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2화
쿤다라(15)
9레벨의 승천자 편람(偏濫)·
우물을 지키는 뱀이자 미천한 영수의 몸으로 주술을 익히고 자격을 얻은 초월자·
자신의 감각을 구부려 말 그대로 행성 전체를 사정거리에 넣을 수 있는 괴물·
천견의 마지막에 대해 빚을 졌다며 승천자가 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한 편람의 말·
하지만 레녹은 편람이 정확하게 어떤 일을 두고 빚을 졌다 말하는 것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편람의 사념체 때문이군·’
견뢰와 천번의 신분을 충돌시켜 이목을 끌고 라피스를 세계의 경계선에 올려보냈던 당시·
도시 전역이 지켜보는 전투의 끝에서 레녹은 현실에 튀어나온 편람의 사념체를 상대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사념체를 억지로 죽여서 전투를 종식시키기 위해 팔련뇌이궁의 편린을 현실에 끌어냈던 바·
편람은 그때의 일을 두고 레녹에게 빚을 졌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사념체가 그때 발칸에 나타난 건 편람의 자의가 아니었던 건가· 하지만 그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우물을 지키는 뱀 편람 파드메 키에사는 자기 자신을 주술로서 완전히 재구축해 자격을 얻은 승천자·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버리고 정립한 반동으로 그녀는 끝없는 망각의 저주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기 힘들어하는 이 초월자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사태가 그만큼 편람 본인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였다는 증거·
무엇보다 고작 의식세계에서 한번 만난 견뢰의 신분을 편람이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건-
“····”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 멈춰 버린 니백스 오로시아의 자성영역·
제자리에 얼어붙은 니백스와 사태를 파악하고 조용히 시선을 돌린 올리비에라·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레녹의 대답을 기다리는 의태한 승천자까지·
고요한 침묵 속에서 레녹은 자신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빠르게 골라냈다·
“승천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군·”
“····”
“당신이 자격을 얻은 초월자라 해도 어떻게 그 과정을 직접 거들어줄 수 있다는 거지?”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의식적으로 표정을 다듬는다·
레녹 역시 이 주술의 정점에 도달한 초월자를 상대로는 확실한 승산을 가늠하기 어려운 바·
하물며 기억이 불안정한 만큼 언제 자신이 한 말을 잊고 폭주하거나 변심해도 이상하지 않다·
자칫 잘못하면 이 외겁도시 전역을 망가뜨릴 수 있는 승천자와 대면하고 있다·
그 의중을 정확히 가늠해야만 이 자리에서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을 터·
하지만 긴장하고 있는 레녹과는 달리 편람의 반응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이 도시에 축적된 사념은 진작에 한계를 초과했다· 별의 그늘 아래 숨어 정상적인 인과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사념이라고···?”
“그 반동을 폭발력으로 삼아 운명을 비튼다면 잠깐이나마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테니· 옆에서 방향을 잡아줄 수 있다·”
구릿빛 피부의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꺾으면서 말했다·
“조금 아슬아슬하지만 너 정도 되는 구도자라면 도전해 본다 해도 괜찮겠지·”
“····”
쿤다라에서 도전할만한 조건이 갖추어졌고 레녹이 그에 부합하기 때문에 움직였다는 말인가·
필연적이거나 특수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할 수 있으니까 해본다는 느낌의 막연한 대답·
적어도 편람에게 들을 거라 예상하고 있던 답은 아니었다·
잠시 고개를 기울인 채로 고민하던 레녹이 물었다·
“말레온의 도전과는 아예 관련이 없는 일인 건가?”
“그런 이름은 모른다·”
편람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필멸자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어진 지는 오래되었지· 내가 볼일이 있는 것은 너 하나뿐이다·”
“····”
말레온에 대해 모르면서도 이 도시에서 승천자가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깨닫고 있다·
과정에 대해서 일절 알지 못하면서도 결과를 먼저 내다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개입하려 한다·
무지(無知)와 전지(全知)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초월성이 레녹으로 하여금 편람을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격차에 판단을 주저하던 레녹이 물었다·
“왜··· 지금 이 시점에 내게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
편람은 그 말에 대답하기 앞서 한참 동안 가만히 레녹을 바라보았다·
마치 레녹을 바라보면서 잠시 잊어버린 기억을 되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버티기 힘든 정적이 흐르고 편람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 수 있으니까 하려 한다고 했었지·”
“···뭐?”
