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6화
별의 그늘(2)
“헤 헤드로 군벌의 오버마인드는··· 군체 의식을 통솔하는 지휘관 같은 조 존재인데····”
거대한 나무뿌리를 엮어 인위적으로 형성된 지하공동·
레녹은 공동 벽면에 기대 단말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통신이 잡힐듯이 잡히지 않는 단말기를 말없이 조작하는 레녹의 모습·
그 옆에서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그 금지된 의식에 지 직접 참가한 사령관들이 타 타락해 만들어진 마물이거든요····”
“····”
“펴 평소에는 ‘욕조’에서 나오는 일이 없는데··· 왜 자 장막에 눌러앉은 건지는 저도 잘····”
이어지는 침묵에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계속해· 왜 그러지?”
“아 하하····”
시귀술주가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꿴 마력사를 가리켰다·
“그 그러니까 일단 이것 좀 푸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헤드로 군벌의 장군급 개체 마물화된 항공모함을 드루이드의 숲 외곽에 떨어뜨린 뒤·
레녹은 드루이드들의 호송을 따라 근처 숲의 격리시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과격한 방식으로 교전을 종식시켜 버린 레녹 덕분에 그 여파를 드루이드 측이 수습하고 있었기 때문·
드루이드를 도와준 것 치고는 꽤나 성의없는 대우였지만 라라벨리의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인간과는 다른 성격이라 들었다·
레녹 역시 서부전선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 생각할 것이 있었기에 큰 불만 없이 격리를 받아들인 상황·
시귀술주에게 오버마인드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설명시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장막]을 점유한 헤드로 군벌과 마물들의 군체의식을 조종하는 오버마인드의 존재·
그리고 드루이드들이 그 오버마인드를 죽이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까지·
“왜 드루이드들은 서부전선까지 나와 헤드로 군벌과 싸우고 있을까·”
레녹이 단말기를 품 안에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식물도시는 대륙 끝단에 위치해 있고 서부선전과는 한참 떨어져 있지· 그 사이에 위치한 중소도시만 해도 다섯 곳이 훌쩍 넘어·”
“····”
“라라벨리 측에서 오버마인드의 존재가 위협이 된다고 느낄 이유는 적다· 그럼에도 굳이 전력을 이끌고 출정을 나온 이유라 한다면····”
시귀술주를 보면서 레녹이 물었다·
“뭔가 숨겨진 사정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헤드로 군벌 장군급 개체의 마물 조종 능력을 술식으로 추출한 시귀술주라면 이 상황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있겠지·
“제 제가 알아봐 드릴 수는 있는데····”
시귀술주가 창백한 얼굴로 헤헤 웃었다·
“이 일단 절 여기 가둔 드루이드들을 절반 정도 시귀로 만들면 술술 토해내지 않을까요···?”
“····”
“애 애초에 그쪽은 전쟁마탑에 같이 타고 있었잖아요· 여 여기 머무르고 있을 이유가····”
“라이엘과는 이야기를 끝냈다· 방금 막 전장의 영공을 이탈했다고 하더군·”
레녹이 대답했다·
“어디서 어떻게 합류할지는 결정을 끝냈다· 남은 건 서로 시간을 맞추는 것뿐인데····”
라이엘과 올리비에라가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술사이자 각자 마탑과 카르텔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경영자다·
서로 해야 할 일이 정해지면 그 과정을 어떻게든 구부려서 결과를 맞히려 할 터·
문제는 전쟁마탑이 아니라 오히려-
“···!!”
순간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의자를 걷어차고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축 늘어진 시귀술주의 목덜미를 강하게 움켜쥔다·
어둠 저편에서 섬광이 사선으로 늘어진 순간·
카아아앙!!!
레녹의 손안에 섬광이 잡히는 것과 동시에 유리처럼 부서져 흘러내린다·
“우 우아앗!!”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한 시귀술주가 버둥거리고 레녹이 들어 올린 손을 힐끗 바라보았다·
‘물리력과 술식의 혼용··· 굳이 따지자면 절삭에 가까운 쪽인가?’
