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5화
이정표(32)
마탑 최상층 집무실 한가운데 위치한 소파·
테이블에 올려둔 오백로 장기판을 두고 레녹과 주티야가 마주 앉아 있었다·
탁· 탁·
돌이 장기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조용한 집무실에 규칙적으로 울려 퍼진다·
말 한마디 없이 돌을 옮기고 뒤집으면서 게임을 이어가는 레녹과 주티야의 모습·
두 사람의 손이 번갈아서 오갈 때마다 흑돌과 백돌이 뒤집히고 집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대국의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국면이 정신없이 바뀌는지라 누가 우세한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옆에 앉아 게임을 지켜보던 제니도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EN12부터 순서대로 각궁·”
“SA5부터 10까지 편향·”
“AB34부터 끝단까지 순전·”
탁·
레녹이 흑돌을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장기판의 돌이 검은 빛으로 뒤집힌다·
순식간에 주티야가 놓은 백돌이 반절 가까이 자취를 감추는 모습·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너 정말 잘 둔다·”
장기판 위에 흐트러진 돌을 말없이 바라보던 주티야가 말했다·
“나도 오백로를 많이 둬봤지만 이렇게까지 잘 두는 사람은 아르스노바에서도 거의 없었는데·”
“그렇겠지·”
레녹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인공지능의 사용자 권한 획득 조건을 오백로 승부로 설정해 둘 정도라면 설계자 본인이 그만큼 이 게임을 많이 해봤다는 뜻일 테니·”
“····”
설마 이쪽에서 먼저 그 사실을 먼저 언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침묵하는 주티야를 레녹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딥웹의 비허가 네트워크 아래 숨겨져 있던 아르스노바의 강인공지능 검색엔진 ‘하이베르크’· 분명 네 작품이겠지?”
딥웹의 관리자들이 레녹을 불러서 처리를 구했던 검색엔진의 존재·
그 과정에서 레녹은 검색엔진을 손에 넣기 위해 내장된 강인공지능과 직접 오백로 승부를 벌인 적이 있었다·
진둔의 파피루스를 이용해서 오백로에서 이기고 검색엔진을 손에 넣은 뒤 교단의 1사도와 단장의 현신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었으니·
사실상 교주와 단장 레녹이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나 마찬가지·
레녹 역시 그때의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네가 한 짓이었다고?!”
경악하는 표정을 지은 주티야가 이내 웃으면서 안경을 추켜올렸다·
“농담이야· 사실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거든·”
“····”
“뭐 그래도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이야·”
농담으로도 받아주기 힘든 레녹의 싸늘한 반응에 멋쩍은 표정을 지은 주티야가 백돌을 쥐면서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 뛰어난 오백로 기사가 아니라면 강인공지능을 뚫고 검색장치의 권한을 가져갈 수는 없을 테니까·”
탁!!
주티야가 백돌을 놓는 것과 동시에 게임판의 절반이 새하얗게 반전된다·
지금껏 팽팽하게 유지되던 판의 균형이 대번에 그녀 쪽으로 쏠린 모습·
“괜찮다면 그거 돌려주지 않겠어?”
침묵하는 레녹을 보며 주티야가 물었다·
소파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백돌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기억을 회상하듯 말했다·
“철없던 시절에 만든 습작이라 많이 어설프거든·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좀 부끄러운 수준이지·”
“검색엔진의 사용자 권한 획득 조건을 오백로로 설정해 둔 건 참신했다·”
레녹이 흑돌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흥미롭기도 했지· 진둔이 만든 보드게임을 아르스노바에서 그렇게 높게 평가하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
“오백로는 단순히 결계술이나 술법진 학습에만 도움이 되는 게임이 아니야·”
주티야가 시선을 돌렸다·
“논리적 추론 능력과 다차원 복합 사고 능력 술식 해석을 위한 영역과 공간 적성· 수치화가 어려운 여러 재능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유이한 수단이지·”
“····”
“술법의 묘리를 완벽하게 녹여낸 게임이기에 뛰어난 기사일수록 상대방의 수를 통해 술식 소양을 읽을 수 있게 되지·”
천천히 백돌을 정리한 주티야가 레녹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술식의 소양을 읽으면 배움의 근간이 보이고 나아가 적성과 기원마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
“아르스노바의 대술사들은 오백로를 두면서 상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읽을 수 있었어· 오백로 자체가 교류이자 소통의 수단이었던 셈이지·”
대답하지 않는 레녹을 보며 주티야가 미소 지었다·
“뭐 강인공지능을 오백로 승부로 이긴 술사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글쎄· 관심법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다만····”
레녹이 그 뜬금없는 말에 표정을 찌푸렸다 이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네 기풍이나 술법진 적성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군·”
“기풍?”
