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화: 이정표(13)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네놈이 정녕 미친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으나····]
거대도시 발칸· 카르텔 본사 지하 연구실·
수천 명을 거뜬하게 수용하고도 남을 법한 공간에, 올리비에라가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화려한 장포를 흩날리면서 돌아선 얼굴은 베일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는 바·
얇은 마력사에 거미줄처럼 매달려 떠오른 작은 케이스의 형상·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특징도 없지만,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별빛이 특별함을 짐작케 한다·
레녹이 첫 번째 관문에서 술주와 싸워가며 직접 손에 넣은 장막의 파편·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올리비에라가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렸다·
[네놈의 허무맹랑한 계획이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군·]
“칭찬을 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군·”
올리비에라의 뒤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잘했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밖에 못 하나?”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알 텐데·]
베일 너머로 번뜩이는 올리비에라의 안광이 흐릿하게 가늘어졌다·
[연구실에서 칩거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설마 아직까지 중앙전선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
[네놈에게 패배했던 마법사가 지금 첫 번째 관문에서 저지른 짓에 대해서 필히 설명이 필요할 터·]
한발을 가볍게 내딛는 것만으로, 올리비에라의 훤칠한 신형이 순식간에 레녹의 앞으로 다가온다·
연구실 한복판에서 그녀가 신경을 레녹에게 기울이는 것만으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설마, 녹스 비블리오에서 네놈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할 셈이더냐·]
“···음·”
어둠의 서고에서 천체술식을 대여하기 전, 레녹은 방법을 일절 설명하지 않은 올리비에라에게 날을 세운 적이 있었다·
쿤다라로 향하는 과정을 논의 없이 처리한다는 것은, 애초에 서로의 신뢰를 담보하지 않은 수단이기 때문·
당연하지만 올리비에라 역시 그때 레녹이 했던 말을 잊지 않고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반대로 레녹 역시 올리비에라의 추궁에 대해 할 말이 없어지는 것도 사실·
[대체 천번과 어떤 거래를 했기에, 그자가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장막의 파편을 구해온 것인지· 어디 한번 상세하게 읊어 보거라·]
집요할 정도로 느릿하게 안광을 번뜩인 올리비에라가 말했다·
[네놈에게 패배해 죽을 뻔했던 그 마법사와 어떻게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부터 설명이 필요하겠지·]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궁금한 것이 많군요·”
올리비에라의 옆에서 다과를 깨작거리던 클라리스가 눈을 빛냈다·
“스튜디오에서 대체영창을 익히는 걸 두고 반응이 묘하다 싶었더니, 이미 그때 천번과 연락하고 있었나요?”
“연락보다는, 염열마법의 핵심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핵심?”
“마법체계를 예열시켜 자신마저 불태우기에, 종국에는 그를 대신할 [불씨]가 필요해지는 거다·”
레녹이 설명했다·
“외부의 열원을 빌려서 자신을 대신하는 거지· 전투가 끝난 뒤에도 [불씨]를 필요로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고····”
[어둠의 서고에서 대여한 지옥불을 천번과의 거래 조건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말이더냐·]
역시, 올리비에라는 잠시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 일련의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한다·
그건 그녀가 마법과 선천이능이라는 두 가지 계통의 힘을 모두 다뤄보았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염열마법과 선천이능은 궤가 다르지만, 쉽게 통제를 벗어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부분이 있지· 그 부분을 체감하고 있다면 천번이 움직인 이유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서고에서 대여해 온 지옥불이, 천번에게 있어서 그만큼 가치 있는 ‘불씨’였다는 말인가요·”
레녹의 말에 클라리스가 생각에 잠겼다·
“음차원의 불꽃이 지닌 희소성을 생각하면, 천번이 중앙에서 날뛴 이유도 납득이 가지만····”
[그 판단과는 별개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어처구니가 없구나·]
팔짱을 낀 올리비에라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결과적으로 네놈이 맡긴 일 덕분에 천번의 명성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게 되었다· 그가 청의 눈을 탈퇴하고 접합술주를 죽였다는 사실을 발칸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지경이지·]
“····”
[네놈과 천번을 비교하고 우열을 가리려는 이들의 소리가 내게까지 들릴 지경이었는데··· 네놈은 그에 대해 아무런 감흥조차 없어 보이는군·]
레녹을 주시하며 안광을 번뜩이는 올리비에라의 모습·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칠채보의 마안이 발동하여 레녹을 주시하고 있겠지·
설명을 요구하면서 레녹을 떠보려는 올리비에라의 저의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다·
발칸 전역의 이목을 끌어모은 견뢰와 천번의 전투에서, 올리비에라는 특유의 직관으로 위화감을 눈치챘던 것이겠지·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마안으로 레녹을 바라보며, 레녹이 말하지 않은 사실을 읽어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레녹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중요한 건 중앙전선의 동향이 아니라, 장막의 파편을 성공적으로 구했다는 사실일 테니까·”
[····]
“하지만 쿤다라로 향할 때는 관문이 위치한 방향은 피해야 할 듯하군· 쓸데없는 시비에 휘말린다면 여지없이 시간낭비가 될 거다·”
칠채보의 마안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레녹의 대상지정 저항을 뚫어낼수는 없다·
레녹이 보유한 가장 강력하고 초월적인 재능 중 하나이자, 견뢰의 신분으로는 결코 풀지 않는 저항능력·
올리비에라가 읽어낸 위화감과는 별개로, 그 진실을 당장 그녀가 확인할 수는 없을 터·
“납득했다면 바로 시작하지· 장막의 파편을 구한 시점에서 망설일 필요는 없을 텐데·”
탁· 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온 레녹이 그대로 올리비에라를 지나쳤다·
연구실 중앙에 얇은 마력사에 매달린 보관함을 올려다본 레녹이 중얼거렸다·
“천체술식을 사용해 모형정원을 현현· 장막의 파편을 담고 반응을 관측· 마지막으로 장막과 동화되는지 확인까지·”
올리비에라와 클라리스를 돌아본 레녹이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일단 천체술식으로 모형정원을 현현하는 일부터 시작할까·”
“견뢰, 잠깐···!!”
