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0화
서대륙 내곽항로(1)
쿠구구구···!!!
메마른 초원 위로 드리운 새하얀 구름 속에서 벼락이 번뜩인다·
구름을 짓뭉개며 나타난 전쟁마탑의 거체가 묵직한 굉음과 함께 하늘을 가로질렀다·
하얀 구름을 발판 삼아 유영하면서 창공 아래 훤히 드러낸 전쟁마탑의 상층부 갑판·
우현 갑판 위에 세워진 간이 훈련장에서 레녹과 한 청년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
“후우!!”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레녹과 긴장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나운 인상의 청년·
각자 손에 날카롭게 회전하는 뇌전을 포갠 채 천천히 서로를 향해 들어 올린다·
한 손을 들어 올린 레녹과 양손을 겹쳐서 내민 청년의 마력이 동시에 회전하고·
콰직!
두 사람이 손에 쥔 벼락이 충돌하는 순간 청년의 벼락이 사정없이 꺾여 짓뭉개졌다·
단단한 금속에 스티로폼이 눌려 부서지는 듯한 일방적인 분쇄·
그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한 감각에 청년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
하지만 청년은 평정을 잃지 않고 곧바로 새로운 뇌전을 뽑아 다시금 레녹과 맞댔다·
허공에서 천천히 뇌전을 충돌해 깎아내면서 점차 횟수와 속도를 높이는 모습·
속도가 빨라진다·
우우우웅···!!
두 마법사의 손에 들린 벼락이 거칠게 회전할 때마다 허공을 할퀴는 궤적이 새파란 섬광이 되고·
이윽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속하면서 사방에 역풍을 더했다·
콰아아앙!!
“웃···!!”
레녹과 청년의 대치를 지켜보던 마법사들조차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릴 만큼 강한 광량·
하지만 레녹은 자신을 향해 거칠게 휘둘러지는 벼락을 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
“상대를 몰아붙이는 일에만 의식이 가 있어·”
콰직!!
맨손으로 청년의 벼락을 쥐어 부숴버린 레녹이 그대로 자신이 쥔 벼락을 휘둘렀다·
전격이 번뜩였다 느낀 순간 이미 청년의 몸은 저 멀리 훈련장 뒤쪽에 처박혀 있었다·
쿠우웅!!
뒤늦게 울려 퍼지는 둔중한 굉음·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청년이 힘겹게 기침을 토해냈다·
“우웩···!!!”
“라자르트 님!!”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워내는 청년 라자르트의 모습에 다른 마법사들이 놀라 이름을 불렀지만·
레녹은 그를 무시하고 라자르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연초를 꺼내 들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채로 연초를 문 레녹이 말했다·
“출력은 나쁘지 않지만 공방의 균형을 아예 조절하지 못하는군·”
“····”
“자기가 만든 흐름에 취하면 어디를 어떻게 찔릴지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파직!
타오르는 뇌전을 연초 끝에 갖다 대어 불을 붙인 레녹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덤빈 패기는 높게 사지· 다음·”
“다음은 제가 하겠습니다!”
“다브리 순서 지켜! 이번에는 내 차례야·”
“어허 라자르트 님도 새치기를 했으니 당연히 위계 순으로 가야지?”
레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앞다투어 순서를 정하기 시작하는 마법사들의 모습·
마치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처럼 서두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토르번 전쟁마탑이 위성도시 라 헤이븐에서 출발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서대륙으로 직행하는 내곽항로에 올라탄 뒤 비행고도가 안정되며 갑판 위에서 활동이 허락되었다·
남는 여유시간에 전쟁마탑을 둘러보던 레녹에게 탑의 메이지들이 전격마법의 성취 관련으로 말을 걸어왔고·
간단한 마법 시연에서 시작된 질의응답이 어느새 마법사들간의 술식대결로 변질되어 버렸던 것·
일이 커지기 전에 끊을 수도 있었겠지만 레녹 역시 탑주에게 받아먹은 것이 워낙 많아 잠시 상대를 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위계 마법사들 위주였지만 나중에는 라자르트처럼 레녹에게 패배한 성위마법사도 은근슬쩍 끼어들고 있던 상황·
“탑주님과 비견되는 대마법사에게 마법을 교정받을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고·”
“그냥 죽여놓는다 생각하시고 제 몸에 직접 마법을 때려 넣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건방진 자식이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반 님을 흥미롭게 할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여야지·”
