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2화
9레벨(10)
“[구겁을 가리고 있던 어둠은 사라졌지만 시련의 주체인 미궁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닐세·”]
우웅···!!
말레온이 입을 때마다 웅혼한 전성이 육성을 따라 메아리친다·
“[원래라면 승급 의식을 성공한 시점에서 시련을 돌파해 구겁에 도착해야 했겠지만 의식 도중 생긴 이변으로 시련이 멈춰 버렸지·”]
성대를 울리는 육성과 마력을 울리는 전성이 동시에 공명하지만 그건 말레온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가 육체를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마력이 자연의 법칙처럼 스스로 호응하며 울리고 있었을 뿐·
자기 자신을 하나의 세계로 삼아 구축하는 9레벨의 승천자·
그 존재만으로 주변의 시공간을 스스로의 법칙으로 개편하면서 자연스럽게 통제하에 둔다·
“[따라서 우리가 구겁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시련을 강행 돌파해야-”]
[듣고 있자니 쓸데없이 귀가 어지럽기만 하구나·]
올리비에라의 싸늘한 전성에 말레온의 말이 순간적으로 뚝 멈췄다·
베일 너머로 말레온을 바라보던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소리가 겹치는 것 하나 조절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자신이 무엇이 되었는지 과시라도 하고 싶은 것이냐?]
“음 실례했군·”
그제서야 마력을 가라앉힌 말레온이 목을 매만지면서 순식간에 소리를 조정했다·
“마력운용과 술식출력이 기존에 비해 곱절로 뛰어오른 터라 감각을 다시 정립하는 데 시간이 걸렸네·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
“반? 괜찮은 건가?”
“그건 오히려 내가 그쪽에게 묻고 싶은 말이군·”
차분하게 기척을 정돈하는 말레온을 관찰하던 레녹이 대답했다·
“승천자가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재정립하는 의식이었다· 그 과정에 예상치 못한 변수까지 있었지·”
“····”
“의식에 성공했다 해도 네 심신이 안정된 상태일 가능성은 극히 낮다· 오히려 굉장히 위험한 상태여야 정상이겠지·”
마드리치 오니온과의 결전에서 레녹이 8레벨에 올라서던 그날·
레녹은 위계를 초월하면서 극도로 불안정해진 스스로의 상태를 자각하고 오랫동안 안정을 취해야 했다·
7레벨에서 8레벨로 올라설 때조차 그러했는데 9레벨에 도달한다는 것은 어떠한 후유증을 안고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말레온의 내면이 굉장히 불안정해져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흠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레녹의 말에 덩달아 심각해진 표정을 지은 말레온이 말했다·
“일단 말은 멀쩡히 나오는군· 눈동자도 잘 돌아가고 소리도 잘 들려·”
“····”
턱을 괸 채로 자신의 눈과 귀를 한 번씩 잡아당겨 보는 말레온의 모습·
레녹이 쓴웃음을 짓고 올리비에라가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말레온은 두 사람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주무르면서 말했다·
“감각이나 기억에는 이상이 없네· 오히려 새롭게 인지하게 된 것들을 받아들이느라 조금 정신이 없군·”
“그런가····”
승천자가 된 말레온이 어떤 존재가 될지 걱정했지만 아직까지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전에 비해 조금 더 솔직해진 것을 제외하면 유의미한 변화가 거의 관측되지 않을 정도·
하지만 말레온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승급 의식을 통한 정상적인 결과일까·
자기 자신의 내면을 송두리째 개변할 정도로 거대한 변화다·
그러한 탈태를 겪고 난 뒤에도 이전과 다르지 않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레온은 자신에게서 변한 부분과 변하지 않은 부분의 차이를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헤아릴 수 없는 감각이 새롭게 깨어난 듯 하네·”
말레온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멀어졌다·
“이해하지 못했던 추상적인 개념과 직관· 과거와 미래의 시간선을 넘어선 예지· 마력의 근원에 손을 뻗는 지배력·”
“····”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실감하고 있어서 오히려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렵군· 이것을 이론으로 정립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걸세·”
레녹을 바라보는 말레온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강하게 변했다·
“이 모든 것이 자네의 도움으로 인해 가능해진 기적이지·”
“····”
