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5화
9레벨(3)
레녹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다리 위를 걷고 있었다·
쿤다라에 도착해 포혈공을 만났던 일겁의 시련보다 훨씬 더 거대한 다리·
바깥에는 까마득한 절벽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말없이 이쪽을 내려다보는 은빛의 용인과 그 뒤에 자리한 수십 명의 고위 장생종들·
[저자가 바로 네가 말한 이번 대의 도전자로구나·]
옆에서 걷고 있던 올리비에라가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마안으로 주변을 향한 시선을 모두 읽어낸 것이겠지·
[진혈을 보유한 용종· 그것도 열 세대에 한 번 태어난다는 보석룡(寶石龍)인가·]
그녀가 흥미로운 듯 전성으로 속삭였다·
[저만치 고귀한 태생이 8레벨에 도달했다면 도전을 꿈꾸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올라탈 배를 잘못 고르지는 않았구나·]
“보석룡이라· 말레온의 종족을 따로 부르는 호칭이 존재하는 건가?”
[몇 번의 세대를 거쳐 태어나는 돌연변이· 그중에서도 격세유전으로 특별한 이능을 쥐고 태어나는 용종을 일컫는 말이지·]
올리비에라가 그렇게 말하며 마안을 번뜩였다·
[그 재능의 방향성을 굳이 따지자면 다른 장생종보다는 오히려 나의 마안과 비교를 해야 할 것 같구나·]
“···말레온의 존재가 칠채보의 마안과도 같은 등급이라고?”
[나의 마안이 발하는 칠색(七色)의 공능이야말로 마안 각성의 인과에 의존하지 않는 돌연변이일지니·]
웃음기 어린 전성으로 대꾸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저 자는 스스로의 태생만으로 그러한 신비와 기적을 손에 넣은 존재다· 분명 쿤다라의 모든 용종을 통틀어서도 남다른 축복의 보유자겠지·]
“····”
[다만 그러한 태생을 지니고도 저런 애매한 의태를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구나· 보통 저 정도 되는 용종은 차라리 본체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할진대·]
자신의 마안에 대해 극도로 높은 자긍심을 지닌 올리비에라가 말레온의 존재가 그와 같다고 인정한 것인가·
그만큼 말레온의 태생과 신분이 쿤다라에서도 보기 드문 희귀한 결과라는 사실이라는 뜻이겠지·
레녹이 그에 대해 무어라 말하려던 그 순간·
“어딘가 귀가 간지럽다 했더니 본인에 대한 칭찬을 하고 있었군?”
안개 저편에서 말레온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추켜세운다고 뭐가 나오지는 않네·”
“···말레온·”
수천미터는 떨어진 절벽 끝에 서 있던 말레온이 어느새 다리 위에서 레녹을 맞이하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근육질의 체격· 레녹보다 훨씬 더 거대하면서도 훤칠한 거구의 용인·
“팔겁(八劫)의 시련에 도달한 것을 환영하네·”
화려한 용의 머리를 한 거인이 수십에 달하는 수행원을 거느린 채 씩 웃었다·
“우리가 함께 구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네와 나 모두 미리 그 전 단계의 시련을 통과해 두어야 하거든·”
“····”
“게다가 승급 의식을 진행하는 도중 팔겁을 몇 번이나 드나들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계획의 첫 번째 단계는 이미 정해져 있던 셈이지·”
말레온이 레녹을 찾아와 승천 계획을 시작하겠다 선언한 직후·
레녹은 올리비에라와 함께 팔겁의 시련에 도전하기 위한 관문 앞에 서 있었다·
구겁의 시련에 도전하기 위해 미리 그 전 단계의 시련을 마쳐두어야 하는 것은 최소조건·
거기에 승급 의식을 준비하는 도중 팔겁을 왕복해야 하는 만큼 출입자격을 얻어두어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
“자네가 팔겁에 출입할 자격을 얻고 나면 바로 구겁의 시련 앞으로 이동해서 승급 의식을 시작할 예정일세·”
“네 뒤에 서 있는 장생종들은?”
