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9화
쿤다라(2)
포혈공(怖血公)·
외겁도시 쿤다라에 기거하는 장생종이자 개중에서도 가장 높은 대우를 받는 진혈(眞血)을 보유한 흡혈귀·
카이세의 시신을 숨기는데 협조한 당사자이자 혈러서기를 집필한 장본인·
동시에 쿤다라로 향하는 모든 길을 틀어막을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권한을 보유한 장생종·
입지로만 따지자면 아르스노바의 최고위 귀족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진혈종·
하지만 그런 강대한 장생종이 쿤다라에 도착하자마자 레녹의 앞에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물며 수백 년을 넘게 살아왔다는 위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소녀의 외견을 하고 있을 줄은·
“혈러서기의 기운을 감지하자마자 쿤다라에서 여기까지 직접 걸음을 옮긴 건가·”
“꽤 오래 전에 만들고 잊어버린 건데 지금 이 시기에는 돌아올 이유가 없는 물건이거든·”
소녀가 팔짱을 꼈다·
그녀의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거울처럼 섬뜩하게 레녹을 비추었다·
“뭐 대충 사정은 알겠어· 너희가 알로건의 심해권역에서 크게 날뛰었다는 애들이지?”
“····”
“서부전선 인근에서 꽤 큰 규모의 학살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게 너희들이었나 보네·”
최고위 장생종이라는 포혈공의 위명과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 소탈한 말투·
아니 그것보다 포혈공이 설마 여성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담이 그랬던 것처럼 고위 흡혈귀들은 여성체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은 것일까·
레녹이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포혈공이 레녹을 향해 손을 쓱 내밀었다·
“어쨌든 그거 내 물건이니까 돌려줘· 그거 받으려고 여기까지 나온 거니까·”
“···그 전에 일단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자연스럽게 포혈공의 손이 닿지 않도록 수첩을 들어올린 레녹이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카이세 바쥬르의 시신을 쿤다라에 숨긴 장본인이 맞는 건가?”
“····”
그 순간 레녹이 들어 올린 수첩을 향해 쭉 손을 뻗던 소녀가 움직임을 멈췄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로 레녹을 빤히 노려보던 포혈공이 말했다·
“혈러서기는 오래전에 내가 금제를 우회하기 위해 만든 기록장치야·”
“····”
“프로젝트의 실패에 대한 정보공유를 위해 만든 물건이었지만 효용에 한계가 있어 내가 가지고 있을 수는 없었지·”
수첩을 휙 가리킨 소녀가 말했다·
“혈려서기를 돌려준다고 약속해· 그럼 네가 궁금해하는 사실에 대해 말해줄 테니까·”
“그쪽에서 내 의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면 진지하게 고려해보지·”
혈러서기가 아깝기는 하지만 포혈공에게 넘기고 카이세의 일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운이 좋다면 쿤다라로 온 목적 자체를 생각보다 빠르게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아티팩트 하나를 아끼겠다고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먼저 그 부분에 대해서 확인을 받고 싶군·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레녹이 소녀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카이세 바쥬르의 결말을 보기 위해 이 도시에 왔다· 그 의문이 해소되면 당장이라도 쿤다라를 떠날 의향이 있지·”
“····”
“네가 정말로 포혈공 본인이 맞다면 먼저 그 사실에 대해서 확인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까부터 자꾸 포혈공이니 뭐니 하는데·”
소녀가 코웃음을 쳤다·
“거슬리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 애초에 그거 날 모욕하려고 만들어진 멸칭이라는 거 몰라?”
“멸칭이라고?”
포혈공이라는 이명을 풀어 해석하자면 피를 두려워하는 공작에 가깝다·
흡혈귀답지 않은 이명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애초에 그녀를 모욕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포혈공은 그런 레녹의 반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르는군· 너 애초에 프로젝트 당시의 관계자가 아니구나·”
“····”
“단명종 주제에 금제에 걸릴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것도 그렇고 프로젝트 이후에 태어난 인간이었나? 뭐 좋아·”
촤악!!
소녀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긴 순간· 그녀의 발 아래서 붉은 장막이 솟구쳤다·
안개가 자욱한 거대한 다리의 절반 가까이를 휘감을 법한 크기·
그 압도적인 혈류(血流)의 범람에 레녹조차도 순간적으로 놀라 시선을 들어 올린 순간·
레녹과 올리비에라가 서 있는 자리를 피처럼 붉은 장막이 휘감고 격렬하게 회전했다·
파라라락!!!
빠른 속도로 회전하던 붉은 장막이 이윽고 색이 바래면서 주변을 투명하게 밝힌 순간·
어느새 레녹은 붉은 태피스트리가 장식된 피의 궁전 한가운데 서 있었다·
“···!”