“자네는 목숨을 걸고 내 도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 실패해야 했던 순간을 반전시켜 온전한 형태로 다시 내게 넘겨주었지·”
승천자가 말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나 역시 더할나위없이 큰 수혜를 입었네· 내가 변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 덕분이겠지·”
레녹이 승급의식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그의 재능을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그의 재능이 발하는 결실 그 자체가 되었기에 말레온은 기대 이상으로 뛰어난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인가·
본인 스스로 그것을 확신하고 있을 정도라면 아마 말레온이 느낀 것이 정답에 가깝겠지·
“오늘 자네에게 입은 은혜는 그야말로 내 평생을 걸고 보답해도 모자랄 거대한 은혜일지니·”
거대한 미궁을 가리킨 말레온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이제는 내가 그것을 갚을 시간이야·”
“···승천자가 되었다고 끝이 아니야· 이대로 구겁에 들어가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 거다·”
원래라면 말레온이 승천자가 되는 것과 동시에 시련을 넘어 구겁에 도착해야 했을 터·
하지만 의식 도중 외해에서 떨어진 흑뢰 때문에 구겁으로 향하는 관문이 멈춰 버렸다·
레녹의 도움으로 인해 말레온은 승천자로 태어났지만 구겁의 시련은 아직 통과하지 못했던 것·
막 승천자가 된 불안정한 몸을 이끌고 시련을 통과해 구겁에 도달해야 한다·
말레온 본인에게나 레녹에게나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해야하는 일이 되겠지·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지금 바로 속행해야 하네·”
하지만 말레온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의식에 협조한 지금이 아니라면 우리는 함께 구겁으로 건너갈 수 없어· 추후 다시 시도하면 나 혼자서만 시련을 통과하게 되겠지·”
“····”
“내가 자네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바로 속행해야 하네· 오직 지금뿐이야·”
후욱!!
거대한 용의 머리를 레녹의 코앞까지 내민 말레온이 활활 타오르는 열의를 담아 말했다·
“부탁하네· 내가 자네가 한 일에 보답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잠깐의 영화를 누렸다고 은혜를 잊어먹는 배은망덕한 동물은 아니었구나·]
레녹의 옆에 서 있던 올리비에라가 웃었다·
[나쁘지 않군· 이 정도면 네놈이 구겁에서 허탕을 치는 일은 없겠어·]
“····”
[지금처럼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동행을 늘리는 것은 사치겠지·]
베일 너머로 보이는 올리비에라의 차가운 입매가 순간적으로 감정을 죽이듯이 가려졌다·
[그리고 둘 중 한 명이 가야 한다면 역시 나보다는 네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올리비에라·”
[카이세를 만나고 오거라· 난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도포를 흩날리며 돌아선 그녀가 속삭였다·
[구겁의 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다오· 우리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
카이세 바쥬르의 일 때문에 레녹과 함께했으면서도 종국에는 스스로 포기하는 것인가·
프로젝트의 실패자인 자신보다 금제에서 자유로운 레녹이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레녹은 니백스의 둥지에서 올리비에라가 남긴 대답을 아직 잊지 않았다·
여생의 끝까지 견지할 대답을 이미 정해두었다던 그녀의 대답·
레녹이 그것을 생각하면서 고민에 잠긴 그 순간·
“음?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말레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반문했다·
“당연히 그대도 같이 가야지·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감안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만·”
[···뭐라고?]
“그대 역시 반을 도와 승급 의식에 협력하지 않았던가· 법진 안에서 나는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네·”
말레온이 큼지막한 손을 들어 올리비에라의 베일을 가리켰다·
“그 베일 안에 존재하는 칠채보의 마안· 내가 아니라 반 때문이라고 해도 그대는 스스로의 몸을 축내가면서 의식을 도와주었지·”
[····]
“큰 부담을 감수하고 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네· 그렇다면 그대 역시 응당 원하는 것을 이루어야 할 터·”
쿠오오오···!!!
