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9화
이정표(36)
사방에서 움직이는 포크레인과 철근을 운반하는 트럭·
시공을 위해 도착한 설계사와 작업을 보조하는 마법사·
관리자들의 지시에 따라 수백에 달하는 인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자재를 실어 나른다·
레녹은 지팡이를 짚은 채 말없이 공사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도시확장개발계획 당시 설계되었다 취소되어 버려진 위성도시 라 헤이븐·
위성도시 상공에 떠오른 전쟁마탑에 맞춰 실시간으로 건조되어 가는 거대한 선착장의 모습·
“자네나 나나 서로 시간을 내기가 참 어렵군·”
지팡이를 짚은 메이어 의원이 레녹의 뒤에 서 있었다·
“이번 사태가 마무리된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이제서야 잠깐 이야기할 시간이 생겼단 말이지·”
“메이어 의원님·”
“전쟁마탑· 대륙 전역에서 사업을 벌이는 친구들답게 일처리가 시원시원하더군· 이쪽에서 제시한 투자조건이나 비율을 거의 흥정조차 없이 수락했어· ”
작게 기침하면서 레녹의 옆으로 다가온 메이어가 선착장을 보며 말했다·
“일주일 안으로 발칸 인근에 경유지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 유일한 조건이었지· 지금 완공을 앞두고 있는 선착장이 바로 그 결과일세·”
“····”
“별다른 노고를 들이지도 않았는데 내가 협상을 잘했다고 소문이 나지 뭔가·”
노의원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레녹은 전쟁마탑이 손익에 둔감한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쟁사업을 지휘하는 라이엘 토르번이 시의회와의 협상에서 무른 태도를 취했을 리는 없을 터·
협상에 나선 메이어가 양쪽의 조건을 빠르게 중재해 타협안을 내놓았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레녹은 굳이 그 사실을 언급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토르번 마탑의 투자를 받을 장소를 위성도시로 잡을 줄은 몰랐습니다만·”
“라 헤이븐은 말 그대로 도시 전체가 항구로서 기능하도록 설계된 위성도시였네·”
메이어가 대답했다·
“바다와 육지를 접하고 있는 환경· 자기폭풍의 영향권에서 비교적 안전한 고도·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여러 이동수단이 경유하기 적합한 곳이지·”
“이번 협약을 계기로 위성도시의 시설을 복구시킬 생각이십니까?”
“그런 의도도 있지만 토르번의 돈이 발칸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기도 하네·”
레녹의 말에 대답하는 메이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토르번 마탑이 전쟁사업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본· 시의회의 입장에서는 분명 탐나는 돈이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것도 사실이니까·”
“····”
“추이를 지켜보면서 투자범위를 확대해나갈 생각이야· 발칸의 내수시장이 아무리 거대하다고 해도 외부자본의 유입은 언제든지 환영이니· 하지만 행여나 문제가 생긴다면····”
“위성도시째로 꼬리를 잘라 버릴 생각이군요·”
“이 발칸에서 직접적으로 설립이 ‘허락’된 마탑은 단 하나뿐이니까·”
레녹의 대답에 메이어가 고개를 돌리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자네의 마탑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겠나?”
“····”
거기까지 들은 레녹이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전쟁마탑의 투자협약을 설명해 주는 이유· 위성도시 라 헤이븐을 항구로서 재개발하고 협약의 증거로 삼은 이유·
토르번의 자본을 한번 걸러 받으면서 그들의 영향력이 레녹의 마탑보다 거대해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나·
“라 헤이븐은 앞으로 토르번처럼 발칸에 찾아오는 외부 세력을 맞이하는 공식적인 1차 경유지로 활용될 예정일세·”
메이어가 말했다·
“에반 바일런 교수가 반중력 엔진을 개발하면서 하늘길이 열린 지금 발칸을 향한 무역 수요가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지·”
“····”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자네의 말대로 수십 년 넘게 버려진 위성도시들을 수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네·”
“토르번 마탑과의 일이 잘 풀린다는 전제 하의 일이겠군요·”
“그렇지· 그 중간에 서 있는 자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게야·”
레녹을 바라보는 메이어의 미소가 더없이 인자하게 변했다·
“처음 자네를 만난 뒤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일세·”
“····”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마치 안전하게 숨겨둔 보물을 바라보는 듯한 뿌듯한 미소·
존 메이어는 여전히 처음 만났을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매사에 탐욕과 야망을 숨김없이 드러내지만 그에 준하는 유능함을 동시에 갖춘 권력가·
자신의 목적과 방향이 일치하는 한 지금처럼 이렇게 얼마든지 레녹의 편의를 봐줄 용의와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약선 야누시카 그린웨이가 제 마탑에서 약제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레녹 역시 합당한 방식으로 대가를 지불할 수 밖에·
“건강에 좋은 영약을 준비할 테니 조만간 한번 탑에 찾아오시지요·”
메이어와 덕담아닌 덕담을 서로 나눈 뒤 선착장에 착륙하는 전쟁마탑 쪽으로 향한다·
쿤다라로 출발하기 전 위성도시를 찾은 것은 메이어와 시의회의 의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기 때문·
삑- 삑-
붉은 경고등을 든 수백 명의 안내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때마다 하늘에 떠오른 전쟁마탑의 거체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면서 선착장의 중심에 내려앉고·
치익-
콰아아아아앙!!!!!
