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8화
9레벨(6)
사상전역·
9레벨에 도달한 승천자에게만 허락되는 자신의 대답을 현실에 직접 구축하는 기적·
술자의 근원심상을 투영하는 자성영역도 술자의 이상을 현현하는 권역도 아닌·
말 그대로 승천자가 되어 도달한 대답 자체를 현실에 직접 현현하는 신기·
천견의 만영일적동공(萬映一的瞳孔)· 헤르메스의 백금비색성(白金飛穡星)· 진둔의 항하사미궁(恒河沙迷宮)·
레녹이 마주한 사상전역이란 승천자가 살아온 생애를 회고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특히 진둔의 항하사미궁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반추하는 기적 그 자체였으니·
요람의 끝에서 진둔을 만나 전해 들었던 이 세계의 진정한 비밀·
네 번째가 없다던 그날의 전언에서 네 번째를 만들기 위한 지금의 여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순간이 그렇게나 선명하고 강렬했기에 더욱 이 순간을 예상할 수 없었다·
항하사미궁의 모방품이 쿤다라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부아아아아아앙!!!!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미궁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지면서 레녹을 휘감는다·
반경 수백 미터에 이르는 찬란한 마력광이 레녹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회전하면서 기울어졌다·
그르르르르르릉!!!
귀청을 터트릴 것처럼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공명음·
아주 거대한 엔진을 앞에 두고 그 울음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듯하다·
동시에 마법진 전체가 레녹을 향해 기울어지면서 그 전신을 끌어안듯이 입체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8레벨에 도달한 도전자를 9레벨의 승천자로 만들기 위한 승급 의식·
구겁의 시련 안에 존재하는 법진이 작동하며 레녹을 대상으로 의식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던 것·
‘승급의 법진 자체가 의식을 위한 제단으로 변형되는 방식이군·’
쿠과과과과!!!!!
자신을 품고 회전하는 마법진의 중심에서 격변하는 마력흐름을 레녹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법진이 입체화되어 솟구치면서 레녹 자신을 떠받드는 것처럼 상승하는 형태·
승급의 법진 전체가 형상을 변환하여 제단의 형태로 변하는 듯하다·
하지만 레녹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직시했다·
‘마력소모량이 말도 안되는 수준이야· 이만큼 마력을 버려야만 의식을 겨우 발동이라도 시킬 수 있는 건가?’
승급 의식을 강제로 발동시키는 법진에 소모되는 마력량은 레녹조차도 제대로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
지금 의식이 열린 것은 레녹이 지닌 미궁의 조작권한을 통해 미궁에서 마력을 끌어다 쓰고 있기 때문·
이대로 상황을 지켜본다면 레녹을 대상으로 승급 의식이 시작되고 말레온을 대신해 레녹이 도전에 임하게 되겠지·
[마 마스터! 어 어떻게 하죠?!]
보기 드물게 당황한 기색으로 품안에서 뛰쳐나온 다비가 파닥거렸다·
[이 이대로는 마스터가 혼자서 승급 의식에 도전해 버려···!! 어라?]
앞발과 뒷발을 허우적대면서 황급히 방법을 찾던 다비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그냥 이대로 마스터가 승천자가 되면 되잖아요?]
“····”
[좋습니다· 가자구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다비가 레녹의 품 안으로 폴짝 기어들어 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자잘한 건 일단 승천자가 된 뒤에 생각해 보는 걸로-!!]
“다 알면서 자꾸 그런 소리 할래?”
다비의 볼을 양손으로 잡고 쭉 늘린 레녹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으베베베·]
“쓸데없는 말은 됐으니까 연산능력을 빌려줘· 이번 기회에 항하사미궁의 조작권한을 완전히 복구해야겠어·”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마법진의 중심에서 손을 펼쳤다·
“미궁을 조작해서 승급 의식을 일시 중단시킨다· 어떤 식으로든 지금 내가 의식에 참가하면 안 돼·”
[마스터 하지만-]
“말레온과 한 약속을 어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있다·”
다비의 말을 끊은 레녹이 자신의 왼팔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방금 막 봉인을 풀고 금기병장을 사용했어· 이대로는 의식이 무조건 실패해 버릴 거다·”
구겁의 시련을 확인하기 위해 왼팔의 금기병장을 사용해 외해의 어둠을 지워 버린 상황·
레녹의 왼팔에 구현된 ‘페널티’의 강제화는 접촉한 무엇이든 실패하고 망가뜨리는 힘이다·
봉인을 다시 걸어둔지 아직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승급 의식을 시도하면 반드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터·
최악의 경우 레녹의 왼팔이 승급의 법진 자체를 완전히 망가뜨릴 가능성도 있다·
레녹이 도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승급 계획 자체가 송두리째 날아가버릴수도 있는 상황·
[핫! 그 그건 안 되죠!!]
