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5화: 이정표(12)
천번과 견뢰의 자성영역을 동시에 언급하면서, 2차전의 결과까지 예측하는 제목의 게시물·
한눈에 시선을 잡아끄는 주목도답게, 댓글 숫자 역시 다른 게시물에 비해 압도적이다·
다비가 게시물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마우스를 잡고 시선을 돌린 클라리스의 모습·
“내용만 잠깐 보죠· 어차피 조금은 시간이 있잖아요?”
할 말을 잃어버린 레녹의 옆에서 클라리스가 눈을 반짝였다·
“게시물이 눌린 순서를 보니까, 버질도 이 게시물을 보려다가 막 멈춘 것 같은데·”
“흠흠···!!”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는 흡혈귀의 반응을 확인한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마음대로 해라· 올리비에라가 돌아와야 일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
“빨리 보고 치우면 되겠죠?”
클라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스크롤을 내리고, 버질이 한걸음 다가왔다·
다비를 몰래 안고 물러선 레녹이, 모니터에 비치는 본문 내용을 바라보았다·
[제목 : 천번의 자성영역, ‘화염꽃’의 만개 최종분석· 그를 통한 견뢰의 자성영역과 2차전 결과 예측·]
제목 아래 이어지는 본문은 글자와 사진, 영상의 배열이 한참 이어지고 있었다·
알아보기 쉽게 깔끔하고 작은 폰트를 사용했음에도 내용의 길이가 심상치 않을 정도·
하지만 레녹의 시선은 제목 바로 아래 적힌 링크 주소를 향해 있었다·
=게시물을 읽기 전에, 예전에 다른 사람이 천번의 영역에 대해 작성한 분석표를 읽고 오는 것을 추천함·
(링크 : 에반 마르티네스가 전개한 자성영역, 속칭 ‘화염꽃’ 3차 분석표)
“····”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게시물의 제목이다·
작성자 역시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은 없는지 바로 내용을 축약했다·
=링크의 내용을 요약하면, 천번의 자성영역, 속칭 ‘화염꽃’은 여섯개의 꽃잎을 마력노심으로 삼아 핵융합(核融合)을 발생시키는 힘·
=천번은 외장형 마력노심 제작능력이 있고, 결계술과 마력노심을 더해 영역의 스케일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음·
=핵심은 견뢰와의 전투 당시 보지 못한 화염꽃의 [만개] 형태가, 접합술주와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는 것·
글줄 아래 바로 달리는 영상의 링크·
관문도시 전역을 휘감은 화염꽃과, 만개하며 지상과 하늘을 이어붙이는 불기둥의 형상·
도시가 지평선 끝에서 보일만큼 멀리서 찍은 영상임에도, 가히 압도적인 규모와 크기다·
“···이건·”
클라리스조차 실제로 그 영상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지, 그녀의 안색조차 살짝 변했을 정도·
=핵융합(核融合)을 연상케하는 위력도 위력이지만,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지속성·
=접합술주와의 교전이 끝난지 90시간이 넘은 현재 아직까지 관문도시 상공을 불태우고 있음· 사진자료 첨부·
=영역을 거둔 뒤에도 힘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천번이 도시를 떠났음에도 불꽃이 남아 있다는 것·
=두 가지 현상으로 인해 천번의 영역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힘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음·
극도로 집중한 표정의 클라리스와, 굳은 얼굴로 모니터를 응시하는 버질의 모습·
게시물을 볼 때마다 품 안에서 격렬하게 꿈틀대는 다비의 반응까지·
게시물의 내용은 영상 아래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교전이 시작된 뒤 화염꽃이 만개하기 까지 걸린 시간은 짧게 잡아도 40분 이상·
=접합술주의 실력과 술식을 감안하면 영역을 전개한 채로 40분을 버티는 건 사실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그만큼 불리한 제약을 걸고 영역을 만개시켰기에, 반대로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불꽃을 빚어냈다면 납득가능함·
“····”
어느새 집무실은 조용하게 변해 있었다·
본문의 내용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일까·
클라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게시물을 내렸다·
=근래 자성영역의 모습과 능력을 이렇게 대놓고 공개한 초인은 거의 없다시피 함·
=견뢰와의 전투 당시에도 그랬음을 생각하면, 영역을 전개하기 위한 조건의 일부가 아닐까 추정 가능·
=이를 통해 천번이 기아스의 사용에 굉장히 능숙한 술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음· 진둔의 결계술을 계승받은 이유 중 하나일 것·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천번의 재능과 자신감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분석이 많이 되었으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함·
=화염꽃의 만개 형태를 분석함으로써, 견뢰와의 전투 당시 견뢰가 전개한 자성영역의 능력도 반대로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것·
“···반·”
버질이 굳은 표정으로 레녹을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괜찮겠나?”
“이제 와서 말인가?”