마탑 내부의 배분과 성취 위계와 직위를 이용해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레녹에게 맞아보려는 마법사들의 다툼·
개중에는 일전의 전투로 부상을 입고 붕대를 두르고 있는 마법사들도 수두룩했다·
팔짱을 낀 채 마법사들을 바라보던 레녹이 고개를 저으면서 몸을 돌렸다·
“30분 정도는 더 여기 머무를 생각이니· 알아서 순번을 정해라·”
훈련장 바깥의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던 라자르트와 시선을 마주치자 그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
라자르트· 미개발지구 사막에서 레녹을 상대로 영역전투를 걸어왔던 세 명의 성위마법사들 중 하나·
대기를 감전시켜 전격마법의 영창을 필중에 가깝게 만드는 철저하게 전투에 특화된 영역을 지닌 워메이지다·
레녹 역시 그 능력이나 발동 원리가 꽤 유용하다고 여겨서 기억해 두었던 바·
라자르트가 창백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내가 졌어· 알버트 영감의 말이 맞았군·”
“····”
“당신은 혼자 전쟁마탑의 주전력과 비견될 수 있는 초월자다· 탑주님을 이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믿지 못했지만····”
“그런 공치사를 듣자고 널 다시 찾은 게 아니다·”
레녹이 품 안에 손을 밀어 넣자 라자르트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지나치게 위축된 라자르트의 반응을 무시한 레녹이 품 안에서 이윽고 낡은 마도서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라자르트가 앉아 있는 벤치 옆에 마도서를 던져주자 그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건····”
“낙뢰연위서(落雷聯委書)라는 물건이다· 뇌전의 응집과 집속을 다루는 방법이 적혀 있더군·”
레녹이 말했다·
“네 마법이 유달리 급하고 빠르니 속도를 조절하는 감각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천뢰서고에 보관되어 있어 열람도 허락되지 않을 텐데· 어디서 가져온 거지?”
“탑주에게 받았지·”
레녹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도서의 내용은 이미 모두 읽었거든· 탑주에게 받은 물건이니 너희에게 대신 돌려주는 것으로 하자·”
“····”
물끄러미 마도서를 들어 올린 라자르트가 중얼거렸다·
“마탑의 지식재산 유출을 줄이려면 탑주님이 아니라 당신이 마탑을 맡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 부분을 먼저 걱정하는 건가?”
라자르트에게 마도서를 돌려주고 마법사들을 스무 명 정도 더 때려눕힌 레녹이 훈련장을 걸어 나왔다·
시간이 날 때마다 전쟁마탑의 내부를 돌아보고 있었지만 아직 구경하지 못한 곳이 있었기 때문·
다른 마탑에 대한 흥미라기보다는 이 마탑의 근원적인 구조에 대해 궁금한 점이 남아 있다·
“조종실이 이쪽이었군·”
전쟁마탑의 갑판 후미에 위치해 있는 선루·
이 거대한 공중요새의 방향을 조정하고 지휘하는 조종실과 통제실이 위치해 있는 핵심지구·
밝은 뇌광이 등불처럼 빛나는 푸른 빛의 복도를 돌아 문을 연다·
철컥!
“엔진 출력 38%· 동력 보급 필요 한계선까지 앞으로 11시간·”
“서대륙 내곽항로 3000m 인근 우회로에 진입· 우현 선체를 기준으로 35도 우회전까지 앞으로 20초·”
“갑판 전면부에 전개된 공기저항 결계의 마력 보급을 강화합니다·”
레이더와 모니터가 빼곡하게 설치된 조종실에 수십 명의 오퍼레이터들이 앉아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전쟁마탑의 엔진 출력과 잔여 연료· 결계와 보안장치를 비롯해 비행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지형지물의 확인까지·
레녹이 조종실의 분주한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오퍼레이터들을 지휘하던 여성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반 님·”
“지젤이라고 했던가·”
레녹과 영역전투를 펼쳤던 세 명의 성위마법사들 중 하나이자 개중에서는 비교적 큰 부상을 입지 않은 마법사이기도 했다·
사용하는 자성영역은 거대한 호수의 형상을 한 근원심상으로 전쟁마탑의 거체를 직접 받아낼 만큼 충격내성에 특화된 능력을 지닌 바·
“탑의 마법사들을 때려눕히는 일은 충분히 즐기신 모양이군요·”
지젤이 웃으면서 조종실 창문 바깥을 가리켰다·
갑판 외곽 간이 훈련장에서 벌어진 소란을 그녀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
“재미있으셨나요?”
“그래 보이나?”
쿠구구구!!!
지젤의 안내에 따라 조종실 안으로 들어온 레녹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지상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서대륙 인근 장막에는 언제쯤 도착하지?”