“안정적이고 견고한 수를 위주로 두는 성향·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레녹이 말하자 주티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런 성향에 대한 이야기라면 많이 들어본-”
“중요한 국면에서 승부를 미루고 도망치려 하는 본질·”
레녹의 담담한 말에 주티야의 말이 뚝 멈췄다·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기판을 내려다본 레녹이 말했다·
“결정적인 순간을 외면하면서 어떻게든 판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어· 자신이 패배하는 순간을 최대한 뒤에 놓으려 하지·”
“····”
“하지만 그건 지고 싶지 않다는 느낌과는 다르군· 처음부터 패배를 상정하고 그다음을 생각하는 건가?”
“···너·”
“이 판을 포기하고 다음 게임을 노리는 것도 아니야· 그랬다면 최대한 내 수를 많이 보고 분석하려 했을 테니· 오히려 그건····”
드물게 놀란 표정으로 변한 주티야를 두고 레녹이 턱을 매만졌다·
“게임이 끝나는 순간을 직접 정하려는 타산에 가까워 보이는군·”
“····”
침묵이 흘렀다·
레녹의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제니의 숨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순간·
두꺼운 안경 렌즈 너머로 레녹을 응시하던 주티야가 입을 열었다·
“아까는 관심법에 별로 흥미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 흥미가 없을 뿐이지 그렇다고 못하는 건 또 아니라서·”
레녹이 피식 웃었다·
“대답을 듣고 싶어 하기에 모처럼 솜씨를 발휘해 봤는데 어땠지?”
“···최악이야· 아주 기분이 나쁜걸·”
주티야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괜히 물어본 것 같아서 후회가 될 지경이라고· 이럴 거면 이런 화제를 들고 널 찾는 게 아니었는데·”
“하핫·”
신랄하기 그지없는 평가에도 레녹은 웃으면서 한 손으로 턱을 짚었다·
레녹의 대답이 완전히 틀린 건지 아니면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로 정곡을 찔렀기 때문인지·
주티야의 혹평이 어느 쪽에 기인한 대답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
“극찬 고맙군· 더 둘 생각인가?”
“···아니·”
안경 너머로 빤히 장기판을 바라보던 주티야가 쥐고 있던 백돌을 장기판 위에 던졌다·
“항복할래· 기분 나쁘지만 네 말이 맞아·”
주티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판세가 기울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거든· 더 해봤자 추해지기만 하겠지· 내가 졌어·”
“····”
얌전히 어질러진 돌을 정리하기 시작한 주티야의 모습·
레녹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추해질 때까지 아득바득 매달려야만 해낼 수 있는 일도 있는 법이지·”
“뭐?”
“적어도 나는 그런 방식의 발버둥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네 방식이 맞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
“뭐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군·”
순간 입을 다문 주티야를 보며 레녹이 피식 웃었다·
“강인공지능을 되찾고 싶다면 돌려줄 수 있다· 그게 지금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도 이야기해 주지·”
“역시 그냥 갖고 있기만 한 것 아니었구나?”
“하지만 조건이 있다·”
팔짱을 낀 채 소파에 기댄 레녹이 말했다·
“내가 검색엔진을 갖고 있는 건 강인공지능과의 오백로에서 이겨 사용자 권한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나 역시 정당한 소유주라는 말이지·”
“····”
“검색엔진의 알고리즘은 복사가 끝났으니 원본을 돌려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대가를 받아야겠다·”
“무슨 대가를 원하는 건데?”