“이번 승급 의식에서 나를 보조하기 위해 모인 수행원들이지· 그들이 지닌 이능과 술식으로 나의 심신을 도전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조정할 걸세·”
말레온이 자신의 뒤에 도열한 수십 명의 장생종들을 가리켰다·
“자네가 시련을 마치는 사이 나 역시 이곳에서 저들의 도움을 받아 의식을 시작할 준비를 할 거야· 팔겁의 시련을 통과하는 즉시 의식을 시작할 수 있게 준비하는 거지·”
“칠겁과 팔겁의 환경이나 조건은 여러모로 다르다고 들었는데·”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네 몸을 도전에 적합한 상태로 조정할 거라면 이곳보다 팔겁에 들어간 뒤에 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수행원들 모두가 팔겁의 시련을 통과할 정도로 높은 성취를 쌓은 것은 아닐세·”
말레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나 역시 팔겁 안에서 ‘조정’을 마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고집할 수는 없지·”
“····”
“대충 이번 일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해가 된 모양이군·”
말레온이 흐뭇한 기색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좋아· 일이 빨리 진행되는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니지· 허령!!”
“···예·”
부름과 함께 말레온의 뒤에서 수척한 인상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말레온이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칠겁(七劫)의 관리자인 그대가 나설 시간일세· 이 친구들이 팔겁의 시련에 도전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
허령이라 불린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게슴츠레 눈을 뜬 채 레녹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레녹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노골적인 태도·
하지만 말레온은 그것을 보고도 태연하게 허령의 어깨를 두들겼다·
“부탁하지· 할 수 있겠나?”
“···은성(銀星)과 독악(毒岳)의 명이 있었는데 저 같은 늙은이가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허령이라 불린 노인이 조용히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의 몸이 밝게 빛나더니 새하얀 깃털을 흩날리는 거대한 학(鶴)으로 변했다·
펄럭!!
색이 바랜 날개를 펼치면서 길쭉한 부리를 기울인 학이 노쇠한 눈빛을 레녹에게 향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대접하도록 하지요·”
“좋아· 나는 바깥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성공을 기원하고 있도록 하겠네·”
그 모습을 본 말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걸음을 돌려세웠다·
퍼엉!!
그의 뒤에 서 있던 수행원이 거대한 전갈로 변해 말레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훌쩍 뛰어 전갈의 등에 올라탄 용인이 레녹을 향해 씩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팔겁의 시공에서 봅세· 건투를 빌지!”
파아앙!!
몸을 웅크린 전갈이 엄청난 도약력으로 뛰어 수백미터 넘게 떨어진 절벽 위를 기어오른다·
남아 있던 수행원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하나둘씩 기척을 감추기 시작했다·
조용해진 다리 위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허령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까이 오거라 인간·”
“····”
“시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네 이름을 명부에 적어넣고 횟수를 헤아려야 할 테니·”
“횟수라는 건 무슨 뜻이지?”
“겁의 시련을 통과한 적이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허령이 기가 차다는 듯 부리를 저었다·
“도전자가 시련에 도전할 수 있는 유예가 정해져 있다· 한번 실패하면 다음 시련에 도전하기 전까지는 수십 년을 기다려야 하지·”
“····”
“이를 어기면 안개의 우주에 독자적으로 흐르는 쿤다라의 시간선이 뒤틀리기 때문에 하위 겁의 관리자들이 도전자의 이름을 적고 유예를 관리한다·”
“한 번의 도전에 한 사람의 이름만을 적을 수 있는 건가·”
레녹이 올리비에라를 힐끗 보면서 물었다·
“이쪽은 동행이 있는데 그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말했듯이 한 번에 도전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다·”
허령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다만 너희 둘이 함께 시련의 다리 앞에 섰으니 네가 실패하면 저 여자 역시 실패한 것으로 간주할 테니 그렇게 알도록·”
“····”
[···후후·]
고압적인 허령의 대답에서 무언가 느낀 것인지 올리비에라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필요 이상으로 까다로운 저 장생종의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펄럭!!
수 미터에 이르는 노쇠한 학이 날개를 펼치자 그 아래서 낡은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그 아래 빼곡하게 적혀 있는 이름모를 무수한 도전자들의 명단·
먹물에 절어진 붓을 두루마리 아래 가져다 댄 학이 레녹을 응시했다·
“이름과 출신· 나이·”
“반·”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녹이 대답했다·
“출신은 발칸으로 하지· 나이는 모르겠군·”
“뭐라?”
“나이라는 건 영혼의 시간인가 아니면 육체의 시간인가?”
눈썹을 꿈틀대는 허령의 모습에 레녹이 반문했다·
“생명체가 나이를 먹는다는 개념의 기준은 뭐지? 행성의 공전주기인가 아니면 장막 안에 독자적으로 흐르는 쿤다라의 시간선인가?”
