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먹는 천재마법사 1030화
이정표(17)
거대도시 발칸 외곽구역 상공·
고층 빌딩과 마천루가 늘어선 시가지는 어느새 반파되어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있다·
장난감처럼 부러진 건물들 사이로 날카로운 뇌광이 오가면서 아득한 속도로 비산한다·
모든 술식을 통틀어 최상급의 순간출력을 지닌 전격마법을 극한까지 익힌 두 마법사의 술식전투·
[토르번의 미친 늙은이가 머리에 벼락을 맞고 맛이 가버렸다는 사실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말없이 지상을 내려다보던 올리비에라가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같은 계통의 마법사에게 저렇게까지 집착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군·]
“····”
[의전의 여흥으로 여기기에는 진작에 선을 넘었다· 언제까지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지?]
올리비에라의 서늘한 질문에 대답한 것은 성서를 들여다보고 있던 장례지도사가 아니었다·
“절차의 문제라는 거야 올리비에라·”
[···하이베르크·]
“아켄드리아스는 우리들 중에서도 [의전서열]이 가장 높은 귀족이니까·”
부스스한 머리칼과 두꺼운 안경을 낀 여성이 나른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몸을 덮는 헐렁한 가디건을 걸친 채 예배당 의자에 앉아 허공을 두들긴다·
그때마다 보이지 않는 허공 너머로 물결 같은 파문이 퍼져 나왔다·
“인간적으로는 못 미더운 사람이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의 의견이 우선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의회의 일원이었던 네가 와 있음에도 그따위 고루한 관습을 아직까지 지키고 있다는 말이더냐·]
“놀러온 게 아니라 아나테마의 장례의식을 치르기 위해 온 거니까·”
작게 하품을 한 여성이 말했다·
“장례지도사의 영역에서 [의전서열]이 정해지는 건 어쩔 수 없어· 내 역할은 기록하는 것뿐이라고·”
[역할을 운운하며 핑계를 대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군·]
올리비에라가 차가운 냉소를 머금었다·
[중앙이 멸망한 뒤 우선순위가 무색해졌음을 모르지 않는데· 내 앞에서 그런 서투른 거짓말을 해보겠다는 건가?]
“어라 그럴 리가 있겠어?”
여성이 킥킥 웃으면서 반문했다·
“우리의 황금향을 멸망시킨 관계자 앞에서 내숭을 떨 수는 없지· 안 그래?”
[····]
“그렇게 안달 내면서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굳이 그러지 않아도··· 견뢰의 역량은 굉장히 우수해 보이는데·”
싸늘한 마안광을 피해 지상을 향해 시선을 내린 여성이 말했다·
두꺼운 안경 렌즈 위로 지상에서 펼쳐지는 벼락의 광채가 아로새겨진다·
선천적으로 좋지 않은 그녀의 눈을 위한 보호장비로도 오래 지켜보기 힘들 만큼 날카롭고 섬찟한 뇌광의 범람·
턱을 괸 채로 흥미로운 듯이 격전지를 바라보던 여성이 말했다·
“아켄드리아스가 저렇게까지 관심을 갖는 마법사는 정말 오랜만에 봤어· 살아온 시간을 감안하면 틀림없이 대륙 역사에 남을 법한 재능이로군·”
[····]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직접 보니 우리 쪽 핏줄이 아닌가 의심이 될 수준인걸· 내가 아직 서기 일을 하고 있었다면 분명 의회의 명부에 이름을 올렸을 거야·”
여성이 느긋하게 중얼거리고 장례지도사가 침묵하는 사이 지상의 전투는 더욱 격렬하게 변한다·
레녹의 벼락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토르번의 광소와 계속해서 위력을 더해가는 벼락의 성소·
그리고 그 끝에서 먼저 의념을 펼쳐 자성영역을 전개하는 토르번의 모습까지·
침묵하는 올리비에라를 두고 여성이 다시금 허공을 두들겼다·
“원로원과는 이야기가 끝났어· 이번 일로 인한 피해는 이쪽에서 수습할 거야· 남은 건 견뢰에게 설명하고 대가를 지불해 주는 것뿐인데····”
마치 보이지 않는 스크린을 어루만지는 듯한 손짓으로 허공을 내리그은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나저나 내가 수십 년 전에 이 도시에 남겨둔 검색장치가 잡히지가 않는데 혹시 뭐 아는 거 없어?
* * *
“선뢰지체(仙雷之體)···?”
