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9화
쿤다라(12)
=독악(毒岳) 니백스는 외겁도시가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해 온 장생종이야·
빽빽하게 수풀이 우거진 울창한 밀림·
풀과 나무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뒤엉키고 사람보다 큰 잎사귀가 시야를 가린다·
생전 처음 보는 보랏빛의 나무와 덩굴· 독을 품은 새파란 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레녹은 한 손에 낡은 수첩을 든 채 밀림을 홀로 걷고 있었다·
=좌훼(坐虺)라고 불리는 장생종인 그녀는 말 그대로 앉은 자리에서 수십 년을 넘게 움직이지 않는 살모사 태생이지·
혈러서기의 페이지 위로 빠른 속도로 새겨지는 피로 물든 글귀들·
혈영궁에 남아 있는 포혈공이 혈려서기를 사용해 레녹에게 전해주는 정보들이다·
검색장치인 혈려서기의 성능을 그녀가 보다 잘 끌어낼 수 있다는 판단하에 조작 권한을 잠시 넘겨주었던 것·
=태어날때부터 독을 품고 태어나 위계를 초월한 뒤로는 아예 자기 자신이 극독이 되어버린 대술사야·
“····”
=그녀가 기거하는 독함림(毒含林)은 말 그대로 숲 전체가 독을 머금은 밀림으로 오랜 시간 동안 숲을 독성권역으로 삼고 변질시킨 결과물이지·
페이지 위에 떠오르는 글귀들을 읽으며 머리 위에 드리운 잎사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무런 특색도 없어 보이는 보랏빛의 잎사귀에 레녹이 손을 갖다 댄 순간·
매캐한 연기와 함께 피부 위로 전개한 실드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치이익···!!
잎사귀와 접촉하는 것만으로 영창해 둔 실드 마법이 녹아내리는 기괴한 모습·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가볍게 손을 저어 피어오르는 연기를 흩어내며 말했다·
“마력입자 간의 연결을 강제로 끊고 붕괴시키는 느낌이군· 이게 니백스가 사용하는 독의 능력인가?”
=니백스가 사용하는 독은 한 가지가 아니야· 신경을 마비시키거나 신진대사를 멈추고 의념의 작동까지 간섭하는 다양한 독을 사용하지·
포혈공이 혈려서기를 통해 즉시 대답했다·
=쿤다라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살아온 그녀가 얼마나 많은 독을 품었는지 파악하는 건 불가능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분석을 기대하지 마·
“흠 그럼 그냥 혈려서기보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뭐?
순식간에 뾰족해진 포혈공의 대답을 무시한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실제로 독을 다루는 술사가 레녹에게 있어 위협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했으니·
마력이나 술식을 직접 다루는 상대라면 레녹이 어떤 식으로는 상성의 우위에 서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레녹이 지닌 마법의 재능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취약한 육체를 중독시킬 수 있는 독이라면 어떨까·
‘중독된 직후부터 몸이 버티지 못할 가능성도 높겠어·’
공용마법에는 해독마법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WORLD 2·0에서는 등급이 높은 독은 해독마법을 무시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으니·
차라리 레녹이 대륙 각지에서 수집한 비약이나 해독제를 믿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 일·
‘접합술주의 생명권역에서 쓸 만한 해독제와 약초를 여럿 구하긴 했었지· 하지만····’
뛰어난 의사였던 술주의 권역을 털어 유용한 약품을 쓸어 담기는 했으나 8레벨의 극독을 해독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가능하다면 직접 시험해 보고 싶지만 레녹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이런 시도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는 바·
아무리 레녹이 시행착오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치게 무모한 일이다·
당장으로서는 중독되는 것을 피하고 여차할 경우 해독제를 바로 투여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밖에·
=니백스가 사용하는 독은 위험하지만 더 경계해야 하는 건 바로 중독 수단이야·
그런 레녹의 심경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포혈공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단순히 복용이나 접촉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수단으로 상대를 중독시킬 여러 방법을 갖고 있다고 해·
“그렇게 말하려면 일단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글쎄· 나도 직접 본 건 아니라서 확답은 해줄 수 없지만····
포혈공이 남긴 메시지가 주저하는 것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녀는 상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중독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
“···믿기 어렵군· 시각독 같은 게 실제로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니백스가 술식을 사용할 여지를 주지 마· 네가 어떤 식으로든 중독이 되어버린다면 주도권을 잃고 끌려다닐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야 쉽지만 이만한 밀림에서 여지를 주지 말라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수풀과 잎사귀에 옷자락이 스치고 작은 벌레들이 떨어진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후끈한 공기가 폐를 쑤시고 목구멍을 따갑게 만들었다·
코트 위로 떨어지는 잎사귀와 벌레에 품 안에서 다비가 기겁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어댈 정도·
[우웨에엣· 으아아앗!]
