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3화
쿤다라(6)
“요즘 오겁 바깥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이야기 들었나?”
올버는 공방을 찾은 손님이 중얼거린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가 운영하는 공방을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상당한 위계를 쌓은 장생종·
그렇기에 손님들이 흘리는 소문이나 정보도 유용한 것이 많았다·
“장원에서 오백로를 두는 분들이 갑자기 확 늘어났다고 하던데·”
“그 정도가 아니야· 하루 종일 밥 먹고 오백로만 두는 어르신들이 가득하다고·”
진열대에 전시된 아티팩트를 구경하던 손님들이 느릿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보는 어린 놈에게 줄줄이 돈을 갖다바치고 있다고 하더군·”
“내기도박에 미친 게지· 늦은 나이에 헛바람이 들어서는····”
“···”
처음 보는 어린놈이라·
얼마 전 갑옷을 사러 왔던 단명종을 떠올린 올버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저기 혹시····”
바깥의 소식에 대해 손님들에게 물으려던 올버가 입을 뗀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면서 붉은 도포를 입은 어린 소년이 공방 안으로 들어왔다·
뚱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공방 곳곳을 둘러보는 소년의 모습·
하지만 소년의 모습을 보자마자 공방의 손님들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
“화예(火鯢)의 앙그론 님을 뵙습니다·”
“바깥에 좀처럼 걸음 하지 않는 분께서 어쩐 일로····”
외겁도시 쿤다라에서 큰 성세를 자랑하는 화예족의 수장 앙그론·
온몸에 불길을 두른 도롱뇽인 그들은 쿤다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들이 숨쉬면서 뿜어내는 불길이 쿤다라의 대기 온도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안개의 우주에서 흘러들어오는 냉기를 반감시키기 때문·
하물며 앙그론 본인은 얼마전에 팔겁(八劫)의 시련을 거의 돌파할 뻔 했다고 하니 화예종의 위상이 도시 전역에서 하늘을 찌르는 상황·
올버 역시 소문을 들은만큼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예의를 갖추었다·
하지만 앙그론은 머뭇대는 손님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서슴없이 진열대 뒤에 위치한 장비를 가리켰다·
“저거 가져와라·”
“···그건·”
올버가 앙그론이 가리키는 물건을 보고 멈칫거렸다·
얼마 전에 공방을 찾아온 단명종 청년· 그가 구매하려 했던 흑쇄용린갑·
그것을 앙그론이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
조심스럽게 갑주를 꺼내든 올버가 망설이다가 물었다·
“화예종은 애초에 여의주를 품지 않아도 되는 분들이 아니십니까·”
“뭘 그렇게 말이 많아? 필요하니까 가져오라고·”
앙그론이 표정을 확 구겼다·
“내가 뭐 공짜로 받겠다고 했냐? 제대로 값을 주고 사겠다니까?”
“····”
올버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사실 이 장비를 구입하고 싶어하는 손님이 계셔서····”
“뭐야 이미 예약이 되어 있던 물건이었어? 어쩐지·”
앙그론이 피식 웃었다·
“두 배로 쳐줄 테니까 당장 넘겨· 두말하지 않겠다·”
“····”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물건이다· 다른 놈한테 파는 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억지 부리지 말도록·”
“···선생님 말씀이십니까?”
