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화
서대륙 내곽항로(2)
늦은 밤·
구름 속을 비행하는 전쟁마탑의 거체가 달빛에 잠기는 자정·
레녹은 작은 등잔을 쥔 채로 널찍한 귀빈실에 서 있었다·
은은한 불빛이 방 안을 비추지만 그보다 더한 찬연한 광채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얼굴을 가리는 베일을 내려놓은 채 레녹을 등지고 돌아선 올리비에라의 모습·
레녹이 피곤한 안색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하루 종일 토르번의 귀빈 대접을 받다가 이제 와서 내게 시킬 심부름이 생각나기라도 한 건가?”
[그런 사소한 이유로 네놈을 부려먹을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런 시간을 고르지도 않았을 게다·]
올리비에라가 싸늘한 웃음기를 머금은 전성으로 대답했다·
[한 가지··· 네놈에게 미리 말해두어야 할 사안이 있으니·]
“뭐지?”
[네놈도 알고 있듯이 나는 칠채보의 마안을 다루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다·]
레녹의 반문에 올리비에라가 레녹에게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마안의 공능을 끌어올리고 반동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나 역시 내가 지닌 많은 것들을 내주어야 했지·]
“····”
연구실에 칩거하던 올리비에라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던 것은 기억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여겼는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던 것일까·
레녹도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일이라 생각해 굳이 캐묻는 일 없이 묵인했던 기억·
[나는 지금부터 아나테마의 유해를 사용해 마안에 걸어두었던 리미터를 조정할 생각이다·]
올리비에라가 시선을 돌리자 베일에 가려지지 않은 그녀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이는 본디 권역에 묶어 억눌렀던 마안의 공능을 나의 근원심상과 공존시켜 출력을 끌어올리는 과정일지니·]
“칠채보의 마안이 지닌 힘을 끌어올리기 위해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었군·”
레녹이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지금에서야 조정한다는 건 발칸에서 떨어진 뒤에야 마안의 출력을 조정하는 일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내 권역의 힘을 빌려 마안의 반동을 억눌렀기에 반대로 권역에서 멀리 떨어진 뒤에야 조정을 시도할 수 있다·]
올리비에라가 답했다·
[이는 네놈이 원하는 대로 쿤다라의 장막을 비틀기 위한 준비과정··· 이번 일에 나를 끌어들인 이유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
칠채보의 마안은 올리비에라가 손에 넣은 모든 술식의 정수를 담은 총체·
각자 다른 일곱 가지 공능을 두 눈에 담은 것은 물론이고 그 눈에 비친 인과를 강제로 관측해 ‘고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8레벨에 도달한 광요마법을 한번 버려가며 위계의 하락까지 감수하고 그녀가 손에 넣은 새로운 가능성·
그 힘이 쿤다라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해 올리비에라에게 도움을 요청했음을 그녀는 레녹에게 상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군·”
레녹이 팔짱을 끼면서 반문했다·
“그래서 조정의식이 끝날 때까지 그쪽을 호위하면 되는 건가?”
[반대다· 조정이 끝날 때까지 내 앞에 어떠한 지성체도 얼씬거리지 않게 하도록·]
올리비에라가 대꾸했다·
[마안의 조정이란 즉 마안이 비추는 공간을 아우르는 작업이니· 이변이 발생한다면 이 비행체까지 휘말릴 수 있음이야·]
“····”
외부의 개입에서 올리비에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서 전쟁마탑을 지키라는 의미였나·
어떻게 보면 실로 올리비에라답다고 할 수 있는 요구·
하지만 마안의 출력을 끌어올리는데 필요한 일이라면 레녹 역시 협조할 필요가 있다·
올리비에라에게서 조정에 필요한 시간을 대략적으로 전해 들은 레녹이 곧바로 귀빈실을 나섰다·
내일부터 라이엘에게 귀빈실의 출입을 통제해달라 부탁하고 레녹이 그 앞을 지키고 있으면 충분하겠지·
마지막으로 잠들기 전에 처리하고 싶은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불이 꺼진 탑의 층계를 걸어 전쟁마탑 지하 최심부 동력실에 도착·
천뢰서고의 문을 열어젖힌 레녹이 등잔을 내려놓고 품 안에서 마도서를 꺼내 들었다·
“전공명도문· 뇌계마선도· 일리다천 진문··· 모두 이쯤에 꽂혀 있었던가?”
