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0화
쿤다라(3)
혈려서기 스스로 포혈공에게로의 소유권 이전을 거부하고 나선 초유의 사태·
수첩의 페이지를 콱 쥐고 있던 포혈공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 싫다고··· 내가 싫어?”
자신이 만든 아티팩트에게 대놓고 거부당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는지 더듬거리며 혈러서기가 한 대답을 되묻는 소녀의 모습·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난 포혈공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홱 돌렸다·
“너 너 때문이구나!”
“····”
레녹을 바라보는 포혈공의 눈동자가 루비처럼 강렬하게 번뜩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당장 설명해· 내가 만든 기록장치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렇게 물어봤자 대답해 줄 수 있는 말이 없군·”
레녹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다른 관리인에게 넘겨받아 몇번 사용해 왔을 뿐 혈려서기에 무언가 수작을 부린 적은 없어·”
“····”
“혈마법에 대해 조예가 없는 만큼 이 아티팩트의 작동원리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아니지· 짐작하고 있지 않나?”
혈마법의 공능이나 위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정작 레녹은 혈마법을 깊게 연구해 본 적은 없다·
연구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술자의 피를 재료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 걸렸기 때문·
흡혈귀처럼 애초에 피와 마력의 호환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인종이 아니라면 익히기 어려운 기술·
발칸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시절 혈법사들의 몸값이 유달리 비싸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혈려서기에 걸어둔 피의 규칙은 흡혈귀들의 서열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규율 중 하나야·”
하지만 포혈공을 그런 레녹의 말에 납득하지 못한 것처럼 물었다·
“같은 흡혈귀가 이런 짓을 했어도 믿을 수 없을 텐데 네가 진혈(眞血)을 보유한 나보다 더 높은 혈성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 부분은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라서 말해주기 어렵군·”
팔짱을 낀 레녹이 포혈공을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소유권 양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되는 거지?”
“···혈려서기의 소유권이 양도되지 않으면 내가 사용할 수 없어·”
포혈공이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내가 수첩을 갖고 있어봤자 거리가 멀어지면 금방 네게로 돌아가겠지·”
“혈러서기를 네게 넘기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졌단 말인가?”
“그래· 그렇지만··· 마음에 안 들어·”
포혈공이 붉은 눈동자로 낡은 수첩과 레녹을 째려보면서 이빨을 드러냈다·
“듣고 싶은 정보는 전부 듣고 수첩도 가져가겠다고? 그건 너와 내가 한 거래와는 다르잖아·”
“납득할 수 있는 다른 대가를 제시한다면 받아들이지·”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게 들은 정보의 가치가 상당한 만큼 나도 이런 식으로 입을 닦을 생각은 없다·”
“····”
카이세의 시신이 구겁의 성소에 숨겨져 있고 구겁에는 승천자들만이 드나들 수 있다는 사실·
포혈공이 혈려서기의 반납을 대가로 일러준 정보는 레녹의 입장에서 실로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원래라면 쿤다라 전역을 뒤져가면서 찾아야 했을 비밀을 포혈공을 통해 바로 알게 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구겁에 들어갈 방법을 모색해야 하겠지만·
이제 와서 입을 닦고 모른 척하기에는 포혈공에게 받아먹은 대가가 너무 크다·
포혈공은 쿤다라에서 상당한 입지를 지닌 장생종인 만큼 이런 식으로 거래를 깨트리는 건 레녹에게도 좋은 일은 아닐 터·
“으으음····”
포혈공 역시 레녹의 대답이 나름 협조적이라 느낀 것인지 순간적으로 내비치던 분노를 거두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레녹이 이 거래에 꽤 순순히 협조하고 있었음을 그녀 역시 기억하고 있던 것이겠지·
흑발의 소녀가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어떻게 하지··· 혈려서기를 사용해서 시도해볼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일을 내가 협조하는 것으로 해결을 보면 되지 않겠나?”