“장례의식 당시 그쪽이 제시한 적이 있던 세계수의 잎사귀와 축퇴로의 부품·”
레녹이 눈을 빛냈다·
“그것의 위치 좌표나 최소한 그에 준하는 정보는 되어야 할 것 같군·”
“····”
“중앙도시 운명의회의 서기로서 쥐고 있는 정보가 많은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그쪽에 흥미가 가거든·”
아직까지도 자는 척을 하고 있는 제니의 어깨를 흔들어 깨워준 레녹이 말했다·
“아 하지만 만약 외겁도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쪽을 우선해서 받겠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외겁도시? 쿤다라를 말하는 거야?”
“이 자리에서는 처음 말하는 것 같지만 조만간 쿤다라에 한번 방문할 생각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주티야의 대답에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막에 가려진 장생종의 도시· 멸망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천혜의 피난처라고 했던가·”
“····”
“아르스노바의 귀족이라면 외겁도시에 대해 뭔가 알고 있겠지· 그 부분에 대해 조언을 듣고 싶군·”
외겁도시는 대륙의 모든 도시를 통틀어서 가장 중앙도시와 밀접하게 엮여 있는 비처·
아르스노바를 두른 장막이 쿤다라의 작품인 만큼 그 관계성에 대해 말해 무엇할까·
그렇기에 레녹은 주티야라면 쿤다라의 장생종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세계수의 잎사귀와 축퇴로의 부품에 대해서도 흥미가 가지만 쿤다라로 가기 전 쓸 만한 조언을 들을 수 있다면 유용할 터·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주티야의 의사를 묻기 위해 시선을 들어 올린 순간·
“···표정이 왜 그러지?”
“아니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보기 드물게 얼빵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주티야의 모습·
마치 이제 와서 이런 것을 물어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듯한 반응이다·
“그래 쿤다라에 갈 생각이니까 조언을 달란 말이지·”
레녹이 그 기묘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린 찰나 주티야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이대로도 충분해· 딱히 해줄 말은 없을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애초에 네게는 쿤다라에 가기 위한 준비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없을 텐데?”
“아니 이대로가 딱 좋아· 오히려 모르고 있다면 모른 채로 가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걸·”
주티야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팍 끄덕였다·
“쿤다라에서 무슨 일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가면 분명 일이 잘 풀릴 거야· 내가 보증할게·”
“····”
레녹과 퀴즈놀이를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심성이 꼬여서 정답을 알려주기 싫은 건지·
그동안 보아온 주티야의 성격이라면 어느 쪽이든 가능할 것 같아 확신하기가 어렵다·
“그래· 알겠다·”
아예 엄지손가락까지 추켜들면서 자신하는 그녀의 모습에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검색엔진을 돌려받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엑·”
* * *
레녹의 수호령수가 머무르는 마탑 지하공동·
식신이 되어버린 토르번 마탑주가 숙식을 해결하는 공간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이 영감· 일어나 있으면 저걸 좀 보라고·”
바닥에 드러누운 탑주를 검집으로 쿡쿡 찌른 딜런이 물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전쟁마탑과 시정부의 투자 협약 체결에 대한 소식·
힐끗 고개를 들어 뉴스를 확인한 탑주가 따분한 표정으로 하품을 쩍쩍 갈겼다·
“어쩌라는 게냐·”
“지금 이 도시에 당신네 자본이 굴러들어 오게 생겼는데 뭐 할 말 없어?”
탑주의 앞에 편하게 주저앉은 딜런이 검집을 추스르며 물었다·
“당신 토르번 마탑의 지분을 지닌 최대 주주잖아· 발칸의 어느 구역이나 시설에 투자할 계획인지는 알고 있는 것 아니냐고·”
“허허 방자한 놈이로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은 토르번이 말했다·
“지금 본노를 내부고발자로 삼아 차익을 취하겠다는 말이냐?”
“아니 그쪽 증손녀님한테 49구역의 투자는 포기하라고 전해달라고·”
딜런이 팔짱을 꼈다·
“49구역은 반의 권역이 중심인 만큼 남아 있는 부지도 조만간 이쪽에서 전부 매입할 생각이거든·”
“흐음····”
“얼마가 됐든 모두 이쪽이 사들일 예정이야· 쓸데없이 다른 마탑과 출혈경쟁을 할 필요는 없잖아?”
