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9화
9레벨(7)
“승급의 법진이 진둔이 남겨둔 함정이라····”
말레온이 승천자가 되지 못할거라 단언하는 레그누스의 대답·
순간적으로 레녹과 레그누스 사이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고민하던 레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둔은 결계술을 파고드는 일에 오롯이 몰두하던 초월자였다·”
“····”
“자신이 설계한 술법진에 고의적으로 거짓과 기만을 섞는 존재는 아니었을 텐데·”
레그누스 아이롬은 팔겁의 관리자이며 구겁의 시련을 열어주는 문지기·
그런 존재가 말레온의 도전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하지만 승급의 법진 자체가 진둔이 남긴 함정이라 단정 짓는 것은 의외였다·
진둔은 결계술을 연구하는 것 외에 모든 것에 무심했던 초월자·
필요에 의해 법진을 남겼다면 모를까 누군가를 기만하는 일에 공을 들일 존재는 아니다·
레녹이 품은 의문에 답하듯이 레그누스가 말했다·
“생전의 진둔은 오랜 지병을 앓고 있었고 말년에는 생명유지장치에 의존해 목숨을 부지해야 했지·”
“····”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기 전에 주어진 일을 모두 처리하려 했다· 구겁의 시련 역시 그러한 결과물이지·”
차가운 시선으로 전당 복도 뒤켠을 돌아본 레그누스가 말했다·
“진둔은 결코 일을 허투루 처리하지 않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편법으로 이루어졌다·”
“승급의 법진 역시 그러한 편법의 일부라는 말인가?”
“구겁의 시련은 도전자를 시험하기 위해서만 설계된 관문이 아니야·”
레그누스가 대답했다·
“그것은 구겁을 ‘배회하는 것’들이 팔겁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한 관문이기도 하다·”
“····”
말레온은 구겁 안에 생명이 아닌 것들이 살아 끊임없이 내부를 배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겁의 시련은 그러한 것이 팔겁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역할을 겸하고 있던 것인가·
“진둔이 법진을 만든 것은 구겁과 팔겁 사이를 오가며 양쪽에서 시련이 기능하도록 조정하기 위해서였지·”
차분한 시선으로 레녹을 바라본 레그누스가 말했다·
“그렇기에 승급 의식을 발동하기 위해서 그 법진을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법진을 사용하는 순간 팔겁과 구겁 양쪽으로 패스가 열리기 때문이겠군·”
승급 의식을 통해 추구해야 하는 것은 팔겁에서 구겁으로 향하는 상승·
하지만 법진을 사용하는 순간 구겁에서 팔겁으로 내려오는 하강 또한 이루어지게 된다·
레그누스는 상승과 하강이 혼재된 법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의식에 있어 극도로 위험한 일이라 경고하고 있었던 것·
그건 애초에 법진 자체가 도전자가 아니라 승천자인 진둔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였기 때문이겠지·
“구겁의 시련과 법진의 존재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있군·”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건 당신이 구겁의 시련에 직접 도전한 끝에 도달한 결론인 건가?”
“····”
레그누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레녹은 대답을 들었다·
혈려서기를 통해 확인했던 구겁의 시련을 포기한 2명의 탈락자·
그중 하나가 레녹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레녹은 설명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
“자신이 남긴 법진이 어떻게 사용되든 관심조차 없었겠지·”
레그누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법진을 이용해 승급에 도전하는 행위는 도전자에게 있어서는 함정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
“그 정도 되는 승천자라면 법진이 어떤 식으로 오용될지도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알면서도 조치를 취할 이유도 없다 생각한 거다·”
레녹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빛이 고요하게 번뜩였다·
“진둔은 악한 초월자는 아니었지만 결코 선한 존재도 아니었으니· 모든 것에 무관심한 채 결계술에 몰두하다 때가 되어 찾아온 결말에 순응했을 뿐·”
아니 그건 아니었다·
모든 것에 무심해 보였던 진둔조차도 마지막에는 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기를 바랬으니까·
그가 그렇게 고백하며 남긴 유지가 아직 레녹의 안에 남아 있다·
하지만 레녹을 만나기 전 쿤다라에서 겁의 시련을 설계한 진둔이라면?
