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5화
이정표(22)
거대도시 발칸 3번 구역· 에이리어 끝에 위치한 오래된 성당·
기도하는 여신상이 지켜보는 앞에서 새카만 흑발을 지닌 노인이 홀로 장기를 두고 있었다·
나이가 적지 않은데도 그 머리칼과 눈동자는 선명하기 그지없는 흑색이다·
휘오오···!!
고요한 바람을 맞으면서 흑돌을 쥔 채 장기판을 주시하는 노인의 모습·
바람이 떠난 맞은 편 자리에 느슨한 가디건을 걸친 여성이 앉아 있었다·
여성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고 흑돌을 내려놓은 노인이 말했다·
“하이베르크· 늦었구려·”
“당신이 빠른 거지 야시르·”
두꺼운 안경을 추켜올린 여성이 표정을 찡그렸다·
“34국면 A18 수· 난 이렇게 안 둬· 무르고 다시 해·”
“다시 하기란 없소 하이베르크·”
흑의 노인이 중후한 목소리로 웃었다·
“이제 우리에게 ‘다시’라는 말은 허락되지 않는 게지·”
“····”
“그렇지만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구려·”
흑돌을 내려놓은 노인의 눈이 오래전의 기억을 회상하듯 흐릿해졌다·
“예전에는 당신이 이런 삶을 받아들일 거라곤 생각조차 할 수 없었지·”
“놀리는 거야?”
“그럴 리가· 반대요·”
백돌을 쥐고 내려놓은 여성을 보며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필 당신이··· 중앙이 아닌 바깥의 편에 설 줄은 몰랐을 뿐·”
“쓸데없이 돌려 말하는 버릇은 여전하네·”
여성이 평탄한 어조로 대꾸했다·
“상원의장으로 그만큼 오래 일했으면 아랫것들을 배려하는 방법도 배웠어야지·”
“····”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없이 무거운 침묵을 안고 쥐고 있던 흑돌을 내려두었을 뿐·
탁·
장기판의 백돌을 흑돌로 하나씩 뒤집어엎으면서 노인이 말했다·
“명왕이 움직이고 있소· 오래지 않아 실낙원의 초입에 도착하겠지·”
“····”
“나는 그가····”
망설이던 노인이 말했다·
“진와가 쌓아 올린 업을 무시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소·”
“흑율(黑律)의 마지막 핏줄이 그렇게 정의로운 성격은 아니었을 텐데·”
“그렇지· 하지만 그 사내는··· 자신과 타인에게 굉장히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 자요·”
여성이 내려놓은 백돌을 보며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 흑마법사가 가비행을 다시 시작한 이상 결코 어정쩡한 곳에서 마무리를 지으려 들지는 않겠지·”
“····”
“충돌은 필연· 중요한 것은 이후의 상황을 통제하는 일이오·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폐쇄구역을 보호하는 조치가-”
“도움을 요청할 상대를 잘못 찾은 거 아니야?”
여성이 백돌을 옮기면서 대답했다·
“나는 기록의 재능을 일부 물려받았을 뿐 승천자의 일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야· 나로서는 어떻게 손댈 수 있는 저주가 아니지·”
“····”
“중앙에 묶이지 않고 스스로 초월을 이뤄낸 승천자들은 더욱 그래· 천견 정도로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않을걸·”
“하지만····”
“하지만 발칸에 머무르는 동안이라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장기판 위로 빠르게 뒤집히는 흑돌을 보며 여성이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이 주시하는 그 마법사가 나도 나름 마음에 들었거든·”
“····”
“대놓고 이쪽을 이용할 거라 말하더라· 뭔가를 대비하고 싶어 하던데 그게 뭔지 궁금해졌어·”
레녹의 앞에서 짓고 있던 나른한 웃음과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냉소가 섞인 싸늘함·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방해하지 마· 그런 사소한 부탁도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 * *
“반· 마탑 주변 구역이 박살 나는 건 이제 신경도 잘 안 쓰이거든?”
발칸 49구역 견뢰의 마탑· 최상층에 위치한 탑주의 집무실·
창문 밖으로 한참 수복작업이 진행 중인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며 제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탑 주변에 저런 흉물이 자리 잡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야· 심각한 비상사태라고·”
“···흉물이라·”
레녹이 제니의 시선을 따라 창밖 하늘 위로 펼쳐진 초원의 풍경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중앙도시의 장례지도사 사이러스 아르델티오의 자성영역 장송귀해선(葬送歸海船)·
마탑 상공에 새롭게 자리 잡은 저 영역의 형상이 제니의 눈에는 영 곱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
아나테마의 장례의식이 끝나고 49구역을 뒤집어놓은 전투가 끝난 며칠 뒤·
레녹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마탑의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귀족들을 탑에 들였지만 그들이 자리를 잡고 주변 사람들이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상황·
레녹이 그 중간과정을 중재하고 있음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
“웃을 일이 아니야· 지금 이 도시에서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알아?”