말레온이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 눈부신 빛무리가 승천자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말레온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은하계를 형성하고 별을 직접 빚어내어 회전시킨다·
그것만으로 주변의 공간이 찌그러지듯이 왜곡되면서 기이한 공명음을 쉴 새 없이 내뿜기 시작했다·
키유우우웅!!!!
미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사로 앞에 선 말레온이 느릿하게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같이 가지· 내가 자네들을 구겁의 시공 저편까지 직접 데려다주겠네·”
“옷 하나 걸치지 않고 그렇게 말해봤자 딱히 신용도 가지 않는다는 거 아나?”
레녹이 피식 웃으면서 말레온의 옆에 섰다·
“좋아· 혼자서 무리해가면서 이쪽을 도와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지·”
씩 웃고 있는 말레온과 시선을 마주친 레녹이 말했다·
“승천자· 앞으로도 이쪽의 충실한 뒷배가 되어주어야겠다·”
“이를 말인가·”
[···하·]
올리비에라가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젓는 사이 말레온이 폭발적으로 회전하는 별무리 속에 파묻힌다·
두 어깨 위로 찬란한 빛무리를 두른 채 미궁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승천자의 모습·
“···말레온·”
말레온의 옆에 서 있던 레그누스가 굳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정녕 이대로도 괜찮다 생각하는 것이냐·”
“····”
“네가 구겁에 자리해 쿤다라를 움직이면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녕 그것을 원하는 건가?”
돌아보지 않는 말레온을 보면서 레그누스가 재차 말했다·
“장막의 바깥으로 도시를 이동시키는 것만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 믿고 있다면 오산이다· 중앙에는-”
“수명의 굴레를 뛰어넘은 괴물들이 결말을 넘어보겠다고 날뛰고 있지요·”
말레온이 레그누스의 말을 끊으면서 답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린 말레온이 레그누스를 굽어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요·”
“···말레온·”
“단명종보다 조금 더 사는 것이 큰 자랑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힘을 사용하지 않고 어떠한 의지나 감정을 담지 않은 채 시선을 마주한다·
그것만으로 두 사람의 기척이 압도적으로 말레온을 향해 기울어지면서 레그누스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인간이나 수인보다 조금 더 오래 살아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을 지켜볼 수도 있겠지요·”
말레온이 말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을 겁니다·”
“····”
“모두가 이르다고 타이를 때 모두가 급하다고 성토할 수 있는 지금이야말로 실험해 보려 합니다·”
쿠구구궁···!!!
말레온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관문을 잠식한 어둠이 한 발 밀려난다·
승천자가 내뿜는 존재감만으로 바깥의 어둠을 밀어내고 그 공백을 눈부신 별빛으로 메웠다·
파아아앗!!!
스스로가 찬란한 별이 되어서 어둠을 밝히면서 길을 열어젖힌다·
은성(銀星)· 그 이명이자 이름이 된 기원 그대로 안개의 우주에 떠오른 별이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결말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그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팟!!
말레온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레녹과 올리비에라의 발아래 눈부신 빛무리가 나타났다·
원하는 시공간 좌표에 자유롭게 ‘별’을 만들어 조작하는 원시마법 성련팔극식·
두 사람을 별빛 안에 품은 말레온이 한걸음 앞으로 내디딘 그 순간·
콰아아아앙!!!
눈부신 은빛의 별로 화한 말레온이 엄청난 속도로 미궁 중심부에 사선으로 내리찍혔다·
드르르르륵!!!
미궁의 벽이 사방에서 일어서며 말레온의 돌진을 가로막는다·
미궁 전역에 새겨진 수천종의 복합 술법진이 발동하며 공간을 격리하고 물리적인 타격을 지워 버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미궁 전체가 거칠게 진동하면서 외부에서 들어온 충격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듯하다·
진둔이 직접 창조한 항하사미궁의 요체를 빌려온 구겁의 시련·
승천에 도전할 자격을 얻은 존재에게만 통과가 허락되는 관문·
“오오오오오!!!!”
쿠과과광!!!
말레온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은색의 별이 미궁의 벽을 관통하고 불태우며 무너뜨린다·
원래라면 결계술의 묘리를 하나하나 해석해 가며 뚫어내야 할 미궁을 힘으로 박살 낸다·
“큭···!!”
