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7화
9레벨(5)
외겁도시 쿤다라를 이끄는 원로성의 최고위원·
말레온과 니백스를 포함해 오직 다섯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최고위 장생종·
그중에서도 진혈(眞血)을 보유한 초월자가 이 자리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주변에서 경악하는 장생종들을 무시하고 레녹은 빠르게 레그누스라 불린 순록을 살폈다·
‘장생종치고는 꽤 평범한 크기로군·’
겉으로 보이는 크기는 대략 3미터에서 4미터 사이·
레녹이 그동안 보아온 십미터를 가뿐하게 넘기는 다른 장생종들의 본체에 비하면 외려 평범하다·
팔대용왕 알로건 원로성의 위원이던 니백스는 그 자체로 괴수와도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었으니·
장생종의 크기가 힘의 총량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상대적으로 평범한 크기·
하지만 저 순록의 발굽과 뿔 위로 피어오르는 푸른 불꽃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냉기를 품은 불꽃· 모순의 성질을 지닌 빙염인가·’
레녹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변했다·
‘저 불꽃 자체가 하나의 [불씨]로도 기능하겠군·’
차가운 불꽃 자체는 레녹 역시 연금술을 이용해서 종종 만들어 사용하곤 했지만·
레그누스라 불린 순록은 지금 마력을 비롯한 어떠한 힘도 휘두르지 않고 있다·
저 거대한 순록이 오직 스스로의 신체기관을 사용해 차가운 불꽃을 피워올리고 있다는 증거·
천번의 신분으로 항시 찾고 있는 새로운 [불씨]를 담을 기회인가·
“무언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 듯하군요·”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손가락을 까닥인 찰나 말레온이 말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승천자의 은총을 받은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련이 멈춰 버린 여파가 아니겠습니까?”
“시련이 멈춘 여파라고?”
“저와 함께하는 대술사가 팔겁의 시련에 도전하여 그 시스템 자체를 멈춰두었습니다·”
말레온이 침착하게 답했다·
발굽에 밟혀 손이 으스러졌음에도 말레온은 고통의 기미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승천자가 설계한 시스템에 간섭이 일어났으니 구겁의 시련까지 영향을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요·”
“····”
레그누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레녹을 바라보았을 뿐·
레그누스의 발굽에 부러진 손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말레온이 조용히 말했다·
“영역을 펼치겠습니다· 비켜주십시오·”
“대업을 앞두고 쓸데없이 힘을 낭비할 생각이더냐·”
원로성 레그누스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답했다·
“고작 이 정도 이변으로 낭비할 심력이었다면 원로성의 다른 위원들을 팔겁에서 쫓아내면서까지 계획을 관철한 이유가 무엇이었지?”
“····”
그 말을 듣는 순간 말레온이 레그누스의 발굽에 밟힌 손을 그대로 빼내었다·
순록이 앞발에 강하게 힘을 주었지만 말레온은 그런 저항을 느끼지도 않는 듯 손을 들어올렸다·
쩌저적···!!
부러진 뼈와 근육이 이어붙고 찢어진 비늘이 재생하면서 손을 원래대로 회복시켰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되감기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재생능력·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녹이 황당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마력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군· 순수한 용종의 회복력만으로 저 정도 재생능력을 보유한 건가?’
방금 말레온은 자신의 몸을 회복시키는데 있어 어떠한 술식도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그 축복받은 육신에 흘러넘치는 생명력과 회복력이 그가 입은 부상을 순식간에 회복시켰을 뿐·
구태여 과시하고 않았음에도 그것만으로 말레온이 어떠한 수준에 이른 괴물인지 대번에 알 수 있을 것 같다·
원로성의 두 최고위원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종족특성에 다른 장생종들이 조용히 숨을 죽인 그 순간·
“저를 믿고 팔겁의 안쪽까지 따라와 준 이들입니다·”
말레온이 순록과 마주 선 채로 말했다·
“여기서 이들을 잃는다면 계획에도 큰 차질이 생길 겁니다·”
“계획의 실패에 진정으로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이더냐?”