다혈질에 화가 많고 단순한 앙그론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굉장히 어색한 호칭·
하지만 앙그론은 그런 올버의 질문이 기껍다는 듯 오히려 반색하면서 대답했다·
“그 뭐냐· 내가 요즘 이 근처 장원에서 오백로를 배우고 있단 말이다·”
“그 그렇군요·”
팔겁의 시련에 도전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앙그론이 타인에게 배움을 구하고 있단 말인가·
입이 근질거렸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던 것처럼 올버와 손님들에게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앙그론의 모습·
“최근 아주 용한 선생을 모셨는데 그분이 도와주신 덕분에 팔겁의 시련을 통과하기 직전까지 갈 수 있었지·”
“····”
“단순히 장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을 짚어주시는데 그게 그렇게 유용할 수가 없지 뭐냐·”
화예종의 수장이자 고위 장생종인 앙그론이 저렇게 저자세로 나올 정도로 뛰어난 선생이 있단 말인가·
하물며 팔겁의 시련에 그 가르침이 유의미하게 도움이 될 정도라니·
어딘가 심상치 않다 느꼈는지 주변의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앙그론의 말에 집중하는 것이 느껴진다·
“선생님께 받은 은혜가 워낙 커서 아무리 성의를 보여도 모자랄 지경이다·”
앙그론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뿌듯한 기색으로 자랑하듯 말했다·
“좀처럼 원하시는 물건이 없어서 보답을 드리는 데 애를 먹고 있었는데 마침 이 갑주를 원하시는 듯하더군· 그러면 마땅히 내가 가져다드려야지·”
“그렇습니까····”
“그러니 빨리 준비해라· 이만큼 설명했다면 슬슬 알아들었겠지?”
흑쇄용린갑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동자가 넘치는 의욕으로 활활 타올랐다·
“포장지는 집어치워· 물건을 보자마자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군·”
“알겠습니다·”
올버가 담담한 표정으로 진열장에서 용린갑을 꺼내 마른 수건으로 닦으면서 말했다·
“다만 갑주를 착용하실 분께 크기를 맞춰야 하는데 직접 오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뭐? 감히 선생님을 이런 번잡한 거리까지 직접 오시게 할 생각이더냐?”
앙그론의 눈빛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그런 일이 있으면 당연히 네가 직접 와야지· 세배로 값을 쳐줄 테니까 가게 문을 닫고 따라오도록·’
“····”
“세 번 말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저 다혈질인 불도롱뇽이 저런 식으로 나올거라고는 올버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답변을 한 것 자체가 올버 본인이 앙그론을 따라 예의 선생을 보기 위해서였던 것·
겉으로는 곤란한 표정을 유지한 올버가 능숙하게 장구류를 챙겨들고 공방을 나섰다·
“스승님····”
“스누크· 공방 문을 닫고 누구에게도 열어주지 말거라·”
올버가 엄한 표정으로 겁에 질린 직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에 하나 예의 마법사가 찾아와도 내가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했다고 해· 알겠나?”
“네 네···!”
며칠 전 자신의 공방을 찾아왔던 인간종 마법사·
겉으로는 정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올버는 그 남자가 얼마나 위험한 인간인지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단명종의 몸으로 장막의 이면에 숨겨진 쿤다라를 찾아올 정도로 뛰어난 술사다·
하물며 그 폭급하고 성질 더러운 알로건의 총애를 받아 여의주까지 손에 넣었으니·
애초에 그자의 성정이 수신용왕과 죽이 잘 맞지 않고서야 가당키나 한 일일까·
원하던 물건이 빼앗겼음을 알고 나면 언제 태도를 바꿔도 이상하지 않다·
철컥!!
흑쇄용린갑의 크기를 줄여 철제 케이스에 수납하고 조정장비를 챙긴 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습니다· 가시지요·”
“좋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소년 앙그론이 그제서야 기분이 풀린 듯 씩 웃었다·
“늦었으니까 빨리 움직이지· 내 뒤에 타라·”
“···예?”
“말귀를 못알아듣는군·”
올버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멈칫거리자 소년이 표정을 찌푸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화르륵···!!
소년의 뺨 위로 붉은 비늘이 우수수 돋아나더니 입 밖으로 갈라진 혓바닥이 쭉 튀어나왔다·
온몸을 휘감은 불길이 소년의 몸을 불사르고 장엄한 불기둥이 되어 솟구친 그 순간·
불기둥 속에서 미끈거리는 양서류의 팔다리가 튀어나오더니 거대한 도롱뇽으로 변했다·
쿠우우웅!!!
