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7화
별의 그늘(13)
쿤다라로 향하는 공간균열을 열어젖힌 직후 포효하는 수룡과 함께 나타난 예하술주의 모습·
휘오오오!!!
이면의 시공와 심해권역의 경계선이 어지러이 뒤섞이며 사방의 풍경이 흐릿해진다·
파도와 안개가 사방에서 일그러지면서 아련한 환상처럼 모든 감각을 흐리게 만들었다·
“심해권역에서 어떻게 알로건을 쓰러뜨리고 날 찾아냈나 했더니····”
눈앞에 서 있는 예하술주와 멀리서 포효하는 수신용왕을 바라본 레녹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애초에 알로건을 이기고 온 것이 아니었군· 수신술을 폭주시켜 근방의 공간을 뒤집어 엎어버린 건가?”
레녹의 위치가 발각당한 것은 알로건이 마력을 휘두르며 근방에 추락한 직후·
하지만 포효하는 수룡의 기척은 더할나위 없이 흉흉한데 예하술주의 몸은 피투성이다·
예하술주가 알로건을 쓰러뜨리고 당도했다기엔 두 사람의 상태가 정반대인 상황·
레녹은 일련의 정황을 통해 술주가 알로건에게 수작을 부려 주변을 강제로 때려 부수도록 만들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반 님께서 심해권역에서 유희를 즐기시는 동안 저도 마냥 놀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요·”
예하술주가 느긋하게 말했다·
“해류를 지배하는 수신술은 확실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능력인 만큼 혹시 몰라 금술을 빌려두었거든요·”
피투성이가 된 팔뚝을 손으로 훑어내리자 걸쭉한 혈액이 팔을 타고 주르륵 떨어져 내린다·
온몸을 쥐어 짜내듯이 팔뚝을 주물러 피를 짜낸 예하술주가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효과는 확실하지만 온몸의 감각이 둔해져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렵군요··· 여러모로 두 번은 못 할 짓입니다·”
“금술이라·”
레녹이 차가운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건 네 몸에 직접 주입해 넣은 시귀술식을 말하는 건가?”
“····”
예하술주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들은 그가 심해권역에서 무수한 피격을 허용했다는 증거·
온몸이 걸레짝이 된 모습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 위화감이 착각이 아니라 시귀술식의 결과물임을 레녹은 알아보았던 것·
“그만한 부상을 입고도 멀쩡하게 움직인다 했더니 자신의 몸을 시귀로 개조해 버렸군·”
“예에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술주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시귀화(屍鬼化)가 완전히 진행된 것이 아니라면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은 있거든요· 중요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
“이번 여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반 님께서 결국 저와 한 약속을 어기실 줄은 몰랐습니다·”
뚝 뚝···!!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들어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예하술주가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 제가 분명 몇 번이고 경고를 드렸던 것 같은데····”
문신을 새긴 피부 위로는 온갖 자상과 타박상이 빼곡하게 새겨져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
하지만 상처 사이로 내비치는 술주의 눈동자는 전에 비할 바 없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어이 혼자서 쿤다라로 가는 문을 여셨군요·”
“주문연맹의 배려는 고맙지만 이면을 돌아다니다 보니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더군·”
레녹이 팔짱을 끼며 웃었다·
“함께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팔대용왕이 그쪽을 찾고 있는데 무시하기도 어렵지 않나?”
“···호오· 그렇습니까·”
술주가 피범벅이 된 얼굴로 히죽 웃었다·
“그렇다면 쿤다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여셨는지 제 앞에서 한 번 더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
“제가 식견이 좁고 견식이 얕아서 당최 무슨 방법으로 장막에 손을 대셨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군요·”
역시 예하술주는 레녹이 천체술식의 모형정원을 사용하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모형정원을 열어 장막을 비틀고 정원을 닫아버린 직후 술주 역시 레녹을 찾아냈지만·
스스로의 몸을 시귀로 개조하면서 감각이 둔해진 탓에 그 모습을 확인하지 못했던 것·
거기까지 확신한 레녹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예?”
“어떻게 하다보니 일이 잘 풀렸다· 운이 좋았지·”
“····”
술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을 바라보다 고개를 툭 기울였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등 뒤에 자리한 쿤다라로 향하는 공간균열을 가리켰다·
“지금 그렇게 만들어낸 결과가 여기 있잖나·”
“····”
레녹이 쿤다라로 가는 길을 열어젖힌 시점에서 술주는 레녹이 천체술식을 가졌음을 확신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 사실은 예하술주가 레녹을 안내하기 전부터 의심하고 있던 것에 불과하다·
예하술주가 레녹과 동행했던 것은 천체술식을 술주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증거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 결정적인 순간을 술주는 알로건을 상대하는 사이 끝내 놓쳐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침묵하던 예하술주가 말했다·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군요·”
툭 툭!!