진둔은 무슨 생각을 하며 시련을 설계하고 도전하는 이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길 원했을까·
“법진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해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는 알겠군·”
그렇기에 결국 레녹이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말레온이 원하는 건 그런 위험까지 모두 끌어안고 시도하는 도전이다· 나 역시 그 사실을 이해했기에 협력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
“말레온 그노시스와 거래관계로 엮여 있기는 하지만 나 역시 그에게 받은 것이 적지 않아·”
말레온이 승천의 비약을 주며 그 위험성을 설파하지 않았다면 레녹은 니백스의 제안을 더 신중하게 고민했겠지·
아이탈론의 샘을 열어 라이프 베슬을 준 것처럼 말레온은 호의를 베푸는데 있어 아끼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말레온의 의중과 생각이 실제로 어떠했든 간에 지금까지 그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도움을 받아왔던 바·
그의 도전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 말레온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레녹은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생각이었지만·
“그쪽이 경고한 변수로 인해서 의식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
자리에서 일어선 레녹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있는 이상 성공하지 못할지언정 결코 허망하게 실패하게 두지는 않겠다·”
레녹이 웃었다·
“내게는 그것을 가능케할 필요도 능력도 있으니까·”
“···그런가· 대단한 자신감이군·”
레그누스가 쓰게 웃었다·
“하지만 너와 같은 술사가 함께한다면 실패가 예정된 도전조차 성공으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지·”
“····”
“말레온의 준비가 끝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영혼의 격을 드높이기 위한 작업이 시작될 거다·”
레그누스가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팔겁에 존재하는 모든 성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열어놓지· 의식의 준비가 끝나면 찾아오도록·”
후욱!!
그 말을 끝으로 광활한 전당의 복도 저편에서 레그누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까지 레녹과 함께 복도를 직접 걸어온 것은 순전히 레녹과 잠시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나·
레그누스가 말한대로라면 그는 구겁의 시련 앞에서 말레온이 준비를 마치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지·
잠시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레녹이 곧바로 걸음을 돌려서 말레온에게 향했다·
우우우우우웅···!!!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으로 아주 거대한 엔진이 공명하는 듯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말레온의 주변을 둘러싼 영역과 마력의 공명이 임계점을 돌파하여 스스로 자멸에 가깝게 충돌을 거듭하고 있다는 증거·
헤아릴 수 없는 빛무리 속에서 눈을 감은 말레온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기 그지없다·
레녹이 그를 바라보며 말레온을 향해 한걸음 가까이 다가선 그 순간·
바로 옆에서 힘없는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가서지 마라·”
“···있었군·”
노쇠한 학이 양 날개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레녹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안색으로 마력을 뽑아내면서 느릿하게 기침하는 허령의 모습·
“술식전승이··· 조금 있으면··· 끝날 게다····”
“····”
“때가 되면 네게 말레온 님을 맡길 터이니··· 잠시 시간을····”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하고 힘겹게 숨을 들이쉰다·
허령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괜찮다 죽어도 좋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정말 생명을 뽑아 술식을 사용하고 있던건가·”
지금 허령은 자신의 술식을 사용해서 말레온의 행운을 계속해서 끌어올리고 있다·
하지만 술식의 기반이 되는 마력은 말 그대로 허령 자신의 남은 생명력을 깎아서 보충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허령의 체내를 들여다본 레녹은 그가 정말로 수명을 깎아가며 말레온을 돕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술식을 뽑아 통째로 말레온에게 전승하고 있군· 그렇게 해서라도 말레온을 승천자로 만들고 싶나?”
“말레온 님을··· 승천자로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다····”
허령이 흐릿해진 눈빛으로 대답했다·
“말레온 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니··· 이 늙은이의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것····”
“····”
“그러니 네가··· 말레온 님을 잘··· 보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빨리 쿤다라에서 떠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허령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멈춰섰다·
대신 흐릿해진 눈빛으로 무언가를 바라듯이 레녹을 올려다보았을 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고 있다·
레녹이 팔겁의 시련을 해결한 방식 때문에라도 허령이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레온의 승급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술사가 레녹뿐이라는 사실을 허령도 직시했던 것이겠지·
“그러지 않아도 승급 의식에는 협조할 생각이니까 상관은 없다·”
푸르르 떠는 학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녹이 담담하게 말했다·
“승급 의식을 통해서 레그누스에게 들은 이야기도 확인할 생각이기도 하고·”
“그런 가····”
허령이 웃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다행 이-”
말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노쇠한 학이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동시에 말레온의 몸을 둘러싼 빛무리가 일제히 그의 거대한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파아아아앗!!!
“····”
허령이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말레온이 눈을 뜬다·
다른 장생종들이 조심스럽게 허령을 부축하는 사이 눈부신 은빛의 광채가 그 앞에 내려섰다·
휘오오오···!!