“····”
“장생종도 아닌 내가 그런 기준을 일일이 지켜가면서 나이를 센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 마음대로 적어내도 좋다·”
레녹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이 시험에 두 번이나 도전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 마침 잘 말해주었구나·”
노쇠한 학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이번 도전에 실패한 뒤로는 두번 다시 말레온 님 앞에 얼굴을 비추지 말거라· 그대로 쿤다라를 떠나 속세의 인간들과 어울려 살도록·”
“····”
“단명종의 몸으로 빼어난 성취를 거두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장막 바깥에서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을 죽였다지?”
허령이 말했다·
“하나 말레온 님께서 도전하는 위업은 살성에 젖은 술사 따위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위대한 술법의 묘리를 무한히 뒤쫓아도 도달하기 어려운 진리를 탐구하는 일이지·”
“····”
“도시에서 장생종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고 들었지만 그런 얄팍한 적선 따위로는 네 끔찍한 본성을 숨길 수 없음이야·”
학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멸시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떠나라· 그리고 두 번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오지 말아라· 짧은 시간을 사는 이들은 쿤다라의 대업보다 중히 여겨야 할 일이 얼마든지 있을 테니·”
“재미있군· 말레온이 떠난 뒤에야 이런 말을 하는 것부터·”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말레온의 옆에 남길 사람을 정리하는 것도 칠겁의 관리자가 맡은 역할이었나 보지?”
“말레온 님께서 이루시려는 도전은 그분 하나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계몽을 위한 대업이지·”
허령이 대꾸했다·
“지학(知鶴)으로 태어난 내 눈에는 네가 짊어진 살생의 업이 얼마나 깊은지 보인다· 네가 장막 바깥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레녹을 바라보는 학의 눈빛이 불쾌함으로 번들거렸다·
“속세에서도 필시 온갖 사특한 불길함을 몰고 다니는 존재였겠지·”
“애초에 이 계획을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 알고 있을 텐데·”
레녹이 웃으면서 물었다·
“말레온의 계획에 매달릴 생각은 없다· 실패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지· 하지만····”
싸늘한 눈빛으로 노쇠한 학을 바라본 레녹이 말했다·
“앞으로도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귀찮게 군다면 그 날갯죽지를 찢어버릴 테니 그렇게 알아라·”
“말레온 님께 이미 한번 구원받은 삶· 남은 여생은 내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지·”
레녹의 섬뜩한 경고에도 허령은 동요하지 않았다·
담담한 기색으로 두루마리를 접은 뒤 그대로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을 뿐·
펄럭!!
“내 죽음으로 말레온 님께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좋겠군·”
“····”
레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허령을 무시하고 자욱한 안개 너머 서서히 강해지는 기척을 응시했을 뿐·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시련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거대한 학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선언했다·
“그럼 지금부터 팔겁의 시련을 시작하도록 하지·”
* * *
칠겁과 팔겁의 경계선에 위치한 안개의 시공·
지학(知鶴) 허령이 직접 관리하는 비처·
시련이 진행되는 관문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로 거대한 학이 착지했다·
펄럭!!
새하얀 깃털을 흩날리며 날개를 접은 학이 절벽 끝에 선 용머리 거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말레온 님· 이것으로 충분하겠습니까·”
“충분하네 허령·”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인 말레온이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견뢰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그가 일단 팔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야 할 테니까·”
“····”
“관리자로서 책무를 다해주어 고맙군· 잊지 않겠네·”
“말레온 님께서 제 손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진혈을 나눠주신 것에 비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일이지요· 하지만····”
휘오오오!!