피범벅이 된 옷자락에 손을 갖다대자 젖은 소매와 천이 우수수 잘려나간다·
소매를 절단해 팔의 운신을 자유롭게 만든 예하술주가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피에 미쳐 있다는 대마법사가 이렇게 궤변을 좋아하시는 분일 줄은 몰랐는데· 실망스럽습니다·”
“주문연맹이 그동안 내 앞에서 지껄인 핑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지·”
레녹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안내라는 명분으로 이면의 시공에서 나를 시험하고 이제 와서 좋은 대답을 기대한 건가?”
“····”
“여전히 맹주의 제안에는 흥미가 있다· 그가 언급한 ‘사냥’에 대해서라면 나 역시 협력할 용의가 있지·”
발 아래 찰박이는 물길을 밟고 돌아선 레녹이 말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시점에서 너희 연맹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
입을 다문 예하술주를 보며 레녹이 냉소했다·
“적어도 맹주 본인과 이 상황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는 협력할 수 없겠군· 그것뿐이다·”
“저는 맹주께서 맡기신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칼날입니다·”
예하술주가 답했다·
“반 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어떤 결말을 바라시든 저는 그분의 전언을 이행할 뿐이지요·”
“····”
“좋습니다· 반 님께서 정녕 맹주께서 권하신 술잔을 거절하실 생각이라면-”
자신의 피를 문신을 새긴 팔뚝 위에 덧바른 예하술주가 고개를 젖혔다·
“저 역시 반 님을 위한 벌주가 되어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
“반 님께서 숨기시는 비밀· 맹주께 고하지 않았던 술식의 존재· 당신만이 장막을 비틀 수 있던 이유·”
예하술주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확인하겠습니다·”
“아직도 헛된 망상에 빠져 있군·”
레녹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심해권역의 팔대용왕· 처음부터 제대로 상대하고 날 찾은 것도 아니었잖나?”
“····”
예하술주의 무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 짧은 시간에 심해권역에서 알로건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한 일·
그리고 예하술주가 모종의 수단으로 알로건의 수신술을 폭주시켜 통제를 잃게 만들었다면-
“이쪽이다 알로건·”
키이잉!!
손가락 끝으로 마력을 터트리는 것과 동시에 감추고 있던 기척을 해체·
동시에 안개 속에서 날뛰며 포효하던 수룡이 예하술주가 서 있는 방향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엄청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내리꽂히는 수룡의 거체를 보며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
[오오오오오!!!!]
콰아아아앙!!!
물안개가 어린 협곡 사이로 거대한 수룡이 머리를 들이박으며 협곡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부서지는 암반과 수풀이 협곡의 절벽 아래로 빠르게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피아를 가리지 않는 그 공격에서 레녹과 예하술주 모두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협곡에 머리를 박은 수룡의 동체 위에 올라타 푸른 비늘을 밟고 몸을 단단히 붙였을 뿐·
파지직!!
[능뢰(凌雷) : 개화(開花)]
레녹의 손끝에서 회전한 전격이 푸른 꽃처럼 피어나 예하술주를 향해 폭발했다·
무너지는 협곡 사이로 뇌광이 번뜩인 직후 새파란 마력광이 물안개를 관통하고·
예하술주가 터트린 참격과 허공에서 충돌해 그 자리에서 비산했다·
쩌어엉!!
“이쪽이다!!!”
동시에 안개가 낀 협곡 사방에서 아가미를 단 수신족의 초인들이 쏜살같이 질주했다·
가파른 절벽 사이를 능숙하게 밟고 내달리면서 수류를 조작하는 수신족들의 모습·
“단명종의 술사를 잡아라· 알로건 님께 가세하라!!”
“이 자리에서 연맹을 죽이고 여의주를 돌려받아야 한다!!”
불가사리가 수신족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주기는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 괴물조차 마력이 범람하는 협곡의 방향이나 위치를 감추기는 어려웠겠지·
부아아앙!!