토르번의 마탑주 아켄드리아스 엘 토르번이 언급한 체질의 이름·
그릇을 강제로 넓혀주겠다면서 꺼내든 말에 레녹이 반응하기도 전에·
탑주의 자성영역이 레녹의 눈앞에 펼쳐졌다·
자성영역 전개
섭리위계 심상구현
[뇌신도화정(雷神導華庭)]
위이이이이이잉!!!!!
자성영역을 전개하는 것과 동시에 탑주의 등 뒤에서 강렬한 회전음이 울려 퍼졌다·
무거운 엔진이나 터빈이 돌아가는 듯한 듣는 것만으로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음·
파지지지직!!!
대기를 거세게 진동시키는 공명과 함께 거대한 두뇌의 형상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벼락을 압축해 만든 거대한 전뇌(電腦)가 미친 듯이 발광하면서 공명한다·
하지만 레녹은 시야를 가득 채우는 뇌광에도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시선을 추켜들었다·
‘영역이····’
자성영역을 펼쳤음에도 레녹과 탑주 주변의 풍경은 변화하지 않았다·
반파된 시가지 위로 푸른 전뇌가 떠올라서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을 뿐·
영역전개는 블러핑이고 전격의 물질조형을 활용해 새로운 물체를 만들어낸 것인가·
아니 레녹은 거기까지 생각한 뒤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영역을 전개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저 거대한 전뇌의 존재가 영역 그 자체였던 것·
설마 아켄드리아스 엘 토르번의 자성영역은-
“현실을 덮어씌우지 않는 형태의 영역인 건가?”
자성영역은 근원심상을 현실에 덮어씌우는 힘· 애초에 그 과정은 술자가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영역을 전개한 순간 술자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근원심상을 상대에게도 내보여야 하는 것·
하지만 토르번이 사용한 영역은 그렇지 않았다·
현실의 풍경을 바꾸는 일 없이 저 거대한 전뇌의 현현만으로 영역을 완성해 버린 것·
자성영역의 부분전개라던가 심상 일부를 빌려오는 형태도 아니다·
영역을 완전한 형태로 전개하면서도 현실을 개변하지 않는 채로 존재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대로라면 영역을 펼쳐서 얻을 수 있는 환경과 상성의 우위 마법의 증강 같은 이점을 일체 기대할 수 없을 터·
“아는 것이 많을수록 생각이 복잡해지는 법이지· 하지만 본노의 영역은 그런 것이 아니다·”
토르번은 굳은 레녹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수인을 맺었다·
“현실을 개변하는 것 자체가 영역의 효과이기에 전개 직후에는 현실을 개변하지 않을 뿐이지·”
“현실개변 자체가 영역의 효과라고?”
“뇌신도화정은 끝없이 솟아나는 벼락의 우물을 상징하는 힘·”
양손을 맞대고 수인을 맺은 토르번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 능력은 바로··· 영역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강제로 뇌화(雷化)시키는 것이다·”
“···뭐?”
파직!!!
그 순간 탑주의 등 뒤에 떠오른 전뇌에서 새파란 벼락 수십 줄기가 튀어나왔다·
뇌에 연결된 신경처럼 복잡하게 얽힌 벼락이 무너진 건물 잔해와 지면에 맞닿은 순간·
날카로운 공명음과 동시에 사방 일대의 모든 물질이 뇌전으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츳!!!
지반을 잃어버린 건축물이 무너지고 부서진 형태 그대로 전격으로 변환된다·
물질을 뇌화시켜 만들어진 전격이 전뇌 안으로 흘러 들어가며 새로운 동력이 되고·
그 자리에서 크기를 키운 영역이 모든 것을 한 줌의 뇌전으로 뒤바꾸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
지면마저 뇌화시켜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물러서지 않는다면 뇌화의 폭풍 속에 휘말리게 될 뿐·
레녹 자신이 뇌화되지는 않겠지만 그 여파에 휩쓸려서 입을 피해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영역 내 모든 물질에게 뇌전의 성질변화를 강제하는 힘인가!!”
파밧!!
점멸을 사용해 수십 미터 뒤로 물러선 레녹이 중얼거렸다·
“믿을 수가 없군· 영역의 자체적인 효과만으로 이렇게까지···!!”
영역을 전개해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바꾸는 효과 자체가 영역의 능력·
뇌화시킬 재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뇌신도화정은 전개 직후 주변의 환경을 개변하지 않는다·
다만 영역을 완성한 뒤 스스로의 능력으로 직접 주변의 환경을 바꾸어나갈 뿐·
물질을 뇌화시켜 전력으로 삼고 만들어진 전력을 다시금 영역을 유지하는 동력으로 삼는다·
자성영역의 효과가 곧 동력이 되기에 처음 영역을 전개한 뒤로는 마력소모조차 없다·
완성 직후 자립해 영역효과를 사방에 흩뿌리고 끝없이 범위와 포착대상을 늘려나가며 뇌화시킬 뿐·
그 과정에서 영역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동력을 제외한 전력은 모조리 술자 본인에게 공급된다·
“후우···”
파직 파직 파직···!!!!!
