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5화
쿤다라(8)
탁!!
사람들이 오가는 길을 벗어난 안뜰의 단상에 적당히 자리를 잡는다·
대진표에 따라 승패를 기록하는 소년을 뒤로하고 장기판 앞에 앉아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
레녹은 장기판 맞은 편에 앉은 용머리 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전신을 뒤덮고 은은하게 빛나는 은빛의 비늘· 사선으로 날카롭게 갈라진 입과 머리 위로 돋아난 뿔·
독수리처럼 강렬하면서도 선명한 눈매와 그림처럼 굴곡진 이목구비·
파충류의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용모가 훤칠하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듯하다·
단순히 인간화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수려한 겉모습만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흩뿌리는 용인·
“미안하지만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네·”
장기판에 앉아 돌을 만지작거리던 용인 말레온이 씩 웃었다·
“뭐 본인의 얼굴이 남자답게 잘 생긴 것은 사실이지· 자네가 부러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자기애가 무척이나 강하신 분이시군요·”
레녹이 피식 웃으면서 말레온이 내민 돌을 골라 쥐었다·
흑돌· 장생종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말레온은 선수를 레녹에게 넘겨주었다·
“대국을 시작하기 전에 이 대국의 의미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만·”
적당히 돌 하나를 골라 장기판 위에 대충 내려놓은 레녹이 물었다·
“당신이 이 오백로 대회를 개최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런가? 그렇게 난해한 설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탁!!
거침없이 백돌을 내려놓은 말레온이 턱을 괸 채로 대답했다·
레녹이 돌을 두자마자 대응에 나서는 빠르다 못해 시원시원한 기풍·
용인의 눈동자가 순간 레녹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추는 듯했다·
“거대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는 대마법사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이해했을 줄 알았다만·”
“····”
침묵이 흘렀다·
반응을 보고 싶은 듯 시선을 기울이는 말레온과 대답하지 않는 레녹의 시선이 엇나간다·
하지만 레녹은 미묘한 침묵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흑돌을 내려놓았다·
역시 이 용인은 단순히 오백로 실력을 보고 레녹을 상대로 지목한 것이 아니다·
말레온이라 불린 이 남자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레녹을 찾아왔음을·
그럼에도 태연하게 레녹과 오백로 한판을 두려 한다는 것을 레녹은 알고 있었던 것·
“발칸의 견뢰· 피에 미친 대마법사· 끝이 없는 투쟁을 자신의 성장 동력으로 삼는 광인이라 했던가·”
백돌을 들어 눈 위에 가져다 대고 유심히 들여다보던 말레온이 말했다·
“현재 대륙을 통틀어 가장 승천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마법사· 그 소문이 어찌나 흉흉하던지 나 같은 장생종에게도 이야기가 종종 들리더군·”
“····”
“팔겁에 숨은 원로성의 어르신들은 내켜 하지 않겠지만 나는 바깥의 단명종들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네·”
빠르게 돌이 교차하는 장기판을 보며 말레온이 말했다·
“겁의 바깥으로 도망치지 않고 중앙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 느끼거든·”
“그렇습니까?”
“그래서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로 오늘의 만남을 꽤 오랫동안 고대하고 있었지·”
레녹을 바라보는 말레온의 동공이 번뜩였다·
“기왕 천번을 만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 천번을 쓰러뜨린 견뢰가 대체 어떤 술사인지도 너무나 궁금했거든·”
“····”
“흥미로워·”
탁·
턱을 괸 채 솥뚜껑만 한 큰 손으로 돌을 내려놓은 말레온이 말했다·
“알로건을 농락한 방식도 겁의 시련을 통과하지 않고 여기 있는 것도 장생종을 상대로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 것도 말일세·”
“····”
“그건 적어도 내가 바깥에서 전해들은 견뢰의 악명이나 피에 젖은 살성과는 많이 달라 보이더군·”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만약 이 도시에서 우리의 뜻이 일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 협력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
“예?”
“아 다 됐군·”
타닥!!
말레온이 그렇게 말하며 백돌을 내려놓은 그 순간 장기판의 풍경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장기판 위에 원을 그리며 놓인 백돌이 강렬한 술법진을 그리면서 머리 위로 떠올랐다·
부아아아앙···!!!
오백로 장기판 위에 둔 돌을 술법진의 재료로 삼아 술식을 발동시키는 말레온의 기예·
그것을 깨달은 레녹이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올린 그 순간·
쩌적!!!