수룡 위에 올라탄 레녹과 예하술주를 포위하듯 수십 명의 수신족이 동시에 떨어져 내렸다·
무너지며 추락하는 협곡 사이로 압축된 수류와 창날 참격이 교차하면서 복잡하게 회전하고·
카가가가각!!!
격렬하게 흔들리는 수룡의 거체 위에서 술주가 번뜩이는 뇌전을 피해 유려하게 돌아선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혀 레녹과 등을 맞대듯 몸을 기울이고 찰나의 순간 가속해 사라진다·
“제가 사용하는 예하술식(刈荷術式)은 짊어진 것을 베는 힘·”
레녹을 향해 고개를 기울인 예하술주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술식의 발동은 반드시 저 자신이 ‘받은 업’을 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수작을···!!”
자신의 술식에 대해 풀어 설명함으로서 술식의 위력을 강제로 끌어올리는 주언(呪言)·
전조가 없는 것이 특징인 예하술식에 영창과 주언을 부여해 강제로 전조를 더한다·
장막을 베어버렸을 때와 같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무언가를 베기 위해 주언을 더하는 영창·
술식을 발동할 틈은 주지 않는다·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선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점멸을 난사·
굵직한 전격을 두른 레녹의 손이 사방에서 번뜩이는 참격을 모조리 쳐내고 거침없이 술주의 명치에 내리 찍혔다·
파아앙!!!
“큽···!!”
수신족의 물살과 창날 알로건의 폭주조차 어렵지 않게 피해내던 술주를 관통하는 섬찟한 낙뢰·
직후 술주의 몸이 직각으로 크게 꺾이면서 그 얼굴이 처참한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단 한 번의 피격을 허용했을 뿐인데 체내 장기가 모조리 뒤틀리는 듯하다·
시귀화를 거친 예하술주조차 신경이 끊어지고 영혼이 분절되는 듯한 격통·
[참절(斬切)]
카가각!!
피를 흠뻑 토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절단술식을 발동해 참격을 터트리고 레녹을 밀어낸다·
정신이 혼미해진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참격을 휘두르며 거리를 벌리려는 예하술주의 반응·
‘기술도 기술이지만 시귀화된 몸이라 맷집이 말도 안 되는군·’
들썩이는 예하술주의 모습을 레녹이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알로건과 수신족이 번갈아 날뛰면서 무너지고 격변하는 협곡·
피아를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쏟아지는 공세 속에서도 어떻게든 레녹을 붙잡아두고 있다·
참격의 위력이나 술식의 배치· 동선과 반응 몸의 움직임을 비롯해 흠결조차 보이지 않는 걸출한 기예·
[일각(一覺)]
콰아아앙!!!
레녹이 오른손으로 수인을 맺은 순간 엄청난 양의 뇌전이 어깨 뒤로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천뇌붕(穿雷崩)]
가파른 절벽을 뒤덮은 방대한 전류가 손짓을 따라 구부러지면서 거대한 뇌전의 말뚝으로 화한 찰나·
전신에 꽂혀 들어가는 뇌전에 술주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악물면서도 술주가 말했다·
“제가 직접 받아 짊어진 피해를 칼날로 벼려 쏘아내는 힘이기에···!!”
번쩍!!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뇌붕의 벼락이 예하술주의 전신에 사선으로 내리 찍혔다·
전격마법 중에서도 순수 출력으로는 최상위에 달한 성위마법이 이면의 시공에 강림한 그 순간·
새파랗게 빛나는 뇌광이 거대한 원을 그리면서 협곡의 사방에 강렬한 벼락을 내리꽂았다·
쿠과과과과과!!!
협곡 전체가 격하게 흔들리면서 물안개와 흙더미를 가리지 않고 증발시켰다·
천뇌붕을 내리꽂은 궤적을 따라 협곡 사이로 깊은 상흔이 남아 동굴을 이룰 정도·
그렇게 만들어진 동굴 끝에 예하술주가 비틀거리면서 서 있었다·
“-저의 결핍이 권한을 대행하는 칼날로서 완성시켜 주는 기적인 셈입니다·”
“····”
그 발아래 만신창이가 된 채 쓰러진 삼지창을 쥔 수신족의 모습·
“쿨럭···!! 네놈···!!”