“흠흠·”
딜런의 옆에서 눈치를 보던 벨버가 말했다·
“탑주가 우연히 내부 정보를 들려줄 수도 있는 건데 꼭 그렇게 단정 지어서 거절할 필요는····”
“벨버 입 닥쳐·”
뻑 소리와 함께 밀라의 발이 벨버의 복부에 꽂혀 들어간다·
허리를 직각으로 숙인 벨버가 헛구역질을 해대는 사이 탑주가 묘한 감탄을 내뱉었다·
“호오! 훌륭한 발차기로구나· 속도가 가히 벼락과도 같은데 전격마법을 배워보지 않겠느냐?”
“···할아범· 내 발차기가 빠른 게 전격마법이랑 무슨 상관인데?”
“신경 쓰지 말게 밀라·”
밀라가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사이 팔짱을 낀 수련이 익숙한 듯이 말했다·
“이 대술사가 온갖 이유를 대면서 전격마법을 익힐 것을 권유한 사람이 벌써 다섯이 넘으니까·”
“····”
“영감· 애초에 우리는 당신이 아니라 반의 마탑에 속한 사람이라고·”
딜런이 검집을 지팡이처럼 짚고 선 채로 물었다·
“당신이 반을 인정하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우리를 회유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뭔가 착각하고 있군· 전격마법을 익힌다고 꼭 토르번에 몸을 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탑주가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벼락의 인과를 새겼다면 소속과 출신을 넘어 동문이나 다름없거늘· 어떤 마탑에 있든 무엇이 중요할까!”
“단단히도 미쳤군·”
“위대한 벼락의 진가를 한 명이라도 더 깨닫기를 바라는 본노의 호의를 무시하다니 참으로 괘씸한 놈들이로고!”
“시끄러우니까 소리 지르지 말아줄래요?”
용병들 역시 이 벼락에 미친 노인이 목소리가 크기만 할 뿐 탑 안에서는 무해함을 이해한 듯했다·
탑주를 경계하는 것도 잠시 어느새 탑주의 망언조차 스스럼없이 받아넘기는 용병들의 모습·
경사로 난간에 기대 투닥대는 탑주와 용병들을 바라보던 레녹이 걸음을 옮겼다·
“반!!”
알고 있었다는 듯 레녹을 향해 검집을 흔드는 딜런의 모습·
“대화는 다 끝났나?”
“틀렸어· 토르번 마탑의 투자 방향에 대해 피드백을 주려고 했는데 헛소리밖에 안 해·”
딜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이엘 토르번이 발칸을 떠나기 전에 한번 접촉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 부분을 두고 제니가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고 하더군· 조금만 기다려 보지·”
“반 지금 발칸에 상장된 대부분의 주식 전반이 요동치고 있어·”
밀라에게 두들겨 맞고 쭈그러져 있던 벨버가 냉큼 끼어들었다·
“토르번 마탑이라는 외부 세력이 끼어들었을 때가 기회야· 탑주에게 투자 정보를 얻어서 차익을 실현하면 마탑의 자산도 몇 배로···!!!”
“못 들은 걸로 해줘 반·”
“이 녀석이 정말 왜 이러지?”
벨버의 입을 막기 위해 곳곳에서 날아든 손이 그의 입과 턱을 마구잡이로 짓누른다·
얼굴이 떡처럼 주물러진 벨버의 입에서 금세 본심이 튀어나왔다·
“크아악!! 내가 3년 전에 사둔 토르번 마탑 우선주가 아직도 하한가야· 제발···!!”
“드디어 흉악한 본색을 드러냈군·”
“네 X같은 투자 실력을 자꾸 반한테 고백하지 말라니까?”
“아니 주식 투자를 한다는 놈이 마탑의 우선주에 손을 댔단 말이더냐·”
벨버를 갈구는 용병들의 뒤에서 관심 없다는 듯 듣고 있던 탑주마저도 황당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라이엘 그 아이가 작전 세력을 역으로 털어먹겠다고 만든 우선주일 텐데 어떻게 골라도 하필····”
“으아아악!!”
