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6화
쿤다라(9)
“대륙 역사상 9레벨에 도달한 승천자는 공식적으로 열 명도 채 되지 않지·”
팔겁의 전당에 마주 앉아 오백로를 두는 두 사람·
흑돌과 백돌이 빠른 속도로 교차하면서 쉴 새 없이 뒤집혀 나가지만·
레녹을 마주한 말레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살아온 승천자들은 그 존재만으로 대륙의 여러 문명에 영향을 끼치곤 했네·”
“····”
“진둔 역시 마찬가지· 결계술과 술법진에 대한 그의 성취는 다른 승천자들조차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었으니·”
담담한 안색으로 레녹이 내려놓은 흑돌을 바라보던 말레온이 턱을 짚으면서 말했다·
“폐쇄적이었던 그의 성격과는 달리 그가 남긴 작품은 대륙 곳곳에 남아 있지· 자네도 짐작 가는 부분이 있을걸세·”
짐작이 가는 수준이 아니라 진둔이 세운 항하사미궁의 요람에 직접 들어갔다 나오기까지 했었지만·
레녹은 그에 대해 언급하는 대신 차가운 표정으로 눈앞의 용머리 거인을 응시했다·
항하사미궁에서 진둔의 결계술을 전수받은 것은 견뢰가 아니라 천번의 신분으로 한 일·
말레온의 본심이 무엇이든 간에 그 사실을 타인에게 직접 고할 생각은 없다·
다만 레녹이 확인해야 할 것은 승천자들의 위상이 얼마나 초월적이었는가 아닐 터·
스스로 9레벨의 승천자가 되어 구겁의 시련을 돌파하려 한다는 말레온의 계획·
그 과정에서 진둔이 남긴 승급의 법진을 다루기 위해 레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제안·
말레온이 말한 계획과 쿤다라에 예정된 중대한 행사가 동일한 뜻이었다면-
“진둔의 위상이 어떤 느낌인지는 이해했다· 그가 아홉 가지 겁의 시련을 설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도 그렇지·”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아니야· 겁의 시련을 통과하는데 오백로가 도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이 도시가 진둔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을 테니·”
“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네가 구겁을 통과하기 위해 승천자가 되려 한다는 설명 그 자체다·”
레녹이 물었다·
“너는 구겁을 통과하기 위해 승천자가 되려는 건가 아니면 승천자가 되기 위해 구겁을 통과하려는 건가?”
“····”
“이 두 가지는 같으면서도 분명 다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일 수도 있지·”
침묵하는 말레온을 보면서 레녹이 싸늘하게 말했다·
“내 협조를 원한다면 네 목적과 수단이 어느 방향으로 치우쳤는지를 우선 알아야 할 것 같군·”
멸망을 피해 만들어진 장생종들의 도시에 새롭게 태어나는 9레벨의 승천자·
말레온이 그 후보로서 대업을 앞두고 있었다면 외겁도시 전역이 주시하는 것도 당연한 일·
말레온이 이 외겁도시에서 다른 장생종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던 것도
원로성의 보고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승천의 비약을 레녹에게 넘겨줄 수 있던 것도·
그만한 권한을 지녔으면서도 비약에 집착하지 않던 것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네가 던진 질문 자체가 내게 있어서는 대답이나 다름없군·”
말레온이 담담하게 고했다·
“구겁에 들어가는 것· 승천자가 되는 것· 두 가지 비원이 모두 수단이자 목적으로서 기능하기에 내가 이 위업에 도전하고 있음을·”
“····”
“한쪽이 중요해서가 아니야· 두가지 모두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대업이기에 자네에게 협력을 부탁하는 걸세·”
강한 시선으로 레녹을 바라본 말레온이 말했다·
“부탁하지· 내가 승천자가 되어 구겁의 시련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만이 이 일을 도와줄 수 있어·”
“승천자가 되어 구겁에 진입하기 위해 내 도움을 받겠다라·”
조용히 말레온이 선언한 제안을 따라 중얼거린 레녹이 어이가 없는 듯 눈앞의 용머리 거인을 바라보았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9레벨에 도달하겠다고?”