마력으로 특정한 대상을 베어 가르는 절단계통의 술식·
레녹을 노린 것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레녹에게 잡혀 있던 시귀술주를 노린 일격·
어둠 속을 바라보며 레녹이 물었다·
“드루이드는 아닌 것 같은데· 누구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는 훨씬 젊으신 분이셨군요·”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맹주께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굉장히 노련한 술사분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만·”
“····”
“몰래 도와주는 후원자 역할도 재미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맡은 일이 있는지라·”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웃는 낯의 청년이 어둠 속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인사를 드리는 것을 이해해 주시길·”
“너는····”
“반갑습니다 반·”
청년이 웃었다·
“쿤다라로 가는 여정을 도와드리게 된 예하술주라고 합니다·”
***
예하술주·
맹주 본인이 직접 레녹을 돕기 위해 보낼 거라 말했던 술주의 이름·
하지만 레녹은 오래전에 판데모니엄의 회의에서 예하술주라는 이름을 들어본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마키나를 방문했던 주문연맹의 사절단 중 하나였다고 했었나·’
레녹이 요르타의 위령탑을 무너뜨린 뒤 돌아와 빅터의 신분으로 참석했던 복마전의 중간회의·
그곳에서 마이야 렌슬릿을 통해 마키나에 방문했던 주문연맹의 사절단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마이야는 예하술주를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이름을 언급하면서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었다·
그녀같은 집행자가 이름을 기억하고 주시할 정도라면 예하술주 역시 그만한 실력을 갖춘 강자일 가능성이 높겠지·
얼굴에 문신처럼 빼곡하게 새긴 고대문자·
어둠 속에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느긋하게 앉아 있는 모습·
예의 바른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나 정작 예하술주 본인에게서 특기할 만한 마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너 실체가 아니군·”
곧바로 예하술주가 본체가 아닌 환영을 여기 보냈다는 것을 깨달은 레녹이 물었다·
“허깨비의 형상으로 찾아온 주제에 내게 인사를 하겠다고 지껄인 건가?”
“확실히 대술주에 비견되는 마법사를 뵙는데 마땅한 예법은 아니었지요·”
다리를 꼬고 앉은 청년이 나른한 기색으로 묵례했다·
“하지만 숲의 드루이드들이 워낙 예민해서 제가 직접 찾아갔다가는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겁니다·”
“···”
“보아하니 드루이드들과 협력하실 예정인 듯한데 제 존재가 방해가 되면 안 될 테니까요·”
레녹은 대꾸하는 대신 시귀술주의 목덜미를 흔들었다·
만약 이 자가 정말 연맹의 술주라면 당연히 시귀술주 역시 그를 알고 있을 터·
“어 어라····”
뒤늦게 고개를 든 시귀술주가 레녹의 손에 목덜미를 잡힌 채 입을 살짝 벌렸다·
남자 역시 시귀술주를 보며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시귀술주·”
“그 그쪽이 왜 여기에····”
“그야 당신이 이번에 맡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남자가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서부전선에서 술식 하나를 가져오라 했더니 견뢰 같은 거물을 끌어들이면 안 되죠· 이번 일로 연맹 측의 얼마나 손해가 막심한지 알고 있습니까?”
“그 그건····”
시귀술주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전쟁마탑에 겨 견뢰가 타고 있을 줄 누 누가 알았는데요··· 저 저도 이런 일에 나서는 건-”
“농담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
“그렇군요· 굳이 어느 쪽의 실수인지를 가려야 한다면····”
시귀술주가 창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예하술주가 턱을 매만지며 미소지었다·
“전쟁마탑이 활동을 재개한 시점에서 그 동향을 파악하지 못한 연맹 관제사들의 실수가 아닐까요?”
“시 실수가 아니라····”
“그래서 관제사들을 전부 죽이고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
“서대륙 내곽항로 관제탑이 세워진지 20년이 넘었던가요? 슬슬 물갈이가 필요한 시기가 온 것 같아서·”
부드러운 음색에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전언에 순간 시귀술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하술주의 말에 경악했다기보다는 왜 굳이 그렇게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한 반응·
하지만 레녹은 그 말 한마디로 예하술주가 꽤나 비틀려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연맹의 술주답군· 베는 것 자체에 홀려 있는 쪽인가?’