묵직한 충격파와 함께 거대한 강철의 요새가 선착장 인근에 그대로 정착했다·
전쟁마탑의 선미에서 굵직한 사슬이 흘러내려 고정장치에 걸리고 팽팽하게 조이면서 균형을 잡았다·
“이쪽 주포의 균형이 안 맞는다·”
“갑판 동력부 전선을 통째로 교체해야 할 것 같아·”
“발칸 암시장을 싹 돌고 왔는데 부품이 없더군·”
갑판 위에는 전신에 붕대를 두른 마법사들이 손에 공구를 든 채 반파된 장비들을 수리하고 있었다·
부러진 포대는 용접해서 수리하고 갑판을 열어 전선을 꺼낸 뒤 망가진 선을 구분해 분류한다·
부품에 복잡하게 새겨진 마법진을 다시 그리거나 새로 주문을 영창해 불어넣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반파된 전쟁마탑의 손상부위를 능숙하게 수리하고 수복하는 토르번 마법사들의 모습·
“그분이 오셨군·”
“아 반 님· 오랜만입니다·”
갑판 위에 올라탄 레녹을 발견한 마법사들이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지난번 전투에 대해 복기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성질변화의 효율에 대해 요령이 있다면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싸움의 승패나 결과를 벌써 잊어버린 듯 태연하게 다가오는 마법사들의 모습·
레녹과 싸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뒤에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온다·
“야 야· 다들 저리가서 일이나 해· 뭐 하는 거야?”
순간 늠름한 인상의 여성이 마법사들 사이에 끼어들어 길을 막았다·
뇌태도를 짊어진 여성이 앞을 막자 다른 마법사들이 구시렁대며 물러선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여성이 그제서야 레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윗선에서 오늘 온다는 이야기 들은 적 없는데· 무슨 일로 온 거야?”
“라이엘 토르번은 어디 있지?”
“기관실·”
여성이 그럴줄 알았다는 듯 등을 휙 돌렸다·
“따라와· 안내해 줄게·”
“할린이라고 했던가·”
여성의 이름을 기억해낸 레녹이 그녀와 싸운 전투를 떠올리고 물었다·
반사신경을 극한까지 끌어올려서 전투에 특화되어 있던 워메이지·
전격마법사면서도 뇌태도라는 무구를 사용해서 레녹의 기억에도 남아 있었다·
“벌써 움직일 수 있을만큼 몸이 회복된 모양이군·”
“···그걸 보통 두들겨 팬 장본인이 말하지는 않지 않나?”
할린이 표정을 찌푸린 채로 투덜거렸다·
“꼬박 사흘을 손가락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 있다가 오늘 일어났으니까 봐줘·”
“나와 싸웠던 다른 성위마법사들은?”