등허리에 불길을 벼슬처럼 두른 거대한 불도룡뇽이 험상궂은 얼굴로 올버를 내려다보았다·
[타라고·]
“아 앙그론 님!!”
당황한 올버가 공방 주변에서 경악하는 사람들을 보며 시선을 돌렸다·
“오겁(五劫)의 안쪽입니다· 함부로 본체를 드러내셨다가는 원로성(元老星)의 분노를 피할 수 없···!!”
[팔겁의 늙은이들이 그 침침한 눈으로 여기서 벌어진 일을 엿볼수야 있겠느냐·]
“하지만-”
[아까부터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쉬익!!
도롱뇽이 혀를 쭉 내밀어 올버의 발목을 잡아채 위로 휙 던졌다·
몸이 붕 떠오른다 싶은 순간 노인의 건장한 신체가 도롱뇽의 등 뒤에 나뒹굴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는 올버를 무시한 앙그론이 그 자리에서 몸을 깊게 굽혔다·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닥치고 따라오도록·]
“서 설마····”
[가르침을 받은 뒤로 온몸에 기운이 마를 날이 없구나· 가자!!]
도롱뇽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폭발적인 화기(火氣)에 다음으로 일어날 일을 직감한 올버가 얼굴을 굳히고·
쿤다라의 번화가 시가지 한복판에서 도롱뇽의 거체가 폭발적으로 도약해 수십 미터 가까이 뛰어올랐다·
콰아아아앙!!!
강렬한 충격파와 함께 주변 건축물 지붕의 기와가 쓸어내리듯이 벗겨진다·
누각과 기와집이 쓰러질 것처럼 휘청이면서 격렬하게 흔들리고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킨 도롱뇽이 불길을 훅 뿜었다·
안개가 자욱한 외겁도시의 위로 회전하는 불의 궤적을 남기면서 앙그론의 신형이 가속·
순식간에 번화가 거리 중심을 벗어나 외곽에 위치한 장원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쿠과과과!!!
“···!!”
전신에 불길을 두른 도롱뇽의 신형이 순식간에 음속을 돌파해 하늘을 질주한다·
활활 타오르는 전투기를 타고 안개의 하늘 위를 비행하는 듯한 기묘한 풍경·
몰아치는 바람과 마력의 폭풍에 간신히 앙그론의 등 뒤에 붙어 있던 올버가 이를 악물었다·
팔겁의 시련을 통과할 뻔했다고 하더니 술식운용 능력조차 이렇게 상승한 것인가·
앙그론이 어째서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구는지 이 비행 한 번으로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을 정도·
“끄으윽···!!”
쿠우우웅!!
도롱뇽의 거체가 텅 빈 공터 한가운데 추락한 순간 올버의 몸이 그대로 떨어져 땅을 굴렀다·
앙그론의 등 뒤에 타오르는 불꽃 벼슬에 그을린 것처럼 머리카락과 얼굴이 반쯤 그을린 모습·
“하아 하아····”
힘겹게 숨을 고르는 올버의 허리에 도롱뇽의 혓바닥이 감기는 것과 동시에 번쩍 들어 올려졌다·
[푸하하핫!!!]
쿵! 쿵! 쿵!!
복숭아나무가 자라난 아름다운 정원을 투박한 발로 쿵쿵 짓밟으면서 신이 난 것처럼 뛰어가는 도롱뇽·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져온 듯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다·
[선생님!]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들고 있던 올버를 바닥에 휙 던져버린 앙그론이 소리쳤다·
[이 제자 앙그론이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물건을 들고 왔습니다!!]
“큭···”
아무런 배려 없이 바닥에 나뒹굴던 노인 올버가 침음성을 흘렸다·
이럴줄 알았다면 차라리 올버 역시 본체로 돌아와 이동하는 것이 나았을 텐데·
쓸데없이 인간형태를 고집하는 바람에 충격과 고통이 더 커진 것 같다·
화끈거리는 얼굴과 욱신대는 허리를 부여잡은 올버가 힘겹게 시선을 들어 올린 그 순간·
쿠웅!!