토르번 마탑주가 레녹에게 이것저것 쥐여주었던 천뢰서고의 마도서들·
탑주가 선물해 준 마도서들은 모두 읽고 숙지했으니 굳이 원본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낙뢰연위서는 라자르트에게 돌려주었으니 남은 마도서들은 모두 서고에 반납하면 되겠지·
“일인공진뢰· 육방선뢰문· 괴천마벽서····”
책장을 쭉 돌아보면서 흥미로운 제목을 지닌 마도서나 연공법을 골라든다·
생소한 제목도 많았지만 어둠의 서고에서 비슷한 일을 해본 덕분에 필요한 책을 고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토르번이 예전에 추천해 준 것처럼 탑의 계보를 따르지 않은 외도 마법사들이 남긴 마도서·
그중에서도 거의 흑마법에 가까울 만큼 반동이나 부작용이 심한 전격마법이 담긴 책들·
서고 한쪽에 존재하는 책상에 앉은 레녹이 집중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작은 등불에 비치는 레녹의 얼굴은 전에 비할 바 없이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페널티의 강화· 육체를 재료로 삼은 금기병장··· 단순히 이변으로 치부하고 넘길 일은 아니야·’
탑주가 지켜보고 있었기에 왼팔을 봉인해 능력을 잠가버리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지만·
레녹은 자신의 왼팔에 일어난 일이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육체를 선뢰지체로 바꾸려고 한 순간 페널티의 힘이 육신 바깥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
온갖 술식과 마법을 연구하고 수련해 온 레녹조차도 생전 처음 보는 페널티 자체의 물질화·
레녹의 초월적인 재능과 직관의 기반이자 구속이기도 한 페널티의 힘이다·
레녹 자신에게 있어 얼마나 치명적이고 위험한 비밀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바·
‘내가 가진 소질이 내 육신과 완전히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육체에 손을 댐으로써 페널티가 강해졌다는 결과 그 자체·
레녹의 초월적인 마력조작이나 마나감응력은 레녹의 육체와는 별개의 재능이지만
일정한 위계를 넘어선 초인의 경우 육체와 정신 심상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육신에 손을 댈 경우 정신이나 심상이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
하지만 레녹이 지닌 페널티 자체가 직접 육체를 덮어쓰고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페널티에 직접 손을 댈 수는 없다면 선뢰지체와 전격마법에 대한 이해도를 지금보다 더욱 높여야 해·’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신중한 표정으로 서적을 넘겼다·
‘우선 뇌신전에 대한 탑의 연구기록을 살펴보고 필요한 자료들을 찾아나가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페널티의 힘이 왼팔에 강하게 발현된 것 자체가 레녹에게 있어 마냥 부정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껏 막연하게 두려워했던 레녹의 페널티를 좀 더 명확한 형태로 조사하고 연구해 볼 수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외부의 술식이나 도움이 아니라 레녹 자신이 직접 페널티의 작동 원리를 연구해서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 자체가 레녹 자신이 대답에 이르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레녹은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발칸의 시립도서관에 앉아 쫓기듯이 방법을 찾던 그날처럼·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마도서의 페이지를 넘기던 레녹의 손이 우뚝 멈췄다·
“할 말이 있다면 직접 와서 이야기하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마도서를 바라보던 레녹이 말했다·
“아니면 내가 서고를 나갈 때까지 그렇게 보고 있을 생각인가?”
“····”
어둠이 내려앉은 적막한 서고의 책장 사이에 푸른 가면을 쓴 청년이 서 있었다·
차갑다 못해 싸늘하게 가라앉은 기척· 탑 내부에서도 유독 이질적인 분위기를 지닌 마법사·
8레벨에 오른 극위마법사이자 레녹과 끝내 직접 싸우지는 않았던 강자들 중 하나·
반대로 레녹이 뇌신전의 성역에 출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존재이기도 하다·
서대륙으로 떠나는 도중에도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천뢰서고에서 레녹의 앞에 나타나 있었던 것·
“탑의 고위마법사들 대부분은 엔진부 출력을 보강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화륵!!
마도서를 덮고 등불을 밝힌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일부러 이런 시간을 골라 나를 만나러 온 건가?”