“····”
“그 사실조차 거래로 삼아서 내 힘을 빌리려고 하다니 지나치게 오래 살아서 미쳐버리기라도 한 모양이군·”
말레온은 스스로 승천자가 될 준비를 하면서도 그 준비 과정 자체를 거래로 삼으려 하고 있다·
레녹이 구겁에 볼일이 있음을 알고 그 목적을 대가로 삼아 자신의 승급에 협력하게 한다는 발상·
자격을 얻고 9레벨에 오르는 것이 자신을 재구축하는 대업임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스스로의 존재와 존속을 좌우하는 중대사를 앞두고도 바깥의 일에 신경을 쓰는 건가·
오랫동안 구도의 길을 걸어온 레녹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광기·
하지만 말레온은 그런 레녹의 말을 듣고도 어깨를 으쓱였다·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군· 하지만 나로서는 최대한 합리적인 선택지를 고른 것뿐이네·”
“근거없는 맹신이 아니라?”
“자네는 모르겠지만 본인은 승천자가 되기 위해 수십 년 전부터 준비를 거듭해 왔네·”
말레온의 표정이 진중하게 변했다·
“승급 의식을 앞둔 지금 스스로 할 수 있는 준비는 거의 다 끝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러지 않고서야 자네와 한가롭게 오백로를 두고 있을 리가 없지 않겠나?”
“····”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말레온의 여유롭던 언동이나 반대로 그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대우하던 고위 장생종들의 태도라면·
그가 예의 대업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쿤다라의 적지 않은 이들이 알고 있기 때문일 터·
“스스로 할 수 있는 준비는 끝냈으니 이제 외부의 도움이라도 더 끌어와보겠다?”
“평생 동안 쌓아온 모든 성취와 운명을 끌어모아 시도하는 일생일대의 도박일세·”
말레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늘에 결과를 맡기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손이라도 잡고 성공시켜야 할 대업이 아니겠는가·”
“····”
“물론 정말로 악마와 계약할 생각은 없지만 본인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이해했으리라고 믿네·”
장기판 위로 살짝 고개를 기울인 말레온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본인과 대등한 경지에 도달한 대마법사· 중앙전선 밖에서는 가장 승천에 가깝다는 찬사를 듣는 초월자가 내 눈앞에 있지·”
“····”
“쿤다라의 다른 어르신들과는 달리 자네는 본인과 어떠한 이해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술사야·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걸세·”
말레온이 한없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위계를 초월해 자격을 얻으려는 같은 도전자의 도움이 필요해· 내 마음을 이해하겠나?”
“그건····”
레녹이 무심코 그 말에 대답하려다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운명을 건 대업을 앞두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레녹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
자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일을 앞두고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전력을 다한다 해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위태로운 구도의 길이기에·
혹시 모를 행운과 기연에라도 기대고 싶은 그 마음을 레녹이 어찌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둔이 남긴 법진을 통해 승급 의식을 발동시킨다 해도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감정을 가라앉힌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레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9레벨에 도전하는 도중에는 너 역시 굉장히 불안정해질 거다· 그 부분에 대해 어떻게 서로를 신뢰할 수 있지?”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그건 내 선택의 결과일 뿐· 누군가 책망받아야 하는 일은 아니지·”
말레온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자네가 아니라 자네가 이 도시에 찾아온 목적을 믿고 있네·”
“····”
“장막을 비틀어가면서 닫힌 쿤다라에 찾아올 정도로 간절한 비원· 그 비원을 위해서라면 자네 역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이겠지·”
생각에 잠긴 레녹의 표정을 보며 말레온이 곧바로 단상에서 일어섰다·
“뭐 아직 좀 고민이 된다면 일단 걸으면서 이야기할까?”
