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6화
이정표(23)
“식신(式神)?”
“주술이나 도술계에서 정의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르자면 술자에게 영육을 저당 잡혀 부림을 당하는 귀신을 일컫는 말이지·”
머피가 검진표의 차트 뒤쪽의 비고란을 보면서 설명했다·
레녹이 오기 전까지 그 나름대로 관련 자료를 확보해두었던 모양·
“속된 표현으로는 사역마라 부르기도 하는데 의미하는 바는 사실 거의 동일하다· 자의로 술자를 보호하는 생명체라고 대충 생각하면 될 것 같군·”
“····”
“물론 나로서도 살아 있는 인간이 그것도 중앙귀족이 이런 일을 당하는 경우는 생전 처음 보지만····”
토르번의 탑주이자 8레벨의 전격계 대마법사·
아켄드리아스 엘 토르번이 수호령수의 식신이 되어버렸다는 머피의 결론·
“잠깐· 뭔가 이상한데·”
레녹조차도 그 생경한 결과에 할 말을 잃어버린 사이 주티야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원래 식신이라는 건 술자의 피나 신체 일부를 사역마에게 먹여서 성립하는 개념이잖아·”
뚱한 얼굴로 수호령수에게 전기를 빨아 먹히는 토르번을 가리킨 주티야가 말했다·
“그렇다면 아켄드리아스가 아니라 그 신체기관을 먹은 견뢰의 영수가 식신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식신화 과정을 지켜보지 못했기에 무어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머피가 주티야의 말에 공손하게 답했다·
“다만 견뢰의 수호령수가 주술이나 도술계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나 상성을 뒤집을 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지 추정만 할 뿐이지요·”
“····”
“명확한 인과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수호령수를 깨워서 보다 정밀한 영능검진을 진행해야 하겠지만-”
“흡혈귀· 뭘 그렇게 거창하게 떠벌리면서 설명하려 드는 게냐·”
그 순간 뚱한 표정으로 지하공동에 비스듬히 드러누운 토르번이 말했다·
“본노의 벼락을 이 뚱뚱한 아룡(兒龍)이 삼켜 성장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탈태가 끝나기 전까지는 아마 돌려주려 하지 않겠지·”
“····”
“지금까지 이 녀석의 반응을 보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순전히 자극과 본능에만 이끌리는 게야·”
팔을 괸 채로 누운 탑주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갓 태어난 수호령수답게 어리고 서투른 것이 보여· 본노가 알아서 할 터이니 방해하지 말거라·”
“····”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머피가 말없이 물러서고 그 말을 듣고 있던 레녹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내 수호령수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면서도 방관하고 있었던 거였나?”
어쩐지 전기 쪽쪽이 신세가 된 뒤에도 반응이 영 미적지근하다고 생각했더니
돌아가는 사태를 이해하면서도 수호령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나·
그를 진료한 머피보다도 자신과 수호령수의 상태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토르번의 모습·
“그야 본노 역시 처음에는 깨달음을 전하는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은 것에 화가 나기는 했지만····”
쿨쿨 잠든 수호령수의 뱃살을 탁탁 두들긴 탑주가 껄껄 웃었다·
“이 녀석을 보다 보니 본노의 마탑에 두고 온 수호령수가 생각나서 말이다· 냉정하고 침착한 본노로서도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만 게지·”
“····”
“진짜 헛소리는····”
주티야가 드물게 한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새끼용의 뱃살을 만지작거린 탑주가 말했다·
“본노도 예전에는 수호령수의 어리광을 종종 받아주고는 했었다· 원래 아이들은 사고도 치고 귀여움도 받으면서 자라야 하지 않겠느냐·”
“자기 내장을 날름 잡아먹힌 사람의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는 아니로군·”
“그럴지도 모르지· 하나 네 수호령수라면 이 녀석 역시 엄연히 벼락의 선택을 받은 존재 아니겠느냐?”
토르번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출신과 태생 종족을 넘어 벼락에게 선택받았다면 누구든 동문이나 마찬가지· 이미 이 돈룡(豚龍)은 본노와 뜻을 함께한 것이나 다름없을지니!”
“····”
수호령수와 소통조차 없이 혼자서 의기투합을 마친 듯한 탑주의 당당한 선언·
누구도 동의하지 못할 법한 소리를 저렇게 확신에 차 외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라고 해야 할까·
냉정 침착과는 아득하게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것이 분명한 미친 노마법사의 광기·
하지만 레녹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알았다· 일단 이대로 추이를 지켜보는 걸로 하지·”
“견뢰 괜찮겠어?”
