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0화
쿤다라(13)
“살마혈(殺魔血)· 마수의 피를 갈아 만든 극독이다·”
“흠·”
“···현몽독(現夢毒)· 현실과 꿈을 혼동케 하는 환각독이지·”
“그렇군·”
“···요목환(搖穆丸)· 승혼산(傷魂散)· 기력을 쇠하게 하고 영혼을 상하게 만드는 환각제의 일종이다·”
“별로 쓸모는 없어 보이는데·”
쾅!!
“네놈 대체 언제까지 내게 장사치 흉내를 내게 할 생각이더냐·”
레녹의 눈치를 보면서 비늘 아래로 온갖 독약을 꺼내 들던 니백스가 짜증을 냈다·
“이만큼 독을 보여주었으면 적당히 납득하고 알아서 보상을 골라 가-”
“어라?”
레녹이 기다렸다는 듯 작은 보랏빛의 약병을 흔들었다·
“이거 필요하지 않은 건가?”
“····”
“승천의 비약이 아주 귀중한 극독이라면 나도 이것에 비견될 만큼 쓸모 있는 독을 하나 물물교환으로 받고 싶은데·”
“····”
“이걸 사용해서 구겁에 들어가는 일도 포기하고 비약을 돌려주겠다는데 설마 이 정도도 못 해주겠다는 건 아니겠지?”
입을 꾹 다문 흰 뱀이 그제야 다시 비늘을 들썩이며 숨겨둔 독약을 더 꺼내 들기 시작했다·
말레온에게서 전해받은 승천의 비약을 미끼로 니백스를 온순하게 만든 지 10분째·
레녹은 그녀를 이 거대한 사혈궁의 한복판에 앉혀두고 갖고 있는 독을 하나씩 꺼내 소개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차피 모든 독을 꺼내놓게 만드는 건 어렵겠지·’
비약과 교환할 독을 달라는 건 핑계일 뿐 니백스가 갖고 있는 독의 능력과 종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지만·
고작 10분 사이 니백스가 꺼내 든 독의 개수는 무려 300종을 훌쩍 넘기고 있는 상황·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독이 남아 있는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지금까지 꺼내 든 모든 독이 타인이 제조한 독약이었다· 처음부터 진짜는 보여줄 생각이 없는 거야’
10분 넘게 시간을 끌면서 눈치를 보는 것 자체가 니백스 본인이 제조한 독은 보여줄 생각이 없다는 증거·
하지만 레녹 역시 굳이 니백스에게 다른 독을 내놓으라고 압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시간을 끌고 싶은 것은 니백스만큼이나 레녹도 마찬가지인바·
“그만· 거기까지만 하지·”
니백스가 비늘을 들추는 모습을 지켜보던 레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즉시 움직임을 멈춘 니백스를 향해 몇 걸음 앞으로 다가온 레녹이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일단 독을 고르기에 앞서 이번 일에 대한 정중한 사과의 말부터 듣고 싶군·”
“····”
“너는 올리비에라의 부탁을 받고도 나를 근거 없이 의심했으며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레녹이 턱을 치켜들었다·
“나는 그 잔인한 말에 굉장히 큰 상처를 받았으니· 진심을 다한 사죄만이 내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 것 같군·”
“···네놈·”
눈도 깜짝하지 않고 뻔뻔한 소리를 해내는 레녹의 모습에 뱀의 혓바닥이 푸들푸들 떨렸다·
상처를 받기는커녕 외려 이 순간을 즐기는 듯한 마법사의 모습이 어지간히 아니꼬웠겠지·
하지만 니백스는 레녹의 손에 들린 보랏빛의 약병을 보고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숙였다·
쿠웅!!
똬리를 튼 거대한 뱀이 사혈궁의 바닥을 향해 스스로의 머리를 박고 고개를 숙였다·
그 무거운 머리가 땅에 맞닿는 것만으로 지축이 흔들리며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동공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게 머리를 숙이고 모든 의념을 죽인 그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 섣부른 판단으로··· 네가 쟁취한 결과를 의심하였으니····”
“····”
“승천의 비약을··· 내놓 돌려받을 수 있다면··· 내 이렇게 고개를 숙일 테니·”
마음에도 없는 말을 억지로 내뱉고 있는지 고고한 장생종의 말이 뚝뚝 끊기면서 억지로 늘어진다·
억지로 말을 드문드문 바꿔가며 레녹의 반응을 살피려는 노골적인 태도·
하지만 분을 삭이지 못하고 어떻게든 말을 빙빙 돌려가는 니백스의 모습 역시 나름 볼만했다·
“승천의 비약을 바친다면 내 네놈에게 합당한 보상을 내릴 것이니··· 내 사과를 받아주겠느냐·”
“····”
사과를 하는 건지 레녹에게 압박을 넣는 건지 모를 엉망진창에 가까운 실언·
하지만 레녹은 니백스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인 그녀의 정수리를 주시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비늘이나 부위는 없다· 혹시나 했지만 역린(逆鱗) 같은 건 없는 모양이군·’
니백스가 독약을 꺼내 들며 비늘을 들추는 사이 다른 곳은 모두 살폈지만 머리 위는 관찰하지 못했던바·
그래서 사과를 핑계로 그녀의 정수리 뒤쪽을 확인하려 했지만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군·”
순식간에 관찰을 끝내고 시선을 거둔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를 받아주도록 하지· 내가 마음이 약해서 그런지 어르신의 약한 모습을 오래 보기가 괴롭단 말이지·”
“····”
레녹의 말이 어찌나 뻔뻔했는지 고개를 숙인 니백스가 이를 악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마음조차 곧바로 가라앉힌 니백스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레녹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승천의 비약을 내게 넘겨주는 것이냐?”