“해낼 수 있으리라 믿으니까 도전한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
레녹은 그제서야 편람이 하는 말을 깨닫고 소름이 훅 돋는 것을 느꼈다·
젊은 천견의 의식체와 함께 편람을 만났었던 의식공간에서의 대화·
어째서 승천에 도전하려 하는지 편람이 묻고 레녹이 대답했던 그 말을·
저 승천자가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
“네가 품은 염원과 대답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부족하지 않다 고했었지·”
“그건····”
망각의 저주에 묶여 자기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편람이 그때 레녹이 남긴 대답을 기억하고 있다·
그 대답이 편람 자신에게 있어서 그만큼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레녹이 무어라 답하기 위해 입을 달싹거린 그 순간·
콰아아앙!!!
영역 전체가 거세게 흔들리며 저 멀리 니백스가 전력으로 도주하는 것이 눈에 비쳤다·
레녹과 편람이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서 아예 자신의 독성권역을 탈출해 도망칠 생각인가·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군·”
힐끗 시선을 돌린 편람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주력을 끌어올렸다·
부아아아앙···!!!
8레벨의 독성술사 니백스 오로시아가 전개한 자성영역 [무궁사악질(無窮蛇惡疾)]·
자신이 탈태한 허물을 [문]으로 삼아 자성영역과 독성권역을 강제로 이어붙이고
그녀 자신의 독성술식을 시공간 전체에 녹여 질병의 화신으로 화한다·
본래라면 영역 안에 발을 들인 레녹과 올리비에라를 전조조차 없이 필중에 가깝게 중독시켜야 했을 터·
하지만 니백스가 필살의 의념을 담아 전개한 자성영역이 단 한사람의 초월자 앞에 빛이 바래고 있었다·
쿠과과과!!!!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한 편람이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독으로 물든 땅이 갈라지고 무너진다·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니백스가 구축한 영역을 지워 없애 버리는 모습·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존재만으로 니백스의 영역을 덧칠하고 뭉개 버리는 건가· 대체 의식의 크기가 어느 정도길래···!!’
편람은 모든 승천자들을 통틀어서 가장 광대한 심상의 풍경을 지닌 초월자·
심상의 밀도나 내구성 자체는 특출나지 않아도 의식의 크기만큼은 말 그대로 압도적인 수준이다·
그렇기에 편람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니백스의 심상이 각인된 영역을 박살 내고 있던 것·
하지만 편람은 그런 레녹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원래라면 이 정도로 균형이 크게 기울어질 일은 아니다·”
“···뭐?”
“이 영역이 내게 잡아먹히는 건 저 장생종의 본질이 나와 상하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니·”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 위에서 몸부림치는 니백스를 보며 편람이 말했다·
“모름지기 종의 미래는 큰 흐름으로 귀결되는 것이 규칙· 그 정점에 내가 존재하고 있으니 저 뱀 역시 그리될 것이다·”
“····”
언젠가 레녹의 수호령수를 주제로 이것과 비슷한 말을 편람에게 들은 적이 있다·
레녹의 수호령수가 지닌 본질이 편람과 유사하여 언젠가 그녀에게 잡아먹힐 것이 예정되어 있기에·
군령도시 요르타까지 가서 수호령수에게 걸린 탈태의 저주를 지워 버리고 돌아오지 않았던가·
만약 그것과 같은 탈태의 저주가 니백스 오로시아에게 부여되어 있다면·
“으아아아아!!!”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 위에 떠오른 흰 뱀이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편람이 들어올린 손을 따라 움직이면서 타의에 의해 강제로 위치를 바꾸는 모습·
소녀가 눈짓할 때마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속절없이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콰아아아앙!!!
스스로가 만들어낸 거대한 독의 늪 아래 굴복하듯 머리를 조아린 니백스가 울부짖었다·
“한낱 짐승 따위에게 고결한 장생종인 이 내가!!!!”
“····”
“탈태의 저주가 왜···!!! 왜 짐승으로 태어난 저 뱀이 나보다도 더 상위종에 도달했다는 게야!!!!”
“위계를 초월한 뒤에도 타고난 태생에 집착하면서 우열을 정하려 하는 건가?”
편람이 나직하게 물었다·
“결말을 알면서도 자연의 순리를 부정해 왔으니 네가 맞이한 결말이야말로 가히 저주라 칭할 만하구나·”
“끄으으윽···!!!”
비명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니백스가 거칠게 발작했다·
하지만 편람은 그런 저항을 무시하고 덜덜 떨리는 니백스의 비늘 위에 손을 얹었다·
쩌저적···!!
비늘 끝이 갈라지면서 천천히 부서지고 편람의 손끝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니백스의 몸이 가루가 되어서 승천자와 하나가 되는 듯한 기이한 현상·
자신의 비늘이 뽑혀나가는 것을 본 니백스가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오 오오··· 위대한 승천자여···!!!”