떡 벌어진 어깨를 젖히고 허리를 편 말레온이 기지개를 펴자 단상 위로 큼지막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용의 머리를 쩍 벌리고 하품까지 갈긴 말레온이 레녹을 보며 씩 웃었다·
“움직이지· 자네에게 안내해 주고 싶은 곳이 있어·”
“난 아직 이번 일에 협조한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만·”
“그렇지만 자네 팔겁의 성소에서 원하던 것이 있던 것 아니었나?”
“····”
말레온의 지나가는 듯한 반문에 레녹이 순간적으로 돌을 쥔 손을 멈췄다·
“여의보주에 담긴 생명력을 수명으로 환전해 주는 팔겁의 성소·”
그런 레녹의 생각을 안다는 듯 웃은 말레온이 말했다·
“팔겁의 시련도 거치지 않고 이 안에 들어왔는데 기회가 될 때 방문해야지·”
“그건····”
“뭐 부담가지지 말고 따라오게· 자네가 반드시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 건 아니니까·”
말레온이 그렇게 말하며 휙 걸음을 옮겼다·
“허락도 없이 자네를 여기까지 끌고 온 보답일세· 이 정도는 이쪽에서 선물로 쥐여주지·”
“····”
단명종에게 있어서는 천금보다 귀중한 시간을 말레온은 선심 쓰듯 선물할 수 있는 것인가·
은빛의 광채를 발하는 용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고개를 저으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고오오오···!!
숨이 멎을 듯이 조용한 적막·
전당의 천장은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져 있어 바깥에서 몰아치는 희뿌연 안개가 고스란히 엿보인다·
하늘 위에서 범람하는 안개가 희뿌연 우주처럼 발광하면서 너른 은하수를 이루고 회전했다·
안개의 우주 위를 유영하는 인공 별· 외겁도시 쿤다라·
아홉개의 겁을 구조로 삼아 도시를 만들고 멸망을 회피하려는 도피처·
“진둔이 남겨둔 법진을 이용한다고 쳐도 타인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은 극히 한정되어 있을 텐데· 어떤 부분에서 내 협조를 원하는 거지? “
전당 위로 비춰진 안개의 우주를 올려다보던 레녹이 물었다·
“애초에 인간과 장생종이 위계를 쌓아올리는 방식은 서로 다른 것 아니었나?”
“진혈을 보유한 장생종이라 해도 생물의 범주를 완전히 초월한 것은 아닐세·”
말레온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머리를 부수고 심장을 찌르면 죽지· 수백 년을 살고 늙어 죽기도 하네· 결말이 찾아오면 우리들도 쓰레기처럼 외해 바깥을 나뒹굴게 되겠지·”
“····”
“마찬가지야· 승급에 필요한 의식 자체는 인간종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자네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걸세·”
힐끗 레녹을 돌아본 말레온이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진둔이 남긴 승급의 법진 조정을 맡기고 싶군·”
“법진의 조정이라고?”
“오백로에 능한 기사들은 대부분 굉장히 뛰어난 술법진의 달인이지·”
뒤에 두고 온 장기판을 눈짓하며 말레온이 말했다·
“하물며 자네는 칠겁의 어르신들에게도 오백로를 가르칠 정도로 뛰어난 기사가 아니었나·”
“····”
“내 듣기로는 앙그론에게 오백로를 가르쳐서 팔겁의 시련을 통과하기 직전까지 이르도록 만들었다 들었다만·”
턱을 쓰다듬은 말레온이 중후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불과 같은 친구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다면 자네의 실력과 안목이 가히 경지에 다다랐다는 뜻이겠지·”
레녹을 승급에 필요한 조력자로 고른 것 자체가 레녹이 8레벨의 대마법사이자 뛰어난 오백로 기사이기 때문이었나·
마법에 대한 재능만큼이나 술법진 작성에 능하기에 레녹의 존재가 유의미한 도움이 될 수 있다 확신했던 것·
“오백로의 실력이 술법진 작성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굉장히 신뢰하는 모양이군·”
레녹이 물었다·
“진둔이 겁의 시련을 설계했다고 하도 법진을 다루는 일에 오백로를 근거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이지·”
말레온이 답했다·
“겁의 시련을 통과하는 데 있어 오백로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쿤다라에 전파한 것이 바로 본인이었으니까·”
“···뭐?”