“받은 피해를 고스란히 네 술식의 동력으로 삼는 힘이라·”
레녹이 굳은 표정으로 예하술주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 술식으로 장막을 벨 수 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군·”
예하술식이란 자신의 몸에 가해진 피해를 고스란히 참격으로 쏘아내는 힘·
예하술주는 자신의 몸에 가해진 모든 피해를 모아 천뇌붕의 마법에 대항하는 참격을 쏘아냈다·
알로건에게 받은 피해 수신족이 쏟아내는 공세가 막강했던 만큼·
술주 역시 천뇌붕의 화력에서 자신의 몸을 건사할 참격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시간이 됐군요·”
술주가 웃으면서 협곡 위쪽에 자리한 공간균열을 가리켰다·
“이제 곧 반 님께서 열어놓은 쿤다라로 가는 길이 닫힐 겁니다·”
“····”
“정 외겁도시로 가고 싶으시다면 다시 한번 예의 ‘방법’을 사용해 장막을 비틀어야 하겠군요·”
천체술식을 사용해 장막을 비틀었다 해도 술식효과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예하술주는 레녹을 상대로 시간을 끌면서 공간균열이 닫히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
단순히 레녹에게 천체술식의 심증을 확보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반드시 천체술식을 자신의 두 눈으로 ‘보아야만’ 한다는 듯한 예하술주의 집착·
그것이야말로 유리정원에 기거하는 맹주를 움직이기 위한 조건이라도 되기 때문일까·
“그렇군·”
하지만 레녹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뒤에도 곧바로 품 안에 손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뭔가 놓치고 있지 않나?”
“···예?”
레녹이 물었다·
“네가 장막을 베고 길을 열어준 건 나 하나만이 아니었을 텐데·”
“···설마·”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가 보이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달은 예하술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순간·
[견뢰· 찾았다·]
턱!!
화려한 도포를 걸친 올리비에라가 무너지는 협곡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창백한 안색을 지닌 시귀술주가 목덜미를 잡힌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우 우와아앗···!!”
[심해권역의 경계에 숨어서 나의 마안으로도 찾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구나·]
베일 너머로 마안을 빛내면서 시귀술주를 바라본 올리비에라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번거롭기도 하지·]
“헤 헤헷····”
시귀술주가 올리비에라의 눈치를 보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 나름 잘 숨어 있었는데 어 어떻게 알고····”
[셋을 주지·]
올리비에라의 마안이 가늘게 변했다·
[맹주의 칼날을 자처하는 저 버러지를 지금 당장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라·]
“우 우리··· 그래도 잠깐이나마 가 같이 여행한 사이잖아요····”
[둘·]
칼같이 단호한 올리비에라를 보며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는 시귀술주의 모습·
“예 예하술주랑은 제가 자 잘 이야기해 볼 테니까 이 일단 진정하는····”
[하나·]
“우와앗!!”
올리비에라가 시귀술주의 목덜미를 쥐고 협곡 아래로 손을 쭉 뻗은 순간·
창백하게 질린 시귀술주가 눈을 꼭 감고 술식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 순간 예하술주의 몸이 시귀술주의 의지에 따라 절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려세운 예하술주가 레녹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제가 아니라 시귀술주를 노리고 있었습니까·”
“시귀술주가 보이지 않던 순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
레녹이 팔짱을 낀 채로 예하술주를 바라보며 답했다·
“시귀술주의 생사에는 신경 쓰지 않던 네가 술주를 숨겨둔 이유가 있을 테니까·”
“····”
시귀술식을 빌려 자신의 몸을 시귀로 개조했기 때문에 시귀술식의 조작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레녹은 올리비에라를 통해 몸을 숨긴 시귀술주를 찾게 만들었던 것·
칠채보의 마안을 지닌 올리비에라는 장막의 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자·
시귀술주의 신변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시귀가 된 예하술주를 조종할 수 있음을 알고 있던 것이다·
휘오오오!!!
예하술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흔들리는 절벽 끄트머리에 선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자욱한 협곡의 절벽 아래·
장막의 이면 안쪽에 존재하는 허수차원에 가까운 시공이다·
절벽 아래 무엇이 존재하는지 살아나올 수 있을지는 오직 떨어지는 본인만이 알 수 있겠지·
“이 자리에서 내 손으로 널 직접 죽이지는 않을 거다·”
술주의 뒷모습을 보며 레녹이 말했다·
“2사도의 일에 대해서는 아직 흥미가 있거든·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 맹주도 내 대답을 이해하겠지·”
“····”
“원하는 것이 있다면 시답잖은 명분을 핑계 삼지 말고 직접 내게 부탁해야 할 거다·”
레녹이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유리정원에 숨어 타인의 손을 빌리는 형태로는 그쪽의 계획에 협력하고 싶지 않군·”
“그 렇군요····”
안개가 자욱한 협곡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예하술주가 힘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닐 겁니다·”
“····”
“반 님께서 외겁도시에서 무엇을 원하시든 언젠가는 반드시-”
[말이 길군·]
후욱!!