절단계열의 술사의 경우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말 그대로 절단하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
습득한 술식을 파고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절단의 심상 자체가 인간이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
절단계 술식은 심상이나 의념 자체가 지극히 단순하여 관련 계통의 술사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치거나 깊게 홀리게 된다·
마치 이름난 검사가 검의 마성에 홀려서 피에 미친 혈귀가 되는 것처럼·
절단계통의 술사들이 앓고 있는 고충으로 잘 알려진 정보라고 해야 할까·
“맹주께 받은 전언은 쿤다라로 향하는 여정에 협조하는 것이라 당장 제가 나설 만한 일은 없을 듯합니다만·”
예하술주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한 가지 조언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잠시 시간을 냈습니다·”
“조언?”
“라라벨리의 엘더 드루이드 아젤란은 뛰어난 술사이나 맹목적인 면모가 있는 지휘관이지요·”
“····”
“그와 협력할 생각이라면 그가 노리고 있는 오버마인드에 대해서는 언급을 조심해야 할 겁니다·”
예하술주가 어둠 속에서 고개를 젖히는 것과 동시에 그의 기척이 급격하게 흐려진다·
마치 스스로의 기척을 한없이 잘게 썰어서 흐릿하게 만드는 듯한 기이한 감각·
“그것은 장막을 오염시키기 위해 서부전선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거든요·”
웃는 낯으로 돌아선 예하술주의 모습이 마지막 말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벌컥!!
그 순간 나무 뿌리를 엮어 만든 문이 열리면서 드루이드들이 들이닥쳤다·
머리에 사슴의 뿔을 단 노년 남성이 시설 안쪽 공동을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했다·
머쓱하게 엎드려 있는 시귀술주와 그 옆에 말없이 서 있는 레녹의 모습·
“엘더 드루이드께서 너를 찾는다·”
침묵하던 남성이 이내 입을 열었다·
“따라오도록·”
***
레녹은 울창한 숲 한복판을 조용히 걷고 있었다·
서대륙 내곽항로 아래· 드루이드와 헤드로 군벌이 싸우던 거대한 수림·
앞서 걷는 드루이드를 따라 시선을 돌린 레녹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자연술식··· 확실히 다른 계통의 술식과는 궤가 다른 힘이군·’
드루이드의 자연술식은 술식의 작동과 변화가 느린 대신 그 흔적이나 전조를 일절 남기지 않는 힘·
레녹 역시 화신체를 다루기 위해 자연술식의 요령을 빌려서 마력을 안정시킨 적이 있지만
라라벨리의 드루이드들이 사용하는 자연술식은 그런 요령을 흉내 내는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어 있었다·
‘숲 전체가 원래 이곳에 존재했던 환경 같아· 경지에 이르면 이 정도까지 인위적인 느낌을 지워 버릴 수 있는 건가·’
자연술식으로 만들어진 숲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주변의 초목이나 수풀에서 어떠한 위화감을 느낄 수가 없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스러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인공물·
드루이드의 술식이 그 두 가지 경계선을 자유로이 드나들고 있음을 깨달은 찰나·
저 멀리서 숲의 중심에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라라락···!!
잎사귀가 바람에 흩날려 부딪히는 소리·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
숲의 중심구역을 자치한 거대한 나무뿌리 아래로 잎사귀와 가지를 엮어 만든 구조물이 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십수 명이 넘는 드루이드들이 분주히 드나드는 거대한 구조물의 모습·
저것이 여기 모인 드루이드들 전체를 통솔하는 사령부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인가·
그런 거목의 뿌리를 지키듯이 앞발을 밴 채로 잠든 거대한 사슴의 모습·
희끄무레한 빛과 영롱한 기척을 흘리는 사슴을 바라보던 레녹이 물었다·
“정령이군· 드루이드 중에서 계약한 술사가 있는 건가?”
“영계가 아니라 라라벨리에서 살아가는 자연정령이다·”
레녹의 말에 힐끗 시선을 돌린 드루이드가 말했다·
“계약이 아니라 공존의 형태로 숲을 지켜주는 역할을 맡고 있지·”
“····”
“이쪽이다·”
더 이상 질문에 답할 생각이 없는 듯 드루이드가 거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팡이를 짚고 있던 레녹이 힐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의 곳곳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레녹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
자연술식의 특성상 처음에 감지하기 어려웠을 뿐 적응이 끝나면 탐지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곰과 사슴· 양과 식물··· 드루이드들 대부분이 인간이 아니었군·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가·’
머리 사슴의 뿔을 달고 있는 노년 남성· 곰의 형상으로 변신한 채 숨을 몰아쉬는 거인·
양의 머리를 한 궁사· 머리카락 대신 식물 줄기를 땋아 묶은 키가 큰 여성·
그 밖에 자연과 동화되거나 인간조차 아닌 존재들이 나무에 올라타 레녹을 주시하고 있다·
레녹을 적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호의를 보내는 것도 아닌 경계심 어린 반응·
마물화 된 함선을 지상에 처박아버린 마법사를 상대로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후욱···!!