레녹이 피식 웃었다·
“넘겨봐· 무슨 말을 하는지 여기까지 온 이상 보고 싶으니까·”
“···좋아요·”
클라리스가 긴장된 표정으로 게시물을 쭉 내렸다·
=천번과 견뢰의 결전 당시에는 구체적인 분석이 이뤄지지 못했지만, 여러 마탑의 자문이 이어지며 당시 전투 과정이 대략적으로 해석되고 있음·
=견뢰는 화염꽃이 만개하기 직전 자성영역을 전개· 자신의 영역을 충돌시켜 화염꽃을 쪼개버렸음·
=영역의 전개와 회수가 경이로울 정도로 빨라 기록은 남기지 못했지만, 화염꽃의 만개를 확인한 지금은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음·
=바로 견뢰의 자성영역이, 천번의 자성영역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형태로 ‘시간’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스터·]
그 순간, 레녹의 품 안에서 다비의 조용한 전성이 울려 퍼졌다·
[지금이라도 전부 밀어버릴까요?]
“····”
항상 활기차던 정령에게서는 듣기 힘든 무감정한 속삭임·
그만큼 다비 역시 지금 저 게시물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것인가·
[사흘 정도라면 딥웹의 네트워크를 40% 가까이 마비시킬 수 있어요·]
다비가 말했다·
[그사이 게시물을 작성한 회원들 전부 위치좌표를 따 올게요·]
레녹의 신변이 엮인 일에 대해서는 레녹 자신보다도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전뇌정령의 태도·
가끔 다비에게서 느끼곤 하던 강렬하다 못해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위화감·
하지만 레녹은 그것을 알면서도 다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게시물을 바라보았다·
게시물은 길고 긴 서론과 본론을 지나 결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견뢰의 자성영역이 지닌 능력이, 시간의 ‘압축’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음·
=자성영역의 전개와 회수에 필요한 시간을 극한까지 압축해서, 영역이 유지되는 동안 펼쳐질 화력을 콤마 단위 시간 안에 모조리 쏟아내는 것·
=영역을 통한 전장의 구축· 환경의 개변· 판세의 유리함을 모조리 포기하는 것을 조건으로, 영역 자체를 찰나의 ‘번개’로 삼았다면 납득이 가능함·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견뢰의 자성영역이 일절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영역을 본 초인들이 모조리 죽은 이유도 모두 설명 가능해짐·
=화염꽃이 만개하기 직전에 영역을 사용한 이유도, 천번의 자성영역이 본인과는 상극에 위치한 힘임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
“····”
클라리스가 손에 어린 땀을 닦고 다시 마우스를 쥐었다·
이 작성자가 이렇게 거창한 분석글을 쓴 이유·
견뢰와 천번 사이의 우열을 비교하고 내린 결론이 아마 다음 글귀에 적혀 있을 테니·
레녹이 무어라 말하지 않는다면 마지막까지 내용을 확인하고 싶겠지·
느릿하게 숨을 내쉰 클라리스가 천천히 게시물을 아래로 넘겼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기반으로 천번의 화염꽃이 만개하면, 견뢰의 자성영역과 승부를 낼 수 있는지 결론을 내릴 수 있음·
=그에 대해 이런저런 분석과 계산식을 적었으나, 업로드 용량이 부족해 올리지 못할 것 같음·
=결론만 말하자면 2차전도 견뢰가 이길 거라고 생각함·
“···예?”
그 말을 끝으로 끝나버린 게시물의 내용에, 클라리스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황급히 마우스를 돌려서 게시물을 다시 훑어보지만, 결론에 대한 근거나 과정은 어디에도 없다·
게시물 아래로 달린 무수한 욕설 어린 댓글만이 잔뜩 도배되어 있었을 뿐·
└이게 씨발 어떻게 2차전 예측이냐
└진짜 미친 새끼인가? 결론 어디감?
└정독하고 있었는데 시간 아까워지네;;
└뭔 이딴 어그로가 다이아몬드 등급 게시판에 기어들어왔냐
뜬금없는 결론에 분노해서 작성자를 성토하는 수천 개의 댓글들·
하지만 본론의 내용 중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을 짚어서 토론을 나누는 이들도 있다·
└결론은 이상하지만 분석 과정은 그럴듯해· 허투루 보고 넘길 글은 아니군·
└특히 견뢰의 자성영역을 예측하는 부분은 굉장히 날카로워·
└영역전개 시간의 압축이라· 한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데· 그건 자성영역의 이점을 스스로 포기하는 짓이잖아·
└그만큼 조건을 걸었으니 영역의 위력 자체는 비약적으로 뛰어오르겠지·
견뢰의 영역에 대한 분석·
앞뒤가 들어맞으면서도 그간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의견을 평가하는 댓글들·
└천번의 영역과 반대되는 힘이기에, 영역 간의 상성 대결에서 승리했다는 주장인가· 이건 또 참신한데·
└애초에 근원심상을 그렇게 고무줄처럼 줄였다 늘릴 수 있는건지도 잘 모르겠는데· 가능하기는 한거야?