퍼뜩 정신을 차린 클라리스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레녹은 곧바로 폭발적으로 의식을 확장시켰다·
구세계의 승천자, 치천이 만든 천체술식은 자성영역의 원전에 가까운 힘·
심상을 각인하지 않기에 영역보다 효율이 낮지만, 공간을 임의로 구성하는 자율성만은 영역을 아득하게 뛰어넘는다·
모형정원 안에 어떠한 재료를 채워 넣느냐에 따라, 술자의 의지대로 정원의 규칙을 분배할 수 있는 힘·
술자의 의식에 기반해 확장되는 공간이기에, 레녹의 의식이라면 이 연구실 전역을 뒤덮는 것쯤은-
“아·”
파아아아앗!!!
그 순간, 클라리스의 몸이 새하얀 빛으로 발광하면서 폭발적으로 그 자리에 내려 찍혔다·
묵직한 굉음과 함께 연구실 전체가 크게 흔들릴 정도로 압도적인 무게감·
콰아앙!!!
연구실 한복판에 나타난 거대한 신수의 형상을 본 레녹이 뒤늦게 의념을 멈춰 세웠다·
“···제가 천체술식을 가르칠 당시 분명 말씀드린 적이 있을 텐데요·”
구름을 갑주처럼 두른 거대신수가, 푸른 눈으로 레녹을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모형정원을 필요 이상으로 확장시키는 순간, 상대에게 비슷한 수준의 의식확장을 강요하기 때문에-”
[장생종의 본체를 강제로 끌어내게 된다는 것· 언제나 늘 그렇듯이 둔중하기 그지없는 모습이구나·]
“둔하지 않거든요?”
강제로 본체로 돌아온 클라리스의 말을 끊은 올리비에라가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이게 네놈이 천체술식을 사용해 구축한 정원이라는 말이더냐·]
“····”
적막하고 고요했던 본사 연구실의 풍경이, 어느새 조금 다르게 바뀌어 있다·
발아래서는 수풀이 흔들리고, 하늘의 풍경이 흐릿하게 아른거렸다·
정원 곳곳에 위치한 거대한 나무와 잎사귀 사이로 비추는 햇살의 정경·
그 모든 것이 ‘모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존재할 리 없는 생동감을 느끼고 만다·
[그렇군· 이건 테스트베드보다는 마치····]
정원 안에 하늘과 땅이 갖춰져 있고, 산천초목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 우연일까·
레녹이 펼친 모형정원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올리비에라가 중얼거렸다·
[하나의 ‘세계’를 의식 안에 밀어 넣은 것 같군· 이것이 네놈이 생각한 정원의 형태더냐?]
