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8화
쿤다라(11)
촤악!!
포혈공의 뒤를 따라 광대한 핏빛의 궁전에 진입한다·
쿤다라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했던 혈영궁·
현실과 허수차원의 경계에 존재하며 출구와 입구가 특정되지 않는 독립적인 영토·
이곳을 통해서 쿤다라에 입성하는 바람에 겁의 시련을 통과하지 않아 일이 꼬였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오백로를 이용해 장생종들을 가르치게 되었으며·
그를 통해 말레온의 승천에 대해 전해 듣고 다시 포혈공과 마주하게 되었으니·
여기서 시작된 일이 한 바퀴 돌아 다시금 이 궁전으로 이어진 듯하다·
쿠오오오!!!
두 번째로 찾은 혈영궁의 고요하면서도 섬뜩한 홀의 풍경·
곁에 올리비에라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무엇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
이 거대하고 공허한 궁전에서 포혈공은 홀로 앉아 외겁도시를 지켜보고 있는 것인가·
“일로 와·”
하지만 포혈공은 레녹을 혈영궁에 들인 뒤 전처럼 혼자 옥좌에 앉지 않았다·
대신 로비 뒤로 펼쳐진 복도를 지나 응접실이 위치한 방으로 향했을 뿐·
길쭉한 식탁이 놓인 의자 위에 올라앉은 소녀가 맞은 편에 위치한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
[이 흡혈종이 어디서 감히·]
다비가 투덜거렸다·
어깨를 으쓱인 레녹이 소녀의 맞은 편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저번과는 장소가 다른데· 식사라도 내올 생각인가?”
“····”
“손님 대접을 할 생각이라면 사양하지 않지·”
“내 궁전에는 인간종이 먹을 음식따위는 없거든·”
뚱한 표정으로 대꾸한 포혈공이 손을 들어 올리자 접시 위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핏덩이를 굳혀 만든 듯한 형태의 젤리 같은 무언가·
“이건···?”
“선지 푸딩·”
소녀가 피식 웃었다·
“내가 가끔 먹는 간식인데 너도 먹고 싶으면 먹어보던가·”
“····”
황당한 표정으로 포혈공을 바라보던 레녹이 품 안에서 말린 육포를 꺼내 들었다·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씹기 시작한 레녹을 포혈공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다·
“먹을 거 갖고 있었네· 왜 나한테 달라고 한 건데?”
“그럼 쿤다라까지 찾아오면서 일용할 식량도 준비하지 않았을 줄 알았나?”
레녹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다만 이 도시에서 식사 대접을 몇 번 받아보니까 쿤다라의 식문화도 나름대로 입맛에 맞더군·”
“····”
“그래서 그쪽도 뭔가 대접할 거리가 있는 건지 궁금했을 뿐이다·”
“···대접이라· 그래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의자에 기댄 소녀가 삐딱한 시선으로 레녹을 바라보았다·
“너 꽤 재밌게 놀고 있더라? 카이세의 시신을 찾고 있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굉장히 즐거워 보이던데·”
“····”
“장생종을 상대로 선생 노릇을 하고 있다더니 얼굴에 윤기가 반질반질하게 흐르잖아·”
“날 불러낸 흡혈귀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외겁도시로 쫓아내서 말이다·”
육포를 씹고 품 안에서 물병을 하나 꺼내든 레녹이 대답했다·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했지·”
“웃긴다· 오백로 과외 선생이 되어서 겁의 시련을 도와주는 게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야?”
소녀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이상한 인간· 이야기는 들었지만 진짜 이상한 녀석이야· 욕심이 많은 인간은 많이 봤지만 너처럼 생각이 뒤틀린 인간은 많이 없지·”
“····”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래서 네가 말레온의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어쩔 수 없네·”
“그런 결과를 바라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어라 그래 보여? 솔직히 말해서 난 말레온을 싫어하지 않아·”
어둠 속에 잠긴 소녀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였다·
“8레벨 중에서 그만한 인격자가 흔치 않다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는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존재야·”
“어째서지?”
“말레온 그노시스가 진정으로 꿈꾸는 것은 외겁(外劫)이 아니니까·”
포혈공이 차가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승천자가 되려 하는 것은 비어 있는 구겁을 자신의 존재로 채우기 위해서야·”
“····”
“그를 통해서 아홉 가지 겁 안에 모두 생명을 채우고 외겁도시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기를 원하는 거지·”
“쿤다라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일겁부터 구겁까지 모든 시공에 생명이 존재해야 한다는 건가?”