레녹을 향해 돌아선 제니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미친 마법사가 이제 사람을 죽이고 묻을 묘지까지 직접 공수해 왔다고 수군거린다고·”
“····”
“어떻게 위치라도 바꾸고 싶어서 장의사라는 귀족한테 접촉했는데 대답을 들은 사람이 없어· 완전히 소통불가야·”
“마탑 후문 연무장을 개조해서 공간을 조금 마련해 보도록 하지·”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례지도사와는 레녹도 멀쩡하게 소통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니 다른 사람들이 어땠을지는 뻔하다·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나을 지경일 테니 레녹이 최소한 중재를 해주어야 할 터·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은 아니야· 적당한 공간이 생긴다면 자리를 옮기는 것 정도는 받아들일 거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지만····”
중앙귀족들이 탑에 머무르는 것은 레녹의 요구로 이뤄진 일인 만큼 가능한 편의를 봐줄 필요가 있다·
제니 역시 그것을 알기에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이렇게 레녹을 찾아와서 그간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일 터·
한참 정독하고 있던 흑신마공(黑神魔功)의 마도서를 집어 든 레녹이 말했다·
“주티야 하이베르크는 어떻지?”
“똑같이 이상한 사람이긴 한데 저 장의사랑은 완전히 반대야·”
제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루 종일 발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자정에 잠깐 탑에 들리고 나가더라· 한곳에 머물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따로 무언가를 요구한 적은 없나?”
“탑에서 외근을 나가는 사람에게는 경비를 지원해 주거든· 이틀째부터 거절했는데 이유가 뭔 줄 알아?”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제니가 책상을 탁탁 두들겼다·
“자기가 하루에 버는 돈이 그것보다 더 많대· 예산을 아끼라더라·”
“제공되는 경비가 적지는 않을 텐데· 벌써 발칸에서 수입원을 찾은 건가····”
포섭한 귀족들이 형식적으로만 탑에 묶여 있을 뿐 애초에 탑의 일원이 될 수 없음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두 귀족이 거대도시에서 보여주는 행보는 꽤나 특이한 면이 있다·
고향이 멸망한 뒤 평생 동안 대륙을 배회하던 이들답게 홀로 생활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고 해야 할까·
“아 그리고 이거는 좀 다른 이야기인데· 자기한테 전산을 맡길 생각이 있냐던데·”
“전산?”
“일주일 안으로 탑의 모든 시스템을 정리해서 프로세스 효율을 30% 가까이 높여줄 수 있다더라·”
“그건····”
아르스노바의 서기로 일하던 주티야가 하는 말이라면 그 터무니없는 말도 허언은 아닐 터·
레녹이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사이 옆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쥬르의 손녀야·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되지·”
“···!!”
제니의 뒤에서 선글라스를 쓴 채 멀뚱멀뚱 서 있는 주티야의 모습·
한발 늦게 주티야의 존재를 눈치챈 제니가 화들짝 놀라 레녹 쪽으로 물러섰다·
한참 여행을 즐기는 관광객처럼 한 손에는 팜플렛을 들고 어디서 사 온 스무디를 휘젓는다·
하지만 주티야는 제니의 격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했던 건 서무보다는 전산업무 쪽에 자신이 있다는 거야· 어디까지나 예시였다고·”
“아 아하····”
“견뢰는 놀고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남의 밥을 빌어먹으면서 놀 생각은 없으니까· 일손이 부족하다면 말해주면 좋겠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니를 두고 물끄러미 주티야를 바라본 레녹이 물었다·
“마탑에 붙어 있는 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도시 여행은 충분히 즐겼나?”
“한참 부족하지· 너 여기 살면서도 거대도시가 얼마나 넓은지 잘 모르는구나·”
주티야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팜플렛을 레녹의 앞에 척 내밀었다·
“발칸의 주요 관광스팟을 방문하는 알짜배기 투어코스만 추려도 소요기간이 두 달이 넘어· 고작 며칠 만에 모두 돌아볼 수는 없다고·”
“그렇군·”
“오늘은 발칸 중심구역 쪽에 갔다 왔는데 오랜만에 아는 얼굴을 만나니까 즐겁더라·”
“····”
“내일은 31구역에 있는 식물원에 갈 거야· 거기서 또 지인을 만나기로 했거든· 도시가 넓고 사람이 많으니까 이런 재미가 있네·”
거대도시를 돌아보는 일을 충분히 만끽하고 있는 듯한 주티야의 모습·
기왕 시간이 난 김에 발칸에 거주하는 지인들을 만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왜 하필 주티야가 오늘 시간에 맞춰 마탑에 돌아온 것인지 레녹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견뢰· 오늘 토르번에 대해 결과가 나오는 거 맞지?”