말레온의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녹에게까지 그 반동이 닿았다·
전신이 거칠게 흔들리다 못해 충격이 뇌리에까지 뻗치고 마력과 의념까지 사납게 공명했다·
이미 떠난 승천자와 새롭게 태어난 승천자의 의지가 충돌하며 안개의 우주 저편까지 그 여파를 뻗치고·
마침내 장막의 이면 안에 들어찬 안개를 밀어내고 어두운 하늘을 천공에 비추었다·
콰아아아아아아!!!!
“···!!!!”
미궁 자체를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직접 부수는 이유가 무엇인가 했더니·
강제로 충격을 발생시켜 안개의 시공 자체를 밀어내기 위함이었던가·
외겁도시를 둘러싼 안개가 걷힌 하늘은 장막 바깥의 중앙전선을 비추고 있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운 암흑·
인간의 감각과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광기만이 가득한 바깥의 저편·
“장막의 이면 바깥에 외해와 직접 연결된 통로가 있었던 건가···!!!”
“별의 그늘을 매개로 삼은 성식결계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말레온이 씩 웃으면서 물었다·
“구겁의 시련을 넘으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그건-”
“위로·”
콰아아앙!!!
말레온이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엄청난 속도로 미궁을 때려 부수며 직진하던 그의 신형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안개가 사방으로 갈라지고 훤히 모습을 드러낸 외해의 바깥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상승했다·
“구겁의 시공은 바로 세계의 경계선을 넘어선 외해 바깥에 있네·”
콰우우우우웅···!!!!
강렬한 마찰열로 말레온의 은빛 비늘이 붉게 달아오른다·
주변의 공기가 뜨겁게 타오르다 못해 이내 호흡조차 불가능할 만큼 순식간에 고갈된다·
어지간한 초인조차 단번에 온 몸이 녹아 증발해 버릴 듯한 마찰의 열기·
외해 저편에서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이 쏟아져 내리는 사이한 한기가 동시에 교차한다·
눈앞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붉고 푸르게 물들고 어둠과 빛이 춤을 추면서 뒤섞였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지조차 할 수 없는 암흑의 바다·
물리법칙이 왜곡되고 반전되면서 뒤섞이는 혼돈의 세계·
그 일각을 향해 직접 몸을 들이밀고 말레온의 힘에 올라타 끝없이 상승한다·
레녹 자신은 물론이고 올리비에라의 기척조차 증발해 사라지는 듯한 막대한 탈력감·
세계와 바다 사이에 존재하는 기압차로 심신이 흔들리며 마모될 것처럼 요동치고·
철퍽!
피막을 통과하는 듯한 기묘한 소리와 함께 레녹이 몸이 차가운 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쿵!!!
몸을 움직여 균형을 잡는다는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양손으로 마력사를 뻗어 지면으로 추정되는 바닥에 붙여 속도를 줄였다·
끼기긱···!!
줄이 거칠게 당겨지는 소음· 청각이 돌아왔음을 깨달은 레녹이 눈을 떴다·
“이곳이····”
휘오오오!!!
사방의 모든 것이 투명한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동·
벽과 바닥 천장· 외벽 전체가 투명하고 차가운 유리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유리가 아니라 얼음이라 해야할까·
닿는 순간 얼어붙을 것처럼 피부가 아려오면서 차가운 이것을 평범한 유리라고 부르지는 않겠지·
피부 위로 두른 결계가 아니었다면 살점째로 뜯겨나갔을지도 모른다·
“···올리비에라?”
얼굴에 베일을 드리운 여성이 레녹과 몇걸음 떨어진 곳에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바깥을 보거라 견뢰·]
“····”
[공허가 이렇게나 우리의 옆에 가까이 있구나·]
고오오오!!!