레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건지 모르겠군· 외겁도시가 제대로 움직이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닐 텐데·”
“아니야· 지금 구겁이 비어 있는 건 원로성에서 의도한 결과니까·”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결말의 때가 오기 전까지 이 도시는 움직여서는 안 돼· 지금처럼 안개의 우주 속에 숨어 끊임없이 성능 테스트를 거쳐야 하지·”
“····”
“하지만 말레온이 원하는 건 외겁도시를 제대로 작동시켜 장막 바깥으로 나가는 거야·”
포혈공이 순간 레녹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이 외겁도시의 존재가 정말로 대답이 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해· 그래서 자신의 승천을 계기로 삼아 그 사실을 실험하려 하지·”
“이 도시는 장생종들을 품은 방주나 마찬가지다· 장막의 이면을 이탈한다고 위험해질 일은 없을 텐데·”
레녹이 물었다·
그가 쿤다라에 들어오기 직전 보았던 안개의 우주를 부유하는 거대한 위성의 형상·
그것이 외겁도시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레녹으로선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었기 때문·
“인공적으로 위성을 만들어 장막의 이면에 숨겼다면 그 내구성이나 안정성은 다른 도시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견고하겠지· 어지간한 충격이나 뒤틀림으로는 무너질 일도 없을 거다·”
“쿤다라가 장막의 이면에 숨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지속 가능한 여러 협약과 봉인이 있어·”
포혈공이 조용히 말했다·
“아르스노바가 멸망한 뒤로 우리가 속세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지되는 균형도 있지· 그건 장막 안팎을 통틀어서 마찬가지야·”
“····”
“수백 년을 산 장생종들이 중앙전선에 합류하면 어떻게 되지? 그들이 도시국가로 흘러 들어가 극대전력을 자처하면? 숨겨진 고대의 기술과 술식이 세간에 풀린다면?”
흡혈귀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흐릿해졌다·
“혼란은 지금보다 훨씬 더 극심해지겠지· 어느 쪽이든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이 뒤따를 테고·”
“그렇군·”
레녹이 말했다·
무심한 눈빛으로 소녀를 내려다보던 레녹이 말을 툭 던졌다·
“그 사실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다면 나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봤을지도 모르지·”
“····”
“말레온과 만나 쿤다라의 내사를 전해들은 뒤에야 이 사실을 설명해 주는 건가?”
의자에 등을 기댄 레녹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딱히 공감은 가지 않는군· 오히려 네가 속세의 균형을 이렇게나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더 놀라운데·”
“그건····”
“애초에 넌 말레온을 막으려하지도 않았잖나· 그 사실을 숨기고 내가 말레온과 접촉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지·”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면 그것조차 금제의 영향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생각인가?”
“난 말레온의 계획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아· 내가 이제 와서 다른 도전자를 비웃고 깎아내릴 자격은 없지·”
포혈공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네 존재가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알 수 없었던 것뿐이야· 말레온의 도전이 끝나고 그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
“····”
“호쾌하고 유능한 호인으로 보였겠지· 실제로 그는 굉장히 담대하고 강인한 성품을 지닌 용이니까·”
소녀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말레온 그노시스는 위험한 존재야· 한점의 악의 없이 자신보다 큰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이란 다들 그렇지·”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관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
처음으로 포혈공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두운 응접실의 촛불 너머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기묘한 정적·
“카이세의 시신이 숨겨진 위치를 들은 뒤로 정보에 대한 대가를 아직 지불하지 않았었지·”
테이블 위로 턱을 괸 레녹이 물었다·
“혈려서기 대신 내가 그쪽에게 지불해야 하는 대가· 내가 말레온과 협력하지 않기를 원하나?”
“····”
“쿤다라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찾아놓고 혈려서기를 회수할 수 없어진 시점에서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지·”
천천히 시선을 앞으로 기울인 레녹이 물었다·
“말해봐· 너는 이 도시에서 뭘 원하는 거지?”