쿵!!
두꺼운 아래턱을 바닥에 바짝 붙인 채 몸을 쭉 펴고 굴종의 뜻을 내보인 니백스가 소리쳤다·
“워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제발 탈태의 저주에 흡수되는 것만큼은···!!!”
“····”
방금 전까지 보이던 오만한 언동과는 완벽하게 대비되는 항복의 선언·
레녹이 목숨을 구걸하는 니백스를 말없이 응시하던 사이 편람이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탈태를 거쳐 손에 넣은 초월성은 진작에 큰 흐름에 귀결되어 소멸했어야 할 것이었다·”
“그 그건····”
“스스로 탈태를 거듭해 초월성을 얻고도 편법으로 순리를 외면해 왔으며 이제는 목숨을 구걸하는 건가?”
“편한 방법을 두고 어찌 고된 길을 돌아 초월에 이른다는 말이냐···!!”
니백스가 씹어뱉듯이 대꾸했다·
“장생종으로 태어난 축복을 온전히 누려도 갈 길이 먼데 고작 저주 따위에 발이 묶여서야 되겠는가! 나는 마땅히 살길을 골라온 것뿐이다!!”
두 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녹이 무언가 짐작이 가는 듯 시선을 돌렸다·
“올리비에라·”
[위계를 높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재정의하고 개변하는 과정이지·]
올리비에라가 대꾸했다·
[하지만 장생종 중에는 스스로의 허물을 벗고 탈태함으로서 손쉽게 자신을 개변할 수 있는 종족이 있다·]
“···허물을 벗는 것 자체가 예전의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인가?”
[축복받은 장생종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만으로 높은 위계에 도달할 수 있지· 하지만····]
비웃는 듯한 전성을 흘린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국에는 그들이 받아들인 순리에 얽매이게 되는 거다·]
“····”
허물을 벗고 탈태하여 위계를 높여왔지만 그렇기 때문에 위계가 높아질수록 같은 계통의 상위 종과 유사해진다·
그중에서도 편람은 그런 허물을 벗고 탈태하는 종의 정점에 도달한 초월자·
수호령수도 걸린 적 있던 탈태의 저주가 어째서 이런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지 이해한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저주가 니백스를 잠식하지 못하게 도와준 적이 있었던 모양이군·”
[나의 마안은 인과를 고정하여 변치않게 하는 이능을 지녔으니· 저 늙은 뱀에게는 그야말로 적격이었을 터·]
올리비에라가 웃었다·
[하나 니백스 오로시아가 편람에게 저만한 열등감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나·]
편람과 자신의 태생 차이를 강조하면서 불쾌감을 드러내던 것은 니백스 본인에게 매인 탈태의 저주를 의식했기에 나온 반응이었나·
아마 그녀 역시 자신과 편람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와 결과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겠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부정하고 어떻게든 그 격차를 메우려고 승천의 비약을 원했다면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파드메 키에사·”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한발 앞으로 걸어나오며 말을 걸었다·
“당신의 제안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일단 잠시 멈추고 이야기하지·”
“····”
니백스를 흡수하려던 손을 멈춘 편람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시선을 맞춘 레녹이 침착하게 생각해 둔 말을 꺼내들었다·
“나는 쿤다라에서 새로운 승천자를 탄생시켜 구겁에 도달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승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확인하려 하지·”
“그래서?”
“당신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9레벨에 오르는 과정을 한 번쯤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레녹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승급을 시도할지는 확답할 수 없군· 승천자의 협력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일을 서두를 수는 없어·”
“····”
레녹도 알고 있다·
승천이란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홀로 완전하게 이룩해야 하는 도전·
하지만 편람이 이 시점에 개입해 레녹에게 도전을 권유하는 이유가 분명 더 있다·
무턱대고 제안을 거절하기보다는 잠시 유예를 두고 편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차분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을 터·
무엇보다 9레벨에 도달한 승천자에게 승급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너는 이 도시에서 스스로의 승급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었군·”
편람이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의 대답을 일축했다·
“그 부분에 대한 판단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 여러 가지 계획과 재료를 모으고 있지· 예를 들면 지금도 당신에게서 도망치려 하는 니백스 오로시아·”
레녹이 니백스를 가리키자 비늘이 갈라진 하얀 뱀의 거체가 움찔거렸다·
“그 뱀의 진혈이 필요하다· 니백스를 죽이든 살리든 상관없지만 그 신변은 넘겨주었으면 좋겠군· 그 살무사는 아직 사라지면 안 돼·”
싸우지 않고 사태를 정리한 것은 나쁘지 않은 결과였지만 편람이 이대로 니백스를 흡수해 버리는 것도 곤란하다·
니백스의 진혈(眞血)을 사용해 피의 계약을 되살리고 십관을 열어 카이세의 시신을 회수해야 하는 상황·
그걸 편람이 모두 삼켜 버렸다가는 레녹이 여기까지 찾아온 목적의 반절 가까이가 날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렇군·”
물끄러미 레녹을 바라보던 편람이 니백스의 비늘에 얹은 손을 떼어냈다·
털썩!!