주티야가 피곤한 듯 눈을 문지르며 물었다·
“보면 알겠지만 가만히 놓아두기만 해도 사고를 치고 다니는 인간이야· 지하공동에 가둬두기만 해도 분명 문제가 생길걸·”
“적어도 벼락에 미쳤다는 일관성은 뚜렷하니까· 괜찮다·”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토르번을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이 노마법사는 스스로의 기준을 벗어난 적이 없다·
벼락의 인과를 생의 첫 번째 자리에 새기고 그 성취와 깨달음을 자격 있는 자에게 전한다·
목숨조차 대뜸 번갯불에 태우려 하지만 그 기준과 판단은 언제나 자신과 타인을 공평하게 향한다·
사고와 판단 결정과 행동 모든 것이 번개처럼 빠르고 강렬하며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새기기에·
반대로 토르번의 대답을 존중하게 되었음을 레녹은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기를 이해하고 있다면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만 부탁하지·”
“나참····”
작게 하품하며 쭈그리고 앉은 주티야가 토르번과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아켄드리아스· 당신이 수호령수에게 자기 내장을 홀랑 내준 덕분에 우리도 이 마탑에 같이 머무르고 있어·”
“그래서?”
“수호령수의 탈태든 영역의 회수든 빨리 해결하도록 해· 언제까지 이 도시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까·”
주티야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원로원이 지켜보고 있어· 우리가 장례의식을 끝내지 않고 이 도시에 머무르면 분명 손을 쓰려 할 거야·”
“본노가 알 바는 아니로군·”
탑주가 뻔뻔하게 지껄였다·
“수호령수의 성장과는 별개로 본노는 이 탑에서 사질에게 깨달음을 마저 전해줄 생각이니 말이다·”
“뭐?”
“이 아룡에게 본노의 전격을 빨아 먹히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질이 한 말에 틀린 구석이 없더군·”
팔짱을 낀 탑주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노가 생에 전반에 걸쳐 얻은 깨달음을 후대에 남기는 일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재빠르게 끝내려 한 것이 어리석은 오만이었을진저·”
“난 당신에게 마법을 배우겠다 말한 적이 없는데·”
어이가 없는 듯한 레녹의 말을 모른 척한 토르번이 말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본노는 탑에 머물면서 사질에게 본노의 심득을 전수할 예정이니· 방해하지 말도록 하여라·”
“····”
멍하니 주저앉아 뺨을 긁적이던 주티야가 물었다·
“미안하지만 네 용에게 한 번만 더 이 작자를 괴롭혀달라고 부탁해도 돼?”
* * *
[49구역에서 발발했던 토르번 마탑주와 견뢰의 전투를 두고 발칸 전역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8레벨의 전격계 대마법사 두 사람이 충돌한 것을 두고 추가적인 피해를 우려하는 시민들의 반응이···]
[시정부에서는 구체적인 정황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으나 현재 유의미한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전문가들 중에서는 현 상황을 일전에 있었던 천번의 사태와 겹쳐보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요·]
[중앙의회에서 주관한 청문회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습된 뒤에도 멈추지 않는 대마법사의 폭거를 두고 세간에서는-]
레녹과 토르번의 전투가 펼쳐진 외곽구역에 대해서는 소문이 날대로 난 상황·
언론과 미디어를 타고 뻗어나간 두 마법사의 충돌을 두고 발칸 전역에서 반응이 뜨겁다·
어느 채널이나 회선을 틀어도 관련 소식이 드문드문 들리고 관련 소식을 전문으로 다루는 채널들도 간간이 보일 정도·
그중에서는 발칸의 군사전문가와 학자들이 모여서 이번 사태에 대해 논평을 하는 곳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토르번 마탑주의 신변을 견뢰가 어떤 식으로 관리하고 있느냐의 문제일 겁니다·]
화면 속에서 정장을 풀어헤친 중년 남성이 붉어진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토르번 마탑주가 견뢰에게 패배한 것이 확실시되는 지금 발칸 시정부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겠죠·]
[최악의 사태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토르번 마탑 측에서 발칸에 개입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패널에 앉아 있던 노교수가 무거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토르번 마탑은 현재 전쟁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여러 내전에 마법사를 파견하는 극도로 위험한 무력집단입니다·]