“···아니·”
그렇게 말한 소녀가 양 팔로 의자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이 닿지 않는 의자 위에서 뛰어내린 그녀가 붉은 눈으로 레녹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말했듯이 네가 말레온의 계획에 협력하든 말든 상관없어·”
“····”
“너를 부른 건 말레온의 계획과는 별개로 카이세의 시신을 회수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가 있기 때문이니까·”
“시신을 회수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
포혈공은 카이세의 시신이 구겁의 십관(十管)이라는 장소에 숨겨져 있다고 말했다·
그 십관이라는 장소에 진입하기 위해서 레녹이 따로 해야 할 일이 존재하는 것인가·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 포혈공이 레녹을 바라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말레온의 도전을 막을 수 없다면 그 성패와는 별개로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
“····”
“그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말레온은 구겁의 시련에 도전할 테고 네게도 한 번쯤은 기회가 생길 거야·”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레녹을 응시하던 포혈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십관(十管)의 약속을 깨기 위한 준비를 지금부터 시작해야겠어·”
“십관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설명에 공을 들이는 건지 모르겠군·”
레녹이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물었다·
“단순히 풀어쓰자면 열 개의 대롱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그 안에 카이세가 어떤 식으로 안치되어 있기에 준비가 필요하다는 거지?”
“카이세는 자신의 죽음이 그 자체로 완전해지기를 바랬어·”
포혈공이 대답했다·
“프로젝트의 실패를 끝으로 자신의 능력이나 천성이 다른 식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
“···”
“파우드의 반역 이후 카이세의 시신을 구겁에 옮겼고 진혈(眞血)을 보유한 최고위 장생종들이 모여 피의 계약을 맺었지·”
소녀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면서 말했다·
“열 명의 진혈을 모아 혈법진을 그리고 그 내부 공간을 거대한 모형정원이자 영역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포혈공이 싸늘하게 말했다·
“십관은 오직 진혈을 보유한 쿤다라의 최고위 장생종의 죽음으로만 열리게 되어 있어·”
* * *
“구겁의 십관을 열기 위해 진혈종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포혈공을 따라 선지 푸딩을 남겨두고 응접실을 나온 레녹이 물었다·
“다만 쿤다라의 최고위 장생종을 죽였다가는 소란을 피할 수 없을 텐데· 방법이 있는 건가?”
쿤다라에 들어오기 전 수신용왕 알로건과 충돌한 적은 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구경꾼을 신경 쓰지 않고 심해권역을 때려 부쉈던 그때와는 달리 쿤다라 전역에서 지켜보는 눈이 워낙 많은 바·
레녹이 만약 합의되지 않은 방식으로 무력을 행사한다면 다른 강대한 장생종들이 즉시 개입해 오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 몸을 건사할 자신은 있지만 소란이 커질수록 구겁에 도달하는 일은 요원해질 가능성이 높다·
말레온을 돕기로 결정한 것 자체가 구겁에 진입하기 위해서인 만큼 일이 본말전도가 되는 결과는 피해야 할 터·
“네 말대로 진혈종을 마음대로 죽였다가는 일이 커지는 걸 피할 수 없겠지·”
혈영궁 밖으로 레녹을 안내하던 포혈공이 말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을 빠르게 처리한다면 수습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사냥보다 암살이 더 쉽다는 뜻이군·”
“뒷수습에 대해서라면 내 쪽에서도 도와줄 방법도 있지·”
붉은 눈으로 레녹을 돌아본 소녀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나는 흡혈귀야· 피를 다루는 일에 관해서 나보다 뛰어난 장생종은 없어·”
“····”
“네가 일을 제대로 처리한다면 현장에 남은 흔적은 내가 지워줄 수 있어· 적어도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만들어줄 수도 있지·”
“시기나 장소만 잘 잡으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인가·”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진혈을 보유한 최고위 장생종들은 대부분 도시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만의 성채나 둥지를 갖고 있거든·”
당장 레녹과 대화하고 있는 포혈공만 해도 자신의 영토인 혈영궁에 기거하며 거의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
다른 진혈 장생종들이 비슷한 습성을 지녔다면 타인의 눈이나 경계를 피해서 그들을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
“중요한 건 네가 그들과 만날 명분을 손에 넣는 거야· 이 경우에는 네가 지금껏 만들어놓은 명성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오백로를 가르친다는 걸 명분으로 삼아 진혈종을 찾아가라고?”
