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먹는 천재마법사 1033화
이정표(20)
아나테마가 중앙도시에서 추방당하던 마지막 날의 기억· 그가 평생 동안 곱씹고 회고해 왔던 이 순간·
감옥에 갇힌 아나메타를 호송하기 위해 나타난 것은 레녹조차도 본 적이 없던 승천자였다·
9레벨에 도달한 언령술사· 대륙의 공용어를 만들어 퍼트린 초월자·
이제는 중앙의 실낙원에서 인간을 문자 삼아 외신을 흉내 내며 영락해 버린 존재·
승천자 진와(陳蝸)·
“내가 없는 사이 중앙의 의전서열이 많이 무너진 모양이네요·”
아나테마의 마른 목소리를 들은 백발의 여성 진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의 입에서 본래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는 모습·
하지만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실로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실패작 따위에게 내 이명을 부르도록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
“뭐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겠죠· 깨어 있다면 [나와]보지 않겠어요?”
철컥!!
진와가 그렇게 말한 순간 아나테마가 갇힌 감옥의 문이 활짝 열렸다·
감옥 가장 깊은 구석에 쓰러진 아나테마를 보며 진와가 미소 지었다·
“그쪽과 잠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중앙의 귀족조차 저항하지 못하는 시해감옥(時解監獄)의 봉인을 말 한마디로 열어젖히는 그녀의 언령·
하지만 아나테마는 그런 진와의 말에도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께서 분명··· 그대에게 경고하였을 텐데·”
수척한 얼굴로 여성을 응시하던 아나테마가 입을 열었다·
“기어코 살아 있는 인간을 그대의 화신체로 삼은 것인가·”
“흠· 나름대로 꽤 가공을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나테마를 내려다보는 여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진 그녀가 말했다·
“용술사의 눈에는 아직 많이 어설픈가 보네요· 조금 더 화신체의 개성을 죽이는 방향으로 깎아봐야 하나?”
“····”
자신의 얼굴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매만지는 여성의 모습·
레녹은 그런 두 사람의 옆에서 스스로를 진와라 칭한 여성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이 시기부터 전조가 있었던 건가·’
대화의 맥락이 짧아서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이 여자가 진와의 본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진와(陳蝸)의 이명은 역대 모든 승천자들을 통틀어서 꽤 독특한 의미를 담고 있었으니·
공용어를 전파한 그녀의 위업과 기원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적어도 그와 관련된 비밀이 존재하고 있을 터·
침묵하는 아나테마를 향해 진와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움직일 생각이 없다면 이쪽에서 도와드리지요·”
“큭···!!”
으직!
그 순간 아나테마의 멱살이 잡힌 것처럼 그의 몸이 앞으로 처박혔다·
감옥 바닥에 머리를 박은 그의 몸이 강제로 감옥 밖으로 끌려 나왔다·
쾅!!
“여기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던 아나테마가 주변의 풍경을 확인하고 이를 악물었다·
아르스노바 최외곽 변경에 위치해 있는 절경(絶警)· 중죄를 저지른 초인들을 대상으로 천륜에 어긋나는 실험을 자행하는 연구단지·
진와는 시해감옥(時解監獄)이 위치한 중앙 대법원의 지하유탑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아나테마가 갇혀 있던 감옥을 통째로 공간전이시켜 그녀가 있는 자리까지 옮겨 버렸을 뿐·
“하아 하아···!!”
“머리·”
힘겹게 시선을 들어올린 아나테마를 팔짱을 낀 백발의 여성이 웃으면서 내려다본다·
“아직도 높아요·”
“···!!”
쿠우웅!!!
화려한 도포를 흩날리는 진와의 뒤로 수백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도열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찬란한 광채의 갑주· 부드러운 비단· 정교한 예복이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넘실거렸다·
황성 용기병단· 진혼 심문관· 아종융합 기갑부대· 성궁 관측소· 불멸 연성사· 비천 마법연합·
레녹이 알지 못했고 들어본 적도 없는 온갖 이름이 아나테마의 기억 안에서 넘실거렸다·
고오오오···!!!
아르스노바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재능 있고 걸출한 초인들이 단 한 명의 승천자에게 고개를 조아린다·
진와를 향해 보이는 경외가 너무나 선명해서 기억을 들여다보는 레녹조차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 자리에 의지를 내려보내는 것만으로 하늘의 색깔을 바꾸는 승천자의 존재·
도전할 자격을 얻은 초월자는 당대 중앙도시에서도 이 정도 대우를 받았던 것인가·
하지만 진와는 자신을 경배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아무런 감흥조차 느끼지 않는 듯했다·
“아 이래서 언이대장군(言理大將軍)의 자리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
“역시 제가 아니라 제 위상을 향한 숭배는 의미가 없군요· 아니면 이것조차도 운명의회의 늙은이들이 계획한 일이었을까?”