[마탑이라는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군요·]
[그렇습니다· 그 호전적인 마탑이 탑주의 패배를 두고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할 수 없는 셈이지요·]
사회자의 맞장구에 전문가들이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토르번 마탑이 전쟁사업을 통해 대륙 전역에서 손꼽힐 정도로 막대한 자산을 확보했다는 사실은 유명하지요·]
[마탑이 워낙 특수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어 대륙 어디서도 그들의 작전정보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말도 있습니다·]
[수백 년이 넘게 이어져 온 마탑의 총본산은 대부분 개성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습니까· 현재 탑주가 실종된 블레이버 마탑도····]
우연히 돌린 채널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꽤나 흥미롭다·
레녹과 토르번 탑주의 격돌만큼이나 차후 마탑의 개입을 걱정하는 듯한 패널들의 의견·
그만큼 현재 대륙 전역에서 토르번 마탑의 위상이나 취급이 극히 위험한 수준에 다다랐다는 뜻이겠지·
알고는 있다·
반으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시절 그 기반에 토르번의 전격마법이 지닌 악명 역시 섞여 있었다는 것을·
오히려 지금까지 놀라울 정도로 토르번과 교류가 없이 쭉 지내왔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지·
그만큼 레녹 역시 토르번 마탑의 힘이나 위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런 진지한 고민을 하다가 탑의 아래를 내려다보면 한 방정맞은 노마법사가 모든 고민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화면송출기· 전력효율이 너무 약해서 써먹을 수가 없군· 조금 더 성능이 좋은 물건은 없는 게냐?”
새로운 세상에 떨어진 것처럼 마탑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물건에 호기심을 보이는 토르번의 모습·
사방에서 운반되는 아이템이나 아티팩트를 반짝이는 눈으로 구경하다가 참지 못하고 집어든다·
“호오 이 술식 투사장치는 굉장히 특이한 전자파를 사용하는군· 혹시 본노의 몸에 직접 쏴봐도 되겠느냐?”
퍼엉!!
“합성전기를 충전해서 배터리의 성능을 대폭 늘린 압축전지라고? 합성전기라는 건 대체 무슨 느낌인 게지?”
쾅!!
“이것이 예의 공용마법 학습장치인가···! 바일런 교수라는 작자는 언제 공용마법에 전격마법을 추가해 주는 게냐?”
양손으로 학습장치를 번쩍 치켜든 채 눈을 반짝거리면서 전원버튼을 누르는 모습·
주변에서 경악하는 시선을 무시하고 여기저기를 들쑤시는 토르번을 보며 레녹이 쓰게 웃었다·
“····”
탑주가 수호령수의 식신이 된 시점에서 마탑에게 유의미한 위험요소는 아니게 된 바·
머피의 진료가 끝난 뒤 레녹은 토르번의 신변을 탑 안에서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49구역에서 벌어진 레녹과 토르번의 싸움이 워낙 요란했던 만큼 이 도시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다·
토르번이 레녹의 마탑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굳이 그를 지하공동에 감춰둘 이유가 없다·
차라리 대놓고 마탑 내부를 활보하게 하여 레녹과 토르번의 존재를 외부에 과시하는 편이 더 낫겠지·
하지만 아켄드리아스 엘 토르번이 얼마나 맛이 간 마법사인지 레녹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배터리를 씹어먹는 건 그만두지·”
“아 왔느냐·”
빠직!!
한 손으로 굵직한 전지를 노려보다 막 입에 물어보려던 탑주가 히죽 웃었다·
레녹이 황당한 표정으로 탑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뇌생명체도 그딴 식으로 전력을 흡수하지는 않을 거다· 뭘 하고 싶은 거지?”
“으으음···!!”
배터리 끝을 씹자 망가진 전지 사이로 튀어나온 전류가 탑주의 혀를 타고 흘렀다·
새파란 전류가닥이 토르번의 이빨과 혀를 타고 목구멍을 타고 회전한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전류가 발광하며 탑주의 피부 아래를 새파랗게 비추었다·
파지지지직!!!
“으아아····”
건장한 체격의 노인 그 몸 전체가 새파란 뇌광으로 투시되는 듯한 기묘한 현상·
주변에서 아이템을 운반하던 사업자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물러선다·
하지만 토르번은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물거리던 전격을 퉤 뱉어내며 말했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군· 한정된 전지 안에 용량을 압축하기 위해서 순도를 낮춘 게냐·”
“그걸 꼭 먹어봐야만 알 수 있는 거였나?”