레녹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방문한 성채와 둥지마다 집주인이 죽어 나간다면 잘도 비밀이 지켜지겠군·”
“애초에 네가 말레온의 협력자가 된 것도 네가 고위 장생종들에게 오백로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잖아?”
포혈공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는 말레온이 승급 의식에 도전한 뒤일 거야· 그 뒤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
중요한 것은 말레온의 승급 의식의 성공률을 높이고 레녹이 그를 따라 구겁에 무사히 들어가는 것·
그 뒤에 일어날 소란이나 죽음 따위는 하등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레녹이 말레온과 만나는 것을 내켜하지 않던 것 치고 포혈공의 계획은 굉장히 급진적이다·
“말이야 쉽지만 실제로 해낼 수 있으리라 장담하긴 어렵군·”
레녹이 팔짱을 꼈다·
“일단 네가 말하는 목표가 누구인지가 더 중요할 것 같은데·”
“그 부분을 확정 짓기 위해서 혈려서기가 필요했던 거야·”
포혈공이 그렇게 말하며 레녹에게 손을 뻗었다·
“꺼내줘· 아직 가지고 있지?”
“····”
레녹이 낡은 수첩을 꺼내 들자 포혈공이 손가락에 피를 내어 수첩 위에 떨어뜨리기 그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붓으로 삼아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기묘한 모습·
한참 수첩을 붙들고 씨름하던 소녀가 뿌듯한 기색으로 레녹에게 수첩을 넘겨주었다·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
“···이게 뭐지?”
낡은 수첩 위에 삐뚤빼뚤한 그림체로 무언가 그려져 있다·
구불구불하고 징그럽게 생겼다는 것 말고는 그 정체를 전혀 알아볼 수 없는 형태·
레녹의 질문에 포혈공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뭐야 일부러 혈려서기에 검색하기 쉽게 그림을 그려준 건데· 모르는 척하는 거야?”
“····”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혈려서기를 펼쳐 수첩에 떠오른 대답을 보여주었다·
=해당 괴문자를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해 합당한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
=혹시 장생종이 아니라 키메라를 검색하고 계신다면 주문연맹의 접합-
“아 알았어!!”
입을 삐죽 내민 소녀가 수첩을 홱 뺏어서 손을 들어올렸다·
“다시 하면 되잖아· 다시 하면·”
투덜거리면서 아까보다 훨씬 더 공을 들여서 그림을 그리는 포혈공의 모습·
어찌나 정신을 집중했는지 수첩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혼자 입술을 막 달싹거린다·
그림을 그리면서 혼자 이런저런 디테일을 입으로 중얼거리는 스타일인가·
레녹이 하등 쓸모없는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던 순간·
“됐어 안 해!”
“····”
포혈공이 발끈한 표정으로 수첩의 페이지를 그대로 휙 넘겨 버렸다·
아까보다 더 기괴한 그림이 그려진 페이지 뒷면에 그림 대신 글을 적어넣는 포혈공의 모습·
=피의 계약을 맺은 장생종 중에서 진혈을 온전하게 보유하고 있는 존재를 찾고 싶어·
레녹이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인지 혈려서기가 즉시 응답했다·
=해당 생물종에 관한 정보를 찾아 표기합니다·
스르륵···!!
그 말과 함께 수첩의 페이지 위로 새하얀 비늘을 지닌 뱀의 모습이 천천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새하얗고 거대하면서 독을 품고 있는 노쇠한 뱀·
레녹에게 오백로 대회를 소개하며 승천의 비약을 추천했던-
“···이자는·”
“팔겁의 원로성에 속한 다섯 명의 최고위원 중 하나 니백스 오로시아·”
포혈공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8레벨의 독성술사이자 스스로 구축한 독함림에서 숨어 기어 나오지 않는 기인이야·”
“····”
“그리고 피의 계약에 사용했던 진혈(眞血)을 혼자 몰래 회수해 승천의 비약을 만드는데 사용한 배신자이기도 하지·”
혈려서기를 레녹에게 내민 소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카이세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서 이 뱀을 죽여야 해· 할 수 있겠어?”
레녹에게 승천의 비약을 소개하면서 거래를 제안했던 흰 뱀 니백스 오로시아·
십관에 들어가기 위해 죽여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올리비에라의 지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