“큭!!”
“자격을 얻을 시점을 스스로 선택하려 하면서도 그에 집착하지 않는 건가·”
손짓 한 번으로 니백스를 뒤로 밀어낸 편람이 말했다·
“마법사· 너는 이미 자신의 ‘선택’이 어떠한 의미를 지녔는지 이해하고 있구나·”
“····”
“좋다· 이제 와서 다른 필멸자의 존재를 내가 기억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다른 가능성을 고려할 이유는 없겠지·”
편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
복잡한 주술문자가 새겨진 소녀의 오른손이 그대로 왼손의 팔뚝 위로 꽂혀 들었다·
뚜둑!!
자신의 손을 팔뚝 위에 꽂아넣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움직이는 소녀의 모습·
피와 살점이 끊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편람이 팔뚝 안에서 손을 꺼내 든 순간·
아주 두꺼운 묵색의 비늘 한 장이 소녀의 손안에 들려 있었다·
말없이 편람이 내미는 비늘을 받은 레녹이 물었다·
“이건···?”
“의태를 위해 나의 본체에서 떼어낸 묵린(墨鱗)이다·”
편람이 피 흘리는 팔을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의 의식과 결합하여 육신을 조형하는 방식으로 쓰이니 이 비늘이 곧 나의 일부나 마찬가지·”
“····”
편람이 레녹을 올려다보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결정이 끝나면 이 비늘을 사용하도록 해라·”
“···잠깐 이 비늘이 당신의 의태에 사용되고 있던 촉매라면·”
이 비늘을 건네준 순간 편람이 의태한 인간의 모습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 추측이 틀리지 않았는지 피 흘리는 편람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아지랑이처럼 희미해지고 있다·
편람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던 니백스 역시 그것을 보자마자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상황·
“실수했군· 나의 영역에서 그 존재를 거두고 돌아갈 채비를 마쳤구나·”
치이익···!!
지면이 녹아내리는 매캐한 연기·
전신에서 독물을 내뿜으며 니백스가 음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약만 손에 넣는다면 저주에서도 도망칠 수 있다··· 내가 이 저주에 언제까지 얽매이리라고 생각한 건가·”
“저주에 얽매이든 벗어나든 네가 맞이할 결말에 대해 흥미는 없다·”
하지만 편람은 그런 니백스를 보면서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탈태의 저주를 해결할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
“···뭐?”
후욱!!
그 순간 축 늘어진 니백스의 거체가 다시 한번 편람의 앞에 머리를 처박았다·
콰아앙!!
“크악···!! 뭐 뭘 하려는 게냐!!!”
기겁하는 뱀의 정수리에 편람이 희미해져 가는 자신의 손을 얹고 주력을 끌어올린다·
섬뜩한 공명음과 함께 니백스의 머리 안에서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걱 삐걱···!!
톱니바퀴가 어긋나면서 서로 부딫히며 망가지는 듯한 소음·
내면에 쌓아올렸던 아주 거대한 탑을 정상에서부터 깎아내는 듯한 불쾌한 마찰음·
부러지고 꺾여서 이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다·
위계를 쌓아 올린 존재라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영락의 전조·
종의 정점에 도달한 승천자에게만 허락되는 타인의 기원에 개입하는 기적임을 레녹이 깨달은 그 순간·
“흐아아아악!!!!”
우두둑!!
니백스의 머리에서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뱀의 거체가 폭발하듯 비산했다·
퍼어어어엉!!!
집채만 한 크기에서 순식간에 레녹보다 작은 사람 정도의 크기로 줄어든 흰 뱀의 모습·
“····”
“아아 아아아아···!!!”
잠깐의 침묵이 끝나고 뒤늦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니백스가 절규했다·
레녹 역시 할 말을 잃고 황당한 표정으로 편람을 쳐다보았다·
니백스의 몸에서 느껴지는 위계가 이전과 비할 데 없을 만큼 크게 하락한 것을 느꼈기 때문·
“···설마·”
편람은 니백스에게 걸린 탈태의 저주를 그녀를 흡수해서 해소시킨 것이 아니다·
“니백스의 레벨을 강제로 깎아서······· 저주에 잠식되지 않을 수준까지 내려 버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