전신에서 찬란한 은빛의 의념을 뿜어내는 말레온 그노시스의 모습·
훤칠한 용머리 거인이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허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각한 수준의 탈진이나 생명에 지장이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
“허령의 나이라면 수명이 많이 깎였겠지만 몇 달 요양하면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겠지요·”
“그렇군·”
말레온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다들 고생 많았네· 의식이 어떻게 끝나든 이번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보상을 약속하지·”
“말레온 님····”
“이제부터는 내가 이루려는 승천을 지켜봐 주게·”
하지만 말레온은 더는 그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돌아섰다·
다른 장생종들을 뒤로하고 레녹의 앞에 선 말레온이 말했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자네가 구겁의 시련에서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그래·”
전신의 비늘이 찬란하게 번뜩이면서 말레온의 기척을 쉴 새 없이 부풀려 나간다·
숨을 쉴때마다 의념과 마력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와 주변을 잠식하고 먹어치웠다·
위계를 쌓아 올린 초인이 강력한 영감을 받거나 깨달음을 얻어 도달하는 극한의 고양상태·
그것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뒤 그대로 고정시켜서 만들어낸 최상의 컨디션·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말레온의 몸이 족히 세 배는 커진 듯한 착각이 든다·
“자네가 팔겁의 전당을 수행원들에게 열어준 덕분에 최대치로 조정을 마칠 수 있었어·”
천천히 손을 들어올린 말레온이 번뜩이는 몸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난 준비가 끝났네· 이것보다도 더 완벽하게 채비를 갖출수는 없겠지·”
“그래 보이는군·”
“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전해준 의지가 여기에 남아 있어·”
눈을 감은 말레온이 조용히 말했다·
“이 감정이 내 안에 이렇게 선명하게 존재하는 동안 도전을 시작하고 싶네·”
“····”
“자네만 준비되었다면 바로 출발하지·”
천천히 눈을 뜬 말레온의 눈동자가 찬란한 은빛으로 번뜩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세계를 오시한 초월자들과 같은 자리에 서려 하네·”
* * *
레녹은 말레온과 함께 외해의 어둠으로 가로막힌 관문 앞에 도착했다·
레그누스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구겁의 시련 입구·
올리비에라와 재회한 레녹은 지체없이 어둠 안에서 본 것에 대해 설명했다·
[구겁의 시련 전체가 거대한 미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더냐·]
“현재로서는 진둔의 항하사미궁 일부를 모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로구나·]
레녹의 말에 올리비에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둔이 위대한 승천자라 해도 승천자가 되는 방법을 여럿 알고 있지는 않았겠지·]
“····”
[자신이 겪은 성공과 실패만이 시련의 형태로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면 틀린 말은 아니겠구나·]
간단한 설명만으로 레녹과 거의 비슷한 추론에 도달하는 올리비에라의 모습·
말레온은 구겁의 시련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알고 있었는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결계술과 술법진을 극한까지 파헤쳐본 술사만이 승급의 법진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겠지·”
“····”
“먼저 진둔이 남긴 승급의 법진을 활성화시켜 승급의식을 강제로 발동시킬걸세·”
무거운 눈빛으로 레녹과 올리비에라를 돌아본 말레온이 말했다·
“그렇게 발동된 승급의식에 내가 참여하면 승천자가 되기 위한 의식이 시작되겠지·”
“성공하면 구겁의 시련까지 자연스럽게 돌파할 수 있겠군·”
“자네는 반드시 내 옆에서 의식을 지켜보고 있어야 해· 그래야 자네 역시 나와 함께 구겁으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
말레온이 레녹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모든 가정은 자네가 법진을 조작해 승급의식을 발동시킬 수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지·”
“····”
“할 수 있겠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말레온이 레녹에게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지켜보는 다른 장생종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진둔이 팔겁의 성소에 남겨둔 승급의 법진·
승천자가 직접 만든 술법진을 강제로 조작해 작동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가능한 술사가 오직 레녹밖에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
이미 레녹은 팔겁의 시련 앞에서 자신이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허령 역시 그것을 보았기에 겸허히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만약 레녹이 불가능하다 판단한다면 말레온 혼자 법진을 조작해 의식을 발동하고 참여해야 할 터·
그러지 않아도 의식에 전력을 다해야 할 말레온의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된다·
“질문이 잘못됐군·”
레녹이 그렇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야 하는게 아니야· 그러기에는 이미 한참 늦었지·”
“그렇다면?”
“진둔이 남겨둔 승급의 법진 해석은 이미 끝났다· 그리고-”
푸화아아아악!!!
동시에 어둠의 구체 저편에서 찬란한 오색의 빛무리가 폭발하듯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방대한 마력의 파도를 등진 채로 레녹이 말했다·
“승급의식 발동은 이미 끝내두었어· 의식을 시작하자·”
“···!!!!”