“아니 말했듯이 이 비약과 대등한 가치의 독과 교환하겠다·”
레녹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백로 대회에서 상품으로 손에 넣은 물건이다· 이 비약을 손에 넣는 데 필요했던 내 노고를 고작 사과 한마디로 때울 생각은 아니겠지?”
“미안한 일이지만 이제 네게 보여줄 수 있는 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니백스가 유감이라는 듯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사과도 했으니 가능하다면 지금 보여준 독 중에서 비약과 교환할 물건을 골라주었으면 좋겠군·”
“····”
자신이 제조한 독은 일절 보여주지 않고 비약과 교환할 물건을 고르라는 니백스의 대답·
역시 이 진혈종은 레녹과 제대로 된 물물교환이나 거래 따위를 할 생각이 없다·
형식적인 사과도 했겠다 이제 그녀 역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승천의 비약을 되찾으려 하겠지·
하지만 레녹 역시 처음부터 니백스에게 무엇을 요구할지는 생각해 둔 뒤였다·
“독 중에서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군· 그런 하급품을 비약과 교환할 수는 없겠어·”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게냐?”
곧바로 이빨을 드러내는 뱀을 보며 레녹이 픽 웃었다·
당장에라도 비약을 빼앗고 싶어 하는 듯한 노골적인 감정이 레녹의 눈에도 잘 보였기 때문·
“독이 아니라 해독제와 비약을 교환하는 건 어떤가?”
“···해독제?”
레녹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던 니백스가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저번에 당신이 말했었지· 독이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독이 될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고·”
“····”
“뛰어난 독술사라면 해독제를 만드는 일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겠지·”
비약을 손에 쥔 레녹이 말했다·
“확실하게 말하지· 극독으로 만들어진 이 승천의 비약· 이 독을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해독제를 가져와라·”
“왜··· 그런 해독제를 필요로 하는 게지?”
“당신이 만든 모든 극독 중에서 이 승천의 비약이 가장 뛰어난 독일 테니까·”
레녹이 대꾸했다·
“그렇다면 이 비약을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해독제라면 다른 어떤 독도 해독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
“당신이 그렇듯이 나도 당신을 믿지 않는다· 당신이 거래가 끝나자마자 내 몸에 정체 모를 신경독을 주입한다 해도 납득할 수 있을 정도지·”
침묵하는 니백스를 향해 레녹이 웃으면서 물었다·
“나는 그런 사태를 방지하고 싶은 것뿐이다· 이해하겠지?”
“···좋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빤히 레녹을 바라보던 니백스가 말했다·
“허나 승천의 비약을 해독할 수 있을 정도의 해독제는 당장 내 수중에 없다· 제조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지만····”
“해독제 제조에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다리지·”
레녹이 비약을 흔들면서 말했다·
“당신의 사혈궁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않겠다 약속하면 충분하겠나?”
“···흥· 기다려라·”
느릿하게 코웃음을 친 니백스의 거체가 서서히 사혈궁의 홀 중심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십수 미터에 달하는 거체를 천천히 틀어서 궁전 바닥을 천천히 미끄러진다·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새하얀 동공으로는 레녹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살무사의 모습·
“됐군·”
니백스가 자리를 감춘 것을 확인하자마자 레녹이 곧바로 움직였다·
“뱀이 자리를 떠났다· 이제야 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어·”
[마스터답기는 하지만 약속을 하자마자 바로 어겨 버려도 괜찮은 건가요?]
품 안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다비가 순간적으로 어이없는 전성을 흘릴 정도·
하지만 레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복도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포혈공은 승천의 비약이 니백스의 진혈(眞血)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진 물건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해독제를 만들 때도 똑같이 진혈이 필요하겠지·”
[헤에·]
“그런 물건을 당장 갖고 있을 리 없으니 제조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가 원하던 건 해독제를 핑계로 니백스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일이었어·”
[오오·]
다비가 감탄한 기색으로 발박수를 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진혈이라는 게 엄청 귀중한 거잖아요· 진혈로 만든 비약을 돌려받으려고 똑같이 진혈로 만든 해독제를 순순히 내줄까요?]