그제서야 다비 역시 정신이 들었는지 부랴부랴 마력을 끌어올려 레녹을 열심히 보조하기 시작했다·
연산능력을 보조하여 승급의 법진 사방으로 의지를 뻗고 마력흐름을 강제로 멈춰 세운다·
법진이 망가지지 않는 선에서 마력흐름을 동결시키는 것과 동시에 발 아래 진동하는 미궁을 조작·
쿠구구구구···!!!
레녹의 손짓을 따라 수백 갈래로 뻗은 미궁의 길이 움직이면서 승급의 법진 작동을 멈춰 세운다·
그제서야 미궁에서 흘러넘치는 마력이 뚝 끊기면서 레녹을 둘러싼 마법진이 멈추기 시작했다·
슈우우우웅···!!
한참 예열을 거쳐 달아오르던 엔진이 급격하게 식어가는 듯한 진동음·
“···멈췄군·”
그제서야 레녹이 마력의 운용을 끊고 멈춰 버린 마법진에서 내려왔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미궁 위로 떠올라 회전하다 그대로 중단되어버린 법진의 형상·
“승급 의식에 필요한 법진은 저렇게 형성된거였군·”
미궁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레녹이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평면이자 입체라··· 2차원과 3차원의 시공에서 동시에 같은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건가?”
마법진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평면의 원에 가까운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
법진이 3차원의 어떤 좌표에서든 2차원의 형태로 관측되고 있다는 증거·
“법진의 형상이 특정 좌표와는 관계없이 일정한 형태로 존재한다면 방향제어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해· 마력효율과 회전률도 조정해야겠군·”
승급 의식을 멈춰두긴 했지만 의식의 구조를 미리 보아두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확이다·
결계술에 대한 지식과 특유의 직관을 사용하면 법진을 해석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
당장 법진을 살펴보면서 얻은 지식만으로도 레녹 혼자 승급 의식을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
“다비· 지금 얻은 승급 의식의 해석본을 데이터베이스에 최고위 핵심자료로 기록해 줘·”
손안에서 마력을 조형해서 법진의 모방품을 만들던 레녹이 말했다·
“당장 말레온의 도전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유용하게 쓰일 일이 있을 거다·”
[이미 데이터베이스 내부에 3차원 전면구조로 스캔 시작했어요· 진행률 89%!]
당장은 승급의 법진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묘리를 이해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레녹이 천천히 중력의 흐름을 따라 미궁의 입구 근처에 내려섰다·
“알고는 있었지만 생전의 진둔은 정말 지독하게 결계술 하나에 몰두하던 초월자였던 모양이군·”
탁!!
미궁 입구에 내려선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구겁의 시련으로 이런 걸 만들어 놓다니 이미 승천자가 되기 위한 시험의 범주를 뛰어넘지 않았나?”
레녹이 당시 항하사미궁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앞둔 진둔이 미궁을 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오래전의 약속을 따라 스스로의 죽음을 단장에게 넘겨주는 과정이었기에 허락된 기적이었다·
이 미궁 전체가 항하사미궁을 모방한 결과물이라 해도 극도로 난해한 작업이 되리라는 사실은 마찬가지·
[다른 유기체가 자신이 설계한 작품에 손을 대는 것이 그만큼 싫었던 게 아닐까요?]
다비가 진둔의 심경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딥웹 VS 놀이 게시판에서 공들여서 밸런스를 맞춰놓았는데 누가 토를 달면 그것만큼 짜증 나는 일이 없죠· 전 이해했어요·]
“···그것과 같은 범주에서 취급될만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그걸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야?”
