와 목걸이를 비롯해 호화스러운 디자인의 아티팩트들·
그 모든 금은보화 안에 마력이 잔뜩 응어리진 채 단단하게 응축되어 있었다·
토르번 전쟁마탑에서 보았던 서고나 창고와는 또 다른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운 보고·
이제껏 침묵하던 올리비에라조차 그 호화스러운 풍경에는 흥미가 이는지 베일 너머 마안으로 보고 안쪽을 응시한다·
“문헌에 따르면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격을 얻고 구겁에 들어온 존재를 위해 안배된 것이라 하더군·”
말레온이 그렇게 말하며 수많은 금은보화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사방에 쌓인 금화가 쩔렁쩔렁 소리를 내며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말레온은 주변의 보석이나 황금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레녹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모든 것이 내 소유라면 내가 이것을 타인에게 조금 양도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나?”
“····”
“따라오게·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니까·”
황금의 산을 넘어 보고 깊은 곳으로 들어선다·
눈이 아플 만큼 화려했던 보석의 광채가 사라지고 그 너머에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선반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영약이나 새빨간 피가 담긴 시험관· 혹은 충혈된 눈알이나 중독된 눈알의 형상·
말레온이 지나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들의 이름을 읽었다·
“백은의 피· 철갑룡의 숨결· 덴드로즈의 체액· 유비아의 눈동자·”
“····”
“모두 수백 년 동안 맥을 이어온 장생종의 신체기관 일부를 떼어 만든 유물급 보구이지·”
선반에 보관되어 있는 모든 것들이 장생종들의 신체 일부를 떼어 만든 아티팩트·
레녹이 과거 올버의 공방에서 보았던 것의 상위호환에 가까운 장비들이 이렇게나 쌓여 있다·
[···유비아의 눈동자라·]
말레온이 한 말에 처음으로 반응한 올리비에라가 시선을 돌렸다·
[태어나면서부터 성위급 선천이능을 갖고 태어나는 장생종· 그 중 마안을 각성한 존재의 눈을 채취한 것이냐·]
“강제로 한 일은 아니었네· 마안보유자 본인이 원해서 한 일이었지·”
말레온이 대답했다·
“그의 마안은 사용할 때마다 그가 가장 원하지 않는 환각을 보여주는 반동을 갖고 있었거든·”
[····]
“미치기 직전에야 스스로의 이능을 포기하고 기부함으로써 간신히 광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레녹은 그녀의 시선이 그 뒤로도 유비아의 눈동자에 머무는 것을 느꼈다·
올리비에라는 연구실에 온갖 희귀한 마안을 수집해 두었으니 장생종의 마안을 보고 수집욕이 동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원하는 장비나 유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주게· 현재 쿤다라에서 본인보다 높은 권한의 보유자는 존재하지 않으니·”
말레온이 가슴을 두들기며 웃었다·
“지금이라면 복잡한 반출 절차를 무시하고 자네들에게 선물을 쥐여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
“장생종의 신체기관을 가공해 만든 아티팩트가 높은 가치를 지녔다는 건 알고 있다·”
레녹이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같은 술사에게 있어 어지간한 아티팩트의 능력은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
말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선물하려는 것은 단순히 아티팩트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는 능력을 지닌 비보일세·”
“아티팩트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레녹의 말에 말레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빽빽하게 들어찬 선반을 지나 보고의 가장 깊숙한 끝으로 향했을 뿐·
화려한 금은보화도 장생종의 신체 부위를 가공해 만든 장비들도 사라지고·
복잡한 선반 사이를 넘어 탁 트인 넓은 공터 쪽으로 걸어 나온 순간·
“····”
공터의 중앙에 놓여 있는 거대한 두개골을 본 레녹이 걸음을 멈췄다·
레녹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용의 머리뼈·
몸을 잃어버린 그것이 머리만 남아서 공터 중앙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두개골을 이루는 뼈 자체가 은은한 빛을 발하는 듯한 기이한 풍경·
어딘가 눈에 익은 보석의 광채에서 기시감을 느낀 레녹이 말레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설마····”
“용종 중에서도 열 세대에 한 번 태어난다는 보석룡· 그중에서도 수 세기 전에 존재했던 금강룡(金剛龍)의 유골일세·”
말레온이 말했다·
“뼈 전체가 금강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엄청난 내구성과 경도를 지녔지만 이 유골의 진가는 그것이 아니지·”
“····”
“수백 년 전의 신비· 보석룡의 머리뼈를 가공해서 만들어진 유물급 아티팩트·”
천천히 용골(龍骨)의 앞으로 다가선 말레온이 그것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것을 보유한 존재는 일시적으로 용화(龍化)의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네·”
“···용화의 능력이라고?”