“합성전기라는 것이 어떤 맛일지 궁금해서 말이다·”
양손으로 번갯불을 튀겨 부서진 배터리를 증발시킨 토르번이 씩 웃었다·
“신기한 것이 있다면 직접 사용해 보고 맞아보고 그래도 부족하다면 먹어보기라도 해야지·”
“····”
탑주가 껄껄 웃으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이 나이를 먹고 나서도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 그런 의미에서 네 마탑은 실로 좋은 학당이로구나·”
“당신 같은 대마법사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마탑은 아니었다만····”
레녹의 마탑은 제니가 주도하는 아이템 사업을 중심으로 협력업체와 사업분야를 확장시킨 장소·
마탑이 문을 열고 닫는 모든 시간 동안 온갖 아티팩트와 아이템이 드나들고 있다·
인근 번화가를 개편해 유통망을 정립한 지금은 한날한시도 물자의 흐름이 멈추는 일이 없을 정도·
천번의 신분으로 49구역을 박살 낸 피해조차 구역 재공사의 명분으로 삼은 제니의 솜씨였지만-
“세상의 모든 기계장비는 전력과 마력에 기반하는 바· 그렇다면 전격마법의 대종사로서 능히 그러한 장비들을 시험할 의무가 있을지니·”
내세우듯 어깨를 편 탑주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본노는 탑주로서 그런 새로운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가슴 깊이 열려 있다·”
“그냥 당신의 호기심을 대충 전격마법과 엮여서 핑계 대고 있는 것 아닌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레녹이 손을 들어 올리자 두 사람이 순식간에 지하공동으로 이동했다·
팟!!
“으음?”
“그런 이상한 이유는 관심 없으니 선뢰지체(仙雷之體)에 대해 마저 이야기를 끝내도록 하지·”
탑주와 레녹 자신을 지하공동으로 전이시킨 레녹이 말했다·
“방식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그릇을 넓힌다는 선뢰지체의 개념에는 흥미가 있다· 가능하다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 이론에 대해 배우고 싶군·”
아켄드리아스 엘 토르번과 싸우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그가 레녹에게 때려 박으려고 했던 벼락의 전승·
레녹 역시 그 술식과 힘의 가치에 대해 아직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깨달음을 전수하겠다고 날뛰는 게 아니라 이론을 설명하고 학습과 수련을 병행하는 형태로· 이해하겠나?”
“으음··· 본노는 잘 모르겠군·”
고민에 잠겨 있던 토르번이 말했다·
“네 육체가 현재 뇌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라는 것은 이해했다· 하나 뇌화를 통해 깨달음을 전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하면 될 일·”
“····”
“경지에 오른 마법사들에게는 오직 깨달음이 전부이거늘 어찌 효율이 낮은 수련이나 학습이 필요하단 말이더냐?”
“애초에 그런 수련이나 학습이 내게 있어 결코 효율이 낮지 않기 때문이지·”
풀썩!
지팡이를 벽에 기대고 그 위에 그림자코트를 벗어 걸어둔다·
소매를 풀고 팔을 걷어붙인 레녹이 걸어 나오자 탑주의 눈빛이 순식간에 진중하게 변했다·
핏줄이 비치는 레녹의 팔을 바라보던 탑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창백하군· 그리고 흐릿해·”
굳은 표정으로 레녹을 바라보던 토르번이 고개를 꺾으면서 물었다·
“형태만을 겨우 갖추고 있을 뿐 네 몸에서는 그 이상의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오랜 전투로 인한 부상이 여생을 앗아간 것이냐?”
“몸을 뇌전으로 바꾸는 뇌화(雷化)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지·”
파직!!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려 팔뚝 위로 뇌전을 두르며 말했다·
“뇌전의 조작과 방출은 상관없지만 육체에 직접 간섭하는 성질변화는 후일을 기약할 수 없을 테니까·”
“····”
“당신이 영역을 사용해 내 몸을 강제로 뇌화시켰다면 틀림없이 부작용이 생겼겠지·”
파츠츠츠!!