“아직 골골대는 중·”
할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교전 도중에 입은 부상이라 후유증이 적었지만 다른 녀석들은 당신이 영역을 직접 짓밟아버렸잖아·”
“····”
“그나마 멀쩡한 건 지젤 정도고 알버트 영감이랑 라자르트는 아직 일어나지도 못했어· 어처구니가 없지·”
태도의 손잡이를 움켜쥔 할린의 표정이 순간 심란하게 변했다·
“같은 계통의 술사라면 전격내성을 믿고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으로 잡아먹힐 줄이야· 애초에 모든 마법적 역량에서 당신이 상위호환이었군·”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내게 딱히 원한이 없어보이는군·”
“라이엘 님한테 설명 들었을 거 아니야·”
레녹의 질문에 할린이 대꾸했다·
“우리가 원해서 시작한 일이고 결과에도 불만은 없어· 오히려 이 정도까지 깔끔하게 밟혔으면 인정할 수밖에 없지·”
“····”
앞서 걷던 할린이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엇보다 당신 결국 한명도 죽이지 않았잖아· 그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건 우리 마탑의 보조배터리도 알아·”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한 건가? 그건 너희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 알아· 우릴 위해서가 아니라 탑주님 때문이겠지·”
할린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당신이 탑주님을 배려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그것도 상관없어·”
“····”
“그러니까 우리가 떠난 뒤에도 그 노망난 늙은이를 잘 보살펴 달라고·”
뇌태도를 천천히 허리춤에 수납한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스승님· 미쳐 있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
“···그렇군·”
레녹도 알고 있다·
벼락의 힘 이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선행하려 하는 탑주가 사실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하무인에 외곬수인 것처럼 구는 그 노인이 수호령수 같은 인연과 잔정에 얽매이는 존재라는 것을·
얽매이지 않으려 하는 만큼이나 속세에 얽매여 있는 마법사다·
그것을 레녹이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였을까·
탑주가 지닌 일면을 거울처럼 레녹 자신에게서 비춰보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할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탑주는 좋은 제자들을 두었군·”
“···그런 말을 할줄 안다는 점에서 그 늙은이랑 확실히 다르긴 하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린 할린이 이윽고 몸을 틀어 옆으로 비켜섰다·
동력실로 향하는 거대한 문 앞에서 고개를 끄덕인 할린이 말했다·
“라이엘 님은 이 안에 계셔· 들어가 봐·”
할린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동력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치익!!
문이 옆으로 밀리면서 공기가 짓눌리는 작은 소음이 울려 퍼졌다·
흐릿한 증기가 들어차 있는 기관실· 푸른 뇌전이 사방에서 회오리치면서 번뜩인다·
용도를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게 얽혀 설계된 거대한 기계장치 앞에 서 있던 라이엘이 시선을 돌렸다·
“토르번 마탑의 투자협약에 대해서 내 파트너가 할 말이 있다더군·”
“오전에 그에 대해서 이미 제니시아 바쥬르와 논의를 마쳤습니다·”
레녹이 라이엘을 향해 다가서며 입을 열자 라이엘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발칸을 떠난 뒤에도 49구역의 부지를 매입하는 일은 없도록 조약을 수정하도록 하죠·”
“벌써 제니가 연락을 했던 건가?”
“발칸에는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고 영민한 협상가들이 많더군요·”
라이엘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납득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기에 승낙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오신 것인지?”
“···아니 다른 쪽의 문제다·”
레녹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면서 물었다·
“조만간 발칸을 떠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할아버님의 거취가 정해진 이상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까요·”
동력실의 무거운 기계장치들을 조정하던 라이엘이 말했다·
“뇌신전의 과부하로 인한 엔진부의 떨어진 출력 문제도 있고 해서 며칠 안으로 기존에 정해진 일정을 수행하러 떠날 예정입니다·”
“아르스노바의 전략기동전함을 제대로 수리하기에는 적합한 부품이 부족한 모양이지?”
“할아버님께서 벌써 거기까지 말씀해 주신 모양이군요·”
라이엘이 놀라지도 않고 대답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스스럼없는 답변·
“처음 만났을 당시 내 수호령수를 강제로 소환했던 결투의식· 중앙의 황성시합을 재해석한 의식이라 했을 때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전쟁마탑 자체가 중앙의 전함을 개조한 물건이라 가능한 일이었군·”
“그만큼 특수한 부품과 재원을 필요로 하는지라 할아버님께서도 참 관리하기 까다로운 물건을 넘겨주셨지요·”
자리에서 일어선 라이엘이 레녹을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궁금한 것은 그것뿐입니까?”