“탑주님께서····”
푸른 가면 너머에서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신 이유를 알겠군·”
“····”
“이 서고에 있는 마도서들은 대부분 네 기준에 찰만한 지식이 아닐 텐데·”
가면 너머로 남자의 시선이 서고의 마도서들을 향하는 듯했다·
“그만큼 축복받은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배움을 소홀히 하지 않는 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앉아·”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잠깐 정도는 시간을 내주지·”
“····”
남자는 그 말에 침묵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레녹이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레녹과 마주 보는 대신 의자를 살짝 틀어서 기대앉은 위태로운 모습·
의자에 등을 기댄 레녹이 대뜸 물었다·
“인간이 아니지?”
“····”
“억지로 흉내를 내려고 하지만 마력흐름이나 패턴부터 궤가 달라· 애초에 제대로 숨을 쉬지도 않는군·”
대답하지 않는 남자를 두고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폐를 통해 호흡하지 않는 건 비인간의 특징 중 하나지· 그 가면이 호흡기의 역할을 대신해 주고 있는 건가?”
“감이 굉장히 좋군· 저번에도 느꼈지만····”
남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평범한 추론으로는 알 수 없는 사실을 직관과 영감에 기대 맞추고 있어·”
“····”
“그건 네 영성과 감응력 자체가 여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말한 남자가 천천히 자신의 가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장막 뒤에서는 말을 세심하게 고르는 편이 좋을 거다·”
“···너·”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오래 산 것들은 필멸자의 조언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가면을 벗은 남자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표정했다·
이질적인 빛을 내뿜는 푸른 머리칼을 제외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과 거의 똑같은 외견·
하지만 레녹은 남자의 귀 뒤에 위치한 작은 아가미의 형상을 놓치지 않았다·
“적어도 네가 지금 향하려는 외겁도시의 장생종들은 그러하지·”
“····”
물끄러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레녹이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이런 시간을 골랐다 했더니··· 쿤다라의 장생종 출신이었나?”
“수신(水臣)의 카르니스· 저주받은 해룡의 후예·”
스스로를 카르니스라 칭한 남자가 대꾸했다·
“그 외겁의 도시에서 도망쳐 나온 변절자다·”
“그만한 태생을 지녔다면 마법에 소질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군·”
그제서야 카르니스의 의중을 이해한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왜 이제 와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
카르니스가 레녹의 목적지를 눈치채고 정체를 드러냈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쿤다라를 떠난 장생종이기에 레녹이 장막을 비틀어 쿤다라로 향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겠지·
애초에 레녹이 쿤다라로 향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카르니스가 이 시점에 레녹에게 접근해 이 사실을 털어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
하지만 카르니스는 레녹의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침묵했다·
마치 지금 레녹에게 이 사실을 말해도 괜찮을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
위계를 초월한 마법사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번민하는 태도에 레녹이 마도서를 만지작거린 찰나·
“내 부친은 수신족의 수장으로 쿤다라의 최상위 팔대용왕 중 한 명이다·”
카르니스가 말했다·
“그리고 쿤다라의 외방 해역에 눌러앉아 억겁의 바다를 지키는 수호신 중 하나지·”
“····”
“네가 만약 장막을 들추고 그 도시로 향하려 한다면-”
레녹을 바라보는 카르니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틀림없이 그자를 만나게 될 거다· 그가 직접 네 출입에 대해 추궁하겠지·”
“····”
말없이 고개를 숙인 레녹이 입을 열었다·
“꼭 그와 싸워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리는군·”
“네가 얼마나 강한 마법사인지 안다· 너는 내가 본 술사 중에서도 극단적으로 싸움에 능한 이단이지·”
카르니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 부친은 본신의 심해권역 안에서는 사실상 적수가 없는 초월자다· 사실상 쿤다라 해역 전체의 해류를 지배하는 존재이기도 하지·”
“····”
“탑주님의 일을 생각해 조언하지· 목숨이 아깝다면 절대 바다 위에서는 싸우지 마라· 어지간하면 그에게 말대꾸도 하지 말도록·”
입을 다문 레녹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선 카르니스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자식이라도 반항하는 상대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자였으니까·”
“···조언 고맙군·”
바로 옆에서 겪어본 듯한 생생한 조언이 누구의 경험담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쿤다라로 향하려는 레녹을 두고 굳이 알고 있는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장생종답지 않게 그런 부분에서는 꽤 융퉁성이 있어 보인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카르니스에게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연 순간·
쿠우우우우웅-!!!!
느닷없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전쟁마탑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
장장 수백 미터를 가뿐하게 뛰어넘는 공중요새가 요동칠 정도의 충격·
카르니스와 시선을 교환한 레녹이 점멸을 사용해 천뢰서고를 뛰쳐나갔다·
파앗!!