그 순간 숲의 나무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는 듯한 환상이 일었다·
실제로 숲이 갈라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질 만큼 거대한 기척이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다그닥·
“····”
숲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발굽소리에 레녹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는 굵직한 근육· 잎사귀를 엮어 만든 듯한 단단한 투구·
길게 묶어 내린 녹색 머리칼과 두꺼운 팔뚝 아래로 쥐어진 녹창(綠槍)의 형상·
“····”
사슴과 인간의 형상을 반씩 섞어놓은 거대한 수인이 무심한 눈길로 레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지간한 인간의 두배 가까운 압도적인 체격· 높이로만 보아도 3m를 가뿐하게 뛰어넘는 크기다·
단순히 체격만 큰 것이 아니라 그 기척과 마력마저도 태산처럼 무겁고 둔중하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주변을 묵직하게 찍어누르는 강렬한 압박감·
“헤에····”
수인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시귀술주마저도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흘릴 정도·
레녹을 안내하던 드루이드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비켜섰다·
인사를 묵살한 수인이 자연스럽게 발굽을 내디디며 레녹의 앞에 섰다·
예하술주의 말대로라면 이 수인이 드루이드들의 지휘관 엘더 드루이드 아젤란이겠지·
레녹이 아젤란을 올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쪽이 아까 내게 말을 걸었던 존재였군· 엘더 드루이드라고 했나?”
침묵하는 아젤란을 두고 레녹이 물었다·
“식물도시의 일원들은 대륙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아젤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잎사귀를 엮어 만든 투구 사이로 말없이 레녹을 내려다보기만 했을 뿐·
대답하지 않는 수인을 두고 레녹이 지팡이에 몸을 기댔다·
“장막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그쪽에서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었지·”
“····”
“설명해 봐· 뭘 원하는 거지?”
서대륙의 현황에 대해서라면 일선에서 싸우고 있던 드루이드가 가장 정확한 정보를 지니고 있을 터·
인간과 동떨어진 드루이드들의 반응이 어색하긴 하지만 아직 이들과는 거래할 여지가 있다·
“하늘에서 네가 한 일을 보았다·”
레녹과 시선이 마주친 아젤란이 말했다·
낮게 가라앉은 저음· 깊게 울리면서도 청명한 종과 같은 음색·
“마물을 잡아 죽이는 일에 굉장히 능숙해 보이더군·”
“····”
“네 사냥실력을 빌리고 싶다·”
“사냥실력이라·”
어떻게 보면 실로 드루이드다운 단어선택에 픽 웃은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장군급 개체를 죽이고 지상의 전장까지 여파를 퍼트린 덕분에 군벌의 전력에 공백이 생겼지·”
아젤란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부전선 일각은 현재 스스로를 예하술주라고 자칭하는 존재가 눌러앉아서 길목을 내어주지 않고 있지·”
“····”
“모함 1척과 전차부대 일선이 궤멸당한 지금이 기회다· 시간이 끌릴수록 오버마인드가 손실된 전력을 생산해 보충할 테니·”
“네가 말했던 [장막]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활용해서 말인가?”
“지름길이 아니다·”
손에 쥐고 있던 녹창을 들어 올린 아젤란이 답했다·
“우리 드루이드에게 있어 숲이 위치한 곳은 어디든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없으니·”
콰직!!
녹창을 땅에 꽂는 것과 동시에 창날이 갈라지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가 튀어나왔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나뭇가지가 아젤란이 서 있는 땅을 경계선으로 삼아 숲을 가로질렀다·
“모목(母木)의 부름을 기원의 종소리로 삼아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길로 향할 뿐·”
“이건···”
사아아악···!!
광활한 숲 한복판에서 바람이 불어닥친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싱그러운 풀의 내음이 비릿하게 화했다·
아젤란이 서 있는 숲을 경계선으로 삼은 것처럼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앗···!!!