수천 발이 넘는 뇌전이 토르번의 전신에 내리찍히며 그 몸에 끝을 모르는 무한한 전력을 공급한다·
그것만으로 그의 몸이 실체화와 뇌화를 반복하며 물질과 뇌전의 경계선을 어지럽게 오가고·
마치 뇌신(雷神)의 화신체처럼 발광하면서 탈태하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직···!!!!!
전신을 푸르스름한 뇌광으로 가득 채운 토르번이 번쩍이는 안광을 흩날리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너를 선뢰지체(仙雷之體)로 만들어 네 그릇을 넓혀주겠다고 하였었지·]
막대한 양의 마력을 공명시켜야만 사용가능한 육합전성이 숨 쉬듯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레녹은 그 시점에서 탑주가 어떤 ‘방법’을 사용하려는지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설마····”
[지금부터 네 몸을 뇌화시켜서 벼락으로 만든 뒤 세포 단위로 조형해 실체화시킬 것이다·]
사방에서 넘실대는 벼락의 폭풍 속에서 떠오른 탑주가 레녹을 내려다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체내의 혈맥과 회로를 조정하고 네 그릇의 크기를 넓혀서 굳히는 과정을 반복하는 게지·]
“····”
[그 과정에서 네 육신을 찢고 이어붙여야 하겠지만 너만 한 마법사라면 분명- 어딜 가는 게냐?]
“잠깐이나마 진지하게 듣고 있던 내 실수였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린 레녹이 엄청난 속도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점멸을 난사하면서 토르번의 영역과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는 레녹의 모습·
황망한 듯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토르번이 이내 사람 좋은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하긴 여기는 그런 중요한 시술을 진행하기에 썩 좋은 자리가 아니긴 하지·]
레녹을 향해 한 손을 들어 올린 탑주가 천천히 고개를 젖히면서 속삭였다·
[자리를 옮기고 싶다면 본노 역시 네 안내를 따르도록 하마·]
우우우우웅···!!!
가볍게 의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주변의 모든 물질들이 강제로 뇌전으로 변해 소멸한다·
레녹이 뒤로 물러서는 것만으로 뇌화의 속도를 더해가며 발칸 외곽구역의 모든 것을 번뜩이는 뇌전으로 뒤바꾸었다·
[천뇌개변(天雷改變)]
쿠과과과과과과!!!!!
토르번의 등 뒤에 떠오른 전뇌가 끊임없이 주변의 뇌전을 흡수하고 내뿜으며 크기를 키워 나간다·
발 디딜 땅조차 한 줌의 전력으로 바꾸어 푸르스름한 벼락의 구체 속에서 떠올라 레녹을 향해 전진한다·
말 그대로 거대한 벼락의 우물이 되어 끊임없이 전력을 생산하고 퍼 올리는 듯한 장엄하고 기괴한 형상·
살아 움직이는 엔진이자 터빈으로서 외곽구역을 짓밟고 갈아버리면서 전진한다·
쿠구구구!!!
영역전개 시 공간을 특정하지 않았기에 술자와 전뇌의 이동을 따라 영역 역시 같이 이동하며 레녹을 뒤쫓는다·
물질을 강제로 뇌화시킨다는 성질변화의 극에 도달한 자성영역·
그를 통해 영역을 전개와 동시에 자립시키고 그를 통해 반영구적으로 힘을 공급받는다·
전투에 특화되지 않은 영역임에도 자체효과만으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으며 술자 본인에게는 폭발적인 힘의 증강을 선사한다·
레녹이 지금껏 보아온 모든 종류의 자성영역을 통틀어서 이렇게까지 강력한 특수효과를 갖춘 영역은 사실상 처음이나 마찬가지·
8레벨의 전격계 대마법사· 토르번 마탑의 대종사가 전력으로 전개하는 자성영역의 힘인가·
뒤로 물러서는 레녹을 따라 움직이던 탑주의 시선이 저 멀리 높게 솟아오른 마탑을 보고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렇군· 저것이 바로 네가 이 도시에 구축한 권역이로구나·]
우우우우웅!!!
한 손을 탑을 향해 뻗은 탑주가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면서 말했다·
[너와 같은 대답자의 이상을 투영하는 권역이라면 본노로서도 필히 그 힘을 견식해야겠지·]
“···아직도 뭔가 착각하고 있군·”
촤악!!