레그누스가 싸늘하게 물었다·
“너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안위인가 아니면 의식에 도전하는 너 자신의 여력인가?”
“···”
“어리석기는·”
대답하지 않는 말레온을 보며 순록이 차가운 한숨을 흘렸다·
“너를 원로성에 들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내 실수가 참으로 한탄스럽구나·”
느릿하게 발굽을 두들긴 레그누스가 돌아서고 말레온이 무어라 말하려던 그 순간·
[결계법진 전개]
파아아아아앗!!!!
순록의 발 밑에서 터져나온 무채색의 파문이 순식간에 주변을 잠식하고 일행을 끌어당겼다·
“후 후우···!!”
“허억 허억!!”
그제서야 다른 장생종들의 안색이 한결 편해지며 그들의 호흡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말레온이 짐짓 놀란 듯이 순록을 바라보았다·
“레그누스 님····”
말레온을 대신해 결계를 펼치고 팔겁의 압력에서 장생종들을 보호하는 레그누스의 대처·
하지만 그것만으로 숨을 쉬기 힘들어하던 장생종들에게 여유를 주기에는 충분했다·
“내 너의 재능과 성정을 눈여겨보아 사태를 지금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 부분에 대해 책임을 져야겠지·”
못마땅한 기색으로 말레온을 돌아보던 순록이 퉁명스레 말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네가 원하는 도전에 이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마라·”
“····”
“모든 것을 버리려는 각오로도 모자란 대업에 아직도 사사로운 감정을 들이려 하다니·”
그렇게 말하면서 혀를 찬 순록이 걸음을 휙 돌렸다·
“쯧··· 따라오도록· 네가 가려는 장소까지는 이들을 보호해 주마·”
“····”
나타나자마자 말레온의 손을 밟아 부러뜨리고 연신 질책해 놓고서는 정작 말레온을 도와주려 하는 건가·
[견뢰 보이느냐·]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비에라가 흥미로운 듯이 전성을 흘렸다·
[무슨 짓을 하는가 했더니 결계를 꽤 재미있는 방식으로 다루는구나·]
“그래· 결계의 내부환경을 영역과 유사한 수준까지 끌어올려서 다루고 있군·”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원심상을 투사할 수 있을 정도로 결계를 개조하여 영역 대용으로 사용하는건가· 저 자 역시 보통 술사는 아니야·”
자성영역은 현실을 개변하는 공능의 하나일 뿐 본래 결계술은 아니다·
레녹이 사용하는 천화만리향처럼 영역에 결계의 성질을 부여하지 않고서는 결계로서 기능하지 않는 바·
하지만 레그누스는 자신의 영역에 결계의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결계에 영역의 성질을 부여해 사용하고 있었다·
영역을 전개하기 위해 심신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반대로 영역의 효과 자체는 상당수 가져오는 사용법·
결계술을 다루는 레녹조차도 생각해 본 적 없으면서도 그 발상과 난이도는 초월적인 경지에 도달한 방식임이 분명하다·
레그누스 본인 스스로 엄청난 경지에 도달한 결계술사임이 틀림없겠지·
팔겁의 관리자이자 구겁의 시련을 주관하는 장생종이기 때문일까·
“자네들에게는 설명이 늦었군·”
레녹과 올리비에라의 대화를 눈치챈 말레온이 힐끗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레그누스 아이롬· 면록(冕鹿)의 수장이자 최고위원으로서 본인을 원로성에 추천해 주신 어르신이지·”
“왜 원로성의 최고위원이 이제서야 모습을 드러낸 거지?”