피처럼 붉게 물든 천장과 복도· 머리 위에서 느릿하게 회전하는 검붉은 샹들리에·
포혈공이 뽑아 올린 방대한 혈류를 그대로 굳혀 피의 궁전으로 삼은 듯하다·
광대한 궁전을 둘러보는 사이 궁전의 로비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옥좌가 보였다·
인간이 앉아있기에는 터무니없이 거대한 옥좌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소녀의 모습·
다리를 꼬고 앉은 소녀가 옥좌 팔걸이에 상반신을 기댄 채 무표정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나의 혈영궁(血泳宮)은 현실과 허수차원의 경계선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영토지·”
포혈공이 옥좌에 기댄 채 말했다·
“공간을 경유하는 개념이라 너희에게 일일이 공간전이를 걸지 않고도 내 영토에 접촉시킬 수 있어·”
“····”
“이 정도면 내가 포혈공 본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엔 충분한가?”
레녹과 올리비에라에게 공간전이를 건 것이 아니라 주변의 공간을 그녀의 혈영궁과 강제로 접촉시킨 것인가·
현실과 허수차원의 경계선에 존재하는 흡혈귀의 영토·
그 모호한 공간을 현실로 끌어내어 강제로 레녹과 올리비에라의 주변에 접촉시키는 힘·
그것을 깨달은 레녹이 고개를 끄덕이며 혈려서기의 수첩을 소녀에게 내밀었다·
“확실히 이 정도 혈마법을 자유롭게 다룬다면 포혈공 본인이 틀림없겠지·”
포혈공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허수차원을 직접 다루는 건 허위계명성(虛僞啓明星)과도 비견될만한 능력이다·
고위계 흡혈귀의 혈마법· 레녹조차 원리를 짐작하기 어려운 고등 술식이 틀림없는 바·
이만한 혈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혈려서기에 대해 알고 있는 진혈종 흡혈귀가 포혈공말고 또 있을 리는 없겠지·
“뭐야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잖아·”
레녹이 순순히 혈려서기를 건네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소녀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살짝 기분 좋은 듯 낡은 수첩을 받아든 그녀가 낡은 페이지를 느긋하게 넘기면서 말했다·
“좋아· 이 수첩이 있으면 그래도 앞으로의 일에서 리스크를 줄일 수 있겠지·”
“····”
“순순히 수첩을 돌려줬으니까 질문을 몇 개 들어줄게· 뭐부터 듣고 싶은데?”
“···카이세 바쥬르의 시신은 어디에 보관되어 있지?”
레녹이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이유가 어쨌든 포혈공은 혈려서기를 대가로 레녹의 질문에 대답해줄 마음이 든 모양·
혈려서기가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레녹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때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레녹의 경험상 금제에 걸려있거나 직간접적으로 얽혀있는 이들은 때와 상황에 따라 답할 수 있는 정보가 천차만별로 달라지곤 했다·
상대가 금제의 내용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금제가 만들어진 뒤에 태어난 인간인지에 따라서조차 가능한 대답이 변하기도 했던 바·
아나테마의 이름이라는 특수한 인과를 빌리지 않는 이상 그렇게 쉽게 기회가 찾아오지는 않는다·
빠르게 질문을 정한 레녹이 한결 차분해진 시선으로 포혈공을 바라보며 물었다·
“애초에 그쪽이 카이세의 시신을 회수해 보관할 위치를 정한 것이 맞기는 한 건가?”
[····]
서슴없이 질문을 던지는 레녹의 태도에 올리비에라조차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눈앞의 흡혈귀를 상대로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녀 역시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포혈공은 그런 레녹의 말을 듣고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젖혔다·
“카이세 바쥬르의 시체는 구겁(九劫)의 십관에 보관되어 있어·”
포혈공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구겁이라고?”
“파우드 올더의 반역이 실패한 뒤로 카이세의 시체를 숨길 후보지를 두 곳으로 좁혔거든·”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는 요르타의 무간과 쿤다라의 구겁을 두고 고민했는데 무간은 이미 누군가 우리가 생각했던 용도로 사용하고 있더라고·”
“····”
포혈공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레녹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곧바로 이해했다·
군령도시 요르타· 무간의 성소에 보관되어 있던 승천자 도래의 시체·
교주의 그릇으로 사용되었던 그 육신을 레녹 역시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레녹은 그보다도 소녀가 언급한 구겁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알로건은 여의주에 담은 수명을 환전하기 위해서는 팔겁(八劫)의 성소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었다·
수신용왕 본인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팔겁을 넘어 그보다 더 위에 위치한 구겁이라 한다면····
레녹이 믿기 어렵다는 듯이 물었다·
“9레벨의 승천자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에 카이세의 시신을 숨겨두었다는 말인가?”