빨대로 스무디를 홀짝이던 주티야가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생각보다 즐겁긴 하지만 적어도 언제까지 여기 머물러야 하는지는 알아야겠어· 계속 시간을 축내고 있을 수는 없잖아?”
“지금쯤이면 슬슬 진료가 끝났을 거다·”
레녹이 흑신마공의 마도서를 품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지하공동으로 가지·”
“···하아·”
제니 역시 레녹이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깨닫고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마탑 근처 상공에서 꼼짝도 않는 사이러스와 하루도 빠짐없이 발칸을 돌아다니는 주티야·
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가 마탑 지하공동 안에 잠들어 있었다·
파바밧!!
“···윽·”
지하공동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을 강타하는 벼락의 광채에 제니가 표정을 찌푸렸다·
흑요석으로 이뤄진 거대한 마탑 지하공동을 눈부시게 밝히는 전격·
공동 전체를 요란하게 울리는 뇌전의 울림 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파직 파직···!!!
선이 굵은 외모· 나이에 걸맞지 않은 강렬한 생동감·
팔짱을 낀 채 입을 굳게 다문 것만으로 함부로 말을 걸기 힘든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시선을 빼앗는 것은 그 몸을 휘감고 타오르는 강렬한 전류의 광채·
빠지지직!!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 저릿한 번개의 숨결이 흘러나오며 사방을 눈부시게 밝힌다·
눈썹을 꿈틀거릴 때마다 뇌광이 터져 나와 천둥소리를 내고 머리칼 사이로 전격이 번뜩인다·
마치 살아 있는 벼락이 된 것처럼 요란하게 번쩍이고 발광하는 노마법사의 모습·
레녹의 뒤에 서 있던 주티야가 나른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켄드리아스 깨어 있어?”
“···하이베르크·”
힐끔 눈을 뜬 토르번이 주티야의 얼굴을 본 뒤 코웃음을 쳤다·
“아직 살아 있었군· 내 사질(師姪)의 자비에 감사하도록 하거라·”
“그거 방금 내가 막 당신한테 하려던 말이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린 주티야가 물었다·
“견뢰한테 패배하고 살아남은 당신이야말로 그의 자비에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 이래서 마법에 대해 모르는 문외한은·”
토르번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노는 이미 사질과 피보다 진한 벼락의 연을 나눈 사이다· 찰나의 승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거늘 어째서 본노가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는 게냐·”
“····”
주티야가 할 말을 잃고 제니가 어리둥절한 듯 시선을 돌렸다·
“진짜야?”
레녹이 정색했다·
“벼락의 연은커녕 통성명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다만·”
하지만 토르번은 그런 레녹의 반응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대들이야말로 사질의 허락도 없이 장례의식을 벌인 대가를 단단히 치렀을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었군· 놀라운 일이로다·”
“미안하지만 우리 발칸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같은 편 아니었던가?”
레녹과 신명 나게 싸울 때는 언제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레녹의 편에서 귀족들을 질책하는 토르번의 언행·
주티야조차도 그 황당무계한 태세전환에 고개를 갸웃거릴 지경이다·
“에잇 되었다!!”
노성과 함께 손을 들어 올린 토르번이 선언했다·
“본노가 이 자리에서 자비로운 사질을 대신해 낡은 귀족들의 무례에 경을 칠 것이니···!!”
파지지직!!
토르번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그의 몸에서 폭발적인 뇌광이 솟구쳤다·
어두운 지하공동을 순식간에 새파랗게 밝히면서 점철하는 강렬한 기세·
주티야의 심드렁한 얼굴이 뇌광에 물들고 제니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다·
영역을 파훼당해 패배한 마법사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강한 마력에 레녹이 개입해야 하나 고민한 순간·
[아붑·]
덥석!!
탑주의 뒤에서 일어선 새하얀 새끼용이 그의 머리를 덥석 물어버렸다·
“~~~~!!!!!”
소리 없는 노성을 지르는 탑주를 무시하고 눈을 감은 채 잠꼬대를 하듯 우물거리는 수호령수의 모습·
그때마다 탑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전격이 급격하게 수호령수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슈우우웅···!!
“···와·”
“····”
멍하니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주티야와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버린 제니의 모습·
중앙의 귀족조차도 토르번이 저런 모습이 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듯하다·
“쿨럭 쿨럭!!”