아젤란의 등 뒤에 펼쳐진 숲의 색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간다·
마물의 기운에 오염된 것처럼 검붉은 색채로 오염된 수풀과 잎사귀· 말라비틀어진 초목·
레녹이 서 있는 숲에서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한 또 다른 숲을 마주하는 듯한 위화감·
그것을 깨달은 레녹이 아젤란을 지나쳐 붉게 물든 오염된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파앗!!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자 시야가 탁 트이면서 서부전선의 하늘 위로 펼쳐진 [장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투명한 아지랑이와 함께 흔들리는 거대한 장막과 그 아래 헤아릴 수 없이 바글거리는 마물의 군세·
장막의 균열에 달라붙은 채 마물들을 토해내는 오버마인드의 모습·
마안의 시선공유를 사용해서 엿보았던 장소에 도착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레녹이 중얼거렸다·
“···놀랍군· 이것이 자연술식을 사용한 숲의 이동방식인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장을 뛰어넘어 [장막]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장소에 도착해 있다·
[장막] 근처에 숲이 있기 때문이라 해도 드루이드가 아닌 레녹 같은 외부인조차 함께 이동시킬 수 있다니·
자연술식의 잠재력이 그만큼 뛰어난 것일까 아니면 드루이드가 그만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현재 오버마인드는 장막 아래 깊게 뿌리를 박고 움직이지 않고 있다·”
레녹이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그 뒤에서 걸어 나온 아젤란이 대답했다·
“장막에 숨겨진 아주 강력한 기운을 흡수해 양분으로 삼기 위해서지·”
“기운을 흡수해 양분으로 삼는다고?”
“돌려 말할 필요는 없겠지·”
아젤린이 말했다·
“우리가 되찾으려는 것은 바로 저 오버마인드가 양분으로 삼고 있는 기운 그 자체다·”
“····”
“저것은 라라벨리에서 가장 귀중한 비보이자 절대 외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재산이지·”
시종일관 무거웠던 아젤란의 저음이 순간 차갑게 가라앉는 듯 했다·
“저것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숲 전체를 희생해서라도 너를 장막 저편까지 데려다주겠다·”
“···그렇군·”
아젤란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지만 레녹은 저 멀리 보이는 오버마인드를 마주한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장막에 달라붙은 오버마인드에게 흘러나오는 기운이 레녹에게도 낯이 익었기 때문·
레녹의 초월적인 감응력을 통해서 드루이드가 말하지 않은 사실을 인지하고 깨닫는다·
오버마인드 본인조차 필사적으로 숨기고 감추려는 ‘기운’의 정체·
‘모목의 부름 기원의 종소리····’
저 멀리 오버마인드를 바라보는 레녹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티야가 언급했던 세계수의 잎사귀· 이곳에 숨겨져 있던 건가·’
아르스노바의 서기 주티야 하이베르크에게서 전해 들은 두 가지 공물의 정보가 담겨있던 석판·
석판에 담겨있던 것과 동일한 기운이 오버마인드의 머리에서 희미하게 퍼져 나오고 있다·
아젤란이 레녹을 이렇게 손쉽게 장막 앞까지 데려다줄 수 있었던 이유·
라라벨리의 드루이드들이 전력을 다해 오버마인드를 죽이려 움직이는 이유·
오버마인드가 양분으로 삼아 빨아먹고 있던 것은 바로 세계수의 잎사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떻지 마법사?”
생각에 잠긴 레녹을 두고 아젤란이 물었다·
“오염된 장막을 정화하는 일에 협력하겠나?”
“····”
레녹은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말없이 고개를 기울였다·
장막을 비틀어 쿤다라로 향하기 위해서는 오버마인드가 점유한 장막을 청소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버마인드가 장막에 기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된 상황·
어째서 드루이드가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인지 왜 오버마인드가 세계수의 잎사귀를 품고 있는 건지·
갈수록 미혹이 늘어가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품 안에서 작은 약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약병 안에서 회오리치는 신비롭고도 영롱한 황금빛의 액체·
아젤란 역시 그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위화감을 느낀 듯했다·
“그건····”
“이런 방식을 원한 건 아니지만 필요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
엘릭서의 희석액을 꺼내든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방식대로 해도 괜찮다면 지금부터 바로 시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