자기개변의 일곱 가지 위계를 완성하는 7레벨
위계 자체를 초월해 도달하는 8레벨·
승천에 도전할 자격을 손에 넣는 9레벨·
포혈공이 말하는 구겁의 공간이란 틀림없이 그러한 위계의 규칙을 형상화한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겠지·
알로건에게 설명을 들었을 때부터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틀림없다·
쿤다라는 도시의 구조 전체를 위계에 맞춰서 창조해낸 장생종들의 도시·
그들이 말하는 겁(劫)이란 바로 위계를 쌓아 올린 초인들이 도달하는 경지 그 자체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팔겁과 구겁을 넘어 쿤다라를 상징하는 외겁(外劫)의 의미는 역시-
포혈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애초에 카이세의 시신을 거기까지 옮긴 것도 승천자의 도움을 받아서 한 일이었지·”
“····”
승천자만이 넘어설 수 있는 구겁의 관문· 그 너머에 카이세의 시신이 보관되어 있다는 포혈공의 설명·
수백 년을 사는 장생종들이 살아가는 외겁도시의 스케일이 비현실적인 수준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승천자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비처라는 것이 도시 안에 공식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줄이야·
카이세의 시신을 찾는 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까다로운 상황임을 이해한 레녹이 표정을 굳힌 찰나 포혈공이 혈려서기를 쓰다듬었다·
“그러지 않아도 최근 구겁을 둘러싸고 시끄러운 일이 생겨서 말이야· 나도 자문을 구하기 위해 이 물건이 필요했거든· 도움이 됐어·”
“····”
설마 혈려서기 안에는 구겁에 대한 정보마저도 기록되어 있는 것인가·
포혈공 본인이 혈려서기를 통해 자문을 구할 정도라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잠재력이 수첩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애초에 이 정도 거래가 아니었다면 포혈공의 입을 열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던 찰나·
“자 이 정도면 충분하지?”
포혈공이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쥐고 있던 혈려서기를 들어 올렸다·
“혈려서기를 돌려준 건 고맙지만 마지막으로 한가지 공정만 더 도와줘야겠어·”
“공정?”
“네가 혈려서기를 인계받으면서 획득한 관리자 권한· 그걸 내게 다시 돌려놓아야 하거든·”
“····”
“내 피를 한 방울 줄 테니까 그걸 혈려서기에 먹여· 그다음에 네가 직접 소유권을 내게 양도하라고 명령하면 돼·”
그 말과 함께 포혈공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핏방울이 배어나왔다·
포혈공은 능숙하게 그것을 손톱 끝에 찍어 올려둔 뒤 옥좌 위에서 내려와 레녹의 앞에 섰다·
“그렇게 하지·”
레녹이 낡은 수첩을 펼치고 포혈공이 떨어뜨리는 핏방울을 수첩의 페이지에 받았다·
붉은 핏방울이 혈러서기의 페이지 위로 녹아내리는 순간 페이지 전체가 크게 들썩이면서 격동했다·
=····
하지만 그 격한 반응과는 별개로 아무런 대답도 없는 혈러서기의 모습·
“···?”
의아한 듯 표정을 찌푸린 소녀를 두고 레녹이 곧바로 핏방울을 찍어 수첩에 발랐다·
이번에는 수첩이 곧바로 응답했다·
=위대한 사명을 짊어진 초월자를 뵙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레녹이 곧바로 글귀를 적어넣었다·
=네 소유권을 집필자인 포혈공 본인에게 양도하려 한다·
=본 혈려서기 자이블은 대대로 적합한 관리인의 안내에 따라 소유권을 인계받아왔습니다·
수첩이 답했다·
=이는 보다 적합한 소유권 보유자를 따라 작동하는 혈러서기의 이념에 반하는 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정당한 절차를 따르지 않고서는 소유권의 이전은 불가능합니다·
“····”
포혈공과 레녹이 한 번씩 피를 주입했는데도 절차가 정당하지 않다는 듯 말하는 혈려서기의 답변·
표정을 찌푸린 포혈공이 다시 한번 손가락 끝을 베어 피를 수첩 위로 떨어뜨렸다·
수첩의 답은 똑같았다·
=적합한 소유권 보유자가 아닙니다·
포혈공이 몇 차례 더 혈액을 떨어뜨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할 뿐·
=보다 뛰어난 초월자의 혈액이 필요합니다·
“···너·”
그제서야 혈려서기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포혈공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내가 만든 장물이 지금 내가 만든 피의 규칙을 거부하겠다는 거야?”
=····
“보다 우수한 피의 주인을 따라야 한다면 응당 내가 다시 네 소유권을 되찾아오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
촤악!!
수첩의 페이지를 흠뻑 적실만큼 피를 떨어뜨린 소녀가 말했다·
“네 주인은 나야· 당장 소유권을 양도해·”
=····
혈러서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적합한 대답을 고르듯이 한참 동안 페이지 위로 괴상한 글귀를 띄웠다 지우기만 했을 뿐·
한참을 그렇게 답변을 망설이던 수첩의 페이지 위로 떠오른 답변은 꽤나 간결했다·
=싫습니다·
“····”
=저는 지금의 주인이 좋습니다·
할 말을 잃은 포혈공이 황당한 시선으로 레녹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