마음껏 전기를 빨아먹은 수호령수가 입을 벌린 뒤에야 힘겹게 기침하면서 빠져나온 토르번의 모습·
침으로 흠뻑 젖은 노마법사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돌아서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대체 언제까지 본노의 벼락을 빨아먹을 셈이더냐· 당장 일어나지 못해!!”
[쿨쿨·]
탑주의 고성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깊은 잠에 빠진 새끼용의 모습·
아켄드리아스 엘 토르번의 영역을 먹어치운 뒤로 수호령수는 잠에 든 채로 깨어나지 않고 있다·
지금처럼 수호령수가 움직이는 것은 모자란 전격을 탑주에게서 쪽쪽이처럼 빨아먹을 때일 뿐·
토르번의 마탑주에서 수호령수의 전기 쪽쪽이로 전락한 아켄드리아스 엘 토르번의 모습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무어라 말하지도 못하고 입을 뻐끔대는 주티야의 옆에서 지하공동의 쪽문이 벌컥 열렸다·
“견뢰 왔군·”
“머피·”
휠체어에 앉아 있는 수척한 인상의 의사 알레한드로 머피가 손에 든 검진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에 딱 맞췄어· 방금 막 아켄드리아스 엘 토르번의 진료가 끝났다·”
탑주가 허무하게 기절해버리면서 전투가 끝났고 이후 토르번의 신변을 마탑 지하공동에 잡아 놓았던 바·
레녹은 그 뒤로 탑주의 몸을 검사하기 위해 생체검진의 전문의인 알레한드로 머피를 호출했던 것이다·
머피는 레녹의 건강검진을 맡은 것은 물론이고 여러 고위 마법사들을 진료해 본 경험이 있는 의사·
그만한 의사라면 이번 일에서 토르번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비교적 명확하게 짚어낼 수 있겠지·
하지만 머피를 알고 있던 것은 레녹 하나만이 아닌 것 같았다·
“알레한드로·”
머피를 향해 시선을 돌린 주티야가 말했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그녀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살아 있었구나·”
“하이베르크 님·”
망설이던 머피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전에 볼 수 없었던 공손하기 그지없는 머피의 태도·
알레한드로 머피는 중앙도시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생존자들 중 한 명·
그가 아르스노바에서도 뛰어난 의사였다면 그를 기억하는 귀족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주티야의 반응은 단순히 머피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발칸에서 여러 지인들을 만나고 다니던 그녀조차 머피를 여기서 만날지는 몰랐다는 듯한 반응·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녹이 물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인가?”
“···아니· 그건 내가 하이베르크 님과 알아서 하지·”
망설이던 머피가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검진표를 펼쳐들었다·
“검진 결과부터 이야기하겠다· 본인이 있는 곳에서 결과를 전하고 싶은데 괜찮겠지?”
“듣지·”
“좋아· 그럼··· 가장 우선적으로 알아야 하는 사실부터 시작하지·”
검진표를 빠르게 들춰보던 머피가 벌렁 드러누운 토르번 마탑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켄드리아스 엘 토르번의 체내에는 심장을 비롯한 주요 장기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뭐?”
“폐와 심장 간장과 신장 같은 장기들의 기능을 전기신호로 대체해서 처리하고 있더군·”
휠체어에 앉아 그래프가 인쇄된 페이지를 휙휙 넘기던 머피가 말했다·
“전반적인 신진대사 수치를 보면 주요장기를 완전히 적출한 것은 아니야· 아마 본인의 장기를 뇌화(雷化)시켜 영역 안에 보관해 두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지·”
“····”
“그래서 네 수호령수가 토르번의 영역을 먹은 것이 문제가 되는거다·”
머피가 탑주의 등 뒤에 잠든 새끼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켄드리아스 엘 토르번의 장기는 지금 뇌화된 채로 수호령수의 뱃속에 삼켜져 있다· 사실상 토르번의 영육(靈肉) 일부가 네 영수와 하나가 된 거지·”
“수호령수와 탑주의 육체가 융합이라도 되어있다는 말인가?”
“영적으로는 비슷한 상태다· 그것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그 소유권을 점유한 상황이지· 이 경우에는 마도의학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 사례를 찾아야 한다·”
“다른 분야라면····”
“이렇게 영육의 일부가 일방적으로 한쪽에 귀속된 경우를 주술이나 도술 쪽에서는-”
표정을 찌푸리고 있던 머피가 말했다·
“식신(式神)이 되었다고 표현하곤 한다·”
“····”
이어지는 침묵·
주티야가 황당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혹시 나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여기 머물러야 하는 건가?”
[아루루룽·]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토르번의 전기를 빨아먹는 수호령수의 잠꼬대가 대답 대신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