바람이 불어오는 거센 절벽·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아래쪽에 홀로 서 있는 레녹을 시큰둥한 기색으로 내려다본 허령이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해도 눈 깜짝할 사이에 태어나 죽어가는 것들입니다·”
“····”
“저희에게 있어서는 개나 고양이와도 같지요· 말레온 님께서 저자와 교류하는 것은 말리지 않겠으나····”
노쇠한 학의 눈빛이 일순 묘하게 변했다·
“일일이 정을 주셨다는 분명 후회하게 될 겁니다·”
말레온은 허령이 레녹과 같은 단명종을 내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허령에게 시련의 준비를 맡겼을 뿐·
오랫동안 알고 지낸 허령을 신뢰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며칠밖에 지나지 않은 저 인간종을 믿기 때문일까·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허령은 만인에게 온정을 주는 위대한 은룡의 심중을 모두 읽어낼 수는 없었다·
“속세의 일이 덧없다 느껴서 속세의 답이 무의미하다 생각해 우리는 장막의 이면에 숨어버렸지·”
말레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르스노바가 속세의 인과에 휘말려 멸망한 지금 우리가 이 방식을 고수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우리가 진정 옳은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속세로 나가 직접 확인해야 해· 그리고 나는-”
천천히 시선을 하늘로 들어올린 말레온이 중얼거렸다·
“승천에 도전할 자격을 얻는 것이 그 믿음을 관철할 유일한 방법이라 확신하고 있네·”
“말레온 님····”
“스스로를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무엇 하나 이룰 수 없지· 자신을 믿고 있기에 타인을 믿을 수 있는 게야· 견뢰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
말레온의 시선이 다리 아래쪽에서 마력을 끌어올리는 레녹을 향했다·
“자네는 아직 믿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내게는 보여· 저 남자는 대륙 역사상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재능을 타고난 술사일세·”
“····”
“결말이 다가온 지금에 와서야 저런 마법사가 태어나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나 반대로 지금같은 시기이기에 비로소 저런 자가 나타난 것일지도 몰라·”
웃음을 터트린 말레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운명의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네·”
“···시작하는군요·”
파아아앗!!!
레녹이 앞으로 걸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다리 앞에서 핏빛의 술법진이 펼쳐졌다·
안개가 낀 다리를 가로막고 회전하는 불길하고 거대한 술법진의 형상·
말레온의 곁에서 지켜보던 다른 고위 장생종들이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마천식(魔天式)인가!!”
“운도 없군· 하필 팔겁의 시련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관문을···!!”
“10년 넘게 마주한 도전자가 없다고 들었는데 이 시기에 걸려 버린 건가·”
팔겁의 시련은 도전자마다 각기 다른 형태를 지니는 바·
하지만 유독 위험한 시련의 경우에는 입소문을 타고 정보가 퍼지기도 한다·
지금 레녹의 앞에 펼쳐진 핏빛의 술법진은 마천식(魔天式)이라 불리는 고대의 악마 숭배 의식의 일종·
665가지 술법진을 정해진 시간 안에 해체하고 그보다 빠른 시간에 모조리 다른 방식으로 조립해야 한다·
실패하면 술법진 자체가 악마화(惡魔化) 단계에 돌입해 도전자를 무조건적으로 적대하는 구조·
팔겁의 시련에서 마천식을 마주한 도전자 중 생존자는 단 두명· 통과자는 아무도 없다·
8레벨에 도전하는 장생종들 사이에도 그 악명이 널리 퍼져 있을 만큼 위험한 시련·
철컥!!
하지만 레녹은 마천식의 술법진을 보자마자 마력을 불어넣고 조작하기 시작했다·
술법진을 거대한 마력회로로 삼아서 거침없이 법진을 조작하는 모습·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허령의 표정이 미묘하게 꿈틀거린 그 순간·
빠지직!!!
마천식의 술법진이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더니 모조리 해체되어 전혀 다른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법진의 외곽을 이루는 경계선이 팔다리를 이루고 내면의 기호와 문자가 얽혀서 몸을 구축한다·
T 자 형태의 머리를 지닌 핏빛의 말라깽이 거인이 술법진을 제 몸으로 삼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뒤틀리고 감각에 혼동이 오는 듯한 기괴한 악마의 형상·
그 모습을 본 다른 장생종들이 놀란 표정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아 악마화 변이체···!!”
“악마 숭배 의식이 완성됐군· 벌써 악마화 단계에 진입한 건가!!”
“시련을 시작한지 아직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어·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마천식의 술법진이 변형되어 악마화되는 것은 시련이 실패했다는 전조·
하지만 시련을 시작하자마자 이러한 결과물이 튀어나온 것은 장생종들조차 처음 보는 일이었다·
“아니 그게 아닐세·”
말레온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술법진을 해체하고 조립할 생각이 없었군· 강제로 실패를 유도해 악마화 단계를 이끌어낸 게야·”
“그게 무슨····”
다른 장생종들이 말레온의 말을 듣고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악마화가 끝난 변이체는 저희들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설마 저 인간종이 정면에서 변이체를 찍어눌러서 시련을 통과하려 한단 말입니까?”