이상한 부분에서 승천자를 이해하려하는 다비의 머리를 문지른 레녹이 미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진둔은 쓸데없이 도전자를 괴롭히는 승천자는 아니야· 항하사미궁을 모방해 시련을 만들었다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그러니까 귀찮게 구는 유기체를 쫓아내는데 미궁이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한 게-]
“구겁의 시련을 만드는 데 항하사미궁을 모방해 설치한 것이 아니라 반대라면 어떨까?”
다비의 말을 무시한 레녹이 자문했다·
“항하사미궁의 묘리를 가져오는 정도는 되어야 구겁을 막는 관문을 만들 수 있었던 거라면·”
[헤에·]
“9레벨의 승천자도 승천자가 되는 방법을 여럿 알고 있지는 않겠지· 그래서 구겁의 시련을 설계할 때는 자신이 성공한 방식을 사용했던 거야·”
한 손으로 미궁의 단단한 외벽을 짚은 레녹이 중얼거렸다·
“승천에 도전할 자격을 얻은 존재라면 어떤 식으로든 미궁을 돌파해 구겁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가정하면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아니군·”
[그럼 마스터 일단 조금이라도 미궁을 조사볼까요?]
다비가 레녹의 품안에서 꼬리를 꼼지락거렸다·
[제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항하사미궁의 최심부 지도가 어디까지 먹히는지만 일단 알아둬도 좋을 것 같은데·]
“이 미궁은 진짜 항하사미궁이 아니라 구겁의 시련으로 설계된 관문이다· 그 요체에 항하사미궁의 원리가 사용되었을 뿐이지·”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이쪽의 데이터만 가지고 시련을 돌파할 가능성은 극히 낮아· 애매하게 실패했다 말레온의 도전까지 막혀 버리면 본말전도가 된다·”
[에엑··· 그럼 어떻게 하죠?]
“일단 팔겁으로 돌아가자·”
고민하던 레녹이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구겁의 시련에 대해 설명하고 어떻게 승급 의식을 치를 것인지 논의해 봐야겠어·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 보이는군·”
새로운 승천자를 탄생시키는 승급의식인 만큼 일이 순탄하게 흘러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설마 항하사미궁의 일부가 쿤다라 최심부에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진둔이 사망한 뒤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가 설계한 관문은 이렇게 남아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미련없이 구겁의 시련을 떠나려던 레녹이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걸음을 멈춰 세웠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실험해 볼까·”
펄럭!!
혈려서기를 펼치고 그 안에 핏방울을 흘려 넣는다·
=위대하신 승천자여·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쿤다라에 온 직후 소모되었던 혈려서기의 동력이 얼마 전 조금 돌아왔다·
이 혈성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해 구겁의 시련에 대해 무언가 알아낼 수 있다면·
레녹이 페이지에 글귀를 적어넣자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구겁의 시련은 승천자 자이기스 이더노어가 설계한 거대한 미궁 형태의 관문입니다·
=시련의 통과 조건은 ‘자격의 여부’· 그 밖의 통과 조건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혈려서기가 말하는 자격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굳이 확인하겠다고 사족을 덧붙여봤자 질문 기회를 낭비하는 일이 될 터·
레녹은 묵묵히 페이지 위에 떠오르는 다른 정보들을 응시했다·
=현재까지 쿤다라에서 구겁의 시련에 도전했던 도전자는 6명· 그중 탈락자는 4명입니다·
=탈락자 중 2명은 중도 포기· 1명은 사망· 1명은 행방불명·
=중도 포기한 탈락자 2명의 신원을 열람 가능합니다· 추가적인 정보 열람이 필요하십니까?