레녹과 말레온이 마주 앉은 단상을 중심으로 공간 자체가 뒤틀리면서 격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두 사람이 선 공간을 강제로 뜯어내어 다른 곳에 이어붙이는 듯한 위화감·
“서대륙 흑림(黑林)에서 관측되는 공간절리(空間節理) 현상을 술식화시켜 술법진으로 전개한 걸세·”
턱을 괸 말레온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내 특기는 아니긴 한데 자네 앞에서 폼을 잡을 정도로는 괜찮게 완성이 된 모양이군·”
“···당신·”
“지금부터는 좀 위험한 이야기를 해야하니까 잠깐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쿠구구구!!!
눈치챈 순간 레녹은 어느새 광활한 전당의 한복판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용과 기린 영수와 환수의 형태를 띈 장생종들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는 거대한 전당·
그 위에 레녹과 말레온이 앉아 있던 단상 한쪽을 잘라 오려 붙이듯이 갖다 붙인 기묘한 모습·
하지만 레녹은 그 잠깐 사이 말레온이 한 일을 깨닫고 희미하게 입매를 굳혔다·
‘장기판의 돌만으로 간이 술법진을 만들어 결과로서 공간을 조작해 낸 건가·’
진둔이 만든 오백로는 술법진 학습에 도움을 주는 보드게임이지만 실제로 장기판 위에 술법진을 그리도록 설계된 게임은 아니다·
돌의 배치와 변화를 통해 술식 소양을 갈고 닦을 수는 있을지언정 게임을 두는 것만으로는 술식을 사용할 수 없는 바·
하지만 말레온은 레녹과 자연스럽게 대국을 이어가는 도중 자신이 둔 백돌의 배치만으로 술법진을 완성·
그것을 장기판 위에서 강제로 작동시켜 두 사람이 앉아 있던 단상을 이 정체모를 전당 안으로 전송시켜버렸다·
포혈공이 레녹을 혈영궁으로 이동시킨 재주보다 훨씬 더 후천적인 술식조작의 극치에 가까운 기예·
눈앞의 이 용머리 거인이 레녹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수준에 도달한 술사라는 증거였다·
“쿤다라의 장생종들은 여기저기 장소를 바꿔대는 걸 상당히 좋아하는군·”
존대를 때려치운 레녹이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넘기며 물었다·
“여기는 어디지?”
“팔겁(八劫)의 안쪽·”
말레온이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대답했다·
“쿤다라라는 도피처를 설계한 창시자들을 기리는 기념관이지·”
“···기념관?”
팔겁의 시련을 통과하고 나면 이런 기묘한 공간이 장생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 그것보다 팔겁에 도착하면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알로건에게 받아 생명력을 채워 넣은 여의주· 그 안에 담긴 생명력을 수명으로 환전하기 위한 성소가 분명-
“자기개변의 일곱 가지 위계를 완성하는 과정은 하나의 생명에게 있어 존재를 정의하는 시련이나 다름없으니·”
말레온이 말했다·
“우리 장생종은 위계를 넘어서는 것을 시련이라 해석하여 겁(劫)이라 칭하였네·”
“····”
“구도자는 아홉 번의 겁을 넘어 세계의 결말을 마주하게 되지만 네 번째가 없는 이상 모두가 실패할 뿐·”
용인의 동공이 심유한 감정을 담고 레녹을 마주했다·
“겁을 통과해 결말을 마주하는 대신 겁의 바깥에서 결말을 피하기로 약속하였으니· 우리는 그것을 외겁(外劫)이라 불렀어·”
“도시 전체를 아홉 가지 위계의 길 위에 놓고 그를 벗어나 멸망을 피하려 한 건가·”
레녹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외겁도시라는 건 너희들이 선택한 대답을 가장 직설적으로 이르는 말이었군·”
겁의 시련을 통과해야만 쿤다라의 더 높은 상위 구역으로 향할 수 있다·
하지만 겁을 통과하려면 도전자 스스로 그에 적합한 위계를 갖춰야 하였으니·
수백 년을 넘게 살아가는 장생종조차 수련을 반복하고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한다·
장생종들이 오백로에 몰두하고 집착하는 것조차 이 도시가 존재하는 방식에 깊게 엮여 있었으니·
외겁도시란 멸망을 피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방식 자체를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다·
“왜 이런 설명을 내게 하고 있는 거지?”
“자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고?”