어둠이 걷히고 그 너머에서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미궁이 모습을 드러낸다·
승천자 진둔이 설계한 구겁의 시련· 그 미궁 위에 떠올라 거칠게 발광하는 거대한 술법진·
하지만 생전의 진둔은 죽기 전 레녹에게 항하사미궁 전역의 조작권한을 넘겨주었다·
비록 진짜 항하사미궁은 진둔의 죽음과 함께 무너져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도록 망가져 버렸지만·
여기 남아 있는 미궁의 모방품은 진둔의 의지와 함께 남아 기능하고 있었던 것·
그렇기에 레녹은 진둔이 전해준 항하사미궁의 조작권한을 사용해서 강제로 승급의식을 발동·
말레온이 도착하기 직전까지 의식 발동을 멈춰두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 어떻게···!!”
레녹과 직접 대화를 나눈 레그누스조차 이미 의식이 준비되어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놀란 표정으로 레녹을 돌아보는 레그누스를 무시하고 레녹이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둠 밖으로 솟구친 마력광이 허공에 거대한 원을 그리면서 복잡한 마법진의 형태로 변하고·
나선형의 피라미드처럼 솟구치면서 팔겁의 전당 천장을 깨부수고 솟구쳤다·
콰아아아앙!!
레녹의 의지에 따라 활성화된 승급의 법진이 안개의 우주 바깥으로 고고하게 회전했다·
감히 올려다볼 수 없을 만큼 찬란한 빛으로 휩싸여서 존재하는 모든 감각과 의념을 거칠게 찍어눌렀다·
차르르르르륵!!!!
8레벨의 대술사가 9레벨에 도전하는 승급 의식·
새로운 승천자로서 태어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그 과정을 진둔의 유산으로 강제로 발동시키는 기적·
지켜보던 장생종들이 그 기적의 정취에 압도당하는 사이 레녹이 법진에 마력을 때려 넣었다·
“시작한다·”
우우우웅···!!!
승급의 법진에 손을 대고 마력을 법진 안으로 쉴 새 없이 흘려보낸다·
법진 안에서 펼쳐지는 천변만화의 묘리를 인지하고 흐름을 조절했다·
‘레그누스의 말대로 술법진 내부에 양방통행의 형태로 가능토록 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 레녹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한 차례 설명을 듣고 난 뒤에야 법진 내부에 존재하는 구겁에서 팔겁으로 내려오는 패스가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
처음 승급의 법진을 보면서 고민했던 2차원과 3차원에 혼재된 형태가 팔겁과 구겁의 양방통행을 위한 설계였던 것이다·
‘구겁에서 팔겁으로 이어지는 패스를 죽이고 그 위로 새로운 회로를 짜올려야 해·’
법진의 본래 설계목적 중 하나를 삭제하면서 법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실시간으로 구조를 다시 짜올린다·
촤라라락!!!
손끝에서 피어오른 마력이 복잡한 기호와 문자의 배열이 되어 법진 내부를 빠르게 채우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순서가 어긋나면 법진이 과열되어 어느 한 부분이 붕괴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방향과 속도를 수천 번씩 바꿔가면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작동하도록 우선순위를 일일이 지정한다·
레녹이 이어받은 결계술의 모든 역량을 극한까지 시험하는 듯한 악랄한 난이도·
하지만 진둔이 한 일이라면 레녹 역시 언젠가는 할 수 있다·
진둔이 레녹에게 자신의 유지를 맡긴 것은 바로 그러한 가능성과 확신의 발로였으니·
해낼 수 있다면 언젠가는 도달한다· 언젠가 도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해낼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시점을 초월해 성장해 온 레녹의 결계술식이 이 자리에서 극한까지 펼쳐지면서 법진을 바꿔 나가고·
철컥!!
자물쇠가 잠기는 듯한 묵직한 충격과 함께 법진의 기능 자체를 일방통행으로 바꾼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법진의 준비가 끝났다· 바로 의식을 재시작하고 대상 지정을-”
쿠웅!!
전당을 뚫고 안개의 우주까지 솟구친 법진 위로 말레온의 신형이 서서히 떠올랐다·
오오오오오오!!!
양손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발 디딜 곳도 없이 자연스럽게 하늘 위로 부유한다·
승급의 법진 중앙에 이끌리듯 다가선 말레온이 허공에 떠오른 채 레녹을 내려다보았다·
“자네에게는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말레온·”
“조건은 모두 갖춰졌네· 남은 것은 오직 나 스스로 행하여 도달해야 하는 기적일 뿐이지·”
부드러운 눈길로 레녹을 돌아본 말레온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한 결의로 굳어졌다·
“맡겨주게 반·”
우우우웅···!!!!”