└견뢰의 자성영역을 맞고 뒤진 놈들한테 물어보면 될 듯?
└여긴 다 멍청한 놈들밖에 없나? 분석글이 사실이라면 견뢰한테 맞아죽은 놈들은 영역을 보지도 못했을거라고·
개중에서는 자성영역의 작동원리나, 핵심 개념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이들도 상당하다·
실제로 영역을 다룰 줄 아는 고위계 초인들도 지금 이 커뮤니티를 지켜보고 있다는 증거겠지·
하지만 그런 댓글들조차도 방금 클라리스가 느낀 황망함을 모두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멍하니 게시물을 바라보던 장생종의 표정이 혼란을 넘어 분노로 물들었다·
“아니, 무슨 여백이 부족해서 글을 못써···!! 지금 장난하자는 거에요?!!”
“클라리스 리첼렌·”
레녹이 한심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단순한 화제로 열을 올리는 게 신기하다고 말하지 않았나?”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클라리스를 두고 레녹이 한숨을 내쉬면서 허리를 폈다·
“재밌는 글이군· 단순한 비교글이라기에는 그럴듯한 근거도 갖추고 있고·”
“작성자 본인부터 자성영역에 대해 굉장히 잘 아는 전문가임이 분명하지·”
버질이 굳은 표정으로 첨언했다·
“영역에 기아스나 결계술을 더하는 것도, 구체적인 원리와 내용을 추정하는 것도 평범한 술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글쎄· 이 정도 안목을 갖춘 마법사가 대륙에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겠군····”
8레벨에 올랐다는 것은 자신이 익힌 계통을 부수고 초월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대종사가 되었다는 것·
당연하지만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전 대륙을 통틀어 극소수의 초인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다·
하물며 8레벨에 오른 이들 중에서, 마법과 자성영역에 통달한 전문가를 추려내면 순식간에 그 숫자가 줄어들 터·
“반· 네가 이 작성자의 안목을 인정한다는 건, 이 분석이 사실이라는 뜻인가?”
레녹의 눈치를 보던 버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영역의 능력을 감추어 왔다면, 이렇게 공개되도록 내버려 둘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버질이 괜히 이 게시물을 레녹의 앞에서 보기를 꺼려 한 것이 아니다·
만약 이 게시물의 내용이 진실이고, 레녹이 그것을 인정한다면 버질은 레녹의 영역에 대해 직접 전해 들은 사람이 되어버리기 때문·
그리고 레녹이 아는 버질은 그러한 리스크든 책임을 함부로 짊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사람이었다·
“만약, 네가 영역에 대해 감추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걱정하지 마라·”
레녹이 웃으면서 소파에 팔을 걸쳤다·
“분석에는 틀린 말이 없지만, 처음부터 그걸로 결론을 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결론이 틀렸다고?”
“식견이 넓고 눈썰미가 좋다는 사실은 인정하겠지만····”
고개를 뒤로 젖힌 레녹이 피식 웃었다·
“과거에 기반하는 추론은 내 기원에 닿지 못하지·”
“····”
추론 자체는 날카롭지만, 상대는 팔련뇌이궁(八連雷理穹)의 본질에 대해 알고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다·
레녹의 근원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절대로 맞출 수 없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
하지만 그럼에도 레녹은 상대의 안목이 굉장히 뛰어난 수준임은 인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분석글에서 설명한 내용 중, 레녹이 영역을 사용한 방식을 정확하게 파악한 부분도 있었기 때문·
“과정을 결과라고 여겼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나와 공감할 부분이 있을 것 같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만····”
버질이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그럼 저 게시물에 따로 조치를 취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겠지?”
“애초에 저 게시물의 분석이 모두 정답이었다 해도 내가 손을 쓸 일은 없었을 거다·”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내 쪽에서 나선다면, 오히려 저 분석이 사실이라고 광고를 하는 셈이 될 테니·”
“그건····”
“올리비에라가 돌아온 것 같군· 슬슬 움직이자·”
마력감지 저편에서 숨겨지지 않는 강렬한 기척이 느껴진다·
올리비에라가 볼일을 끝내고 본사로 복귀중이라면, 지금 바로 연구실로 이동하면 시간이 맞을 터·
하지만 레녹의 말에도 클라리스는 모니터 앞에 앉아 깊은 침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흐으음···”
“클라리스 리첼렌· 아직도 분석글의 결론을 살펴보고 있나?”
“아뇨, 그것보다는····”
모니터를 바라보던 클라리스가 레녹을 향해 힐끗 시선을 돌렸다·
“댓글도 보다 보니까 재밌는 의견이 많은데, 조금만 더 보면 안 될까요?”
“····”
커뮤니티 반응을 몇번 맛보더니, 순식간에 인내심을 잃어버린 장생종의 모습·
설득을 포기한 레녹이 그대로 클라리스를 모니터 앞에서 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