이쪽을 내려다보는 온갖 괴물들의 눈길에 올버의 숨이 턱 막혔다·
평범한 인간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고위 장생종들이 본체를 드러낸 채· 장원 한쪽에 서 있던 것·
장원의 중심에 세워진 간소한 누각의 양옆으로 줄을 선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장생종들이 일제히 올버를 내려다본다·
[천각족의 아이로군·]
먹물처럼 거대한 날개를 펄럭인 까마귀가 말했다·
[이 근방에서 장인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생님께는 무슨 일이더냐·]
“그····”
[앙그론 이 머저리가 데려왔다면 뻔하지 않겠나?]
까마귀의 옆에서 5m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두꺼비가 껄껄 웃었다·
[보나 마나 천각족의 뿔을 달여 선생님께 드릴 생각이겠지· 그 뭐냐 마력공명에 효율이 좋다고 했던가 하지 않았나?]
[선생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도 뛰어난 현인이시다·]
두꺼비의 뒤에서 우아한 외모의 사슴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딴 보약 따위는 하등 도움도 되지 않을 텐데 무슨· 차라리 이 아이가 만든 장비를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하긴 앙그론 놈이라면 멀쩡한 장인을 납치해 오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했을 리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딱 화예족의 머리다운 행동이로고·]
도롱뇽· 두꺼비 사슴과 학·
거대하고 신비로운 외형의 고위 장생종들이 모여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여기 모여 있는 모든 장생종들이 오겁 안에서는 얼굴조차 한번 보기 힘든 귀인들뿐·
올버가 경직된 표정으로 몸을 굳힌 그 순간 그 뒤에서 앙그론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실컷 떠들어라· 그래봤자 내가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가져왔다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흐음 네가 준비한 선물 따위에 선생님께서 기뻐하실지는 잘 모르겠다만····]
두꺼비가 턱을 부풀리면서 올버를 향해 시선을 돌린 그 순간·
올버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에 계셨군요· 찾고 있었습니다·”
“···음?”
복숭아 나무가 드리운 장원 한복판에 세워진 거대한 누각·
그 누각의 앞마당에서 레녹이 웃는 얼굴로 올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소매를 정리하면서 경사로를 밟고 내려오는 레녹의 모습·
“신원 보증에 관한 문제가 해결되어서 장비를 구매할 생각이었는데 잠시 공방을 비우셨더군요·”
“아 그것이····”
설마 했더니 하필 이 시기에 이 단명종 마법사 역시 공방을 찾아왔던 것인가·
그것도 올버 본인이 요구했던 신원 보증을 마치고 용린갑을 구매할 생각으로 그를 뒤쫓아왔던 모양·
문제는 지금 올버가 쿤다라에서도 적지 않은 위상을 지닌 고위 장생종들의 앞에 서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처음 약속대로 레녹에게 용린갑을 팔았다가는 어르신들의 분노를 피하지 못할 테지만·
약속을 어기고 앙그론에게 갑주를 넘겼다가는 수신용왕의 축복을 받은 이 마법사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
“그 미안하게 됐네만····”
오래 고민할 시간이 없다·
이대로 시간이 끌린다면 어르신들이 올버뿐만 아니라 이 인간종에게도 화를 낼지도 모르는 상황·
빠르게 결심을 마친 올버가 사정을 설명하고 레녹에게 양해를 구하려던 그 순간·
쿠웅!!
올버의 양옆에 서 있던 고위 장생종들이 거의 동시에 몸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공손하게 양손을 모으고 누군가는 큼지막한 앞발을 포권하듯 겹쳤다·
[선생님· 기침하셨습니까!]
[환록의 아예바가 선생님을 뵙습니다·]
[섬제의 보탄이 선생을 뵙소!]
“···?”