그렇게 말한 진와가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려세웠다·
인파 사이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이 경례를 올리고 장엄한 황금빛이 지평선 끝까지 물결쳤다·
자색 사슬에 묶인 아나테마의 신형이 저항하지 못하고 그녀의 뒤로 끌려 나갔다·
철컹 철컹!!
발에 차이는 사슬소리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흔들린다·
“비색의 부탁이기는 했지만 오늘 이 도시에 온 건 원래 그쪽 때문이 아니라서·”
힘겹게 고개를 숙인 아나테마를 돌아보지도 않고 진와가 나른하게 말했다·
“편람이 도착하기 전에 간단하게 마지막으로 조정만 끝내두도록 할까요·”
수천에 달하는 인파가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진와의 앞에 거대한 장벽이 드리운다·
아나테마조차 가까이 다가선 뒤에야 깨달았을 만큼 ‘인지’ 자체를 왜곡시켜서 위치와 좌표를 숨기는 장벽·
쿠오오···!!
장벽 너머에서 느껴지는 한없이 음습하면서도 위태롭게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기시감·
그 기척에서 익숙한 기시감을 느낀 찰나 장벽 너머에서 소름 끼치는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쿵···!! 쿵···!!!
맨몸으로 땅을 갈아내는 듯하면서도 반대로 잡아 뜯어내는 듯한 기괴한 소리·
“저건···!!”
“그쪽도 운명의회의 장난질에 참가했었다면 알고 있겠죠·”
진와의 화신체가 웃으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실패한 승천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괜찮다면 그쪽에게도 보여줄까요?”
쩌어엉!!!
여성이 읊은 말이 실제하는 언령이 되어 아나테마의 눈앞에 떠오른다·
고대와 현재의 문자가 뒤섞여서 일그러지는 언령이 현실에 새겨진 순간·
진와와 아나테마의 신형이 순식간에 인지의 장벽을 뛰어넘어 공간 내부로 향했다·
[아아아아아아아!!!!]
차르르르르륵!!!!
온몸이 새카맣게 물든 수천의 인간이 검은 사슬에 매인 채 아우성을 친다·
검게 물든 양손으로 땅을 박박 긁어내면서 지옥 끝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을 질렀다·
사슬에 묶여 있는 인간의 구체가 지상을 갈아내면서 지반을 흔들고 뒤집어엎었다·
쿠구구구구!!!!!
장벽 너머 지평선을 까맣게 물들이면서 미친 듯이 회전하는 영락한 초월자·
바라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오염되는 듯한 불결하고 타락한 염상의 집합체에 레녹의 표정 역시 굳어버렸다·
그 섬뜩한 외견을 편람의 우물에서 절대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 들여다보았기 때문·
중앙도시에서 만들어져 인공적으로 실패가 계획된 승천자·
계백(界魄) 아우렐 실포드·
“컥···!!”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아나테마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사슬에 매인 제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는다·
쏟아지는 염상에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범람해 덧칠되어 간다·
하지만 진와는 그런 아나테마의 발작은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도포를 흩날리면서 걸어 나온 그녀가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어내리면서 입을 열었다·
[절제·]
쩌어엉!!
그녀의 언령이 발하는 것과 동시에 강렬한 마력광으로 빛나는 글자가 허공에 떠오른다·
[봉쇄·]
언령의 글자가 허공에 새겨지면서 방대한 파문을 사방으로 내뿜었다·
[부전·]
쩌저저저적!!
진와가 발하는 언령이 엄청난 속도로 연달아 허공에 떠올라 서로 얽혀들어 간다·
눈부시게 발광하는 언령이 저 멀리서 발작하는 인간의 구체 위로 내리찍힌 순간·
[새겨라·]
차르르르륵!!!
서로 얽힌 언령이 새로운 사슬이 되어 인간의 구체를 묶고 그 일부가 되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오!!!!]
사슬에 매인 수천 명의 인간들이 울부짖으면서 진와가 묶은 언령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녀가 직접 새긴 봉쇄와 억제의 언령이 망가지며 초월한 괴물의 사지를 묶고 변질을 틀어막는다·
“제 언령으로 기아스를 더해서 억제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겠어요·”
손짓 한 번으로 아나테마의 앞에서 언령을 거둔 진와가 말했다·
“결국 인공 승천자를 만든다는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네요· 아니 ‘계획대로’ 실패했다고 해야 할까?”
“····”
“운명의회에서는 계백(界魄)이라 부르던데· 그 이름 자체가 너무 노리는 게 노골적이지 않아요?”