“안 돼·”
포혈공이 붉은 눈으로 레녹을 째려보았다·
“외부인에게 발설할 일이 아니야· 카이세의 시신을 찾으려는 위험한 녀석에게는 더욱 그렇지·”
“시신이 숨겨진 위치를 순순히 말해준 장본인이 할 이야기는 아닐 텐데·”
포혈공 본인이 카이세의 시신을 숨길 위치를 정했으면서도 그녀는 레녹에게 그 위치를 생각보다 순순히 알려주었다·
더 이상 카이세의 시신을 숨길 필요가 없다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그때와는 생각이 달라진 것인지·
하지만 포혈공은 의외로 그 말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표정을 찡그렸다·
“그건 어차피····”
마치 그런 화두 자체가 이제 와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듯한 미묘한 반응·
혈영궁 한복판에 서서 멀뚱히 고민에 잠겨 있던 소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다· 머리가 아파졌으니까 일단 나가봐·”
“···나가라고?”
“그 부분에 대한 설명까지 포함해서 네게 무슨 대가를 요구할지 생각해 볼 테니까·”
터덜터덜 걸어 옥좌에 앉은 포혈공이 손을 내젓자 혈영궁의 벽면 한쪽이 쩍 갈라지며 바깥의 풍경을 드러냈다·
방금 전까지 레녹이 서 있던 안개가 자욱한 다리가 아니라 저 멀리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일단 외겁도시 안에는 들여보내 줄 테니까 그다음부터는 알아서 해·”
포혈공이 레녹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부르지·”
“이 혈영궁· 출구와 입구를 주인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공간이었군·”
레녹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쿤다라를 드나들 때 유용해 보이는데 괜찮다면 이 궁전에 계속 머물러도 되겠나?”
[····]
올리비에라가 미친 사람을 보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옥좌 위에 앉아 고민하던 포혈공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레녹을 째려보았다·
“죽을래? 피 빨리고 싶어?”
“····”
“빨리 나가·”
쿠우웅!!
궁전이 거칠게 닫히고 바깥으로 쫒겨난 레녹이 올리비에라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잘 안 먹혔군· 아쉽게 됐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올리비에라가 도포 소매 사이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포혈공은 성전 당시부터 굉장히 잔혹한 손속으로 유명했던 흡혈귀다· 그 이명조차 그가 피를 다루는 방식을 의미한다는 소문도 있었지·]
“····”
[내 눈에는 네놈이 일부러 그녀를 도발하고 자극하려는 것처럼 보였다만·]
“맞아· 이쪽에서 던지는 말에 반응이 굉장히 미적지근했지·”
피의 궁전이 사라진 자리를 돌아본 레녹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포혈공은 혈려서기 때문에 우리를 찾아온게 아니야· 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
“카이세의 시신이 숨겨진 위치를 순순히 알려준 것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레녹이 물었다·
“포혈공 본인이 카이세의 시신을 숨긴 당사자라면 이렇게 쉽게 위치를 공개할 이유가 없어· 혈려서기가 아무리 중요해도 좀 더 신중하게 저울질하는 태도를 보였겠지·”
[···그래서?]
“하지만 요르타의 무간을 언급한 시점에서 포혈공이 거짓을 말했을 가능성은 낮다· 정보가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레녹이 손가락을 폈다·
“우리가 카이세의 시신을 찾는 것을 원해서 일부러 위치를 흘렸다· 혹은 어차피 우리가 알게 될 정보라고 생각해서 그녀가 먼저 발설했다·”
[····]
“어느 쪽이든 수상하기 그지없지· 이것만으로는 포혈공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어· 그래서 일단 도발해서 반응을 떠보려고 했는데····”
픽 웃으면서 돌아선 레녹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치고는 굉장히 신중하게 나오는군· 이런 부분에서는 확실히 장생종답다고 해야 할까·”
[구겁에 숨겨진 카이세의 시신을 두고 무언가 꾸미는 일이 있다····]
올리비에라가 고심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역시 이것만으로는 정보가 많이 부족해 보이는구나· 이 시점에서는 막연한 추측밖에 할 수 없겠군·]
“그래· 그러니 지금부터는 쿤다라를 돌아다니며 관련 정보를 수집할 생각이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궁전 바깥에 펼쳐진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구겁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건지· 결국 직접 조사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테니까·”
휘오오오!!