“니백스를 만났다면 알고 있겠지만 현재 원로성의 최고위원들은 공식적으로 팔겁에 기거하지 않고 있네·”
말레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외부의 변수와 개입을 줄이고 장막 바깥에서 일어날 후폭풍을 쿤다라 측에서 책임지지 않기 위해 원로성의 모든 전력은 팔겁에서 자리를 비운 상황이지·”
“····”
“레그누스 위원은 스스로 팔겁의 관리자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만큼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아직 여기에 남아 있던 걸세·”
말레온과 니백스를 제외한 다른 원로성의 위원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가·
마키나와 요르타에서 레녹이 도시를 뒤집어 놓았음에도 사태가 끝난 뒤에야 다른 초인과 세력을 조우했던 것처럼·
진혈을 지닌 최고위 장생종들 중 상당수가 말레온의 도전을 관조하고 있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 저 순록은 네가 도전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는 건가?”
“원로성에서 구겁의 시공을 비워둔 것은 의도한 결과였으니까· 내가 그 방침을 어기지 않기를 바라겠지·”
말레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결말이 오기 전에 이 도시의 방향성을 한번 크게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네· 도전을 앞둔 지금에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
“····”
“도망치는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어찌 세계의 결말을 지켜보지 않고서 도망칠 방향을 제대로 고를 수 있겠는가?”
말레온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쿤다라가 만들어진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장막 밖으로 나가 중앙에 남겨진 결말을 지켜보아야 해·”
“····”
“나는 이번 도전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이 맞는지 이 도시의 명운을 걸고 시험하려 하네·”
말레온 그노시스는 스스로 승천자가 되어 구겁에 자리하는 것으로 쿤다라를 작동시켜 장막을 이탈하려 한다·
장막의 이면 너머 숨겨진 외겁도시를 중앙전선 바깥으로 내보내어 결말을 직접 지켜보겠다는 그의 결의·
쿤다라의 명운이 걸린 계획을 지금까지 관철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이 말레온이 얼마나 뛰어난 초월자인지 증거하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많은 인과에 얽매여둔 초월자가 어떤 식으로 9레벨에 도달할지 레녹은 아직 짐작하지 못했다·
결국 그 과정을 직접 옆에서 지켜보면서 확인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미답의 깨달음이겠지·
레그누스가 전개한 결계를 두르고 팔겁의 전당을 주파한 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기나긴 복도를 지나 일행은 끝이 없어 보였던 거대한 팔겁의 전당 최외곽에 도착했다·
“도착했군·”
말레온이 기운이 없는 허령을 부축해 내려놓는 사이 선두에 홀로 서 있던 레그누스가 말했다·
“이곳이 바로 팔겁의 끝이자 구겁으로 향하는 시련의 입구다·”
“····”
휘오오오!!!
끝이 보이지 않는 전당의 복도 끝에 벽을 대신해 짙은 어둠의 구체가 느릿하게 회전하고 있다·
거대한 블랙홀이 벽을 대신해 전당을 가로막은 것처럼 기이하고 이질적인 어둠의 응집체·
저 어둠속으로 들어가면 구겁으로 향하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레녹은 본능적으로 저것이 외해(外海)의 어둠과 극도로 유사한 개념임을 깨달았다·
“승급의 법진은 저 어둠 너머에 있다· 저 어둠이 구겁으로 향하는 시련의 입구이자 시작인 셈이지·”
힐끗 시선을 돌리면서 설명하는 레그누스의 전언·
레녹은 그 거대한 순록과 시선을 마주한 뒤에야 그가 자신에게 직접 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련을 통과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
“위로·”
레그누그가 대답했다·
어둠 속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허·
저 너머를 뚫고 올라서면 구겁의 공간이 존재하는 것인가·
레녹은 그제서야 진둔이 설계했다는 아홉 번째 겁의 시련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외해와 유사한 환경을 뚫고 승급에 도전하여 물질의 한계를 넘어서만 도달 가능한 비처·
“반· 나는 이곳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조정을 준비하고 있겠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말레온이 말했다·
“내 몸을 도전에 적합한 상태로 조정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 그 사이 자네는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아·”
“····”
“전당에 위치한 다른 성소를 이용하든 팔겁에 보관된 유물이나 아티팩트를 습득하든 상관없네· 준비가 끝나면 곧바로 의식을-”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움직이는 레녹의 모습에 말레온이 순간적으로 말을 멈췄다·
“···어디로 가는 겐가?”
