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2화
별의 그늘(8)
펜터렉트는 레녹이 지닌 모든 아티팩트를 통틀어 가장 레녹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작동하는 힘·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펜터렉트를 통해 구현된 결과물은 별다른 부담 없이 치워 버릴 수 있다·
레녹과 가장 무관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동하며 반대로 그렇기에 뒷수습이 어렵지 않은 유물·
예하술주가 가장 예상하지 못할 방식이면서 여차할 경우 회수가 가능해 펜터렉트를 먼저 골랐지만·
그 기회를 타고 이형의 괴물이 레녹을 직접 보러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업이라 말하기는 했지만 너무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단의 칠망성 위로 나타난 일곱 개의 손가락을 가진 검붉은 손의 형상·
불가사리처럼 기괴하게 꿈틀거리면서도 정중하게 질문을 던져오는 상대의 모습·
=제가 주목하는 것은 그대의 악마적인 소질 그 자체· 그와 연결되는 형태를 꼭 한 가지로 고정해 둘 이유는 없으니까요·
기괴하고 추악한 기운과는 반대로 정중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가 강렬한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
헤드로 군벌을 마물로 타락시킨 금지된 의식의 주체·
살아 있는 인간의 군대를 마물로 변이시킨 이형의 존재가 레녹에게 직접 접촉해 온 것인가·
“헤드로 군벌은 금지된 의식을 거쳐 마물로 타락했다고 들었는데·”
레녹이 물었다·
“그럼 네가 바로 그 금지된 의식의 주인이라는 말인가?”
=저희의 계약자들이 그러한 모습이 된 것은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이 바란 일입니다·
불가사리가 웃었다·
=그들의 유한한 삶을 전쟁에 얽매어놓기 위한 가장 적합한 형태가 그것이었을 뿐이죠· 스스로 바래어 받아들인 결과이니 어찌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
=다만 앞서 말했듯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쪽이 아닙니다·
쩌저적···!!
불가사리가 레녹을 향해 둥글게 구부러지며 인사하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헤드로 군벌을 학살하던 그 솜씨· 무척이나 인상 깊었습니다· 저희 외계의 짐승들조차 쉽게 따라 하지 못할 만큼 세련된 기술이더군요·
“····”
=아주 오랫동안 무수한 생명체를 죽여보면서 스스로의 소질을 갈고 닦아온 개체임이 틀림없겠죠·
불가사리가 물었다·
=시간의 흐름에 그 재능이 녹슬기 전에 반드시 그대의 유전적 소질을 보존하고 싶습니다· 저희와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유전적 소질을 보존한다고?”
기괴한 제단 위에서 소환된 괴물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선정·
레녹이 그 갑작스러운 제안에 미간을 찌푸린 사이 불가사리가 레녹을 향해 손을 펼쳤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대의 유전형질(遺傳形質)이 기록된 체내 세포 일부를 제공해 주시면 됩니다·
쩌업!!
일곱 개의 손가락이 달린 손바닥이 쩍 벌어지며 입처럼 변했다·
=그럼 저희가 그대의 유전정보를 습득해 그 축복받은 소질을 결말 너머까지 보존하게 되겠죠·
“···”
=허락해 주신다면 말씀드린 대로 장생종에게 그대를 안내하고 그대가 행하는 모든 살육에 성심성의껏 협조하겠습니다· 어떠십니까?
갑자기 나타나 레녹의 유전정보를 요구하는 것 치고는 그들이 말하는 목적 자체가 심상치 않다·
스스로를 자칭하는 외계의 짐승이라는 말과 유전정보의 보존· 결말 이후를 언급하는 태도까지·
[어처구니가 없군·]
순간 대화를 듣고 있던 올리비에라가 냉소했다·
[서부전선에서 벌인 짓거리가 얼마나 악랄했으면 저런 것이 소문을 듣고 너를 찾아온 게냐·]
“····”
[네놈이 그간 발칸에서 쌓아 올린 악명이 노력 끝에 결실을 빚었다고 보아야겠구나· 기특하기도 하지·]
“칭찬 고맙군·”
레녹이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불가사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나는 정체도 모르는 괴물에게 내 생체정보를 넘겨줄 생각은 없다·”
=제 소개는 이미 충분히 드린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이형의 괴물과 손을 잡고 살육에 몰두할 정도로 미치지도 않았지·”
레녹이 제단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애초에 그게 꼭 그쪽과 손을 잡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던가?”