안개가 자욱한 평야 위로 수천에 달하는 장엄한 기와집이 세워져 있었다·
깊은 강을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다리· 사방에서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세워진 수십 채의 누각·
집채만 한 학이 구름 위를 유영하듯 날아다니고 지상에서는 거대한 거북이가 사람들을 실어나른다·
신선들이 기거하는 선계 한복판에 떨어진다면 이러한 풍경일까·
“구겁에 들어갈 방법과 알로건이 말한 쿤다라에 예정된 중대한 행사·”
시가지로 뻗은 길을 향해 고갯짓한 레녹이 말했다·
“일단 이 두 가지 정보를 우선순위로 잡고 움직이도록 하지· 할 말 있나?”
[···아니·]
올리비에라가 대답했다·
[지금부터는 서로 떨어져서 움직이도록 하지·]
“뭐?”
[네놈의 말대로 쿤다라에서 정보 수집이 우선이라면 따로 움직이면서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일 터·]
고개를 추켜든 올리비에라가 말했다·
[이 도시에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지인이 몇 있다· 나는 먼저 그쪽을 찾아가 보도록 하마·]
“····”
올리비에라가 그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발이 넓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쿤다라에도 지인이 있을 줄이야·
그녀 스스로 찾아가 정보를 구할 정도라면 꽤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쪽이겠지·
“카이세의 시신이나 구겁같은 정보라면 쿤다라의 장생종에게는 꽤나 민감한 정보가 될 텐데·”
레녹이 팔짱을 꼈다·
“그런 부분을 자극하지 않고서 정보를 뽑아낼 수 있겠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올리비에라가 웃으면서 걸음을 돌려세웠다·
[네놈이야말로 이 도시에서는 당분간 성질을 죽일 수 있도록 하여라· 쓸데없이 날뛰었다가는 지금까지의 일이 수포가 될 거라는 사실· 알고 있겠지?]
“····”
[필요한 정보를 찾으면 네놈을 찾아가도록 하마·]
할 말만 남기고 곧바로 거리 저편으로 훌쩍 사라지는 올리비에라의 신형·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그동안 묘하게 협조적이어서 잊고 있었지만 원래 저 마안술사는 저런 사람이었지·
애초에 올리비에라의 동행 자체가 레녹의 부탁 때문이었으니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자 그럼····”
레녹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외겁도시 쿤다라의 거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고풍스러운 기와집과 누각이 복잡다변하게 세워진 번화가 시가지·
부적을 이어붙여 세워진 벽과 요정을 잡아 만든 등불이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도복을 입은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평범한 크기를 한참 뛰어넘은 온갖 짐승들·
거리를 오가는 주민들 모두가 인간이나 아인종과는 다른 수명을 보유한 장생종인 것인가·
‘외견상으로는 인간과 차이점을 알아보기가 어렵군·’
거리 한복판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클라리스의 말대로 쿤다라의 장생종들은 스스로의 본체를 드러내는 일을 꺼리는 걸까·’
클라리스는 레녹에게 천체술식을 가르치면서 모형정원의 의식확장 능력을 통해 장생종의 본체를 강제로 끌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능력이 쿤다라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도 덧붙였었지·
적당히 듣고 흘려넘겼지만 그 말 자체가 쿤다라의 주민 전원이 인간화를 익히고 있다는 말이었던 것일까·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원이 오래된 물건이 많다· 부적· 기념품· 법보··· 식료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물건이 수십 년은 된 장물들이군·’
장생종의 도시답게 번화가 시가지에서 판매하고 있는 물건들 대부분이 심상치 않은 내력을 보유한 것들이다·
수십 년 넘게 밀봉되어 저주받은 고독 항아리·
기이한 고대문자를 빼곡하게 새긴 갑각류의 껍질·
짐승의 이빨을 엮어 만든 목걸이· 오색 깃털을 떼어 만든 망토·
확실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도시답게 레녹조차 생경한 장물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가판대에 널려 있는 조개 껍데기를 집어도 생전 처음 보는 기묘한 화석이 붙어 있을 정도·
정보 수집을 염두하고 있던 레녹도 거리를 둘러보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구경에 빠져 있던 찰나·
“···아·”
거리 저편에 위치한 신비로운 광채를 내뿜는 가게를 확인한 레녹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시가지 근처 유독 큰 규모로 건조되어 있으면서도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거대한 공방·
광활하면서도 한적해 보이는 공방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레녹에게도 무척 낯이 익었기 때문·
‘여의보주와 비슷한 느낌인데··· 설마?’
