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1화
쿤다라(4)
여의주를 보자마자 수신족의 팔대용왕을 언급하며 경계하기 시작한 노인의 반응·
하지만 레녹은 여의주를 꺼낸 순간 일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레녹의 여의주는 수신용왕 알로건이 직접 만들어 대부분의 기운을 알로건 자신의 생명력으로 채워 넣은 물건·
여러 기운이 혼재되어 있다면 모를까 이만큼 순수한 용왕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면 장생종 중 알아보는 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그걸 알면서도 이 자리에 굳이 여의주를 먼저 꺼내놓은 이유는-
“수 수신용왕···!!”
노인의 뒤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공방 직원 스누크가 창백한 안색으로 몸을 덜덜 떨었다·
레녹의 여의주를 보자마자 노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쿤다라의 변경을 수호하는 여덟명의 용왕 중에서도 가장 성격이 폭급하다고 알려진 장생종·
수신족 전체를 휘어잡고 지배하는 존재에게 방금 전까지 망언을 퍼붓고 있었던 것인가·
보랏빛으로 얼굴이 물든 스누크가 더듬거리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요 용족 중에서 그런 식으로 마 말씀하시는 분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착각을···!!”
“····”
“죄 죄송합니다· 죄송···!!”
사과의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벌벌 떠는 스누크의 어깨를 노인이 강하게 잡아누른다·
그 힘에 따라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에 납작 엎드린 스누크의 모습·
그런 청년을 두고 여의주를 진열대에 내려놓은 노인이 말했다·
“스누크· 공방에 있는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가게 문을 닫아라·”
“···예 예?”
“오늘 장사는 여기서 끝이다·”
노인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분을 마지막으로 응대하고 문을 닫을 생각이니 네가 직접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오도록·”
“아 알겠습니다···!!”
그제서야 스누크가 황급히 일어나 공방 안을 바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여가면서 출구를 안내하는 스누크의 모습·
방금 전까지 태도가 좋지 않던 스누크가 갑자기 공손해진 그 반응에 손님들이 놀라면서도 하나둘씩 공방을 빠져나간다·
레녹은 그런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웃으면서 노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핑계를 대어가며 제 눈앞에서 떼어놓지 않아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
“제자를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군요·”
“누가 저런 멍청한 직원 놈을 걱정한다는 겐가·”
노인이 애써 평정을 가장하면서 말을 돌렸다·
“가게를 정리하기 위해 귀찮은 일을 맡겼을 뿐 놈이 어디 나자빠져 죽든말든 관심조차 없소·”
“그렇습니까?”
“그것보다 이 여의주의 존재에 대해 서로 해야 할 말이 있었지·”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순식간에 조용해진 광활한 공방의 중심에서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동요를 감추려고 하지만 그의 노회한 눈빛은 진열대에 내려놓은 눈부신 여의주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찬란한 광채를 내뿜는 여의주를 손에 쥔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낸 노인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 여의주에 담긴 기운은 틀림없이 팔대용왕의 것· 심해권역을 수호하는 알로건 님께서 본인의 생명력을 직접 하사하셨음이 틀림없는 바·”
“····”
“하지만 이 여의주는 용왕보주라기에는 극히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군· 그렇기에 알로건 님 본인의 여의주는 아니겠지·”
노인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믿기 어려운 듯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 수신용왕께서 수신족도 아닌 존재에게 직접 여의주를 만들어 하사하셨다는 말인 겐가·”
“거기까지 알고 계신다면 설명할 필요도 없겠군요·”
레녹이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추켜들었다·
심해권역을 수호하는 수신용왕 알로건은 어차피 당분간 쿤다라로 돌아올 수 없는 상황·
레녹이 알로건과의 관계를 살짝 왜곡해서 드러낸다 해도 그 간극을 지적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알로건이 레녹에게 직접 여의주를 만들어 그 생명력을 보주에 불어넣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
“저는 흑쇄용린갑을 구입하기 위해 공방에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물건의 가격을 들을 수 있을까요?”
“확실히· 이 정도 수준의 여의보주를 지녔다면 용종장비를 다루는데 어떠한 문제도 없겠지· 하지만····”
침음성을 흘린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네· 자네에게는 장비를 판매할 수 없을 것 같군·”
“어째서입니까?”
“자네가 쿤다라의 겁(劫)을 정상적으로 통과해 들어온 장생종이 아니기 때문이지·”
“····”
순간 두 사람 사이에서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말을 들은 직후 레녹이 굳게 닫힌 공방의 문을 확인하고 노인이 그 모습을 눈치챘기 때문·
노인 역시 레녹이 그 말을 듣자마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치챈 듯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자네도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군·”
“그건····”
“설명해 줄 테니 그 동안에는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겠나?”