“쿤다라는 아르스노바의 영향을 받은 도시지만 유희로 소비되던 오백로의 진가를 이해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지·”
고요한 복도를 걸으면서 말레온이 시선을 돌렸다·
“몇몇 장생종들만이 깨닫고 누려온 그 편법을 나는 쿤다라 전역에 직접 공표해 모두가 사용케 했네·”
“····”
“멸망을 피한다는 것은 개개인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계몽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말레온이 고개를 들어 저 멀리 펼쳐진 안개의 우주를 바라보았다·
“개인의 초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아홉개의 겁을 지나 외겁에 도달하는 것·”
표정이 보이지 않게 시선을 돌린 말레온의 목소리가 순간 어둡게 가라앉는 듯했다·
“바로 그것이 내가 승천자가 되려는 이유일세·”
“····”
“누군가 비어 있는 구겁을 채워주지 않는다면 쿤다라는 정상적으로 외겁에 도달할 수 없을 테니까·”
설명하고 있지만 설명하지 않는다·
대답하고 있지만 말레온은 지금 레녹에게 답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녹을 관중으로 삼아 팔겁의 시공이라는 무대 위에서 독백하고 있을 뿐·
말레온이 승천자가 되어 구겁에 자리하려는 근본적인 이유·
누군가는 구겁을 채워서 외겁을 완성해야 한다는 그 말의 의미·
그에 대해 레녹이 생각하고 자신이 내린 결론에 대해 말하려던 그 순간·
“도착했군· 이쪽일세·”
말레온이 제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끝을 알 수 없는 광대한 전당의 복도 어딘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허한 복도의 한편·
그 앞에서 멈춰선 말레온을 보며 레녹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린 찰나·
“훕!”
팔짱을 낀 말레온이 은빛의 비늘에 휘감긴 꼬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가벼운 준비운동을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꼬리를 휘둘러 허공을 휘저은 순간·
파아앙!!
귀청을 찢는 충격파가 터져나오면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파문이 일었다·
가볍게 꼬리를 휘두른 결과라고는 믿기 어려운 채찍을 휘두른 것만 같은 강렬한 괴력·
레녹이 무심코 손을 들어올린 찰나 눈앞의 풍경이 부서지며 무언가가 비치기 시작했다·
“···분수?”
분수대 중앙에 세워진 거북이 조각상의 입에서 쏟아지는 붉은빛의 액체·
분수대 아래쪽에 설치된 원형의 수조에는 붉은빛의 샘물이 가득 차서 출렁이고 있었다·
쏴아아아!!
말 그대로 피를 녹여서 샘을 만들어놓은 듯한 화려하면서도 기묘한 광경·
분수대 옆에 선 말레온이 팔짱을 낀 채 꼬리를 들어 거북이 조각상을 가리켰다·
“아이탈론의 샘·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았다는 영귀(永龜)의 등껍질 허물을 재료로 만든 성소일세·”
“····”
“타고난 수명이 가장 길다는 장생종의 허물답게 이 성소는 생명력이라는 동력을 수명으로 환전해 주는 힘을 지녔지·”
말레온이 어깨를 으쓱이며 레녹을 향해 돌아섰다·
“자네가 이 성소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알로건과 오백로 내기를 통해 수명을 빼앗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
“말했듯이 이건 어디까지나 내 호의에 불과하니까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레녹을 향해 웃으면서 손을 내민 말레온이 말했다·
“원한다면 한번 사용해 보게· 난 여기서 지켜보도록 하지·”
“····”
레녹은 말레온을 말없이 바라보다 품안에서 여의주를 꺼내 들었다·
파아앗!!