투명한 유리처럼 비치는 외벽 너머에는 어둠만이 가득하다·
어두운 우주 한복판에서 유리로 이루어진 구조물에 갇힌 듯한 섬뜩한 기분·
아주 거대하고 투명한 우주정거장 안에서 공허한 우주를 바라보고 있다면 이러한 느낌일까·
이곳이 바로 외겁도시 쿤다라의 최심부이자 최외곽에 해당하는 비처·
구겁(九劫)의 시공·
[장생종의 수명을 부러워한 적은 없지만 그들이 그 시간을 가지고 해낸 일에는 경외를 표할 수밖에 없군·]
올리비에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것은 어쩌면 외해 바깥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개척지일지도 모르겠구나·]
“····”
쿤다라의 구겁이란 외겁도시 내부가 아니라 외해 바깥에 존재하는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외겁도시를 만든 창립자들은 어째서 구겁의 시공을 이런 극한의 환경에 구축하고 유지한 것일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부공간이 압도적으로 넓다·”
의문을 억누른 레녹이 빠르게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부 공간을 왜곡시켜 부풀려놓았군· 격벽 안쪽은 보이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큰 크기일 거다·”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것은 외해를 향하는 천장과 바닥을 비롯한 외벽들뿐·
각 섹터별로 설치된 격벽과 그로 인해 격리된 내부의 공간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여기 가만히 멈춰 있어서는 안 돼·”
비틀거리며 일어선 레녹이 품 안에서 앰플을 꺼내 들었다·
“말레온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애초에 지금 이 공간에서는-”
콰지지직-!
레녹의 의념과 마력이 쉴 새 없이 짓눌리면서 부서지고 있다·
구겁 내부로 진입하는 것과 동시에 느껴지는 숨이 막히다 못해 영혼이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
이것이 바로 말레온이 언급했던 영압(永壓)이자 자격 없는 자들이 구겁에 닿았을 때 치러야 할 대가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순식간에 기력이 바닥나는 듯하다·
지금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말레온이 보이지 않는 상황·
오래 버틸 수 없다면 일단 움직여야 했다·
무엇보다 말레온과 레그누스가 경고했던-
콰직!!
레녹의 등 뒤에서 거친 진동과 함께 무언가 발을 굴렀다·
그 진동으로 바닥이 크게 흔들리면서 숨을 몰아쉬던 레녹이 비틀거렸다·
“···!!!”
몸으로 느끼는 것보다 마력이 먼저 반응한다·
정륜결계를 쌓아 올리는 것과 동시에 점멸을 사용· 회피 방향을 지정한 뒤 전격마법을 중첩영창한다·
번쩍!!
구겁의 상공으로 떠오른 레녹이 한 손으로 저릿한 번개의 창을 쥐고 몸을 비튼 찰나·
지상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거대한 거북이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깐·”
온몸이 넝마처럼 너덜거리며 등껍질은 부서져 흘러내리는 저 모습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팔겁의 전당에 비치된 성소· 수명을 환전해 주는 용도로 사용되던 아이탈론의 샘·
장생종 중 가장 오래 산다는 영귀(永龜)이자 쿤다라의 창립자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조각상·
아이탈론의 샘에 비치되어 있던 거북이 조각상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견뢰!]
올리비에라의 날카로운 전성에 반응한 레녹이 곧바로 뇌창을 사출하려던 순간·
콰우우웅!!!
복도 저편에서 눈부신 은빛의 별이 폭발하듯 회전하면서 가속했다·
팔종(八種) – 외법(外法)
질량변환(質量變換)
막대한 열량을 품은 강렬한 열원이 단단한 격벽을 여러 차례 관통하고 사출·
투명한 유리공동 저편에서 수백 미터를 넘어 거북이 시체의 머리 위로 내리찍혔다·
[유성포(流星砲)]
콰아아아아아!!!
“···!!!”
눈부시게 발광하는 별빛의 포격이 영귀의 시체를 휩쓸고 증발시켰다·
무어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영귀의 몸이 은색의 광채로 가득 차 폭발한다·
비쩍 말라버린 몸에서는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고 너덜거리는 거죽만이 나풀거릴 뿐·
뻐어엉!!
그 자리에서 풍선처럼 터져버린 영귀의 뒤편에 말레온이 손을 뻗은 채 서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로군·”
“···말레온?”
마력을 운용해 지상에 착지한 레녹이 말레온의 모습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너 몸이···”
치이이익!!