알로건과의 내기도박을 통해 손에 넣은 여의주·
그와 유사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기운을 수십에서 수백에 가깝게 중첩해서 내뿜는 듯하다·
설마 여의주나 보주 자체를 가공해서 아티팩트로 만드는 종류의 공방인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즉시 공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호오····”
공방 진열대에 걸려 있는 각양각색의 아티팩트와 방어구가 대번에 레녹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둘투둘한 가시를 엮어만든 대검· 거대한 송곳니를 빼어 만든 언월도· 신목을 깎아 만든 지팡이·
억대를 가뿐히 호가할 법한 장비들이 거리 한복판에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쿤다라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이 정도로 강력하고도 다양한 아티팩트가 쌓여 있는 광경은 레녹도 듀리스 공방을 방문한 뒤로 처음 볼 정도·
하지만 레녹이 공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주목한 것은 아티팩트의 화려한 외견이 아니었다·
‘단순히 강력하거나 유용한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공방이 아니야·’
진열대에 전시된 아티팩트 아래에 적힌 이름과 설명을 확인한 레녹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공방에 있는 모든 아티팩트가 장생종의 신체부위를 재료로 삼아 만들어진 장비들이었군·’
대상을 타격하는 것과 동시에 칼날이 가시처럼 갈라지는 극형위검(棘荊蝟劒)·
입에 대고 불면 마력공명 효율을 약 3배 가까이 상승시켜주는 성각의 뿔피리·
피격당하는 순간 피부 위를 감싸며 착용자를 보호하는 흑쇄용린갑(黑鎖龍鱗甲)·
‘각자 형위족 천각족 쇄룡족의 신체 일부를 떼어다 만들었군·’
아티팩트 아래에는 이 아티팩트를 제작하는데 사용한 장생종의 신체 부위가 적혀 있었다·
그중 레녹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진열장 최상단에 위치해 있는 비늘갑주 흑쇄용린갑·
쇄룡족(鎖龍族)의 비늘을 떼어 만든 이 갑옷은 평소에는 급소를 보호하는 형태로 감춰져 있다 충격을 받으면 전개된다·
착용자가 피해를 받는 즉시 피부 위로 비늘이 뒤덮이며 몸을 보호하도록 설계된 술사 전용 특화 유물급 방어구·
‘행동이나 운신을 제약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만 방어에 사용할 수 있다면 확실히 가치가 있겠는데····’
합금처럼 단단하고 자물쇠처럼 엮여 있는 쇄룡족의 비늘을 떼어 만든 물건이기 때문일까·
어지간한 방어구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레녹조차 흥미가 생길 지경이다·
‘장비에 대한 설명은 꽤 자세한데 정작 가격은 적혀 있지 않군· 공방 측과 직접 협상해야 하는 방식인가?’
장생종처럼 오래 살아오며 장사를 하는 이들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판매방식은 아니다·
당장 쿤다라에서 통용되는 돈이나 화폐는 없지만 레녹에게는 여의주가 있는 바·
이 공방에서 장비를 구매하는데 얼마만큼의 대가가 필요한지는 확인해볼 수 있겠지·
“실례합니다·”
레녹의 질문에 진열장 옆을 바쁘게 오가던 청년이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능숙하게 목소리를 다듬은 레녹이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이 공방에서 판매하는 흑쇄용린갑을 구매하고 싶습니다만·”
“····”
청년은 레녹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치 그런 질문을 받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라는 듯한 노골적인 태도·
“당신 용족이야?”