“최대한 몸을 보호하기야 하겠지만 밀림 전체가 독을 품었다면 차라리 이 숲을 모두 불태우는 게 빠르겠어·”
레녹이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일단 할 건 해야겠지·”
키이잉!!
검지와 중지를 앞으로 뻗으면서 옆으로 휘두른 순간 레녹의 의념을 타고 절단마법이 발동·
[블레이드]
서걱!!
레녹의 눈앞에 드리운 거대한 잎사귀가 우수수 잘려 나가며 길을 트기 시작했다·
=그렇군· 수풀이나 잎사귀를 싹 다 쳐내서 아예 접촉할 여지를 없애겠다?
한발 늦게 레녹이 한 일을 깨달은 포혈공이 감탄했다·
=좋은 선택인걸· 처음부터 밀렵도 같은 걸 준비해 줄 걸 그랬나·
“필요 없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면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떤 장비를 가져와도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 못할 테니·”
동시에 레녹을 중심으로 수십 번에 달하는 절단마법이 동시에 발동·
반경 15m 언저리에 있는 모든 것을 믹서기처럼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눈에 보이지도 않는 참격이 찰나의 순간 수십 번 넘게 회전하면서 사출·
머리 위에 드리운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자르고 발아래 드리운 뿌리와 덩굴을 베어낸다·
잘려 나간 잎사귀와 나무 파편이 미친 듯이 흩날리지만 정작 레녹에게 닿는 일 없이 그대로 멀리 밀려났다·
절단마법을 난사해 참격의 폭풍을 만들고 빽빽하게 우거진 밀림을 갈아버리면서 길을 만드는 레녹의 모습·
카가가가가각!!!
=···무슨 짓을 하나 했더니 절단마법끼리 충돌시켜 범위와 속도를 늘리는 거야?
그 기괴하기 그지없는 정공법에 포혈공이 어이없다는 듯 메시지를 남겼다·
=각도와 마력 효율을 미리 조정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하기 어려울 텐데 이상할 정도로 참격을 잘 다루는걸· 순수술식계 마법이 네 특기가 아니었어?
“쿤다라로 오는 길에 참격을 사용하는 술주를 만났었지·”
레녹이 대꾸했다·
“기분 나쁜 쓰레기였지만 술식 응용 능력은 상당해서 요령을 기억해 뒀다·”
=····
절단마법을 영창하고 방향과 각도를 지정 발사 속도를 입력한 뒤 그대로 사출·
최대 사거리에 도달하기 직전 미리 영창한 다른 절단마법과 충돌시켜 방향을 꺾고 그 반동으로 위력을 높인다·
충돌해서 꺾인 참격이 레녹의 주변을 둥글게 회전하면서 밀림을 갈아버리고 소멸·
각도와 방향을 정하고 사용하는 단순한 원리이기에 마법끼리 충돌시킨 다음에도 반동과 방향 계산 자체는 어렵지 않다·
레녹의 마력 조작과 다비의 연산력을 사용하면 [블레이드] 마법을 50번까지는 동시에 충돌시키며 방향을 계산할 수 있을정도·
카가가가가각!!!!
기이한 방향으로 갈라진 알껍질· 독을 품은 푸른 개구리· 샛노란 날벌레들이 모조리 갈려 나간다·
레녹이 지나가는 길마다 사방에서 짓물리고 터져 나온 독물이 매캐한 독안개가 되어 퍼져 나왔다·
“원리는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동급의 술식보다 출력이 강하지· 확실히 참격을 다루는 마법도 제대로 운용하면 쓸 만할 여지가 있어·”
고유마법이나 술식도 아니라 공용마법인 [블레이드]를 예하술주가 사용하던 요령을 섞어 휘두르고 있는데 이만한 위력·
단순한 만큼 사용할 수 있는 전투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만큼 특정한 상황에서는 확실한 효용을 보여주는 마법이다·
“이쯤이면 슬슬 길을 열어줄 때가 된 것 같은데·”
순식간에 반경 수백 미터 일대를 주파하며 밀림을 갈아버린 레녹이 느긋하게 말했다·
“설마 아직까지도 내 방문을 눈치채지 못한 척할 생각은 아니겠지?”
니백스의 독함림에 진입하여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한 지 34분째·
하지만 레녹은 자신이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길이 열리지 않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레녹의 마력 감지나 기억력으로 방향을 잃거나 혼동하고 한번 지나온 길을 잊어버릴 리가 없으니·
이 밀림의 주인이 의도적으로 길을 꼬고 방향을 어그러뜨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든 결과·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레녹은 대략 30분간의 걸음 이후 무력행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독함림에 들어와 이만큼 길을 헤매었다면 방문객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다한 셈·
지금부터는 밀림을 보이는 대로 갈아서 원하는 풍경이 나올 때까지 전진하면 그만이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절단마법의 횟수를 늘리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그 순간·
우두두둑···!!