“말 그대로 사용자 본인이 잠깐이나마 최상위 장생종으로 변할 수 있게 되는 셈이지·”
그렇게 말한 말레온이 레녹을 향해 돌아서며 씩 웃었다·
“자네 같은 마법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선물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저 두개골을 사용하면 아티팩트의 소유주가 잠깐이나마 용으로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레녹이 일전에 상대했던 아나테마의 용술식과도 유사한 면모가 있는 아티팩트·
“신체변형의 우려는 덜어두어도 좋아· 그것보다는 훨씬 세련된 방식으로 술자를 보조하고 용의 권능을 부여하지·”
말레온이 설명했다·
“특정한 동력을 불어넣으면 두개골을 중심으로 피육이 자라나서 사용자를 감싸 안고 대뇌 부위에서 조작권한을-”
“이 용골이 구겁의 보고 안에서 가장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은 이해했다·”
말레온의 말을 끊은 레녹이 말했다·
“하지만 이런 물건은 누가 선물해 준다고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장비가 아닐 텐데·”
“으음?”
“장생종의 신체부위를 가공한 장비를 사용하려면 여의주를 동력으로 삼아야 하지·”
레녹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게다가 이 금강룡의 유골은 네 말대로라면 틀림없이 진혈을 지닌 장생종이었을 거다·”
“····”
“평범한 여의주도 아니고 진혈종의 것을 사용해야 이 유해를 사용할 수 있을 텐데·”
말레온이 레녹에게 직접 설명하면서 추천할 정도라면 용화의 능력이란 실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 힘이겠지·
하지만 레녹은 이 유골이 무려 진혈 장생종의 시체를 가공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진혈종의 유해로 만든 보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동력으로 진혈종의 여의주가 필요할 터·
하지만 구겁에 도착한 지금 어디에서 진혈종의 생명력을 담은 여의주를 손에 넣는다는 말인가·
동력원이 없는 이상 사용할 방법이 없는 애물단지나 마찬가지·
말레온이 말한 용화의 공능 자체에는 흥미가 있지만 애초에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게·”
하지만 말레온은 레녹의 말을 듣고 난 뒤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펼치고 그 위로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을 뿐·
“처음부터 자네에게 줄 여의주는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뭐?”
우우우우웅···!!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감은 승천자가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려 휘두른다·
거대한 보고 사방에서 눈부신 은빛의 별무리가 떠올라서 강렬하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존재만으로 거칠게 타오르면서 당장이라도 보고를 박살 낼 것처럼 번뜩이는 별빛·
하지만 말레온은 자신이 만든 별들이 보고를 불태우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자신의 의념과 심상을 움직여가면서 수십개의 별무리가 한 곳에 모여들도록 조정한다·
그 손짓에 따라 별무리가 말레온의 손안에 급격하게 응축되면서 작은 구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이잉!!!
별빛이 충돌하면서 융합되고 귀청이 찢어질 것처럼 날카로운 공명음이 터져 나온다·
승천자로 완성된 직후 외해의 어둠을 씻어내기 위해 술식을 사용했던 그때처럼·
하지만 모든 것을 융해시키는 초신성의 영창은 그곳에 없었다·
대신 한없이 청명한 기운을 품고 발광하는 은빛의 여의주가 말레온의 손안에 쥐어져 있었을 뿐·
피로한 안색으로 미간을 주무른 말레온이 이내 자신이 만든 여의주를 응시했다·
“여의주를 새로 만들어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다행히 한번에 성공했군·”
“···너·”
“내가 자네에게 선물하려 한 것은 단순히 이 보고에 보관된 유물 하나뿐만이 아니었네·”
말레온이 그렇게 말하며 여의주를 내밀었다·
“장생종의 신체 부위로 만들어진 구겁의 시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티팩트나 다름없으니 여의주를 통해 동력을 넣고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지·”
“····”
“자네는 오늘 이 자리에서 나의 이름을 대신하여 구겁의 모든 시설을 직접 사용할 열쇠를 가지게 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