“예?”
“용족 아니잖아· 그냥 말하는 것만 봐도 안다고·”
그렇게 말한 청년이 레녹을 향해 손을 휙휙 내저었다·
“용종장비는 애초에 같은 용종만 구입할 수 있는거 몰라? 뭔 주제도 모르고 저런 보구를 탐내고 있어·”
“···그렇습니까?”
“딱 보니까 바깥에서 굴러먹다 우연히 지성을 얻은 짐승 태생 같은데 그쪽 손님은 안 받으니까 가봐요· 이걸 꼭 말해줘야 아나?”
“····”
프리랜서로 일하던 시절에도 이런 대접은 몇번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꽤나 신선한 경험이다·
존대와 평대를 애매하게 섞어가면서 깔아뭉개는 말투가 워낙 노골적이라 오히려 화도 잘 나지 않을 지경·
올리비에라가 말한 성질을 죽이라는 조언을 생각하며 레녹이 품 안에 손을 밀어 넣은 그 순간·
“스누크·”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 공방 뒤쪽에서 걸어 나오며 무거운 목소리로 청년을 불렀다·
“공방을 찾아온 손님을 허락도 없이 쫓아내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스 스승님····”
“비켜· 내가 상대할 테니·”
파리해진 안색의 청년을 향해 고갯짓한 노인이 말했다·
“일단 오늘 장사를 마친 다음에 널 문책하겠다·”
“····”
고개를 푹 숙인 청년이 뒤로 물러서자 노인이 그제서야 레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깨가 떡 벌어진 전신이 근육질로 이루어진 체격·
겉으로 보이는 외견 자체는 토르번 마탑주가 연상될 만큼 강렬한 인상이다·
“내 공방에서 쇄룡족의 장비를 찾는 손님은 꽤 오랜만인데·”
무심한 눈빛으로 레녹을 빤히 바라보던 노인이 말했다·
“일단 보주를 좀 보고 싶군·”
“보주 말입니까?”
“우리 공방에서 만든 장비들은 모두 여의보주를 동력으로 삼는 아티팩트이네·”
노인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재료로 삼은 장생종의 능력이나 특성을 고스란히 재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주의 동력이 필요하지·”
“····”
“다시 말해· 어떤 보주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자네에게 팔 수 있는 물건이 정해져 있다는 말일세·”
레녹을 내려다보는 노인의 표정이 살짝 날카롭게 변했다·
“물론 이런 사실도 모르고 내 공방을 찾아온 손님이라면 나도 좋은 대답을 해줄 수 없을 것 같군·”
“····”
장생종의 신체 부위를 재료로 삼은 장비를 작동시키기 위해 여의주의 힘이 필요하다라·
공방 안에 여의주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비슷한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것은 그런 이유였나·
레녹이 품안에서 여의주를 꺼내 진열대에 올려두었다·
“여기 있습니다·”
“이건····”
진열대 위에서 찬란한 빛을 내뿜는 여의주를 본 노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알로건과의 오백로 내기에서 이기면서 족히 100년 이상의 생명력을 품은 영험한 보주·
무려 팔대용왕의 생명력으로 내용물을 채웠으니 그 영험함이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
무심코 감탄하면서 여의주를 집어든 노인이 말했다·
“굉장한 물건을 가지고 있군· 이 정도 물건은 칠겁(七劫)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데·”
“····”
“육겁이나 칠겁에 거주하는 장생종의 경우 여의주를 만들어 품을 수 있는 종족 출신이 꽤 되지·”
노인이 여의주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렇기에 내 가게에서는 보주의 힘을 안정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 장비를 제작하고 있지만··· 음?”
신비로운 광채에 둘러싸인 보주를 한 손으로 어루만지던 노인의 표정이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여의주 안에서 무언가 느껴서는 안될 기운을 느낀듯한 노인의 반응·
믿기 어렵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레녹을 휙 돌아본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수 수신족의 팔대용왕께서 제 공방에는 무슨 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