레녹이 곧바로 혈려서기에 다시 질문을 적어넣었다·
=시련을 통과한 합격자들의 신원을 열람할 수 있나?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현재 구겁의 시련을 공식적으로 통과한 합격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도전자가 6명· 탈락자가 4명인데 공식적인 합격자가 없다라·
레녹은 질답기록을 다시 돌려보고 나서야 혈려서기가 합격자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시련에 실패한 것이 확실한 4명과는 달리 나머지 2명은 시련을 합격한 건지 실패한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혈려서기가 이렇게 대답한 이유를 깨달았다·
“나머지 둘은 구겁의 시련을 돌파하고 승천자가 된 이들이 아니었군·”
혈려서기를 덮은 레녹이 중얼거렸다·
“이미 9레벨에 도달한 채로 구겁의 시련 앞에 섰던 이들이었던 거야·”
[마스터 그 말은····]
“서로 다른 두명의 승천자가 쿤다라의 구겁에 다녀갔다· 이건 확실히 유의미한 정보로군·”
카이세의 시신을 구겁에 보관하기 위해 방문했던 승천자와 알 수 없는 목적을 지닌 또 다른 승천자·
한 명은 말레온이 언급했던 비색이라는 승천자겠지만 다른 하나는 알 수 없다·
두 승천자가 각자 다른 시기에 다른 목적으로 구겁을 방문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혈려서기를 품 안에 집어넣은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의식을 서둘러야겠군· 바로 팔겁으로 돌아가자·”
* * *
슈오오오···!!!
블랙홀처럼 회전하는 어둠의 구체 안쪽에서 레녹이 걸어나온다·
“후우···”
금기병장으로 변한 왼팔의 페널티를 사용한 대가로 감각이 희미해지고 아려오기 시작한다·
왼팔을 주무르는 레녹의 앞에 푸른 머리칼을 지닌 청년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을 쓸어넘긴 청년이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을 보며 말했다·
“살아 돌아왔군·”
“····”
“그대로 외해의 어둠에 삼켜질 줄 알았는데 인간종치고는 재주가 많은 술사로구나·”
처음 보는 얼굴과 고압적인 말투· 강압적이다 못해 싸늘하게까지 느껴지는 기세·
청년이 입고 있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예복조차 처음 보는 것이다·
미간을 찌푸린 채 청년을 응시하던 레녹이 뒤늦게 상대의 정체를 깨닫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레그누스 아이롬 본인인가?”
말레온과 같은 원로성의 최고위원이자 팔겁의 관리자·
면록이라 불리는 진혈종인 그가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한 채 레녹을 기다리고 있던 것·
하지만 레그누스는 레녹의 말을 듣자마자 오히려 불쾌한 것처럼 표정을 찌푸렸다·
“누가 네게 나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부르도록 허락했지?”
“····”
순록의 모습일 때와는 달리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자 감정을 읽기 쉬워졌다·
구겁의 시련으로 향하는 어둠의 구체 앞에 서서 레녹을 기다리고 있던 것인가·
레그누스를 무시하려던 레녹이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레녹이 어둠 안으로 진입할 때만 해도 수십에 달하는 장생종들로 웅성거리던 전당이 고요하다·
올리비에라의 기척조차 한참 멀리 떨어진 전당 외곽에서 잡히고 있을 정도·
그제서야 레녹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깨닫고 입매를 굳혔다·
“잠깐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외해와 유사한 어둠 안과 바깥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다·
그 때문에 레녹이 어둠 안에 들어가기 전후의 변화가 급격했던 것·
혈려서기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포혈공이 레녹에게 연락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였던가·
“네가 구겁의 시련 안으로 진입한지 45시간이 지났다·”
“····”
항하사미궁을 잠깐 조사하는 사이 이틀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흘렀던 것인가·
그제서야 레녹이 레그누스가 여기 남아 있는 이유를 깨닫고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팔겁의 관리자이기 때문에 여기 남아 있었던 거였군·”
“구겁의 시련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기 때문이지·”
담담하게 수긍한 레그누스가 걸음을 돌렸다·
“이해했다면 움직이지· 말레온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말레온은 지금 어디에 있지?”
“승급의식에 앞서 만전을 기하기 위한 준비 중에 있지·”
레그누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말레온은 아주 오래전부터 승급을 갈망해 왔으니 대업을 위해 준비된 안배와 조력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
“쿤다라 전역이 주시하는 가운데 시기를 골라온 만큼 말레온 역시 자신에게 필요한 술자와 술식을 신중하게 선정했지·”
광대한 전당의 복도 사이를 지나쳐 레녹을 안내한 청년이 말했다·
“그렇게 쌓아 올린 안배와 인내의 결실이 바로 저기에 있다·”
고오오오···!!!