푸른 전격을 얇게 펴서 팔뚝 위로 두른다·
팔뚝 위에 뒤덮인 뇌전이 수십 개의 날카로운 가시처럼 일어섰다 다시 수십 갈래로 갈라졌다·
수십 갈래로 갈라진 뇌전의 파편이 팔뚝 위에서 서로 이어 붙으며 합쳐졌다 나뉘기를 반복한다·
키이이잉···!!
작은 전격의 호수 위에서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떨어지는 듯한 신묘한 움직임·
“호오····”
감탄을 숨기지 못하는 탑주를 보며 레녹이 물었다·
“당신이 보기에 내 마력조작의 정밀도는 어떻지?”
“···초월해 있구나·”
레녹의 전격조작에서 눈을 떼지 못한 탑주가 나직하게 말했다·
“본노가 본 그 어떤 마법사보다도 유려하고 완벽하다· 8레벨의 술사가 이론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를 진즉에 넘어섰군·”
“····”
“믿을 수가 없군· 후계를 찾아 헤매는 기나긴 인고의 시간 끝에 이런 기적을 발견하게 될 줄은····”
한없이 진중하게 느껴지는 탑주의 얼굴 속에서 불신과 환희가 동시에 교차한다·
하지만 그는 이내 순식간에 감정을 다잡고 진지한 얼굴로 레녹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네가 지닌 가장 큰 축복이자 자산이구나·”
“····”
“지금 이것을 본노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 감각 자체가 네 성명절기이기 때문이겠지?”
토르번의 말이 틀리지 않다·
레녹이 지닌 모든 재능을 통틀어서 마력조작은 가장 자신이 있는 소질 중 하나였으니·
처음 마법을 깨우치고 익힌 뒤로 레녹은 승천자를 상대로도 마력조작에서 밀릴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유약한 몸을 이끌고 온갖 괴물들과의 전투에서 대등하게 승부를 겨룰 수 있던 레녹의 기원·
토르번 정도 대마법사라면 이것을 잠시 보는 것만으로 그 가치를 알아보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던 것이다·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어떤 설명을 듣고 싶은지 당장 상세히 고하거라·”
그런 레녹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탑주의 눈동자는 비할 데 없는 열의로 번뜩이고 있었다·
“본노는 이미 결심을 마쳤으니·
당장이라도 레녹의 마력조작을 빌려 그 몸 안에 깨달음을 새겨 넣고 싶어 하는 듯한 탑주의 말·
레녹은 그런 탑주를 보며 마력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선뢰지체(仙雷之體)의 구결과 체맥의 변화 과정· 그 부분에 대해 직접 설명을 듣고 싶군·”
“체맥의 변화라?”
“당신은 나를 뇌화시킨 뒤 직접 내 몸을 교정하려고 했다· 그건 애초에 체질을 개변하는 과정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레녹이 답했다·
“그 정보가 필요해· 이론을 이해하고 나면 거기서부터는 내가 스스로 조정을 거칠 생각이다· 당신이 말하는 모든 인과와 상성에 선행하는 극뢰를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군· 육체개변을 이론만 듣고 스스로 일구어내겠다는 것이냐·”
레녹의 말을 이해한 탑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야 네 자질이라면 분명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준비?”
“위계를 초월한 초인의 육신이란 정신이나 심상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토르번이 말했다·
“최소한 네 근원심상을 풀어놓을 장소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네 심신의 조화를 도울 영약이나 촉매도 필요하겠지·”
“····”
“물론 본노로서는 그러한 준비물이 마련된 장소에 대해 알고 있다만····”
뒷짐을 진 토르번이 물끄러미 지하공동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장소나 준비물을 굳이 찾아다닐 필요는 없을 듯하구나·”
“···뭐?”
파직!!
그 순간 레녹의 뇌리를 짓누르는 아주 거대한 기척이 느껴졌다·
마력감지에 걸리는 수준이 아니라 탑의 권역을 통째로 짓뭉개는 듯한 압도적인 염상·
사고를 짓누르고 판단을 끊어버리는 수준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
“···!!”
탑주를 굳이 재촉할 시간조차 없었다·
파앗!!
권역 위쪽으로 드러나는 기척을 인지하자마자 공간전이를 발동·
마탑 정상에 선 레녹이 하늘을 세로로 쪼개는 거대한 뇌광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저건····”
파직 파직 파직···!!!!