대답하지 않는 아나테마를 두고 진와가 웃었다·
“이름에 힘이 깃든다고 하지만 정도가 과하면 언령을 다루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꺼려지거든요·”
아나테마를 바라보는 여성의 얼굴에 싸늘한 냉소가 깃들었다·
“당신의 이름처럼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면 할수록··· 결국 본질에서 비틀리는 법인지라·”
“····”
“아나테마(anathema)· 황제가 그 이름을 준 것은 지금같은 결말을 원해서는 아니었을 텐데·”
“···결말이라·”
아나테마가 처음으로 다른 말을 꺼내 들었다·
허공에 떠오른 언령의 빛이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온전히 비추었다·
레녹이 기억하고 있는 비늘덮인 외견과는 전혀 다른 훤칠한 인상의 젊은 남성·
그가 입술을 씹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황제께서 떠난 순간부터 우리에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지·”
“····”
“그대들 승천자 역시 마찬가지다· 다음이 없는 세계에서 방법을 찾지 못하고 망가지고 있을 뿐·”
웃는 표정의 진와를 보면서 아나테마가 조소했다·
“인간을 화신으로 삼아 외신을 흉내 내는 것조차··· 저 아우렐 실포드를 보며 조바심을 느끼기 때문 아닌가?”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말없이 자신의 손톱을 정돈하던 여성이 말했다·
“저런 반쪽짜리 승천자와 본인을 비교하는게냐· 형벌을 받기 전이라 해도 겁이 없어진 것 아닌가요?”
“흥분했군· 말투가 뒤섞이고 있구나·”
“····”
진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만지작거리다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을 뿐·
[나와·]
파앗!!
아나테마의 몸이 보랏빛으로 물든 벌판 위로 나뒹굴었다·
자수정 사슬에 손목이 묶인 채 순식간에 장벽 밖으로 튕겨나온다·
힘겹게 균형을 잡는 아나테마를 보며 진와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꿇어·]
뿌직!!
아나테마의 무릎이 반대방향으로 뒤틀리며 역관절처럼 짓뭉개진다·
관절과 신경을 찢어발기는 격통에 아나테마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큭···!”
무릎이 반대로 꺾인 채 여성의 앞에 꿇은 기괴한 모습·
아나테마를 따라 감옥 밖으로 나온 레녹이 그 가공할 언령의 힘에 표정을 굳혔다·
‘언령만으로 공간전이와 생체조작을 행하는데 전조조차 없다····’
행동과 대상을 확실하게 지정하는 것도 아니고 명령조의 말 한마디로 주변의 현상을 조작한다·
레녹이 아는 언령술의 한계와 범주를 아득하게 뛰어넘은 초월적인 위력·
이것이 바로 언령술식을 사용해 자격을 손에 넣은 승천자의 힘인가·
[내 언령에 저항조차 못 하면서 그따위로 입을 놀리다니 배짱도 두둑하구나·]
우우우우웅!!!
거침없이 언령을 터트린 여성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려 했으나 승천자의 죽음을 마시려던 죄인에게 들어야 할 말은 아니었다·]
“····”
[선종의 시체를 식인(食人)하고 그 위상을 의태하려던 네놈이 감히 누구에게 조언을 던지는 게냐·]
“그대 역시 살아 있는 인간을 도구 삼아 허락되지 않은 위상을 탐하고 있지 않나····”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든 아나테마가 물었다·
“그대가 신을 흉내 내는 것과 내가 저지른 죄가 무엇이 다르지?”
[····]
“공용어를 만들고 전파해 인간을 긍휼히 여기던 그대를 존경했는데····”
싸늘한 침묵 속에서 힘겹게 웃은 아나테마가 말했다·
“지금은 이렇게 되었군·”
[시간이 됐군·]
무표정한 얼굴로 아나테마의 말을 듣고 있던 진와가 고개를 젖혔다·
[편람이 절경(絶警)에 도착했다·]
그 순간 자색으로 물든 하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비춰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전신이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동체가 하늘 위를 엄청난 속도로 부유하면서 회전한다·
그 형체가 워낙에 빨라서 아나테마의 기억 속에서도 정확한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
하지만 아나테마도 그 기억을 지켜보는 레녹도 알고 있었다·
승천자 편람 우물을 지키는 뱀·
영수로 태어나 승천자가 된 존재가 자신의 본체를 이끌고 중앙도시 상공에 도착해 있었다·
위이이이이잉···!!!