“인간의 몸으로 구겁에 들어가고 싶은 것· 아니었나?”
“····”
“그것을 위해 오백로 대회에서 우승해 승천의 비약을 손에 넣으려 했겠지·”
레녹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레온이 말했다·
“니베스의 제안이겠지? 그 노망난 독술사가 아니고서야 비약의 존재를 알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한 말레온이 품 안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은빛의 비늘로 뒤덮인 손 안에서 자수정을 깎아 만든 듯한 작은 약병이 끌려 나왔다·
그것을 보지도 않고 장기판 한가운데 내려놓은 말레온이 말했다·
“이것을 마시고 구겁을 통과하는 건 자네에게 있어 결코 좋은 일이 아닐걸세·”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레녹이 황당한 표정으로 장기판 위에 놓인 약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게 그 하얀 뱀이 말했던 승천의 비약이라는 말인가?”
“원로성의 보고에 보관되어 있는 물건을 꺼내왔지·”
말레온이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을 직접 보여주고 설득하지 않는다면 자네 같은 술사는 내 말을 믿지 않을 테니까·”
“····”
레녹과 직접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말을 전하기 위해 승천의 비약을 직접 가져온 것인가·
오백로 대회를 우승한 뒤 원로성의 보고에서 선택했어야 할 보상이 눈앞에 놓여 있다는 황당한 결과·
하지만 말레온은 비약을 쳐다보지도 않고 레녹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원한다면 직접 확인해 봐도 좋네· 그러라고 꺼내온 것이니까·”
레녹을 바라보는 말레온의 눈빛이 한없이 차분했다·
“이 비약은 생물이 마셔서는 안 되는 물건이야· 나는 자네에게 니베스의 제안이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네·”
“····”
말없이 말레온을 바라보던 레녹이 손을 뻗어 장기판 위에 놓인 약병을 움켜쥐었다·
자수정처럼 아름답게 발광하는 약병 표면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젖힌 그 순간·
말라비틀어진 속삭임이 약병 안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
[구축해 주마····]
“···!”
[살아 있는 살점을 찢고 싶다····]
[벌레들을 도축하자····]
[왜 왜 내가 죽어야만 하는 건데····]
약병 안에서 들려오는 지독하게 비틀린 누군가의 사념·
온갖 부정적이고 끔찍한 염상과 단어로 범벅이 되어 일그러진 염상·
잠시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하다·
레녹이 이 정도라면 어지간한 사람은 약병을 열어 귀를 기울이는 순간 미쳐버려도 이상하지 않겠지·
딸깍·
표정을 찡그린 레녹이 뚜껑을 닫자 말레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겠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평범한 비약이나 독이 아니야·”
“····”
“승천에 실패한 초월자의 사념과 그 시체에 남은 내단을 오랫동안 썩혀 만든 오염체지·”
말레온이 이어서 말했다·
“그것을 복용하면 잠시나마 승천자와 비슷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겠지· 하지만 자네라는 존재를 근본부터 무너뜨리는 타락이 그다음에 있을 거다·”
“비약의 효과는 어디까지나 독의 부작용에 불과하다는 건가·”
“원한다면 비약을 가져도 좋네· 내가 그 비약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지·”
말레온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결코 복용하지는 말도록· 나는 자네에게 다른 방법을 권유하기 위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걸세·”
“···재미있군·”
약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녹이 차갑게 웃으면서 그것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확실히 위험한 물건이라는 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버릴 생각도 없다·
승천에 실패한 초월자를 썩혀 만든 독이라면 굳이 레녹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도 어딘가 쓸 곳이 있을 터·
“좋아· 이 비약을 복용하는 일은 보류하도록 하지·”
“다행이군·”
“하지만 그건 그쪽이 뭘 원하는지 듣고 난 뒤에 결정할 일이 될 거다·”
여유 공간이 거의 없는 개인 아공간에 약병을 밀어 넣은 레녹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말레온을 응시했다·
“비약을 직접 주면서까지 날 설득한 건 너도 내게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
“····”
“말해봐· 비약을 사용하지 않고 승천자가 되는 것도 아닌 채 구겁에 들어갈 방법이 무엇이지?”
“구겁의 시련이라는 건 다른 여덟가지 겁을 통과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네·”
말레온이 말했다·
“본인이 직접 시련을 통과하지 않더라도 옆에서 시련을 넘어선 존재가 있다면 그를 따라 구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
“구겁의 시련을 통과한 다른 존재를 기다리라고?”