사방에서 나무뿌리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레녹의 눈앞에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울창한 수풀과 덩굴 사이에 가려진 듬성듬성 구멍이 뚫린 새하얀 궁전·
동물의 상아를 깎아 만든 것처럼 둥글게 발광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빛을 품은 비처·
=찾았다· 결국 문을 열어줬네·
혈려서기에 포혈공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니백스가 기거하는 뱀의 둥지· 사혈궁(蛇穴宮)이야·
“····”
기괴한 색깔로 물든 이 숲에서 저 궁전만이 하나의 오탁도 묻지 않은 것처럼 깨끗하고 정갈하다·
하지만 바로 저 상앗빛 비처이야말로 이 밀림에서 가장 지독하고 저열한 독기를 품은 뱀의 둥지겠지·
슈우웅···!!
주변에서 회전하던 절단마법을 취소시킨 레녹이 천천히 사혈궁의 문 앞으로 다가섰다·
한 점의 티끌도 묻지 않고 은은한 우윳빛깔로 빛나면서 굳게 닫혀 있는 궁전의 대문·
벌컥!
레녹이 그 앞에 다가선 순간 자연스럽게 문이 열리면서 내부의 공간을 훤히 드러냈다·
* * *
바깥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상아를 깎아 만든 듯한 길다란 복도·
사악 사악 사악···!!!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주변에서 스치듯이 미끄러지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발아래로 새하얀 비늘을 입힌 작은 뱀들이 꿈틀대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성조차 없는 듯 제자리에서 혓바닥을 날름대면서 바닥을 핥아대기 바쁘다·
여기 모인 뱀들이 독을 품은 독사이자 니백스와 같은 종족인건가·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복도 끝에 위치한 아치형의 문을 지나 탁 트인 홀로 걸어 나온 그 순간·
“왔군·”
사혈궁의 넓은 홀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흰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레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쿠우웅!!
뱀의 거대한 동공에 레녹의 모습이 담기는 그 순간 어깨가 무거워지고 몸이 둔해지는 듯하다·
의념을 내뿜는 것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텁텁하고 뻑뻑해지면서 해로운 물질로 변질되는 듯한 위화감·
외겁도시 쿤다라를 이끄는 팔겁의 원로성·
도시가 세워지기 전부터 살아왔다는 살무사이자 위계를 초월한 독성술사·
독악 니백스 오로시아·
“저번에 봤을 때보다 몸집이 몇 배는 더 커진 것 같은데·”
레녹이 품 안에서 연초를 꺼내면서 물었다·
“느껴지는 기세도 그렇고· 일부러 기척을 숨기고 있던건가?”
“오겁의 장원에서 너를 만났던 내 아이를 말하는 것이냐?”
니백스가 웃었다·
“그 아이라면 이미 죽었다· 오겁에 내려보낸 시점에서 어미의 뜻을 이해했을 테니 지금쯤 어딘가에서 스스로 독샘을 깨물고 자살했겠지·”
“····”
저번에 만난 뱀에게서 특별한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했더니 애초에 본인이 아니었던 것인가·
하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정도로 거대한 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렵지는 않지만-
“뱀의 몸으로 태어나 초월적인 위계에 오른 존재가 하나 더 있었지·”
물끄러미 니백스의 거체를 올려다보던 레녹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크기는 다르지만 승천자 편람(偏濫)과 꽤 비슷해 보이는데· 혹시 그녀와 무슨 관계가-”
콰아앙!!
순간 새하얀 뱀의 꼬리가 작살처럼 레녹의 바로 옆에 내리꽂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초음속의 타격· 가볍게 꼬리를 흔드는 것만으로 사혈궁의 바닥이 뚫리면서 거칠게 요동쳤다·
레녹의 옆에 내리꽂힌 채 빳빳하게 굳은 새햐안 비늘만이 니백스의 심기를 짐작케 할 뿐·
“말을 조심히 가려서 하도록 하거라 인간아·”
“····”
“편람은 장생종이 아니라 미천한 영수의 몸으로 초월자가 되었으니· 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태생이나 다름없지·”
불쾌한 것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린 니백스가 말했다·
“주술사로서 경지에 이른 그 성취는 존중하나 그 비교는 굉장히 실례되는 말이로다· 올리비에라의 지인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살점을 뜯어내었을 게야·”
“편람이 장생종이 아닌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레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히려 보잘것없는 짐승으로 태어나 승천자가 되었다면 훨씬 더 대단한 일이 아닌가?”