법진의 정상까지 솟구친 말레온이 안개의 우주 끝에서 외겁도시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쿤다라의 명운을 건 이 도전·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성공시킬 테니-!!!!!!!”
파아아아아아앗!!!
하늘 끝까지 펼쳐진 법진이 엄청난 속도로 압축되며 말레온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말레온의 모습이 헤아릴 수 없는 빛에 휩싸인 채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승천자란 자신의 대답에 걸맞게 스스로를 재구축하고 그를 통해 자격을 얻은 존재·
도전자는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존재를 9레벨에 걸맞게 완전히 재구축하게 된다·
“시작됐다···!!!”
“하늘이시여· 제발!!”
말레온의 의식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은 장생종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 넘게 준비를 마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춰 도전에 임했음에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도박·
운명에 맡기고 결과를 받아들여야하는 무력함과 그럼에도 기적을 바라는 갈망이 그곳에 있다·
의식을 지켜보던 레그누스조차 차마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것처럼 시선을 돌린다·
“후우····”
하지만 레녹은 하늘 끝에서 시작된 말레온의 도전을 단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8레벨의 대술사가 승급에 도전하는 오직 쿤다라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순간·
9레벨의 승천자가 이 세계에 새로 태어날지도 모르는 기적에 가까운 찰나·
그 과정을 남김없이 관찰하고 기억하여 레녹의 내면에 남겨두어야 한다·
언젠가 도전해야 할 레녹의 승급에 있어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지금 말레온의 도전을 통해 인지하고 이 순간을 교보재로 삼기 위해 극한까지 감각을 확장한다·
레녹의 초월적인 직관이 감각을 넘어 펼쳐지며 말레온에게 벌어지는 일을 남김없이 관찰하기 시작했다·
‘세포단위에서 신체의 연결을 끊고 마력과 의념 심상의 순으로 해체한 뒤 재구성한다·’
두 눈을 찌르는 빛무리에 타들어가는 고통조차 무시하고 레녹이 생각했다·
‘구심점이 되는 것은 심상의 기반이 되는 술식이나 무예· 가장 강한 하나의 원념(原念)을 표층의식까지 띄워 올리는 거야·’
말레온이 의식을 통해 맞이하는 모든 과정을 남김없이 탐미한다·
8레벨을 넘어 9레벨에 도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승천에 도전할 자격을 얻는 것이 생명에게 어떤 식으로 허락되는 개념인지·
‘8레벨까지 쌓아온 위계를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린 뒤 무너뜨린다· 쌓아서 부수고 다시 쌓아서 부수기를 반복하면-’
자신의 내면을 중심으로 헤아릴 수 없는 창조와 파괴를 반복한다·
생명이라는 인과를 창조해서 쌓아 올리고 파괴를 통해 부수기를 자행한다·
원인과 결과가 이어졌다 끊어지고 순환하다 닫히는 과정을 망각의 순간까지 선행한다·
인과가 이어지든 닫혀 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과정 자체를 자신의 내면에 녹이고 법칙으로 만들어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토록 하는 것·
자아(自我)는 세계(世界)가 되고 세계는 자아가 된다·
승천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지 홀린 듯이 탐식하고 잊어버린다·
오랫동안 빛을 쳐다본 두 눈은 진작에 흐릿해졌지만 레녹은 여전히 모든 것을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그런 거였군····’
승천자란 무엇일까·
승천에 도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막연하게 망상하고 기대하며 두려워하고 부정했던 그 모든 추측들이 레녹의 내면에서 하나둘씩 확신으로 변해 나간다·
그래·
승천자란·
나 자신을 한없이 세계와-
빠직!!!!!
“···!!!!”
뇌를 갉아먹는 듯한 불길한 파열음·
그 소름 끼치는 소리를 듣자마자 레녹은 거짓말처럼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에서 번뜩이는 불길한 검은 빛의 번개·
레녹이 순간적으로 그 벼락에서 무엇보다 강렬한 기시감을 느낀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흑뢰(黑雷)가 술법진을 관통하고 시공을 검게 물들였다·
쩌어어엉!!!
수백 미터 크기에 이르는 거대한 술법진 전체가 검게 뒤틀리며 깨져 나가는 섬뜩한 풍경·
[아아 아아아···!!!]
순식간에 오염되어 타락해 가는 승급의 법진 속에 파묻힌 말레온의 그림자·
레그누스가 언급했던 법진 내부의 함정· 양방통행의 기능을 제거한 완전한 술법진을 완성했음에도·
방금 전까지 순조롭게 도전에 임하던 그것이 더할 나위 없이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