“그럴 리가 없지·”
[에엥?]
“비약을 돌려받겠다고 저 난리를 피웠는데 이제 와서 내게 진혈이 담긴 해독제를 순순히 넘겨줄 리가 있겠어?”
괴상한 비명을 지르는 다비를 보며 레녹이 딱 잘라서 말했다·
“해독제를 내주기는커녕 보나 마나 해독제를 제대로 만들 생각도 없을 거다·”
[···그걸 알면서 왜 해독제를 달라고 한 거예요?]
“내 손에 승천의 비약이 있는 이상 해독제를 만드는 시늉은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어찌 됐든 제조 과정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
거침없이 니백스가 사라진 반대편 복도를 걸은 레녹이 궁전 지하 아래로 향하는 널찍한 경사로를 발견하고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그사이에 이 살무사의 궁전에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건····]
다비가 무언가 짐작한 듯 조용히 입을 다물고 레녹이 거침없이 경사로를 걸어 내려갔다·
사혈궁 전체에 계단이 없다는 사실이 이 텁텁한 밀림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든다·
아마 니백스 본인이 평소에도 살무사의 모습으로 사혈궁에 기거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후욱!!
경사로를 따라 궁전 아래쪽으로 향하자 축축한 습기와 함께 지하에 위치한 늪지대의 풍경이 펼쳐졌다·
밀림의 수풀과 덩굴 아래 숨겨져 있는 거대한 늪지대 호수의 형상·
하지만 호수에 차 있는 것은 물이나 점액 따위가 아니라 짙은 남색의 독액이었다·
쿠웅!!
호수 전체가 어두운 남색의 독으로 가득 차 있는 기괴한 광경·
독액에 섞인 점성이 어찌나 강한지 바람이 부는데도 호수의 표면에는 일절 흔들림도 없다·
뱀의 허물처럼 보이는 거대한 하얀색의 장막이 호수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고·
허물의 장막 너머 등을 돌린 채로 깊게 호수에 잠겨 있는 무언가의 모습·
온몸을 남색의 독액에 파묻은 채 미동조차 없이 느릿하게 숨을 내쉰다·
독액에 닿지 않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품이 넓은 흑색 도포를 두른 그 뒷모습을 본 순간·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
레녹이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하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레녹이 곧바로 말했다·
“쿤다라에서 승천자가 되려 하는 존재가 있고 나는 그 과정에 협력하기로 했다·”
“····”
“그를 따라 구겁에 진입할 생각인데 그곳에서 카이세의 시신을 회수하려면 니백스의 진혈(眞血)이 필요하다더군·”
“····”
“물론 그 뱀의 모가지를 따고 진혈을 뽑아내도 늦지는 않겠지만 그 전에 앞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들렀다·”
미동조차 없는 올리비에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너는 지금 어느 쪽에 서 있는 거지?”
프로젝트의 실패를 지켜본 올리비에라가 카이세의 일에 대해서는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알고 있다·
온갖 거짓과 기만으로 자신의 속내를 숨기는 그녀라 해도 카이세의 시신을 찾는다는 목적 자체는 거짓이 아니겠지·
레녹이 알고 싶은 것은 그 수단·
만약 올리비에라가 레녹이 아니라 니백스의 편을 들어서 스스로 카이세의 시신을 회수하기로 했다면·
이 시점에서 두 사람의 방향성이 갈라지는 것은 사실상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니백스의 둥지에 의탁해 치료에 전념하고 있는 그녀라면 언제고 니백스의 편에 서도 이상하지 않을 터·
레녹은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올리비에라와 대화할 시간을 마련했던 것이다·
만에 하나 그녀가 레녹과의 동행을 포기하고 스스로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면·
레녹보다도 더 오랫동안 알고 지냈을 지인인 니백스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라면·
레녹 역시 앞으로의 행동 방침을 크게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
올리비에라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외려 이런 부분에 대해 그녀를 그만큼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한낱 잔정이나 인연에 구애받아 그녀가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을 인간임을 알고 있기에 레녹은 여기서 그녀의 진의를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
“····”
침묵이 길어진다·
레녹의 말을 모두 듣고도 어떠한 반응조차 없이 조용히 독액의 호수에 목욕재계를 반복하는 그녀와·
올리비에라를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손목을 주무르는 레녹의 모습이 교차한 그 순간·
“아하·”
콰아아아앙!!!!
늪지대 천장이 굉음과 함께 폭발하고 그 위에서 새하얀 뱀의 거체가 떨어져 내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촤아아악!!
새하얀 뱀이 독의 호수 한복판에 추락하며 사방으로 독액의 파도를 퍼뜨렸다·
늪지대 바깥으로 흘러나온 독액이 순식간에 지표면을 녹이고 증발시키며 호수의 면적을 넓혀 나갔다·
가볍게 꼬리를 떨쳐 중심을 잡고 독액의 호수 중심에 선 니백스가 새하얗게 발광하는 동공으로 레녹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