레녹이 순간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려다 마음을 먹은 순간 그만두었다·
여의주를 보자마자 레녹의 비밀을 눈치챈 것 치곤 노인의 태도가 꽤나 차분했기 때문·
애초에 레녹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것 자체가 그를 압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증거·
조용히 의념을 가라앉힌 레녹이 대답했다·
“저는 살인멸구를 즐기는 성격은 아닙니다·”
[···?]
품안에서 들려오는 다비의 의문을 무시한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겠습니다·”
“쿤다라에서 겁의 시련을 통과하는 것은 이 도시에서 살아가며 존재하기 위한 정당한 인과를 쌓아가는 과정일세·”
노인이 말했다·
“그렇기에 외겁도시에 기거하는 장생종은 겁의 시련을 통과할 때마다 그 인과가 보주에 쌓이기 마련이지·”
“····”
“하지만 자네가 이 오겁(五劫)의 장원에 와 있음에도 여의주에는 겁의 시련을 통과한 어떠한 흔적도 없네· 투명한 거울처럼 깨끗하기만 하지·”
심유한 눈빛으로 레녹을 바라본 노인이 말했다·
“그런 인과를 획득하지 않은 상대와 교류했다가는 팔겁(八劫)의 원로성(元老星)에서 즉시 그 인과의 비틀림을 인지하고 ‘조정’에 나서겠지·”
“겁을 통과하는 것이 쿤다라에서 존재하기 위한 인과라····”
고민하던 레녹이 물었다·
“돌아가는 정황만으로 짐작하고 던진 말은 아니군요· 제가 장생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디서부터 의심하신 겁니까?”
“여의보주를 지닌 장생종은 보통 자신의 신체기관 어딘가에 보주를 깊숙이 넣어 보관해두지·”
노인이 답했다·
“당연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의주에는 보통 그만큼 강한 기운이나 체취가 배어나오기 마련이네·”
“····”
“하지만 이 여의주는 수신용왕의 기를 품었는데도 거의 냄새가 나지 않아· 기껏해야 얕은 바다내음 정도?”
노인이 여의주를 레녹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자네가 애초에 여의주를 만들거나 품는 종류의 ‘생물’이 아니라는 증거겠지·”
“····”
기척을 숨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기척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장생종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게 된 것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레녹을 보며 노인이 자신이 한 말을 정리하듯 말했다·
“물론 단명종의 몸으로 그만한 위계에 오른 것 자체는 존중할 일이지· 난 그것만으로 자네를 손님으로 대우할 생각이 있네·”
“그렇게 말하시는 것치곤 그쪽도 상당한 수준의 위계를 쌓아 올린 것으로 보입니다만·”
노인은 레녹의 여의주를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 여의주에 담긴 기운이 수신용왕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동시에 여의주가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보주라는 것을 간파하고 레녹이 알로건 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노인 스스로 뛰어난 마력사용자이자 상당한 수준의 위계보유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
쿤다라에서는 번화가 시가지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조차도 이렇게 뛰어난 초인인 것인가·
“자네는 장생종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군·”
하지만 노인은 레녹의 말을 듣고도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위계를 완성해 나아가는 존재일세· 쌓아온 위계는 깨달음과는 크게 관련이 없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 위계를 높이고 완성되어간단 말입니까?”
“위계가 높은 장생종이라 하여 반드시 초월성을 지닌 존재인 것은 아니야·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많지·”
“····”
“쿤다라에서 정당한 방식으로 장생종과 교류하고 싶다면 수신용왕의 축복을 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네·”
진열대를 정리한 노인이 레녹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가 겁의 시련을 통과했다는 증거· 혹은 그에 준하는 신원보증이나 자격이 필요하지·”
“신원 말씀이십니까?”