“힘의 논리로 시련을 통과할 생각이었다면 이리 번거로운 방식을 택하지도 않았겠지·”
말레온이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반이 어째서 이런 방식을 선택한 것인지는 알 것 같군·”
말레온을 따라 하늘을 바라본 허령이 순간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전위공명(電圍共鳴)]
다리 끝에서부터 번뜩이는 푸른 벼락이 자욱한 안개를 잡아먹고 솟구친다·
절벽 위로 솟구친 벼락의 광채가 수백 갈래로 쪼개지며 동시에 서로 이어붙기를 반복하고·
분절과 공명의 극에 이른 벼락의 연결이 팔겁의 관문을 관통하듯 회전하며·
말레온과 허령이 서 있는 절벽의 하늘을 아름다운 광채로 물들였다·
[집뢰편향(輯雷偏向)]
파아아아아아아앗!!!!!
“····”
할 말을 잃어버린 허령이 천천히 입을 벌린다·
말레온이 감탄하고 그의 뒤에 서 있던 술사들의 표정이 덩달아 창백해졌다·
인간종에게서는 결코 상상해 본 적 없던 온 하늘을 물들이는 아름다운 별빛의 파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의념의 절정에 도달한 경외 어린 침묵이 공간을 가득 메운 그 순간·
[대라연청(貸羅聯靑)]
번쩍!!!
수백 갈래로 쪼개져 범람하던 하늘빛 벼락이 악마 변이체를 향해 한 점으로 수렴하듯 쏟아져 내렸다·
[끼기기기기기!!!!!]
나선으로 회전하는 대라연청의 벼락 줄기 속에서 악마의 전신이 뒤틀리고 망가져 내린다·
기괴한 비명이 터져 나오며 술법진을 해체해 만들어진 악마 변이체가 녹아내렸다·
말라비틀어진 팔다리가 사방에 눌어붙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면서 흐릿해진다·
악마가 핏빛의 광채를 번뜩이면서 발작하지만 은백색의 빛은 더욱 강해지며 저항조차 무위로 돌리고·
파아아아앗!!!!
다리 위로 자욱하게 깔린 안개를 전부 증발시키면서 관문의 풍경을 훤히 드러냈다·
“큭···!!!”
사태를 관전하던 이들조차 순간적으로 시선을 피할 만큼 강렬한 광량·
하지만 그 너머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끼기 기기긱···!!!]
뇌인을 정면에서 맞은 악마는 그 자리에서 소멸하지 않았다·
다리 위에 전신이 기이하게 눌어붙은 채 꿈틀거리고 있을 뿐·
그런 악마의 존재를 [문]으로 삼은 것처럼 비어있던 관문 뒤로 또 다른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레녹이 말레온의 도움을 받아 출입한 적 있던 팔겁의 전당·
쿤다라의 창립자들을 기리는 조각상이 세워진 안개의 우주가 비치는 성소·
뒤늦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달은 장생종들이 경악 어린 전성을 내뱉었다·
“팔겁의 시련을 진행되던 도중에 강제로 멈춰 버린 건가!!”
술법진 해체와 조립에 실패한 것도 악마화된 변이체를 죽여 시련을 통과한 것도 아니다·
대라연청을 이용해 마천식의 변이체에게 내장된 마력에 연쇄폭발을 일으키고·
동시에 다비의 연산능력을 사용해 막대한 정보량을 불안정해진 변이체에게 강제로 주입·
술법진으로 만들어진 변이체가 박살 나기 직전 억지로 망가뜨려 그 기능을 멈춰 버렸던 것·
그 결과 팔겁의 시공으로 건너가는 관문 자체가 애매하게 열린 채 멈춰버렸다·
“인간종이 진둔이 설계한 시스템에 간섭했다고···!!”
“쿤다라의 누구도 시련의 구조 자체에 개입하지는 못했는데 대체 어떻게?”
“처음부터 마천식의 술법진을 가지고 놀고 있었군· 연산능력이 대체 어느 정도인 거지···?”
겁의 시련으로 이루어진 관문을 마비시켜 시련에 도전하지 않은 타인이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 버린 것·
그리고 레녹이 이렇게 억지로 관문을 열고 시련을 멈춘 이유는 정해져 있었다·
“혼자 시련을 통과해 팔겁으로 건너가면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겠지·”
올리비에라를 향해 눈짓한 레녹이 절벽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하지만 팔겁의 시련을 주관하는 시스템 자체를 마비시킨 동안에는 다른 이들도 팔겁에 출입할 수 있을 거다·”
“···반·”
“의식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팔겁에서 다른 장생종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말레온을 향해 레녹이 고개를 까닥였다·
“준비가 됐다면 안내해라· 진둔이 남겨두었다는 승급의 법진을 직접 확인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