마탑을 중심으로 펼쳐진 권역·
그 안쪽에서 멈춰선 레녹이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서며 대꾸했다·
“당신에게 내 권역을 보여주기 위해서 굳이 여기까지 전장을 끌고 온 것이 아니야·”
레녹의 몸을 강제로 뇌화시켜 선뢰지체로 재구성하겠다는 토르번의 황당한 발상·
당연하지만 레녹은 그러한 탑주의 호의 아닌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토르번이 레녹에게 갖고 있는 호감은 차치하더라도 몸을 뇌화시킨 시점에서 제대로 돌아오리라 장담할 수 없다·
아니 대상지정저항을 고려하면 레녹의 몸이 타의에 의해 완벽하게 뇌화되는 것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일·
무엇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레녹의 몸에 새겨진 페널티를 탑주에게 공개하고 방안을 찾아야 한다·
탑주를 거기까지 믿을 수 있는지 애초에 페널티를 이런 식으로 해결해도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 것인지·
설령 선뢰지체라는 것으로 몸을 바꿀 수 있다 해도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을 듣지 않고서는 따를 수 없다·
하지만 레녹은 그러한 것들을 탑주에게 일체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건설적인 논의나 설명이 불가능한 인간에게 설득을 시도해 봤자 시간낭비지·”
양손으로 수인을 맺은 레녹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일단 당신을 멈춰놓은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본노의 솜씨를 믿지 못하는 게로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로구나·]
고개를 끄덕인 토르번이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며 뇌신도화정의 영역을 앞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때로는 백 마디 설명보다 한 번의 실천이 와닿는 일도 있는 법이니·]
쿠구구구구구!!!!
전뇌를 중심으로 펼쳐진 거대한 번개의 우물이 하늘과 지상의 모든 것을 벼락으로 바꾸며 다가온다·
[네게 본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접 알려주어야겠구나·]
마탑의 권역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통째로 집어삼켜도 이상하지 않을법한 자성영역의 폭풍·
이상을 눈치챈 마탑의 동료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지만 레녹은 무시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토르번을 굳이 마탑의 권역 인근까지 유인한 것은 여기서만 실험해 볼 수 있는 대안이 있었기 때문·
레녹의 권역은 우로보로스 마법체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상의 권역·
그렇기에 권역 안에서라면 우로보로스의 힘을 사용해 가능성을 잠시나마 뽑아 쓸 수 있다·
천지를 뇌화시키는 저 자성영역 앞에 레녹이 내밀려는 것은 바로 명에게 직접 넘겨받은 흑마법의-
찰칵!!
맨손으로 허공을 매만지는 순간 보이지 않는 손끝에서 차가운 사슬의 감촉이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검은 사슬을 움켜쥔 레녹이 그대로 손을 끌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나와라·”
차르르륵!!!
그 순간 레녹이 움켜쥔 사슬에 끌려 나오듯 흑색의 마력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기괴하게 비틀린 손가락이 균열을 비집고 튀어나오며 흑색의 사슬에 매인 팔뚝을 드러냈다·
굵직한 흑색의 사슬을 맨 거대한 악마거인이 공간을 비집고 나타나 레녹의 등 뒤에 떠올랐다·
쿠오오오오!!!
한때는 명의 소환수였고 지금은 레녹의 수중에 존재하는 흑마법의 사용과 현현에 특화된 악마·
그리고 지옥의 거래에 따라 무패의 계약을 현현하는 공능을 가진 소환수·
레녹이 수인을 맺는 것과 동시에 악마거인이 레녹이 맺는 수인을 따라하기 시작하고·
키이이잉···!!!!
악마거인의 수인이 완성되는 순간 검게 일그러진 흑마법진이 떠올라 느릿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흑율계열 고유마법·”
치이익···!!
거대하게 펼쳐진 흑마법진에서 검은 눈물이 방울지어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둠이 흘러넘치듯이 주변의 공간을 물들이는 끈적이는 암흑의 광채·
[하하하하핫···!!!]
권역 저편에서 레녹이 어떠한 마법을 꺼내 들었는지 인지하기라도 한 것일까·
토르번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저 멀리서 뇌신도화정의 영역이 격렬하게 회전한다·
우우우우우우웅!!!
시공간을 갈아버리는 격렬한 공명음· 토르번의 영역과 레녹의 권역이 맞닿아 겹쳐지고·
양손에 검은 사슬을 두른 악마거인이 거대한 흑마법진을 회전시킨 그 순간·
레녹과 토르번의 표정이 거의 동시에 일변했다·
[음?]