=과연 그렇습니까·
불가사리가 순간 감탄한 듯 말했다·
=누구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유롭게 살인에 몰두하고 싶다는 뜻이라면 저도 어쩔 수 없군요·
“····”
무슨 말을 해도 레녹의 인상은 판에 박힌 채로 굳어서 변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나·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올리비에라가 뒤에서 얼마나 비웃고 있을지 짐작이 가는 것 같다·
하지만 불가사리는 레녹의 대답에 오히려 감명을 받았는지 제단 위에서 꿈틀거리며 자신의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그대가 가진 살인에 대한 진심만큼은 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쩌저접!!
피로 물든 제단 위에서 불쾌한 형상이 쪼그라들더니 손가락만 한 크기의 촉수로 변했다·
=아 됐다· 아직은 형상변환 술식이 먹히는군요·
스스로 변한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제단 위에서 꿈틀거리던 촉수가 말했다·
=가까이 와서 저를 들어주세요· 저 혼자서는 그대의 어깨에 올라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뭘 하려는 거지?”
=본래 개체가 지닌 유전적인 소질이란 개체 본인이 지닌 취향이나 미의식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바·
촉수가 꿈틀거리면서 레녹에게 경례하듯 고개를 젖혔다·
=그대가 언급한 살인의 미학 역시 그 경이로운 살인의 소질과도 깊게 연관이 있을 테니· 이는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
=오늘 계약을 맺을 수 없다고 해도 멀리서나마 그대를 후원하고 그 미학을 관찰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듯하군요·
“그건··· 의외로군·”
촉수가 하는 말을 이해한 레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당장 나와 사업인지 뭔지를 계약하지 않고 도와주겠다는 말인가?”
=예· 제가 알고 지내는 장생종의 권역까지 그대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촉수가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까닥였다·
=그를 위해 제 모습을 최적화된 형태로 바꾼 것이니 잠시만 어깨를 빌려주시지요·
“····”
그러고 보니 촉수의 형태가 마치 더듬이와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애초에 레녹을 도와 길을 찾아주기 위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꾼 것이었나·
스스로를 외계의 짐승이라 부르면서 레녹의 유전적인 소질을 보존하겠다 요구하는 존재·
레녹의 모든 대답을 이상한 방식으로 곡해해 받아들이면서도 오히려 그 부분을 더욱 마음에 들어 하는 괴물·
하지만 저런 기괴한 촉수가 어째서 외겁도시의 장생종과 알고 지낼 만큼 인연이 있는 것일까·
올리비에라가 황당한 듯 물었다·
[헤드로 군벌의 뒷배를 뽑고도 이런 결과를 내다니·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구나·]
“····”
[좌우지간 그 괴상한 유물을 사용한 대가는 뽑아냈다 할 수 있겠군·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긴 했지만···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면서 제단의 촉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을 타고 꾸물꾸물 기어 올라오는 촉수의 감촉을 억지로 무시한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은 예하술주도 예상하지 못한 것일 테니 의미가 있다·”
[····]
“이 촉수가 말하는 장생종을 찾으면서 예하술주의 반응을 보도록 하지· 그럼 술주의 저의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듯하군·”
예하술주가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해도 헤드로 군벌을 타락시킨 뒷배가 지금 나타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터·
그렇다면 이 촉수가 제안한 방법 역시 예하술주의 예상을 벗어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맹주의 명을 따라 레녹을 감시하고 있는 술주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레녹이 촉수를 어깨에 올려놓은 뒤 닉스의 휘장을 해제하며 걸음을 돌려 세웠다·
그 순간 촉수가 곧바로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하 아티팩트로 주변의 감각을 차단해두셨군요· 이제 좀 기운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네가 알고 지낸다는 장생종에게 가지·”
레녹이 촉수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마력을 거두면서 물었다·
“다만 이 근방의 공간은 실시간으로 재구축되며 좌표를 바꾸고 있다· 방향을 찾을 수 있겠나?”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촉수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흐물거렸다·
=쿤다라가 숨어 있는 장막의 이면은 특수한 공간이기 때문에 방향에 얽매이지 않거든요·
“무슨 뜻이지?”