외겁도시 전역에서 높은 위상을 지닌 고위 장생종들이 한 사람에게 인사를 올리는 보기 드문 현상·
그 방향이 그 뒤에 선 레녹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은 올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잠깐만 설마 어르신들이 말씀하신 선생이-”
“신원 보증에 대한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레녹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물건을 받을 수 있을까요?”
* * *
복숭아 나무가 드리운 도원향에 세워진 누각·
그 누각을 중심으로 모여든 각양각색의 장생종들이 단 한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각자 장기판을 펼쳐둔 채 얌전히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
[선생님· 칠겁의 시련에서 본 문제를 재현해봤습니다만 검토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308수 근처에서 납득가지 않는 수가 있군요·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선생님· 축차 진형을 술법진에서 수직으로 맞추는 부분에 대해 질문이 있습니다·]
“술법진을 수직으로 맞추기 위한 요령이 대략 3가지 정도 있습니다· 일단 모두 알려드릴 테니 마음에 드는 방식을 선택하는 걸로····”
[술법진 작성에서 마력수율을 높이기 위한 5번째 방향제어 방식에 문제가····]
“마력수율 관련 문제는 방향제어가 아니라 기호배치를 신경 써야 합니다· 생각보다 더 감각에 꽤 좌우되는 편이니 일단 연습하면서 감을 잡는 것을 우선하도록 하죠·”
한 명의 기사가 하수 여럿과 동시에 대국하며 지도하는 다면기(多面棋)·
장기판 사이를 오가면서 대국의 흐름을 확인하고 돌을 두면서 방향성을 논의한다·
“보탄 님· 제가 분명 허락없이 수를 물러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미 미안하네· 선생·]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고위 장생종들이 레녹의 말 한마디에 쩔쩔매며 무안한 기색으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평생 동안 외겁도시에서 살아온 올버조차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운 기묘한 광경·
철컥!!
사슬처럼 단단하게 얽힌 용린갑의 비늘에 망치를 대고 못을 박듯 천천히 두들긴다·
올버가 비늘을 두들길 때마다 갑옷이 급격하게 확장되면서 갑주의 형태로 화했다·
촤라라락!!
흑쇄용린갑을 구성하는 비늘을 모조리 펼친 뒤 신체 말단 부위부터 사이즈를 조절해 나갔다·
어깨에 줄자를 대고 사이즈를 측정한 뒤 비늘 사이의 간격을 맞춘 올버가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끝났습니까?”
“····”
어느새 누각 아래 앉은 장생종들과 다면기를 마치고 온 레녹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올버가 레녹의 시선을 피하면서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종에 맞춰서 크기 조정이 끝났네· 이걸로 흑쇄용린갑은 자네의 것이야·”
“감사합니다·”
흑쇄용린갑을 받아든 레녹이 능숙하게 비늘을 두들겨서 순식간에 갑옷의 크기를 조정했다·
방금 전까지 갑옷을 조정해주던 올버 본인보다도 조작에 더 능숙해 보이는 기묘한 모습·
철컥!!
순식간에 흑쇄용린갑을 작게 압축한 레녹이 그것을 올버에게 다시 건네주면서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남은 대국을 좀 더 도와드려야 해서· 이 갑주를 저쪽에 가져다 주시겠습니까?”
“···가져다 달라고?”