“···잠깐·”
콰앙!!
희끄무레한 형체가 탑의 지면을 박살내고 튀어나와 엄청난 속도로 지상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앙!!]
귀에 익은 울음소리· 출렁이는 뱃살을 달고 내달리는 모습·
자신을 대신해 먼저 튀어 나간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레녹이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새하얀 새끼용이 다가오는 뇌신도화정의 영역 안으로 거침없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후루루루룹!!]
쩝쩝쩝쩝!!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뇌전을 물을 마시듯이 코와 입으로 들이켠다·
굵직한 벼락을 두꺼운 앞발로 잡고 으적으적 씹어 삼켰다·
천지를 불태우는 토르번의 전격마법이 너무나 익숙하다는 것처럼 아무런 피해 없이 그것을 모두 ‘흡수’하는 새끼용의 모습·
[···에엥?]
뇌전으로 이루어진 영역을 먹어치우는 새끼용의 난입에 탑주의 표정조차 경악에 빠지고·
앞발과 뒷발을 펼친 새끼용이 순식간에 영역을 돌파해 전뇌에 덥석 달라붙었다·
[아-]
군침을 줄줄 흘리면서 입맛을 다시고 입을 쩍 벌리는 새끼용의 모습·
전뇌에 비해 턱없이 작은 새끼용의 입안에서 황금빛의 법진이 맹렬하게 회전한 그 순간·
번뜩이는 거대한 전뇌가 그대로 새끼용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
[아 안 된다 이 녀석아!!]
보기 드물게 당황한 탑주를 무시한 짐승이 입을 쩍 벌리고 전뇌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
꿀꺽!
두툼한 앞발로 배를 쓰다듬은 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새끼용의 형상·
[꺼억·]
동시에 사방 일대를 뇌화시키며 날뛰던 영역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권역에 충돌하려던 격렬한 기세가 무색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멸하는 영역의 풍경·
슈우우웅···!!!
그 자리를 휩쓸고 갈아버린 자상만이 외곽구역 위로 길게 남아 지형을 바꾸었을 뿐·
쉴 새 없이 번뜩이던 천둥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이윽고 마탑 주변에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허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새끼용을 바라보는 토르번의 노쇠한 얼굴·
허탈한 웃음을 흘린 토르번의 몸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뒤로 넘어졌다·
몸에 두르고 있던 고풍스러운 기품조차 무색하게 그대로 혼절해 고꾸라진다·
쿠웅-!
가볍게 어깨를 떨다가 축 늘어지듯이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다·
단순히 영역을 취소당한 반동이라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허무한 기절·
지금까지 전투로 인해 받은 피해와 반동을 이제서야 비로소 받아낸 듯한 위화감·
“···?”
순식간에 적수를 잃어버리고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양손을 쥐었다 펴는 악마거인·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레녹과 주저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수호령수의 모습·
탑주와 만나 싸우기 시작한 그 모든 순간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황당무계한 결말·
[쿨····]
“반···?”
할 말을 잃고 침묵하는 레녹의 옆에 한껏 긴장한 안색의 타티아나가 다가왔다·
스태프와 마도서를 비롯한 아티팩트를 장착하고 전투준비를 끝낸 모습·
굳은 표정으로 쓰러진 노인을 바라보던 타티아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설마··· 그 토르번이야?”
“····”
중앙에서 일하던 타티아나라면 이 노인의 얼굴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겠지·
기절해 버린 토르번을 바라보던 타티아나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혹시 이 자리에서 죽여야하는 거였어?”
“아니 죽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군·”
레녹이 품 안에서 연초를 꺼내 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극뢰마법의 전승· 뇌둔과 뇌화의 요령· 선뢰지체의 각성·
하지만 레녹이 얻은 것은 그런 술식이나 기연이 아니라 그것들을 레녹에게 쑤셔 넣으려는 벼락에 미친 노마법사였다·
느닷없는 수호령수의 난입· 영역을 먹어치운다는 비현실적인 능력·
심장을 꿰뚫리고도 초월적인 힘을 뽐내던 토르번이 이렇게 쉽게 혼절해버린 이유까지·
확인해야 할 일이 한참 쌓여 있었지만 레녹은 연기를 내뿜으며 시선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일단 마탑 지하공동에 가둬줘· 그동안 남은 일을 처리하고 다시 오지·”
발칸 상공에서 지금 이 혼란을 지켜보고 있을 중앙도시의 귀족들·
그들에게 지금 상황에 대해 확실하게 책임을 지게 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