“조정과정을 굳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레녹이 그렇게 대꾸하며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되면 호출해라· 난 저 안에 있다는 승급의 법진을 먼저 확인하고 있을 테니·”
“···저 공간은 외해의 공허를 구현해놓은 마경이야· 아무리 자네라도 혼자서는 오래 버틸 수 없을 텐데?”
“걱정하지 마라·”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외해 바깥에서 버틸 수단은 이미 몇 가지 마련해두었으니까·”
고오오오···!!!
팔겁의 성소 끝에서 끊어진 길을 넘어 어둠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디딘 그 순간·
빠직!!
싸늘한 파열음과 함께 레녹의 몸을 둘러싼 실드가 부서져 내렸다·
강한 압력이나 이해할 수 없는 입자 소멸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냉기·
공허 안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숨결이 실드를 얼려 붙이고 강제로 깨트리고 있는 것·
하지만 레녹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한번 천천히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레녹의 몸이 중력을 거스르고 붕 떠오르면서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뒤집혔다·
“···”
어둠 속에 잠기는 순간 레녹의 감각 전체가 차단되며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든다·
어디에 서서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지· 제대로 호흡하면서 심장이 뛰고 있는지·
현실에서 마땅히 주어져야 할 감각을 육신으로 인지하고 반응할 수 없다·
생명에게 주어진 기능 감각 축복 권리를 앗아가는 [바깥]의 어둠·
진둔은 이러한 외해의 어둠을 오직 자신의 결계술만으로 흉내 내어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인가·
항하사미궁에서 그에게 결계술을 물려받았음에도 여전히 아득한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실감한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우우웅···!!!
육신의 감각이 뒤틀리고 어긋나며 소실되는 와중에도 레녹의 마력만큼은 언제나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인간으로서 갖고 태어났어야 할 기능과 시간을 버려가며 손에 넣은 재능은 단 한순간도 레녹을 배신하지 않는다·
찰칵 찰칵···!!!
왼팔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거칠게 회전하면서 레녹의 팔에 걸린 봉인을 빠른 속도로 해체했다·
천뢰건의 능력을 사용해 잠궈 두었던 봉인을 해체하고 그 능력을 어둠 속에 드러낸 순간·
쩌어어어업!!!!
왼팔에서 뿜어져 나온 보랏빛의 광채가 어둠을 지워 없애기 시작했다·
자색으로 물든 왼손에 어둠이 맞닿을 때마다 암흑이 비틀리며 망가져 소멸한다·
어둠 자체를 무위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존재하지 못하도록 그 기반 자체를 망가뜨리는 위화감·
뇌신전의 성역에서 선뢰지체를 실험하다 손에 넣은 대가 아닌 대가·
레녹의 초월적인 재능이 아니라 그와 상반되는 페널티를 투사하는 금기병장·
끼기기기긱···!!!
구겁의 시련을 가리고 감추는 어둠이 망가지고 무너지며 기능을 잃어버린다·
레녹의 육신을 묶은 ‘속박’이 레녹의 몸이 아니라 눈앞의 어둠을 망가뜨리고 풀어헤친 그 순간·
화아아악!!!
어둠이 걷히면서 그 너머에서 거대한 미로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로?”
무심코 목소리를 내어 중얼거린 뒤에야 레녹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둠이 사라지면서 구겁의 시련이 모습을 드러내고 레녹의 감각도 원래대로 돌아왔던 것·
휘오오오!!!
귓가에 불어닥치는 차가운 바람·
까마득하다 못해 아찔하게까지 느껴지는 수천 미터 상공 위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미로를 내려다본다·
어둠이 걷히는 것과 동시에 중력이 생겼는지 레녹의 몸이 미로를 향해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화아악!!