“···그것보다 나는 네놈에게 맡긴 일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를 먼저 듣고 싶구나·”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 니백스의 새하얀 동공이 번뜩였다·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심기가 마냥 편한 상황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내 분명 네놈에게 오백로 대회를 권했을 때는 분명히 승천의 비약을 손에 넣겠다고 약조했을 텐데·”
“····”
“허나 네놈은 대회에서 우승하기는커녕 은성(銀星)과 접촉한 뒤 그대로 자취를 감춰 버렸지·”
니백스가 말했다·
“덕분에 계획을 제안한 내 꼴이 퍽 우습게 되어버렸구나· 이 사실을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더냐?”
“책임?”
레녹이 피식 웃었다·
“당신 처음 승천의 비약에 대해 언급할 때는 올리비에라의 부탁을 받아서 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
“오백로 대회에 나가는 것도 늙은이의 부탁이라면서 부담을 갖지 말라는 듯 말해놓고 이제 와서 내게 책임을 묻겠다고?”
“내 권한을 사용해 네놈을 말레온의 대회에 밀어 넣은 시점에서 내가 네 뒷배를 맡는 것은 응당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니백스의 눈이 번쩍였다·
“네놈은 그걸 알면서도 대회에 끝까지 참가해 우승하는 대신 중도 포기하고 내 이름에 먹칠을 했지·”
“····”
“하물며 비약을 손에 넣기도 전에 말레온에게 내 의도가 들통이 나고 말았으니· 네가 감히 내게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주었구나·”
“꼭 승천의 비약이 당신의 손에 들어왔어야 했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팔짱을 낀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구겁에 들어가는 걸 도와주겠다는 건 핑계였고 진짜 목적은 말레온이 갖고 있던 승천의 비약을 확보하는 거였나?”
“은성의 것이 아니다· 인간아·”
니백스가 낮게 쉬익거리면서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것은 내가 제조한 비약이다· 나의 진혈(眞血)을 녹여 만든 승천의 단서란 말이다·”
“····”
“은성이 위험하다는 명분으로 빼앗아간 승천자의 허물을 내가 돌려받겠다는 것이 대체 무슨 잘못인 거지?”
쿠구구구···!!
니백스가 한 마디 한 마디를 씹어뱉을 때마다 사혈궁의 성소가 묵직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하얗고 거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앉은 자리를 중심으로 상앗빛의 바닥이 보랏빛으로 물들면서 기묘한 냄새를 흘렸다·
“네놈이 내 제안을 우습게 여기고 보란 듯이 은성의 편을 들어 나를 우습게 만들었으니·”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니백스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이 자리에서 네놈에게 그 책임을 묻고 이 분을 풀어야겠구나·”
“결국 말레온에게 따지지 못한 분을 내게 풀고 싶다는 뜻이었군·”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당신처럼 오래 살아온 장생종조차 말레온에게 정면에서는 거역하지 못할 만큼 그의 위상이 막강하기 때문이겠지·”
“····”
“말을 들을수록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말레온의 손을 잡은 것이 옳은 선택으로 보이는데·”
“한 줌 독물이 되기 전까지 한번 실컷 떠들어보거라·”
니백스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꼬리를 들어 올렸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뱀의 꼬리 끝에 보랏빛의 멍처럼 흘러내리는 독물이 뚝뚝 맺히기 시작했다·
“나의 독함림에 혼자 넘어온 것이 네놈의 실수였으니· 이곳이라면 은성의 눈에 띄는 일 없이 네놈을 벌할 수 있을 터·”
“그렇군·”
“네놈이 시답잖은 이유로 포기해 버린 승천의 비약· 그 책임을 이 자리에서 묻-!!!”
“승천의 비약이라는 거· 혹시 이걸 말하는 건가?”
레녹이 품 안에서 작은 보랏빛의 약병을 꺼내 든 그 순간·
니백스가 레녹의 머리 위에 내리찍던 꼬리의 방향을 바꾸었다·
끼이익!!!
공기가 뒤틀리는 소음과 함께 꼬리를 억지로 잡아당겨 멈춰 세운다·
힘을 이기지 못한 꼬리가 똬리를 튼 니백스 본인의 옆구리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콰직!!
한껏 독물을 머금은 꼬리가 몸에 박혔지만 니백스는 그 사실에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레녹을 응시하던 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 비약을· 어떻게·”
“말레온과 대화한 건 사실이지만 나는 승천의 비약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레녹이 대꾸했다·
“멋대로 계획의 실패를 단정 짓고 나를 죽이려던 건 그쪽이었지·”
“···그·”
“그 사실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먼저 내게 해야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할 말을 잃은 니백스의 눈앞에서 승천의 비약을 흔든 레녹이 물었다·
“일단 그쪽이 내게 지금까지 지껄인 말에 대한 확실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