순식간에 갑판 위에 내려앉은 레녹이 사방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이건····”
밤하늘 상공을 비행하는 토르번 전쟁마탑의 거체·
족히 수십 대에 달하는 전투기가 마탑을 포위한 채 낮게 비행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초음속의 속도로 비행하면서 거친 소닉붐을 터트리는 전투기들의 형상·
하지만 레녹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전투기 표면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불쾌한 혈관이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전투기 날개와 동체 사이에 달라붙어 꿀렁이는 핏줄의 형상·
묵직한 굉음을 타고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괴이한 웃음소리·
[크헤 헤헤헷···!!]
[헤헤헤헥!!!!]
콰과과과!!!
반쯤 열린 전투기의 콕핏 안에 이미 파일럿은 존재하지 않는다·
눈알과 살덩이가 뒤섞인 괴물이 좌석을 꽉 메운 채 히죽히죽 웃으면서 핏발선 눈을 번들거리고 있을 뿐·
인간이 타고 있는 전쟁병기째로 타락해 마물이 되어버린 섬뜩한 모습·
[토르번 전쟁마탑 전원 전투준비· 헤드로 군벌의 전투비행대대가 습격을 감행해 왔다·]
갑판의 스피커를 통해 지젤의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느껴지는 기척은 40체 이상· 편대를 통제하는 건-]
전투기들이 편제를 이루고 대형을 갖추면서 구름을 밀어내는 것과 동시에
구름 위에서 토르번의 전쟁마탑만큼 거대한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쿠구구구!!!
“저건····”
[장군급 개체···!!]
바다 위에나 존재해야 할 법한 항공모함이 공중에 떠오른 채 지상을 오시하고 있다·
선체 표면에는 어지간한 인간보다 굵직한 핏줄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채 꿈틀대고 있었다·
모함 전체가 마물화되어서 공중을 비행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형상·
전투기 수십 대를 동시에 수용하고도 남을법한 압도적인 크기·
헤드로 군벌의 장군급 개체·
그 정체는 바로 전쟁마탑과 비견될만큼 거대한 규모와 시설을 갖춘 공중항공모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 * *
고오오오!!!
밤하늘 위에 떠오른 핏물과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거대한 항공모함의 형상·
기괴한 눈알을 덕지덕지 달고 전쟁마탑을 향해 부라리면서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
항공모함의 선체 외벽이 일제히 개방되면서 핏물이 뒤섞인 마력광을 방대하게 흩뿌렸다·
투투투투퉁!!!
모함의 선체 아래쪽으로 폭발하듯 터져 나온 마력포화가 수백 발씩 중첩되며 지상을 향해 쏟아져 내린다·
토르번 전쟁마탑이 강렬한 뇌광에 휩싸이더니 수천발에 달하는 주뢰포(珠雷砲)를 난사·
수백 미터 상공에서 비행하는 두 전함이 거의 동시에 수천 발에 달하는 포화를 주고받았다·
퍼버버버버벙!!!!
“큭···!!”
눈앞이 새하얗게 일그러질 만큼 아득한 광량·
밤하늘이 낮처럼 밝게 개이면서 지옥같은 열기가 공간을 짓이긴다·
전쟁마탑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탑의 워메이지들이 거칠게 소리치며 갑판 위를 질주했다·
“습격이다!!”
“주포 장전해· 뇌격공성포를 가동한다!!”
“결계진 훼손율 58% 이상···!!”
서대륙으로 향하는 토르번 전쟁마탑을 습격해온 헤드로 군벌의 전투비행대대·
한때는 중앙의 대형 군사조직이었으나 군벌 전체가 금지된 의식에 참여해 마물로서 타락해 버린 존재·
이제는 중앙전선 전역에서 공적으로 지정되어 토벌 대상이 되어버린 괴물들이다·
‘파일럿과 전투기가 함께 통째로 마물화되어 버렸군·’
사방에서 거칠게 비행하는 전투기들을 레녹이 빠르게 살폈다·
‘첫 번째 관문에서 본 전차형 마물보다 훨씬 강하다· 군벌 안에서도 이만한 힘의 격차가 존재하는 건가?’