그 이상 예하술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올리비에라가 손을 들어 올리자 시귀술주가 눈을 질끈 감고 술식을 조작·
예하술주의 몸이 안개가 자욱한 협곡 아래쪽으로 떨어져 버렸다·
“우 우아···!”
창백하게 질린 시귀술주가 주저앉은 사이 올리비에라가 그녀를 가리켰다·
[이 시귀는 어찌 할 셈이더냐·]
“말했듯이 죽이지는 않을 거다·”
레녹이 대답했다·
“내 입장에서는 아직 연맹과 협력할 여지를 남겨두고 싶거든· 벌써부터 연맹과 완전히 척을 질 필요는 없지·”
[예하술주 놈을 절벽에 던져놓고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군·]
“받은 피해를 참격으로 치환하는 술식의 보유자다· 시귀가 된 만큼 평범한 방법으론 죽이기도 어렵지·”
올리비에라의 시큰둥한 지적에 레녹이 웃었다·
“시간이 많지 않은 만큼 당장 생각나는 방법을 골랐을 뿐이다·”
[····]
“바로 움직이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면서 모형정원을 사용해 열어둔 공간균열을 가리켰다·
“이제는 정말 외겁도시로 갈 시간이다·”
[···흐음·]
올리비에라가 차가운 한숨을 내쉬면서 걸음을 휙 돌렸다·
공간균열 앞으로 향하는 올리비에라를 두고 레녹이 시귀술주를 향해 돌아섰다·
“주문연맹주는 네가 가진 술식의 가능성을 굉장히 높게 보고 있더군·”
“그 그건····”
“만에 하나 네 술식이 교단의 손에 넘어갔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겠지·”
“····”
“이 자리에서 널 죽여 두 번 다시 회생할 수 없게 만들까 생각도 해봤지만····”
움츠러든 시귀술주를 보며 레녹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렵겠지· 자신의 몸을 시귀로 만들 정도라면 어딘가에서 살아날 대비책도 강구해 두었을 테니까·”
“····”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문 너머로 사라진 올리비에라를 따라 걸음을 돌린 순간·
콰직!!
발아래 협곡의 절벽이 쩍 갈라지며 흙먼지를 뒤집어쓴 예하술주가 뛰쳐나왔다·
“하핫···!!!”
두두두두두!!!
쏟아지는 흙과 바위를 참격으로 베어내며 잔해물을 밟고 뛰어오르는 술주의 신형·
엄청난 속도로 잔해를 밟고 절벽을 거슬러 오르며 예하술주가 눈을 번뜩였다·
“아직입니다···!!!”
“····”
불길하기 그지없는 사념을 전신에 두르고 레녹을 향해 손을 뻗는 술주의 모습·
절벽 아래로 떨어진 직후 떨어지는 파편을 모조리 베어내며 올라온 것인가·
시귀술식에 몸을 지배당한 뒤에도 그 몸에 새겨진 맹주의 ‘권한’을 사용했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레녹은 그걸 알면서도 태연한 표정으로 품 안에서 손을 뻗었다·
“시귀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존재하는 시귀술식으로만 가공 가능한 존재지·”
대천사의 연민을 꺼내 든 레녹이 그것으로 예하술주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리고 시귀화가 진행될수록 생물보다는 무생물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예?”
“아까 스스로의 입으로 시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레녹이 웃었다·
오버마인드를 공략할 당시 대천사의 연민을 사용해 시귀술주를 강제로 이동시켰던 것처럼·
시귀화가 진행된 예하술주를 상대로 그 잠깐 사이 훨씬 더 편한 방법이 사용 가능해졌기 때문·
“이제 너도 대천사의 연민 포착 대상에 잡히는군·”
키이잉!!
대답은 없었다·
대천사의 연민이 발동하는 것과 동시에 시귀술주의 몸을 강제로 공간전이·
이번에야말로 잡을 곳 하나 없는 협곡의 안개 한복판에 그대로 떨어뜨려 버렸다·
“아아아아아!!!”
멀어지는 예하술주의 비명· 입을 쩍 벌린 시귀술주를 지나친 레녹이 쿤다라로 향하는 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