레녹이 토르번 전쟁마탑을 빌려 타고 서대륙으로 향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동부전선을 통해 [장막]에 접근할 경우 필연적으로 첫 번째 관문이 위치한 지역과 접촉해야 하는 바·
견뢰의 신분으로 움직이는 지금 천번이 다녀간 관문 근처에 접근해 괜히 트러블을 일으킬 필요는 없기 때문·
“본 전쟁마탑은 비행능력과 안정성에 있어서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성능을 지니고 있어요·”
지젤이 말했다·
“이틀 안으로 내곽항로를 벗어나 서부전선 인근에 도착할 거에요· 전선 근처에서 두 분을 내려드리고 저희는 곧바로 공화국 내전지로 떠날 예정입니다·”
“올리비에라에게도 일정을 말해줘야겠군· 어디에 있지?”
“귀빈실에서 탑에 저장된 진미와 양주를 대접받고 계십니다· 이런 호화로운 생활에 굉장히 익숙하신 분이시더군요·”
지젤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분의 입맛을 맞춰드리기 위해 마탑에 고용된 셰프들이 굉장히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하네요·”
“····”
얼굴조차 비추지 않는다 했더니 레녹보다 전쟁마탑에서 훨씬 풍요로운 호사를 누리고 있었던 건가·
카르텔의 회장 정도 되는 인사가 이런 식의 귀빈 대우나 대접에 능숙하다는 거야 놀랄 일도 아니지만
레녹이 전쟁마탑의 조종실에 찾아온 것은 누군가의 신변을 캐묻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불이 붙지 않은 연초를 꺼내 문 레녹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미행이 붙었다· 알고 있겠지?”
“····”
“낌새가 있던 건 대략 10시간 전· 이쪽의 비행궤도를 20㎞ 전후에서 따라 움직이면서 흔적을 숨기고 있어·”
이 거대한 공중요새가 구름을 헤치고 온 동쪽 방향·
주변의 구름을 뭉개 시야각을 흐리고 궤도를 흔들었음을 레녹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전쟁마탑의 뒤를 쫓는 추격자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레녹의 마력감지로도 기척만을 잡을 수 있을 뿐 정체를 특정하기 힘들 만큼 아득하게 먼 거리에서 은신비행을 반복하고 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파일럿· 혹은 그에 준하는 비행능력을 지닌 초인이나 괴물이 틀림없을 터·
“아마 그쯤이 통제실의 레이더 사정거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겠지·”
“기가 막히는군요· 벌써 거기까지 알고 계셨나요?”
미행이 따라붙은 상황은 물론이고 그것이 가능한 연유까지 짐작하고 있는 레녹이 어지간히 황당해보인 것일까·
지젤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루 전에 보고가 올라왔습니다만 저쪽에서 행동에 나서지 않는 이상 대응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째서지?”
“이쪽의 비행궤도를 읽고 수십킬로미터 밖에서 따라올 수 있는 비행단이 상대라면 추적을 뿌리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지젤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술식으로 비행흔적을 숨기는 건 많은 마력을 소모하는 만큼 쉽사리 시도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그렇게 한다 해도 추격을 뿌리칠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요·”
“탑의 다른 고위마법사들은? 현재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인가?”
“반 님과 교전을 치른 뒤로 다들 어느 정도 회복을 마치기는 했습니다만····”
지젤이 말끝을 흐렸다·
“고위마법사들 대부분이 현재 엔진부의 출력을 유지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비행을 멈추지 않는 이상 일선에 나서기는 어렵겠죠·”
“···엔진부의 출력 부족이라·”
생각해 보면 라이엘 역시 엔진부의 부족한 출력 문제를 출발 전에 한번 지적한 적이 있었다·
뇌신전의 힘을 동력으로 삼는 이 거대한 전쟁마탑이 레녹과의 일 이후로 출력을 어느 정도 상실해 버리고 만 것·
뇌신전의 성역 자체가 힘이 떨어졌다기보다는 레녹이 출입하기 위해 성역을 과부하시킨 반동이겠지만·
어찌 됐든 레녹의 일이 엔진부의 출력문제로 이어졌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반 님·”
고민에 잠긴 레녹을 보며 지젤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추적자들이 교전을 걸어온다면 전쟁마탑을 지상에 착륙시키고 고위마법사들이 나서면 될 일이니까요·”
“····”
“토르번 마탑은 손님 대접에 있어 서투를 수는 있어도 귀빈을 대신 전장에 내보낼 만큼 경우 없는 기관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던 모양이군·”
어딘가 능숙해 보이는 지젤의 설명에 레녹이 눈을 빛냈다·
“역시 서대륙에는 상대적으로 항로의 규칙이나 비행 요령이 잘 정립되어 있는 편인가?”