“아니 발칸을 떠난 전쟁마탑의 다음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고 싶다·”
“····”
영문을 알 수 없는 레녹의 말에 고개를 기울인 라이엘이 말했다·
“현재 저희가 대륙 전역에서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전장은 15곳 이상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력이 아니라 단순자본 투자를 포함하면 40여 곳 이상에 달하는 전장에 개입하는 바· 한 번에 하나의 목적지를 정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일정이 아니라는 말이죠·”
온갖 초인과 괴물들이 날뛰는 이 대륙에서 전쟁사업이란 실로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품은 분야·
그 일선에서 움직이면서 최정예 워메이지와 전쟁장비를 보급하는 토르번 마탑의 일정이란 언제나 분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레녹은 그런 라이엘의 설명을 듣고도 고개를 저었다·
“방향 정도만 알면 충분해· 어디로 가지?”
“···당장은 서대륙 쪽으로 이동할 계획입니다만·”
“좋아· 그거면 충분하겠군·”
“···?”
영문을 모르겠다는 라이엘의 표정에 레녹이 미소지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장막 근처에 방문해야 할 일이 있거든·”
“····”
“그런데 발칸 주변이나 동대륙 인근은 안돼· 되도록 첫 번째 관문 근처는 피하려고 한다·”
라이엘이 팔짱을 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서로 가는 방향이 같다면 그때까지는 동행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
레녹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쪽에서 태워준다면야 굳이 사양하지는 않기로 하지·”
“····”
* * *
레녹의 개인저택 인근에 위치한 연구실·
공간을 분리해서 격리시킨 연구실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작업대·
작업대 위에 무언가를 빼곡하게 쌓아둔 레녹이 양손으로 무거운 철덩어리를 매만졌다·
철컥!!
낡은 머스킷 총이 부드럽게 회전하면서 장전을 마친다·
마력을 불어넣고 의념으로 조작한 순간 총의 형상이 뒤집히면서 샷건과 화염방사기 라이플로 변화했다·
기계도시 마키나에서 획득한 구세계의 마총 테레메르의 종언·
여섯 가지의 형태를 보유하는 변화하는 마총이자 술식 자체를 탄환에 담아 쏘는 능력을 지닌 비보·
그리고 레녹이 알고 있는 마총사가 한때는 직접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구·
“····”
양손으로 머스킷을 쥔 채 신중한 눈빛으로 점검을 마친 레녹이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머스킷을 내려놓았다·
달칵·
넓게 펼쳐진 작업대 위에 빼곡하게 놓여 있던 반지와 지팡이 염주와 열쇠 파피루스와 회중시계·
건틀렛과 모노클 눈동자와 펜터렉트를 비롯해 수십 종에 달하는 아티팩트가 작업대 위에서 조용히 빛을 발했다·
레녹이 이 세계에서 눈을 뜬 뒤 대륙 각지에서 수집하고 획득해 온 유용한 도구들·
8레벨에 도달한 뒤에도 사용할 만큼 독특하고 개성적인 능력의 장비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시간·
“저주아귀는 아직 펠릭스가 가지고 있을 테고····”
달칵 달칵·
하나씩 하나씩 정리해둔 아티팩트를 다시 품 안에 수납한다·
회중시계와 지팡이는 허리춤에 반지와 염주는 손목과 손가락에 걸고 파피루스와 눈동자는 아공간에 밀어 넣었다·
그림자 코트의 주머니와 소매 사이로 밀어 넣고 정리해서 위치를 기억한다·
허리춤에 보이지 않게 장착한 소켓 벨트에 영약과 단환을 쪼개 넣고 미리 만든 연초는 안주머니에 케이스째로 수납했다·
호흡기를 물고 기화시킨 포션 용약을 들이키며 양손으로 장갑을 끼고 옷을 정리한다·
그림자가 일렁이는 코트를 마지막으로 집어든 레녹이 텅 빈 작업대를 바라보며 시선을 돌렸다·
[운명자천칭 극예 5법]
[헤르메스의 질량술식]
[흑율계열 고유마법]
연구실의 칠판 한쪽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술식의 연구 테마와 레녹 자신이 떠오르는 발상을 적어둔 문구들·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온갖 물건을 수납하고 내뿜으며 작동하는 간이승천문 속칭 랜덤박스·
“····”
레녹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연구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전쟁마탑의 영약창고와 천뢰서고를 훑으면서 레녹 자신이 가진 물건을 한 번쯤 정리할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
레녹 단 한 사람이 모아온 온갖 술식과 아티팩트의 가치가 탑 전체가 쌓아온 것에 결코 모자라지 않다·
하지만 하필 지금 이 일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파앗!!