“외겁도시는 장생종들이 모여 살아가는 도시이나 단명종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노인이 대답했다·
“몇몇 인간들은 장생종의 보증을 받거나 그의 소유물 혹은 노예가 되어 쿤다라에서 활동할 자격을 부여받았지·”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나로서는 이것이 해줄 수 있는 말의 전부로군· 물건을 사고 싶다면 다른 식으로 신원을 보증할 수단을 가져오게·”
***
눈앞에서 조용히 닫힌 공방의 문을 바라보며 레녹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도시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기에는 생각보다 여러 문제가 있군·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가····”
외겁도시 쿤다라는 장생종의 수명을 화폐로 사용하는 인외의 도시·
여의주를 숨기면 단명종이라는 사실을 쉽게 들키지는 않겠지만 반대로 수명을 화폐로 사용할 수 없어진다·
이 시점에서 레녹이 외겁도시의 숙박시설이나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길이 막힌 것이나 마찬가지·
수신용왕을 뒷배로 두었다는 사실을 이용해 일이 편해질 여지가 있었지만 반대로 겁의 시련을 통과하지 않아 그 혜택을 써먹을 수 없다·
포혈공과 조우하면서 겁의 시련을 건너뛰고 도시 안으로 들어온 시점에서 마냥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던 것·
‘흑쇄용린갑이 아니라도 그 공방에서 구매하고 싶은 물건이 몇 가지 더 있었는데·’
노인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레녹은 틈틈이 공방에 진열된 물건 중 쓸만한 장비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개중에서 레녹이 주목했던 것은 지성이 없는 마수에게 채워 탈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수용 안장·
그리고 장생종과 합의를 거쳐 사용할 수 있는 소환계약서·
마수용 안장이야 그렇다 쳐도 소환계약서는 쿤다라 바깥에서도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하니 탐이 난다·
만약 쿤다라의 강력한 장생종 중 하나와 합의를 거쳐 소환계약을 맺는다면 분명 앞으로의 일에서 큰 도움이 될 터·
공방의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정보 조사를 위해서라도 신원보증은 필수겠지·
결심을 마친 레녹이 거리 바깥에 위치한 정자에 앉아 낡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포혈공과의 거래 도중 일어난 불상사로 인해 다시 레녹의 손에 들어온 혈려서기·
알맞은 주인의 손에 들어왔다는 것처럼 희미하게 진동하는 수첩을 레녹이 무거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잘해야 두 번인가?’
혈려서기는 혈액이나 생명체에 대한 방대한 기록장치이나 한번 사용하고 나면 오랫동안 작동을 멈춘다는 단점이 있다·
일겁의 시련 앞에서 한번· 포혈공에게 소유권을 양도하는 과정에서 족히 다섯번 넘게 사용했으니·
아마 앞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몇 번도 채 남지 않았겠지·
질문을 신중하게 잘 골라야 한다·
혈려서기의 테마에 크게 어긋나는 일 없으면서도 레녹의 목적과 가장 합치하는····
고민에 잠겨 있던 레녹이 이내 손가락 끝에 피를 내어 페이지 위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이 거리에서 쿤다라의 최고위 장생종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장소를 알고 싶다·
=····
혈려서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첩 위로 핏방울이 방울지며 떠올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뿐·
근방의 거리를 그려낸 지도임을 깨달은 레녹이 즉시 일어나 수첩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걸로 됐어·’
쿤다라의 겁(劫)을 통과하는 방법은 포혈공이 쥐고 있다고 혈려서기에게 이미 대답을 들은 상황·
그렇다면 이 도시에서 신원을 보증받기 위한 방법 자체는 레녹이 직접 찾아야 한다·
혈려서기에게 답을 여러 번 들을 수 없는 지금 레녹이 단 한번의 질문으로 알아내야 하는 것은 바로 신분이 높은 장생종의 위치·
번화가 시가지를 벗어나 거리 외곽에 위치한 넓은 정원으로 향한다·
복숭아 나무가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풀밭이 펼쳐진 아름다운 도원경(桃源境)·
나무 아래서는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마주 앉아 돌을 쥐고 있다·
“···음?”
다시 보니 이 도원경에 모여앉은 모두가 오백로를 두고 있음을 깨달은 레녹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순전· 호마·”
“축차· 선렴·”
뒤늦게 귀가 트이는 것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오백로의 대국을 설명하는 용어들·
주변에서 오가는 행인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제각기 자신들의 대국에 열중하는 사람들의 모습·
여기 모인 이들 모두가 인간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장생종들이겠지·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조차 잊고 제각기 돌을 쥔 채로 오백로에 열중하는 것인가·
아르스노바와 쿤다라 양쪽에 진둔이 창시한 보드게임이 널리 퍼졌다는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던 것·
“····”
사방에서 진행되는 여러 대국을 쭉 둘러보던 레녹이 자연스럽게 정원 외진 구석으로 향했다·
여기 모인 오백로 기사들 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수준이 높은 대국을 두고 있는 두 사람·
검고 붉은 도포를 입은 두 사람의 소년이 한없이 근엄한 얼굴로 장기판에 돌을 두고 있었다·
혈려서기가 가리키는 지도의 끝에 위치해 있는 정원의 좌표·
필히 이 두사람이 이 자리에서 가장 강력한 술사이자 장생종이겠지·
“···후우·”
레녹이 다가온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대국에 열중하는 두 소년을 보며 레녹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부터 레녹이 할 일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하지만 쿤다라에서 원활한 정보 수집을 위해 최대한 빠르게 레녹 자신을 이 도시에서 증명케 할 수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상대가 단명종을 벌레처럼 깔아보는 고위 장생종들이라면 레녹이 그들에게 접근해 이목을 끌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레녹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만큼이나 그들도 이제는 레녹을 필요로 하게 될 테니까·
결심을 마친 레녹이 살짝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두 소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
“···허?”
시대와 종족의 굴레를 넘어 어디서든 통용되는 도발 시동어·
이마에 핏대가 선 두 소년이 동시에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