거대도시 발칸 인근에 몰아치는 자기폭풍으로 인해 발칸에 하늘길이 열린 것은 극히 최근의 일·
이해의 바다에 위치한 필레놈 자치령· 개중에서도 부유섬 군락지를 제외하면 동대륙 쪽에는 비행기술 자체가 크게 활용될 환경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그러한 제약에서 자유로운 서대륙 쪽이 역시 하늘길을 이용하는 측면에서는 더 열려 있다고 보아야 할 터·
“그러고 보니 저번에는 탑의 자동비행 알고리즘을 복제해 가셨었죠·”
레녹의 질문을 들은 지젤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부유마탑의 항로나 비행조작법에 대해 흥미가 있으신 겁니까?”
“탑의 권역을 지상에 고정해놓는 것보단 이런 형태가 훨씬 더 이득이 많을 테니까·”
레녹이 대답했다·
“좋은 견본이 있다면 굳이 따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마탑을 공중에 띄우거나 비행체의 형태로 개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레녹도 큰 흥미가 있다·
권역을 한 곳에 고정시켜 놓기 보다는 이동을 자유롭게 만든다면 그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을 테니·
접합술주 아베스타 채프먼과의 전투에서 그가 생명권역을 소환수처럼 다루는 것을 본 레녹은 권역의 힘에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술주가 그랬던 것처럼 권역에 생명을 불어넣어 소환수로 만들 생각은 없지만 권역을 한곳에 고정시키지 않는다는 발상만은 레녹도 능히 차용할 만하다·
전쟁마탑의 자동비행 알고리즘을 다비를 통해 훔쳐 오기는 했지만 그것을 다루기 위한 사용설명서도 받아올 수 있다면 좋겠지·
레녹이 말하는 의미를 이해한 지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탑의 관제실에서 사용하는 관련자료를 조금 갖다드리죠·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부탁하지·”
향상심을 최고로 치고 벼락의 인과를 무엇보다 우선하는 독특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걸 제외하면 레녹이 만난 토르번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눈치가 빠르고 일머리가 좋은 편이다·
지젤이 자리를 떠난 뒤 홀로 남은 레녹이 난간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반쯤 남아 있는 연초를 마저 태우면서 몰아치는 바람소리를 배경 삼아 메신저를 뒤적거렸다·
휴대폰 자체는 진작 통화권을 이탈한 지 오래지만 일이 바빠서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는 그대로 남아 있는 바·
아니 오히려 지금 읽어야 수신이나 읽음 기록이 남지 않는 메시지도 있다·
하이레아가 복마전의 비밀회선으로 보낸 며칠 전의 연락처럼·
[빅터· 광대가 작전 참가를 확정 지었어·]
“····”
메신저를 확인한 레녹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카바힘 왕도 지하에 위치한 [문]의 공략· 작전 기일을 정하기 위해 모의의식공간에서 회의를 열 테니까 시간이 되면 참석해 줘·]
빅터의 신분으로 금기병장을 획득한 직후 하이레아는 그 능력이 [문]의 공략에 필요하다며 빅터의 참가를 요청했었다·
도시국가가 아니라 왕정제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기사들의 나라 카바힘·
아르스노바의 혈통을 모방해서 스스로 저주를 받아들인 왕족들의 무덤·
그 왕도 지하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 공언된 외해로 통하는 [문]의 존재·
그때 적당한 대답으로 넘겼던 예의 작전이 진척을 거듭해가면서 확정을 앞두고 있던 것인가·
‘광대가 직접 작전을 지휘한다면 참가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광대는 판데모니엄에서도 굉장히 이질적인 위상을 지닌 미치광이·
위계에 장난을 쳐가면서 광증에 잠식되는 것을 피하는 초월적인 환술사다·
의도나 목적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제멋대로인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 능력 자체는 레녹도 인정할 만큼 뛰어난 바·
편람의 우물 작전 이전에도 복마전에서 홀로 남대륙을 맡고 있을 만큼 조직 내에서도 남다른 대우를 받는 괴물·
성격을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 능력이라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다·
[문]에 대해서는 레녹 역시 흥미가 있는 만큼 적당한 시기와 기회가 있다면 참가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터·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하이레아가 보낸 다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는 소식인데 얼마 전에 멤버 한 명이 복귀했어·]
마침 생각나서 레녹에게 전해준다는 투의 가벼운 어조·
하지만 그 내용은 하이레아가 말하는 것처럼 가볍게 느껴지지만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당신이 입단하기 전부터 있던 멤버인데 모종의 사건으로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거든· 약물 쪽 전문가인데 당신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네·]
“····”
[복귀한 뒤로 성격이 꽤 달라진 것 같던데 어쩌면 그도 이번 작전에 참가하게 될지도 몰라· 구체적으로 사안이 정해지면 연락할게·]
마지막 전언을 끝으로 끊어진 메신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레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물 쪽 전문가··· 혼수상태···?”
레녹이 알고 있는 판데모니엄의 멤버들 중에서 그런 내막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
“···설마 마약왕이 깨어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