전당 내곽에 위치한 원형의 거대한 홀·
수십 명의 장생종들이 스스로의 본체를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있다·
거대한 학과 전갈 제비나 기원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외형을 지닌 고위 장생종들·
위계를 완성한 존재들이 소우주와 자성영역을 전개하고 스스로의 심상을 남김없이 풀어헤치고 있다·
그들이 전개한 심상과 의념 마력의 힘이 헤아릴 수 없는 찬란한 빛무리가 되어서 몰아치고·
파아아아앗!!
격렬하게 회전하는 빛무리의 중심에 말레온이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장생종들이 동시에 전개하는 영역이 중복되며 겹치는 중심부·
그 안에서 그들의 심상과 술식을 고스란히 받아 흡수하는 듯한 말레온의 모습·
그때마다 말레온의 기척과 의념이 쉴새없이 커지면서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강제로 부풀려서 공간을 가득 채우는 듯한 기묘한 형상·
“저건····”
“말레온이 지닌 모든 능력과 기원에 축복을 내리고 있다·”
레녹의 옆에 멈춰선 레그누스가 설명했다·
“심상과 의념증강 육체능력과 정신안정 술식출력과 마력조작 행운을 불리고 저주를 물리치며 삿된 기운을 몰아내지·”
“····”
“말레온을 따라온 이들 모두가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스스로의 술식을 직접 조정한 자들이다·”
청년이 푸른 눈동자로 레녹을 힐끗 돌아보았다·
“원래라면 칠겁에서 준비를 끝내고 팔겁에 진입한 뒤 바로 의식을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네가 팔겁의 관문을 마비시키면서 일정이 변했지·”
“그건····”
“책망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팔겁에서 준비를 마치는 것이 의식에는 도움이 될 테니· 그런 의미에서 네가 한 일은 말레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지·”
레그누스가 레녹을 내려다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굉장히 뛰어난 기사이자 술사라고 들었다· 결계술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걸출한 재능을 지녔겠지·”
“····”
“그러니 의식이 성공할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도록· 말레온이 직접 선택한 조력자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려세우는 레그누스의 모습·
“말레온이 깨어나면 바로 의식을 시작하겠지· 기다리고 있겠다·”
레녹을 데려다주기 위해 걸음했을 뿐 팔겁의 관리자라는 직위에 맞게 구겁의 시련 앞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망설임없이 떠나려는 레그누스를 바라보던 레녹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말레온이 성공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
레그누스의 걸음이 멈췄다·
“아니 조금 다르군·”
잠시 고민하던 레녹이 말했다·
“성공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할거라 생각하는거야·”
“···너·”
“구겁의 시련 내부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는 레그누스를 바라보며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말레온이 의식을 준비하는 동안 이쪽에 신경을 기울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나와 잠깐이라도 독대하기를 원했던 거야·”
“····”
“나를 죽이거나 제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이번 계획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 대해 할 말이 있기 때문이겠지?”
시련 앞에서 레녹을 기다리고 있던 것도· 레녹을 굳이 직접 말레온에게 데려다준 것도·
모두 레그누스의 입장에서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행동들 뿐이었다·
그것이 레녹과 독대할 시간을 만들고 그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면·
레녹이 아니라 승급의 법진을 조정하는 레녹의 역할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면·
그건 이번 계획의 성패가 말레온이 아니라 레녹이 맡은 승급의 법진에 달려 있다고 레그누스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힐끗 말레온을 돌아본 레녹이 말했다·
“말레온과 장생종들은 한참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니 아직 이쪽을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
“설령 인지했다고 해도 우리의 대화를 들을수는 없겠지· 그러니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듣고 싶군·”
레녹이 물었다·
“말레온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침묵하던 레그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인인 네가 거기까지 눈치챘다면 말해도 괜찮겠지·”
“····”
“이대로라면 말레온은 실패할 거다· 적어도 승급의 법진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안 돼·”
저 멀리서 빛무리에 휩싸인 말레온을 바라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건 진둔이 남긴 함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