첫 번째 관문에서 접합술주를 죽인 직후 발생했던 혼전·
중앙전선의 온갖 세력이 난입한 전장에서 헤드로 군벌의 마물도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 레녹이 본 전차와 융합된 마물들은 이 정도로 섬뜩한 기척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쩌어업!!
전투기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날개를 뒤덮은 핏줄이 마구 꿈틀거린다·
동시에 전투기 날개 아래 장착된 미사일이 사출· 엄청난 속도로 전쟁마탑을 향해 내리찍혔다·
콰과과광!!!
전투기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출하는 미사일도 핏줄과 눈알이 달라붙어 마물화가 끝난 상황·
미사일이 탑의 외곽 결계에 직격하는 순간 핏물을 흩뿌리면서 폭발을 일으켰다·
쿠우우우웅-!!
헤드로 군벌의 장군급 개체 마물화된 항공모함과 포격전을 벌이는 탑의 허를 찌르는 폭격·
충격을 이기지 못한 전쟁마탑의 거체가 크게 흔들리면서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넘어지지 마!! 주변의 물건을 붙잡아라!”
“마력을 끌어올려 폭격에 대비해!!”
“결계가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이쪽에서 먼저 나서야 한다!!”
갑판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워메이지들이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전쟁마탑이 폭격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탑을 보호하는 결계가 불안정하다는 증거·
49구역에서 레녹과의 전투로 반파된 마탑이 아직 완전히 수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사방에서 떨어지는 미사일의 요격준비를 시작한 마법사들을 보며 레녹이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이미 이 전쟁마탑에서 깨어있는 기척은 전부 확인해 둔 상황·
벌컥!!
“견뢰·”
지휘통제실로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레이더를 주시하던 라이엘이 시선을 돌렸다·
습격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그녀 역시도 갑판 위로 올라와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것일까·
곧바로 라이엘이 보고 있던 레이더 쪽으로 다가온 레녹이 물었다·
“헤드로 군벌 측에서 습격을 시도했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현재 탑의 주전력이 되는 고위 마법사들은 엔진부 출력을 보강하기 위해 마력을 보급하고 있습니다·”
라이엘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해당 고도에서 비행을 지속하는 이상 교전에 임할수록 이쪽의 손해· 최대한 빠르게 전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전장이라고?”
“지상을 보세요· 헤드로 군벌이 습격을 감행해 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라이엘이 그렇게 말하며 레이더 옆에 위치한 모니터를 가리켰다·
탑 하층부에 설치된 카메라가 지상을 비추자 그 아래쪽으로 우거진 숲이 보였다·
파스스스스!!!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면서 지상을 뒤덮은 숲과 질주하는 마물화된 전차부대의 형상·
라이엘이 그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라라벨리의 드루이드들과 헤드로 군벌이 교전하고 있습니다· 저희로서는 그 전장의 영공에 부득이하게 끼어든 셈이지요·”
“····”
“드루이드의 자연술식으로 이곳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아예 감추고 있던 듯 한데 운이 나빴군요·”
쿠과과광!!!
라이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탑이 크게 흔들리면서 요동친다·
헤드로 군벌의 마물들이 쏟아붓는 폭격이 탑의 결계를 부수고 갑판 위로 내리찍히기 시작한 것·
“저희가 비행을 포기하고 지상에 착륙하기를 원하고 있어요·”
하지만 라이엘은 그런 충격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헤드로 군벌 측에도 상대의 행동을 유도할 만큼 지성이 남은 개체가 있는 모양입니다·”
항공모함 전체가 마물화되어 만들어진 장군급 개체가 쏟아붓는 포격전·
전쟁마탑이 받아내기 위해서는 탑의 고위마법사들이 부족한 엔진의 출력을 보조해야만 한다·
비행을 포기하고 착륙하면 고위마법사들이 나설 수 있겠지만 지상에는 드루이드와 헤드로 군벌이 교전에 임하고 있는 상황·
이 시점에서 전장 한복판에 착륙을 시도했다가는 양쪽 모두에게 표적이 되는 일을 피할 수 없겠지·
전장에서 다른 세력과 문제가 생긴다면 외겁도시로 향하는 일정이 며칠 이상 뒤로 밀려도 이상하지 않다·
“비행고도를 유지하면서 속도를 높이는 일에 집중해라·”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코트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몸을 돌려세웠다·
“지상에 착륙하는 일 없이 전장을 지나칠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모함의 포격을 직접 받아내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대꾸했다·
“저 장군급 개체라는 마물을 죽여버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