=별의 그늘을 매개로 삼아 만들어진 이면이기에 이곳은 애초에 정상적인 위치좌표를 지닌 시공간이 아닙니다·
촉수가 설명했다·
=따지자면 허수차원과 유사한 개념이라 쿤다라의 장생종 중에서도 도시 바깥에서 멀쩡하게 활동할 수 있는 장생종은 한정되어 있죠·
“그 말은····”
=스스로 권역을 구축해 독립적인 시공간을 보유할 수 있는 초월자들·
레녹의 어깨에 올라탄 촉수가 동시에 몸을 왼쪽으로 쭉 기울이기 시작했다·
=장막의 이면에서 길을 찾는 방법은 좌표가 아니라 바로 권역의 기운을 나침반으로 삼는 겁니다·
“····”
=이쪽입니다· 마침 멀지 않네요·
촉수가 레녹을 재촉하듯 어깨를 톡톡 두들긴다·
올리비에라와 시선을 마주친 레녹이 펜터렉트를 품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사아아악···!!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한 안개 속을 정처 없이 걷는다·
어깨 위에서 안테나처럼 방향을 짚어주는 촉수와 올리비에라의 기척만이 느껴질 뿐·
“예하술주의 시선이 잡히나?”
[···아직·]
올리비에라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이 촉수 놈이 말하는 ‘권역’의 기운이 먼저 느껴지는군·]
“····”
레녹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촉수가 안내하는 방향을 향해 걸을 때마다 자욱한 안개 저편에서 아주 무겁고 강대한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
후우 후우····
굉장히 거대한 무언가가 느릿하게 숨을 내쉬면서 비릿한 숨결을 내뿜는 듯하다·
안개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 속에 희미한 비린내가 섞이면서 동시에 감각을 바짝 일깨웠다·
촉수가 알고 있다는 장생종· 그것도 스스로의 권역을 구축한 8레벨의 초월자·
그의 둥지를 향해 발을 들이밀고 있음을 전신으로 실감케 하는 섬뜩한 감각·
=여깁니다·
그 순간 레녹의 어깨에 매달린 촉수가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기운을 찾기 어렵지 않은데 생각보다 거리가 좀 있었군요·
“····”
촉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레녹은 눈앞의 풍경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자욱한 안개 속에 끝을 알 수 없는 광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
철썩 철썩···!!
지면이라고는 일절 존재하지 않고 오직 끝을 모르는 바닷물만이 펼쳐진 광활한 수면·
정처 없이 몰아치는 파도가 서로 부딪히며 쪼개지는 소리를 냈다·
바닷물이 밀고 나가면서 쉴 새 없이 젖어 들어가는 수평선의 끝·
=쿤다라의 해역을 지키는 수호신·
촉수가 말했다·
=수신용왕 알로건이 머무는 심해권역입니다·
촤아악!!
밀려오던 파도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물리법칙을 거스르듯 수십 미터에 이르는 물결이 갈라지면서 바다 깊은 곳을 드러냈다·
쿠구구구!!!!
바닷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수벽이 솟구치고 그 아래로 거대한 궁궐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다·
안개가 자욱한 바닷가 수평선 끄트머리 바다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장엄한 궁궐의 형상·
쿠우웅!!!
끝을 알 수 없는 알현실 복도 양쪽에서 아가미를 단 어인(魚人)들이 부복하고 고개를 숙인다·
광대한 용궁의 끝에 짐승처럼 흉포한 인상을 지닌 장년 남성이 옥좌에 기대앉아 있었다·
쿠오오오···!!!