솟구치는 바람을 맞으면서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무심코 표정을 찌푸렸다·
마력을 운용하자마자 주변에서 강한 저항이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
‘마력회전율이 굉장히 낮은 수준까지 떨어지는군· 이 미궁의 자체적인 특징인가?’
왼팔의 금기병장이 아직 작동하는만큼 마력효율이 억제되는 것을 감안해도 정도가 지나치다·
이 미궁의 환경 자체가 마력을 사용하는 행위를 극단적인 수준까지 억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터·
물론 레녹의 성취라면 외부요인 때문에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수율이 조금 떨어지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다·
철컥!!
공간을 비틀고 천뢰건을 꺼내 왼팔에 꽂아 넣고 금기병장의 능력을 잠궈버린다·
[어라 마스터?]
그 순간 레녹의 품 안에 숨어 있던 다비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말을 걸어왔다·
[저 아래에 위치한 미궁· 제 데이터베이스에 자료가 남아 있는 것 같은데요?]
“···네 데이터베이스에 자료가 남아 있다고?”
다비의 데이터베이스는 레녹과 함께한 모든 경험을 이미지나 수치의 형태로 환산해 기록하고 정리하는 용도·
전뇌정령으로서 태어난 흑마법사의 반역사태 이후 모든 데이터를 다비는 스스로 정리해서 보관하고 있다·
그런 데이터베이스에 미궁의 형상이 남아 있다는 것은 레녹이 다비와 함께 미로를 한번 마주한 적이 있다는 증거·
“···설마·”
진둔이 남긴 승급의 법진·
구겁의 시련 안에 존재하는 정체불명의 미로·
그리고 다비의 데이터베이스에 일치하는 자료·
일련의 상황에서 순식간에 한가지 기억을 떠올린 레녹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사상전역 항하사미궁(恒河沙迷宮)의 최심부 요람과 패턴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어요·]
다비가 신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만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잠깐 항하사미궁과 패턴이 일치한다는 말은···!”
우우우우웅···!!!
그 순간 번뜩이는 빛이 엄청난 속도로 미궁 전역을 주파하며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궁을 가로지른 마력광이 번뜩이면서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한 마법진을 그린다·
파아아앗!!!
떨어지는 레녹을 감싸안듯 미궁 전역을 발판으로 삼아 펼쳐지는 수백 미터 크기의 마법진·
직후 마법진 위로 거칠게 흘려 쓴 듯한 강렬한 글귀가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지기 시작했다·
[항하사미궁 조작권한 보유자 인식 완료]
[천상위주법위계 법진 기동 준비]
[의식 개시]
부아아아아앙!!!!
동시에 미궁 전역이 새하얗게 발광하면서 레녹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회전하며 떠올랐다·
마치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미궁 전체가 들썩이며 작동하려는 듯한 위화감·
그제서야 다비 역시 이상을 느끼고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라···?]
“진둔이 떠나면서 내게 항하사미궁의 조작권한을 넘겨준 적이 있었지·”
레녹이 발 아래서 발광하는 거대한 마법진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넘겨받은 권한이 이 미궁과 반응하고 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진둔과 오백로를 두며 결계술을 전승받은 요람의 기억·
하지만 진둔은 그때 레녹에게 세계의 비밀과 결계술만을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사상전역 항하사미궁의 조작권한·
진둔이 사망하고 미궁이 무너지면서 더는 쓸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던 미궁의 조작권한이·
항하사미궁 일부를 모방한 구겁의 시련에서 강제로 발동하기 시작했던 것·
그제서야 레녹이 하는 말의 의미를 눈치챈 다비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럼 의식 시작이라는 건···!!]
“구겁의 시련이 활성화되면서 그 안에 담긴 승급의 법진까지 강제로 발동되어버린 것 같다·”
레녹이 표정을 굳히면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금 당장 승급 의식이 시작되려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