“모형정원 안에서 [장막]을 모사하려면, 장막이 위치한 중앙전선을 투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 것뿐이다·”
하지만 레녹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중앙전선 외곽지대의 풍경 정도는 이미지할 수 있으니까· 모형정원 내부 환경을 최대한 현실과 비슷하게 맞출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이 좋겠지·”
[연습이라····]
올리비에라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기에 네놈의 천체술식은, 이미 연습이 필요 없는 경지에 도달한 듯한데·]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천체술식을 공격용으로 다룬다면 모를까, 모형정원을 펼치는 것 정도는 클라리스에게 요령을 배운 순간 숙달이 끝나 있었으니·
만화경의 근원심상을 깨우친 뒤 자성영역을 원하는 대로 다루기 위해 얼마나 고된 연습을 반복했던가·
초월적인 직관과 재능을 가지고도, 심상과 의식을 다루는 데 있어 남들보다 훨씬 더 어려운 방법과 수단을 선택해 왔다·
정신과 이성의 고강함· 자기암시와 의지개변에 있어 레녹과 비견되는 이는 있을지언정, 뛰어넘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을 조절해 특정한 풍경을 그리는 것 정도는 숨 쉬는 것보다도 수월하게 느껴질 정도·
“정원의 풍경은 흐릿하지만, 공간 자체는 무서울 정도로 단단하게 안정되어 있어요·”
클라리스 역시 그 비범함을 느낀 것인지, 긴 목을 기울여 초원이 펼쳐진 의식공간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묵직한 거체가 정원을 짓누르고 있음에도, 약간의 흔들림조차 없이 받아내는 안정감·
연구실이 위치한 현실보다 정원의 흔들림이 적다는 것이 장생종에게는 어지간히 인상 깊은 듯했다·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의식이 조금은 약해질 만도 한데··· 생각대로 독한 인간이었군요·”
[네 제자가 놈과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면서 몰랐던 게냐?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이걸 보도록·]
올리비에라가 그렇게 대꾸하면서 무릎을 굽히고 발아래 흔들리는 수풀을 잡아 뜯었다·
[풀이 뜯겨나간 채로도 형상이 남아 있어· 외부의 개입이나 변수까지도 일일이 구현하고 있는 게지·]
“흐음, 그렇군요· 사후연산인지, 사전에 공정을 끝내둔 것인지도 한번 확인을-”
“내 모형정원에 대한 품평은 그쯤하고 시작하지 않겠나?”
레녹이 만든 모형정원을 구경하기만 할 뿐, 실험을 시작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
“흠흠, 실례했군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클라리스가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발칸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는 마법사가, 대체 어떤 근원심상을 지녔을지 너무 궁금해서·”
“모형정원과 자성영역이 다르다고 설명해 준 건 그쪽이었을 텐데·”
레녹이 차가운 시선으로 클라리스의 옆을 가리켰다·
“일단 당신 옆에서 계속 실례를 하고 있는 인간부터 일으켜 세우지·”
[····]
레녹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한 손으로 땅을 쓸어내리는 올리비에라의 모습·
황당한 듯한 신수의 아가미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에 드리운 베일을 만지작거린다·
레녹이 직접 의식을 펼쳐 구축한 공간 자체가 어지간히 흥미롭게 보였던 것일까·
“····”
아니, 살짝 젖힌 베일 사이로 엿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레녹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한 흥미보다도 훨씬 더 깊은 갈망을 함축한 묘한 표정·
마치 레녹이 만든 모형정원이, 올리비에라 자신의 목적과도 합치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듯한-
거기까지 확인한 레녹은 그대로 모형정원의 전개를 풀어버렸다·
파아아앙!!
물거품이 꺼지듯이 펑 터지면서, 연구실의 무기질적인 풍경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잠깐의 침묵·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전성과 함께 고개를 돌린 올리비에라를 향해, 레녹이 어깨를 으쓱였다·
“연구실로 누군가 오고 있군· 기척을 보아하니 사장단 중 한 명인 것 같은데·”
“···아!”
황급히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온 클라리스가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메이즈· 원로원의···!!”
[···벌써 시간이 되었나·]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은 올리비에라가, 베일을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망설임 없이 출입문 쪽으로 향한 그녀가 레녹을 향해 힐끗 시선을 돌렸다·
[네 차례다, 견뢰· 만나야 할 존재들이 있으니 준비할 수 있도록·]
“만나야 할 이들이라고?”
[네놈과 내가 중앙전선에 신경을 쏟는 사이 신경 쓰지 못했던 낡은 규율이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 올리비에라가 레녹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운이 좋다면 하루면 충분할 게다· 이번 일에는 너와 나의 책임이 있으니, 직접 나서지 않고선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라 보아야 할 터·]
“내 책임이 있다라·”
올리비에라가 지금 이 약속장소에 늦었던 근본적인 이유·
그녀의 성정을 생각하면 중대한 일임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버질의 말처럼 레녹이 엮여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나·
다만 이 시점에 와서 올리비에라 레녹이 같이 처리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원로원까지 개입해서, 잠시 일정을 멈춰둬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 한다면-
[아르스노바의 귀족이 사망할 경우 다른 귀족 가문에서 그 장례를 치르기 위해 움직이게 되어 있지·]
“···그건·”
생각지도 못했던 올리비에라의 말에, 레녹의 대답이 순간 멈췄다·
레녹의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눈치챈 올리비에라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반응을 보니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 낡은 율법에 대해 전해 들은 게냐·]
“····”
올리비에라의 말대로, 레녹은 그 [장례 절차]에 대해 한번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듀리스 공방에서 2사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그때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했던 아나테마에 대한 소식 중에서, 장례를 처리하는 다른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
[아나테마의 사망을 전해 들은 중앙의 귀족들이 이미 발칸에 도착해 있다·]
올리비에라가 레녹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로서 영락한 아나테마의 결말을, 네게 직접 듣고 싶어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