레녹의 말을 따라 시선을 돌린 올버가 누각 한쪽에 쌓여있는 온갖 선물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쿤다라 어디서도 구하기 힘든 희귀한 영초와 약재· 몸에 좋은 보약과 등급이 높은 아티팩트·
장생종의 신체 부위를 재료로 삼은 장비들이 누각 곳곳에 여럿 쌓여있다·
할 말을 잃은 올버를 두고 레녹이 태연하게 말했다·
“쿤다라의 어르신은 다들 손이 굉장히 크시더군요·”
“····”
“이 일을 시작한 뒤로 받은 선물이 많아져서 날을 잡아 따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단명종이 대체 어떻게 홀로 외겁도시에 들어왔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
장원 곳곳에서 대국에 열중하는 장생종들을 보며 올버가 중얼거렸다·
“까탈스러운 어르신들께서 자네에게 이만한 정성을 들이게 할 정도라니····”
“한순간의 유희를 위해서만 오백로를 두는 것이 아니니까요·”
레녹이 대답했다·
“겁의 시련을 통과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니 저는 옆에서 방향성을 잡아드릴 뿐입니다·”
“····”
앙그론의 대국에 끼어 들어 본의 아니게 팔겁의 시련을 풀어준 뒤로 며칠이 흘렀다·
레녹의 조언을 받고 갈피를 잡은 앙그론이 무작정 팔겁의 시련에 다시 도전해 홀로 시련을 통과할 뻔한 뒤·
소식을 듣고 찾아온 고위 장생종들이 여럿 늘어나면서 오겁의 장원 전체가 레녹의 학당처럼 변해버린 상황·
며칠 사이에 레녹의 조언을 받아 자신의 기풍을 수정해나가는 장생종이 무려 열 가까이 늘었으니 올버가 어색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는 어르신들께서 저렇게까지 매달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듯하네만·”
올버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자네가 오백로를 잘 두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저분들이 저렇게 열중하는 것 아니었나?”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레녹 역시 오백로를 통해 겁의 시련을 통과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던 상황·
실제로 가르치는 장생종들에게 자문한 결과 겁의 시련을 통과하는 데 오백로가 직접 사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겪은 겁의 시련을 술식과 관련된 형태로 구체화가 가능한 유일한 수단이 바로 오백로였던 것·
진둔이 창시한 보드게임이 술식소양과 적성을 가장 명확하게 투사할 수 있는 수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레녹은 그를 통해 장생종에게 오백로를 가르치는 선생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주티야가 말했던 모르는 게 더 좋을 거라는 뜻이 이것이었나?’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 갑옷의 조정을 마친 올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자네에게도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군· 상황이 정리된 듯하니 난 이만 가보겠네·”
“고생 많으셨습니다·”
레녹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공방에 다시 들러 장비를 구입할 예정이니 그때까지는 몸조심하시지요·”
“자네 같은 술사가 아직도 내가 만든 장비를 필요로 한다니 그건 영광이군·”
올버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어르신들의 총애를 받는 동안에는 불가능한 일이 있겠는가· 공방에서 기다리지·”
장원을 떠나는 올버를 두고 멀리서 레녹을 부르는 장생종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장기판을 앞에 두고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얌전히 앉은 장생종들을 향해 돌아선 그 순간·
“····”
올버가 떠난 그 자리에 어느새 새하얀 뱀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깨달은 레녹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두 눈에 비춰지는 풍경이 변했음에도 레녹조차 그 모습에서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뻔했다·
인식 자체를 속이고 녹여서 위화감을 흐리는 듯한·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생물만이 가능한 변위의 기예·
“흐음·”
새하얀 뱀이 레녹을 바라보면서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어디서든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을 거라 들었는데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구나·”
“····”
“설마 이 도시에서 장생종을 상대로 오백로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을 줄이야· 재주도 재주지만 발상이 참 기가 막히는군·”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뱀이 레녹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과 종족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 재능과 판단을 지녔으니 올리비에라가 너를 따르는 것도 이해가 가는구나·”
“···제게 오백로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신 분은 아니셨군요·”
낯익은 이름을 듣자마자 웃고 있던 레녹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올리비에라의 지인이십니까?”
올리비에라가 말했던 쿤다라에 알고 지낸다는 몇몇 지인들 중 하나·
그녀를 도와 정보조사에 협력할 수 있다던 장생종 중 한 명이 레녹을 찾아온 것인가·
“그 아이의 말로는 네가 오백로를 두는 데 있어 굉장히 특출난 소질을 지녔다고 하더구나·”
뱀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재능을 지녔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지·”
“····”
“구겁에 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레녹을 바라보는 뱀의 동공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찰나 동안이라도 직접 승천자가 되어볼 생각이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