49구역에 도착해 마탑 후문에 위치한 훈련관 지하를 살핀다·
붉은 마력을 두르고 대련에 열중하는 펠릭스와 페이샤· 뒤에서 한가롭게 훈수를 두고 있는 결백·
연무장에서는 용병들이 한참 훈련에 열중하고 뒤편에 자리한 장송귀해선에서 사이러스가 누군가와 오백로를 두고 있다·
마탑 하부 층계에서 쉴 새 없이 아이템을 운반하는 인부들과 정신없이 물량을 적고 통과시키는 마법사들·
상부 층계에서 누군가와 전화를 주고받는 제니와 그녀의 옆에서 하품하면서 컴퓨터를 두들기는 주티야·
탑 지하공동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수호령수와 그 옆에서 배를 두들기는 탑주의 모습까지·
그 모든 것을 한 번씩 눈에 담고 지나쳤다·
휘오오오···!!!
마탑의 옥상에 홀로 서서 레녹이 없어도 멀쩡하게 돌아가는 49구역의 정경을 내려다보던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갈 생각이군요·”
“···클라리스 리첼렌·”
팔짱을 낀 장생종이 어느새 레녹의 뒤에 서 있었다·
힐끗 그녀를 돌아본 레녹이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준비가 끝났다·”
“····”
“나는 카이세 바쥬르의 최후를 확인하러 간다· 쿤다라에서 그가 맞이한 결말을 찾아볼 생각이지·”
레녹이 말했다·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끝에 내가 아는 이들이 엮여 있음이 확실해졌으니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비사를 파헤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레녹이 하는 말은 레녹 자신을 다잡기 위함일까·
아니면 클라리스를 통해 이 말이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바래서였을까·
레녹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지·
언어로 구체화할 필요가 없다 여겼던 이유를 돌고 돌아 다시금 굳이 말로 전하려 하는 건·
“저는 조만간 싱클레어 마탑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이곳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났으니까·”
그런 레녹의 말을 이해한 것처럼 클라리스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를 대신해 누군가 다시 이 도시에 돌아오겠죠·”
“····”
침묵하는 레녹을 보며 클라리스가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돌아와서 직접 하도록 해요·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지 말고·”
“···그렇군·”
레녹이 천천히 한 발을 앞으로 뻗었다·
옥탑의 경계선을 넘어 허공으로 발을 디딘 레녹이 고개를 돌리면서 쓰게 웃었다·
번쩍!!!
그 순간 레녹의 발아래 엄청난 광량의 벼락이 떨어지며 한줄기 길로 변했다·
마탑 최정상에서 강렬한 빛이 번뜩인 순간 레녹의 신형이 49구역의 권역을 초음속의 속도로 주파·
외곽구역과 미개발지구를 넘어 순식간에 거대도시 바깥으로 향했다·
휘오오오오!!!!
멀리서 번뜩이는 뇌광을 기다렸다는 듯 라 헤이븐의 선착장에서 부상하는 전쟁마탑의 모습·
날카로운 벼락을 두른 강철의 함선이 거칠게 상승하면서 강렬한 엔진음을 내뿜고·
탁!!
쉴 새 없이 진동하는 탑의 갑판 위로 레녹이 발을 내디뎠다·
[왔군·]
화려한 도포를 두른 채 투명한 베일을 쓴 올리비에라가 팔짱을 낀 채 갑판 끝에 서 있었다·
물끄러미 레녹을 바라보던 올리비에라가 이윽고 차가운 웃음소리와 함께 마안을 번뜩였다·
[네놈답지 않게 이번에는 제시간에 맞추었구나·]
“이동수단을 저쪽에서 준비했는데 늦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레녹이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콰아아아아아!!!!
전쟁마탑의 엔진부가 맥동하며 동력을 끌어올리고 선미에서 회전하는 추진체가 미친 듯이 발광한다·
그때마다 위성도시 상공에 떠오른 탑의 거체가 빠르게 속도를 높이고·
지상의 풍경이 일그러지다 이내 흐릿한 선이 되어서 가속했다·
파아아앙!!!
멀어지는 위성도시와 그 뒤편에 펼쳐진 발칸의 정경을 바라보던 레녹이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쿤다라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