나른한 듯 의자에 몸을 파묻었음에도 숨길 수 없는 기품· 하나 흘러나오는 의념은 한없이 사납기만 하다·
인간보다는 짐승이나 마수에 가까운 한없이 원초적이고 야성에 가득 찬 마력·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위태롭고 흉포한 살의가 바다속을 가득 메웠다·
쿤다라의 해역을 지키는 수호신·
외겁도시를 비호하는 여덟 명의 용왕(龍王) 중 하나·
수신(水臣)의 알로건·
카르니스가 경고하고 주의하라 언급했던 심해권역의 주인이 사나운 눈길로 레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나의 심해권역에 얼굴을 비친 이가 없었는데·”
새파랗게 번뜩이는 파충류의 동공이 남자의 눈 안에서 섬찟한 살기를 흩뿌렸다·
물끄러미 옥좌 아래쪽에 내려선 레녹을 바라본 남자가 나른한 기색으로 물었다·
“오늘은 웬일로 벌레들이 다채롭게 몰려들었구나·”
[틀렸다·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로군·]
시선을 마주한 레녹이 침묵하고 올리비에라조차 혀를 차면서 말끝을 흐렸다·
[위계를 초월한 장생종이라기에 혹시나 했지만 느껴지는 의념은 가히 짐승에 가깝구나·]
“하루살이와도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벌레들이 나의 권역에는 어인 일로 찾아온 거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을 직접 드리고 합니다 알로건·
레녹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던 촉수가 솟구치면서 알로건의 눈앞에 떠올랐다·
더듬이처럼 길게 늘어진 촉수가 알로건의 눈앞에서 꿈틀거리면서 새빨간 칠망성을 띄워 올렸다·
키이잉!!
“····”
알로건이 그제서야 사나운 눈길을 촉수를 향해 돌려세웠다·
푸른 동공으로 칠망성의 광채를 불쾌한 듯 바라보던 알로건이 물었다·
“네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마법사분· 제가 눈여겨본 아주 굉장한 ‘후보’거든요·
하지만 촉수는 그런 알로건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꿈틀거리면서 대답했다·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전적인 소질이라 생각해 옆에서 잠시 일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후보라고?”
순간 레녹을 바라보는 알로건의 시선에 미묘한 냉소가 섞였다·
“귀찮은 것에게 물렸군· 어지간히 이상한 소질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구나·”
=알로건· 당신의 심해권역을 이용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쿤다라까지 도착할 수 있을 텐데요·
촉수가 물었다·
=갑작스럽게 부탁을 드리게 되어 죄송하지만 심해권역을 움직여 쿤다라로 향해주시겠습니까?
“····”
=당신의 유전정보를 후대에 남기는 일로 인해 제게 빚을 진 적이 있었죠·
입을 다문 알로건을 두고 촉수가 말했다·
=이번 부탁으로 그때의 빚을 갚는 것으로 삼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외계의 짐승· 유전적 소질의 기록·
아까부터 레녹의 유전정보에 대해 신경을 쓴다 했더니 애초에 촉수가 지닌 능력 자체가 그쪽에 편중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 능력으로 쿤다라의 장생종과도 협력할 정도였다면 촉수가 어째서 레녹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인지도 이해할 수 있다·
촉수가 레녹에게 호의를 보내는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를 통해 팔대용왕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방을 둘러싼 무수한 어인들의 군세를 돌아본 찰나·
“아니·”
알로건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겠군·”
=예?
설마 바로 거절당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촉수가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 쿤다라는 도시의 운명을 가를 아주 중대한 위업을 앞두고 있다·”
그런 촉수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옥좌에 기댄 용왕이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도시 전체가 외부의 개입에 극도로 예민해져 있어 현재 쿤다라로 향하는 모든 수단이 막혀있거늘·”
“····”
“애초에 제대로 된 시기를 골라 출입했다면 정상적으로 나의 권역을 거칠 일도 없는 바·”
굵고 새하얀 눈썹을 꿈틀거린 용왕 알로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쿤다라에 이르는 길을 모두 막아둔 지금 네놈들이 편법을 사용했음이 틀림없겠구나·”
쿠구구구···!!!
알로건이 옥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과 동시에 바닷속에 자리한 용궁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용궁을 기준으로 갈라졌던 파도가 머리 위에서부터 빠르게 닫히면서 사방을 바닷물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궁궐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바닷물 속에서 알로건의 몸이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라 회전했다·
레녹의 눈앞에서 푸른 비늘로 이루어진 거대한 무언가가 아음속의 속도로 오가면서 순식간에 사방을 장악하고·
알현실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수룡(水龍)이 레녹의 눈앞에서 새파란 눈동자를 번뜩였다·
[단명종· 장막을 ‘베어’ 이면의 시공을 어지럽힌 불순물이 네놈이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