“물론 그렇게 들어간 구겁 안에서 버티는 것 정도는 직접 해내야겠지·”
레녹이 표정을 찡그리자 말레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자네 정도 되는 대술사라면 구겁 안에서 자아를 유지한 채로 버티는 것 정도는 아예 불가능하지 않-”
“아까부터 자꾸 다른 이야기를 하는 군·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런 부분이 아니야·”
말레온의 말을 끊은 레녹이 짜증스레 말했다·
“구겁의 시련을 통과하는 누군가를 따라가라는 말은 일단 시련에 도전할 주체가 있어야만 가능할 일일 텐데·”
“····”
“네 제안대로 일이 진행되려면 적어도 외겁도시에서 9레벨에 올라서려는 누군가가 있어야 해·”
“····”
“애초에 지금 중대한 행사를 앞두고 있다는 외겁도시에서 대체 누가-”
거기까지 말하던 레녹의 말이 그 자리에서 뚝 끊겨 버렸다·
구겁의 시련에 도전하는 초월자를 따라 시련을 통과하는 방법·
쿤다라 전역에서 준비중이라는 중대한 행사·
외겁도시에서 가장 재능있는 대술사로 여겨진다는 말레온의 존재·
이 모든 이야기가 단 하나의 인과로 엮여있다는 사실을 레녹 역시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
아니 어쩌면 말레온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녹이 그것을 어렴풋이 직감하면서도 부정했던 것은 말레온이 제안하는 방법 자체가-
침묵하는 레녹을 보며 말레온이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이제 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모양이군·”
“설마 너·”
어렵사리 말을 끊은 레녹이 물었다·
“네가··· 쿤다라의 새로운 승천자가 될 생각인 건가?”
“이런 중요한 일에 자리에 없는 타인을 전제로 이야기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말레온이 씩 웃으면서 어깨를 폈다·
“돌려 말하지 않지· 나는 이 도시에서 승급 의식을 통해 새로운 승천자가 될 생각이네·”
“····”
“그리고 자네는 고위 장생종들이 겁의 시련을 통과하는 것을 도와주는 데 있어 굉장히 유능한 자질을 지니고 있지·”
입을 다문 레녹을 향해 손을 뻗은 말레온이 물었다·
“내가 승천자가 되는 것을 도와주게· 그렇다면 자네가 내 옆에서 구겁을 같이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비현실적인 계획이군·”
레녹이 어렵사리 표정을 관리하면서 대꾸했다·
말레온이 쿤다라의 새로운 승천자가 되어 구겁을 통과하려 한다는 계획·
그가 이 도시에서 스스로 9레벨에 오르려 한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지만 레녹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승천자가 된다는 선언으로 이뤄지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어·”
“····”
“9레벨에 도달할 수 있다 확신하는 이유가 뭐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쿤다라에 존재하는 아홉 가지 겁의 시련을 설계할 때 우리는 한 승천자의 도움을 받았었지·”
말레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결계술과 술법진에 능통한 그가 설계를 도와주었기에 우리는 안개의 우주에 기반을 만들 수 있었네·”
“····”
결계술과 술법진에 능통한 승천자가 쿤다라의 겁을 설계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 말을 들은 레녹이 무심코 입매를 꿈틀거린 찰나 말레온이 말했다·
“승천자 진둔· 자이기스 이더노어가 팔겁의 성소 끝에 남겨 둔 승급의 법진이 있네·”
“····”
“진둔 본인이 겁의 시련을 설계할 당시 사용했던 법진인데 오랜 시간 동안 쿤다라의 그 누구도 다뤄내지 못했던 물건이지·”
말레온이 진지한 표정으로 레녹과 시선을 맞췄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해석을 거쳐 그 술법진을 통해 9레벨에 도달하는 승급의식을 강제로 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네·”
“····”
“내가 이 사실을 자네와 같은 뛰어난 오백로 기사에게 말해주는 이유를 이해하리라 믿네·”
말레온이 말을 이어나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최근 휴면상태에 빠져 있던 법진이 급격하게 작동하기 시작했어· 지금이 아니라면 시기를 맞추기 어려울-”
레녹을 바라보던 말레온이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아니·”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며 표정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말레온의 말을 듣는 순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미 깨달아 버렸기 때문·
[으흐흐·]
품 안에서 들썩이는 전뇌정령의 웃음소리가 어쩐지 레녹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