거대한 뱀의 동체가 보랏빛 하늘 위로 회전하면서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원을 그렸다·
자신의 몸으로 원을 그리며 하늘의 바깥에 균열을 내려는 듯한 기묘한 몸짓·
동시에 하늘 위로 아주 거대한 결계법진이 펼쳐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전체를 뒤덮는 그 크기를 짐작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결계법진·
수백 미터에 이르는 편람의 거체를 품고도 남는 결계진 위로 하늘 저편에서 강대한 기척이 연달아 내리꽂혔다·
쿠과과과과!!!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무언가’가 시공을 뛰어넘어 이 곳에 자리한다·
이 별의 사방에 흩어져 있는 승천자들이 행성의 표면을 훑어 의지를 내려보내는 기적·
[선종이 죽음을 흉내내고 편람이 통로가 되어 문을 연다·]
그를 바라보던 진와의 화신체가 말했다·
[진둔이 이 공정을 법진으로 정립하며 비색이 그 존재를 증거하겠지·]
뚜두두둑!!
여성이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목소리는 언령이 되어서 아나테마의 전신에 내리꽂혔다·
[이는 곧 황제가 안배했으나 어긋난 네 운명을 통해 인과율을 이탈한 존재에게 보내는 전언이 될 지니·]
진와가 웃으면서 속삭였다·
[그렇기에 오직 네 이름만이 승천자들이 동의하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진와···!!”
예상치 못한 말에 아나테마가 멈칫거렸지만 진와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아나테마의 말에 대꾸하거나 그와 소통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미련한 진둔이 이번 일에 동의한 것 자체가 네 죄악을 증명하는 바·]
단지 자신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언령을 한 손으로 쥐고 그의 이마 위로 흘려넣었다·
위이이잉···!!!
아나테마의 머리 위로 쌓인 언령이 그의 이마를 파고들며 낙인처럼 내리찍힌다·
그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아나테마가 울부짖은 순간·
아나테마를 바라보던 레녹의 시야가 새하얗게 일그러졌다·
파직!!
새하얗게 명멸하는 기억 속에서 끝이 없는 빛을 마주한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끝난 건가·”
살아 있는 인간을 화신으로 삼았기에 진와의 언령을 사용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승천자의 언령을 대행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몸에는 막대한 부담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진와는 그러한 부담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인간을 도구로 삼아 뜻을 이루어버렸다·
공용어를 전파해 인간을 긍휼히 여기던 예전의 진와와 인간을 재료로 여기는 지금의 그녀·
자신이 해낸 위업조차도 한낱 도구로 삼아 신을 참칭하는 괴물이 되기까지·
말 한마디로 현실을 개변하는 힘을 지닌 저 괴물이 언젠가 레녹이 마주해야 할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
레녹이 그것을 생각하면서 기억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그 순간·
새하얀 빛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아나테마를 마주하고 정신을 차렸다·
“····”
피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아나테마의 모습·
새하얀 빛 속에 몸을 반쯤 파묻은 채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본다·
단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핏발선 눈으로 레녹을 바라보는 모습·
레녹은 그런 아나테마의 얼굴을 확인한 뒤 조용히 몸을 돌려세웠다·
아르마스 폰 아나테마가 평생동안 후회해 왔던 마지막 기억·
기억을 엿본 대가로 그와 이렇게 마주해야 한다면 그 대가 정도는 감내할-
‘···잠깐·’
아직 아나테마의 기억이 끝난 것이 아니다·
끝나지 않은 기억 속에서 아나테마가 맞이한 마지막을 여전히 같이 지켜보고 있었을 뿐·
아나테마는 지금 레녹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녹이 아니라 그의 등 뒤에 위치한-
화악!!
눈이 부실만큼 새하얀 빛으로 물든 벌판·
일렁이는 빛의 바다 속에서 누군가 아나테마를 향해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아나테마의 목소리·
손목을 묶고 있던 자수정 사슬은 완전히 부서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하아 하아···!!”
알 수 있다·
저 존재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아나테마의 모든 것이 낱낱이 깨져 흩어진다·
아나테마라는 인간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부서지고 무너져서 흘러내렸다·
멍하니 바라보면서도 필사적으로 내쉬는 호흡마저 갈라져 사라진다·
쩌적 쩌저적···!!
피부 위로 금이 가고 균열은 영혼에까지 이른다·
아나테마가 평생 동안 보아온 그 어떤 승천자보다도 강대하고 초월적인 힘의 잔재·
그 존재를 영원히 현실 밖으로 추방하는 존재적인 배제·
말 그대로 하늘의 순리를 거스르는 힘·
그것을 깨달은 아나테마가 멍하니 탄식을 내뱉었다·
“아····”
레녹과 아나테마의 시선이 겹치고 감각이 엇갈린다·
빛으로 물든 벌판 너머에 선 누군가 아나테마를 향해 돌아선 그 순간·
쩌적!!
하늘 위로 검은 실선이 아로새겨지며 기억의 세계가 유리처럼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