알로건에게 빼앗아 완성시킨대로 찬란한 광채를 내뿜으면서 발광하는 여의주의 형상·
원래라면 올버의 공방에서 장비를 구매하기 위해 사용해야 했겠지만
장생종에게 오백로를 가르치며 일이 잘 풀린 덕에 여의주 자체는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다·
찰칵·
핏빛의 샘물을 쏟아내는 거북이 조각생에게 다가가 쩍 벌린 입안에 여의주를 끼워 넣는다·
마찰음과 함께 여의주가 거북이의 입에 틀어박힌 순간 조각상에서 흘러나오던 샘물이 뚝 끊겼다·
쩌저적!
딱딱하게 굳어 있던 거북이 조각상이 미친 듯이 요동치면서 천천히 레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의주의 힘을 동력으로 삼아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며 레녹을 바라보는 거북이의 모습·
초점이 없는 조각상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레녹을 또렷하게 바라본 찰나·
촤아아악!
“···!”
분수대 아래 넘실대던 붉은 샘물이 시간이 역행하는 것처럼 조각상을 향해 모조리 흡수되기 시작했다·
넓은 수조 안에 가득 차 있던 붉은 샘물을 모조리 들이마시고 분수대 바닥이 드러난 순간·
딸깍!!
거북이 조각상이 물고 있던 여의주를 그대로 레녹의 발 앞에 툭 떨어뜨렸다·
핏빛의 샘물을 모두 흡수하고 찬란한 붉은 광채를 발하는 여의주의 형상·
발치에 굴러 떨어진 여의주를 움켜쥔 레녹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구슬의 형태를 하고 있던 여의주가 아까와는 형태가 달라져 있었기 때문·
거북이의 이빨을 따라 움푹 패여 무언가를 담는 함처럼 변해버린 여의주의 모습·
“이건···”
“수신용왕의 생명력을 담았다고는 하나 한번의 환전에 남은 샘물을 모조리 써 버린 겐가·”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말레온은 외려 그 모습에 훨씬 흥미를 느낀 듯했다·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로군· 다음번에 성소를 사용하려면 족히 몇년은 기다려야 하겠어·”
“이게 뭐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쥔 여의주를 들어올렸다·
“여의주의 형태 자체가 변해 버렸는데· 이걸 수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여의주에 담긴 생명력을 수명으로 환전한다는 이미지와는 영 동떨어진 결과·
애초에 함의 형태로 변한 여의주가 레녹에게 있어 어떻게 수명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말레온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수명이 아닐세 반·”
“뭐?”
“아이탈론의 샘이 수명을 환전해 줄 때는 사용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형태로 작동하지·”
팔짱을 낀 말레온이 말했다·
“이 경우에는 자네가 아니라 자네가 보유한 이 여의주를 대상으로 삼아 성소가 작동한 듯하군·”
“흠····”
대상지정 저항능력을 꺼두지 않았기 때문일까 레녹의 페널티 자체가 그만큼 특수하기 때문일까·
애초에 성소가 정상적으로 작동할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으니 예상치 못한 결과가 일어난 건 납득할 수 있지만·
말레온은 오히려 레녹의 손에 들린 작은 함과 같은 여의주의 모습이 더욱 흥미로운 듯했다·
“아주 오래전에 구세계의 문헌에서 그것과 비슷한 물건을 본 적이 있지·”
“····”
“무한한 시간을 구가하는 사술의 대가들이 자신의 수명을 나눠 담아 죽음을 무마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들었네·”
“그건····”
그제서야 말레온이 하는 말을 이해한 레녹이 입을 다물었다·
설마 그의 말대로라면 아이탈론의 샘이 레녹에게 전해준 것은 수명이 아니라····
“엑스트라 라이프 베슬(Extra Life Vessel)·”
말레온이 흥미로운 듯 말했다·
“아이탈론의 샘은 자네의 최대수명을 늘려주는 대신 남아 있는 수명 안에서 여분의 목숨을 자네에게 쥐여준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