은빛의 비늘은 붉게 달아오른 채 연기를 뿜어내고 벌어진 살갗 사이로 피가 흘러 내린다·
마력이나 의념이 상한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으로는 상당한 부상을 입은 모습·
레녹의 시선을 눈치챈 말레온이 쓴웃음을 지으며 벌어진 비늘을 한 손으로 덮었다·
“별건 아니야· 자네들이 신경 쓸 필요는 없네·”
“····”
“다만 역시 구겁에 억지로 올라오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던 모양이야·”
구겁의 시련을 힘으로 돌파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반동을 몸으로 직접 받아낸 대가인가·
말레온의 강대한 재생력으로도 쉽게 회복되지 않을 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아니 오히려 맨몸으로 구겁을 돌파하고도 피를 조금 흘리고 그친 그 초월적인 내구성에 감탄해야 할까·
“의태한 육체의 손상 따위는 내게 있어 큰 문제는 아니야·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네·”
말레온이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구겁을 배회하는 것은 단순한 괴물 따위가 아닐세· 그보다도 훨씬 더 추악하고 고결한 존재들이지·”
“···창립자들·”
“그래·”
말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쿤다라를 만든 창립자들· 그들은 이 외해에서 죽지도 썩지도 못하고 미라가 되어 이 성소를 배회하고 있지·”
팔겁의 전당에 존재했던 창립자들을 기리는 조각상·
하지만 어째서 외겁도시 내부에 살아 있는 창립자나 죽은 창립자를 기리는 묘비조차 없던 것일까·
수백 년을 넘게 사는 장생종이라면 창립자라 해도 아직 살아서 도시에 남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 대답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쿤다라를 만들고 죽음으로서 완성시킨 존재들· 구겁을 지나치기 위해서는 그들을 상대해야 하네·”
“····”
“구겁의 각 섹터를 격리하는 격벽마다 창립자들의 죽음이 도사리고 있겠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게야·”
말레온이 언급하고 레그누스가 경고했던 구겁을 ‘배회하는 것들’·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쿤다라를 세운 최고위 장생종들의 주검을 지금부터 상대해야 하는 건가·
“헤아릴 수 없이 높은 위계를 쌓았거나 존재 자체가 이능이나 다름없는 초월자들이 대부분이지·”
말레온의 시선이 자신이 쓰러뜨린 영귀를 향했다·
“지금처럼 구겁 외곽에서는 어렵지 않아도 내부로 깊게 진입할수록 생전의 힘을 보유한 존재들을 만나게 될 걸세·”
“···구겁 안으로 진입할수록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흐려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이미 죽은 이들이 아직 그 육신을 보존한 채로 이 공간을 배회하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구겁 최심부에 위치한 십관의 환경이란 대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 걸까·
뇌리를 찌르는 강렬한 위화감에 레녹이 순간적으로 표정을 찌푸린 찰나·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쿠르릉···!!
몸을 일으켜 세운 말레온이 빛나는 은빛의 눈동자로 레녹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것을 돕기 위해 내가 여기까지 자네와 함께한 것이니까·”
“···말레온·”
“물론 지금부터 이 구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결코 안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말레온이 웃으면서 걸음을 내디뎠다·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고 따라오게· 그런 존재들이 있었던 곳인 만큼 얻을 것도 많으니까·”
“얻을 것이라고?”
“구겁 전체가 창립자들의 죽음을 보관하기 위한 거대한 묘지이자 방주나 마찬가지·”
말레온이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돌려 세웠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창립자들이 소지하고 있던 지보의 재화와 아티팩트가 같이 보관되어 있네·”
“그건····”
“진혈종의 신체기관을 재료삼아 만들어진 신화급의 보구· 장생종의 이능과 재능을 극한까지 깎아 만들어낸 여러 무구들·”
“····”
“내가 구겁에서 자네를 도와주겠다 말한 것은 단순히 무력과 자격을 빌려주는 것만이 아니야·”
할 말을 잃어버린 레녹을 돌아보며 말레온이 보기 드물게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큰일을 하기 전에 먼저 챙길 것은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