[와웅]
울부짖는 벨버의 목소리가 어찌나 절절한지 앞발을 물고 쿨쿨 잠에 빠져 있던 수호령수가 몸을 들썩였다·
뱃살이 튀어나온 새끼용이 깨어나려는 조짐을 보이자 기겁한 용병들이 벨버를 밖으로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반 그럼 우린 가볼게!!”
“맨슨의 말이 맞았어· 저주술사를 찾자·”
“이 녀석의 입에서 두 번 다시 투자라는 단어가 나오지 못하게 주언을 걸자고·”
순식간에 작당모의를 끝마치고 사라지는 용병들과 다시 조용해진 지하공동의 풍경·
“참으로 말 많고 시끄러운 제자들을 두었구나·”
잠에 빠진 새끼용의 뱃살을 베개 삼아 드러누운 탑주가 껄껄 웃었다·
“마법사로서는 형편없지만 저런 녀석들이 있다면 매일이 심심하지는 않겠어·”
“마법의 소양이나 적성이 특출난 쪽은 아니지·”
레녹이 답했다·
“그걸 알면서도 밀라에게 전격마법을 가르칠 생각을 했군·”
“흐음 듣고 있던 게냐?”
탑주가 씩 웃었다·
“부족한 것을 구태여 포장할 생각은 없으니· 어느 쪽이든 네게 비하면 미약한 불꽃에 불과하지·”
“····”
“하지만 소질이 부족하다 하여 배움을 포기할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너도 네 제자들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있던 것이 아니더냐?”
“그들을 억지로 마법의 길로 안내할 생각은 없다·”
레녹이 대답했다·
“다만 그들이 지닌 능력이나 재능을 개화하는 과정에 도움을 주고자 할 뿐이지·”
“흠 네가 창조한 마법체계가 워낙 특이한 것이니 이해는 하겠다만····”
수호령수의 우로보로스에 자성영역을 먹힌 탑주라면 그 마법이 얼마나 기괴한 힘인지 이해하고 있겠지·
레녹이 8레벨에 올라 위계를 초월하기 위해 직접 빚어낸 창조마법·
하지만 탑주는 그 진가에 대해 알면서도 전쟁마탑의 앞에서 함구하고 입을 다물어주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하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레녹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내 마법체계에 대해 함구하고 수호령수를 지켜준 덕분에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
“토르번 마탑이 입은 손해는 차후 이쪽에서 보상하지· 적어도 그들이 마냥 위험에 처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생각이다·”
“되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쓸데없는 부분에서 도의를 지키려 하는구나·”
탑주가 껄껄 웃었다·
“내 제자라면 네놈 같은 마법사와 싸워보았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기고 성장의 발판으로 터· 그 이상의 대가를 바라지는 않을 테지·”
“····”
“그보다 나는 네가 뇌신전에서 얻은 깨달음이 궁금하기 그지없구나·”
탑주가 반짝이는 눈으로 레녹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설마 성역에 출입하고도 빈손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터· 무엇을 얻었는지 본노에게 솔직히 고해보거라·”
“사상의 지평을 초월한 깨달음을 성역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아니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대신 그보다는 좀 더 명확한 형태를 지닌 것을 갖고 나왔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그 성역에서 돌아올 수도 없었을 텐데·”
탑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초에 그 뇌신전의 성역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존재를 제외하면-”
“그 부분에 대해서 당신과 논의를 하고 싶어서 찾아온 거다·”
손가락을 구부려서 허공을 매만진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듯이 방황하던 레녹의 손이 그대로 허공을 움켜쥔 그 순간·
[천뢰건(穿雷鍵)]
콰아아앙!!!
대기에 유리처럼 금이 가면서 황금빛으로 발광하는 열쇠가 레녹의 손에 튀어나았다·
“···!!!!”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뜬 탑주의 표정을 보며 레녹이 그것을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벼락을 쉴 새 없이 튀기면서 발광하는 레녹의 팔뚝만 한 크기의 거대한 열쇠·
구세계의 승천자가 남긴 실패한 대답이나 뇌해술식이라는 첫 번째 세계의 비의를 쥔 뇌제·
“쿤다라로 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도해 볼 일이 하나 남아 있었지·”
뇌제의 열쇠를 대거처럼 들어 올린 레녹이 말했다·
“선뢰지체의 개변· 가능하다면 지금부터 당장 시작해도 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