먹구름 낀 하늘 위로 파랗게 번뜩이는 번개의 눈동자가 레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벼락의 눈동자가 서서히 눈을 뜨면서 사방의 구름과 공간을 밀어젖히고 균열을 만들었다·
그렇게 갈라진 균열이 마침내 하나의 [문] 자체가 되어 공간마저 열어젖힌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균열 저편에서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아주 거대한 금속의 비행체가 튀어나왔다·
등장과 동시에 강렬한 뇌광을 팔방에 흩뿌리며 사나운 천둥소리를 가감 없이 내뿜는 폭거·
아주 거대하고 강력한 엔진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펄펄 끓으면서 하늘 위를 비행하는 듯하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대한 출력과 무게를 품은 거대한 요새가 느닷없이 발칸 상공에 나타난 기현상·
[천궁비상군체 전쟁마탑 토르번· 발칸 외곽구역 좌표 도약 완료·]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엔진 덩어리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견뢰의 마탑으로 추정되는 비처 권역 감지· 마탑 최상층에서 대마법사의 기척 포착·]
“····”
휘오오오!!!
권역 상공에 떠오르는 것도 모자라 49구역 시가지를 뒤덮고도 남을만큼 압도적인 면적·
요새 아래쪽으로 터져 나오는 강렬한 뇌광이 저 거대한 요새 전체를 떠받치고 좌표를 고정한다·
부유섬 아래쪽에서 번뜩이는 뇌명성이 레녹을 날카롭게 비춘 그 순간·
[탑의 수호령수 대상지정· 어전(御前) 결투의식 개시·]
파직!!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레녹은 벼락이 몰아치는 거대한 성소 한복판에 서 있었다·
쿠구구구구!!!!
새파란 뇌전이 성소의 천장과 벽을 타고 흐르면서 광원을 대신한다·
사방에서 모인 벼락이 레녹의 눈앞에서 회전하며 특정한 형태를 갖추고 솟구쳤다·
[크르르르릉!!!!]
눈이 부실만큼 강렬한 전격을 머금은 거대한 사자가 거칠게 포효하며 내리찍혔다·
전쟁마탑 토르번의 권역에서 태어나 자란 수호령수가 살기어린 뇌성을 터트린 순간·
레녹이 말없이 자신의 등 뒤에서 졸고 있는 새끼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쿨쿨·]
레녹의 뒤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잠에 빠진 새끼용의 모습·
수호령수를 바라보던 레녹이 성소의 제단 위에 선 마법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아니라 수호령수를 지정해 의식에 끌어들이다니 요령이 좋군·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모양이야·”
저들은 레녹이 아니라 수호령수를 상대로 의식을 걸어서 영수를 강제로 소환시켰다·
수호령수를 상대로 의식을 걸었기에 레녹 역시 자의로 그들을 따라 들어왔을 뿐·
하지만 볼일이 있던 것이 수호령수 쪽이 아니라는 것을 양쪽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견뢰·”
성소에 설치된 제단에서 앞으로 나선 선이 굵은 외모를 지닌 여성이 입을 열었다·
자신의 키보다 큰 지팡이를 짚고 푸른 뇌전을 휘감은 신비로운 기척·
“본 전쟁마탑은 탑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소실된 좌표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레녹이 미간을 찌푸린 사이 여성이 말했다·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탑을 이 근방까지 전이시킬 수밖에 없었죠·”
“····”
“서로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겠지요·”
대답하지 않는 레녹을 담담한 눈길로 내려다보던 여성이 물었다·
“탑주님을 돌려주시겠습니까?”
“그보다는 어떤 방법으로 내 수호령수를 소환한 건지 설명을 듣고 싶은데·”
레녹이 반문했다·
“수호령수를 대상으로 하는 저주나 의식에 대해 좋은 기억이 없군·”
레녹의 수호령수가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다고 해도 영수를 강제로 소환시킬 수 있다는 건 이상한 일·
아마 다른 마탑의 수호령수와 대면하는 것을 조건으로 특정한 의식에 강제로 끌어들인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여성은 레녹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전 의식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할 뿐· 탑주님의 행방만 알려주신다면-”
[···쿠웅?]
그 순간 잠들어 있던 새끼용이 눈을 부비적대면서 깨어났다·
침을 흘리면서 꾸벅거리다 자신을 노려보는 사자를 마주한 새끼용의 모습·
멍하니 토르번의 수호령수를 바라보던 새끼용이 이윽고 사자를 향해 두툼한 앞발을 들어올렸다·
[바우·]
파직!!
떨떠름한 표정의 토르번 마탑주가 새끼용의 앞에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