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화: 이정표(11)
마탑 후문 인근에 세워진 연무장·
평소에는 기합과 타격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져야 할 연무장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
수십에 달하는 초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 수련을 멈추고 연무장의 단상을 올려다본다·
단상에 마련된 상석에 턱을 괸 레녹과, 그의 앞에 부동자세로 선 웨이안의 모습·
“···반?”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 웨이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한참 수련에 몰두할때도 흘리지 않았던 식은땀이 등 뒤에 흥건했다·
“그,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으면····”
“····”
“말을, 해주면··· 고쳐보도록, 노력····”
웨이안의 영문을 모르는 항변에도 무덤덤한 레녹의 눈길·
버티지 못한 웨이안이 힘겹게 몸을 비트는 사이, 주변에서 다가온 용병들이 수군거렸다·
“또 뭘 잘못했길래?”
“몰라· 갑자기 와서 그냥 쳐다보기만 한다는데·”
“불쌍해····”
“반이 저러는거면 이유가 있겠지·”
“웨이안이면 본인 잘못 아니야?”
“아니야···!”
잘못이 없는데도 동정조차 받지 못하는 웨이안의 평소 평판이 어땠는지 알만하다·
늦은 오후· 관문도시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나른한 연무장의 분위기·
물끄러미 웨이안을 바라보던 레녹이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드는군·”
“헉···!”
그 말을 들은 주변에서 질세라 숨을 삼켰다·
“이건 큰일났네·”
“멀리 안 나간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사과해!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해!”
안타레스과 크림갈의 용병들이 시끄럽게 호들갑을 떨지만, 웨이안은 그 말을 농담으로도 받지 못했다·
보랏빛으로 물든 웨이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레녹이 느릿하게 시선을 기울였다·
8레벨의 특질계 술사, 접합술주 아베스타 채프먼의 마나감응력은 가히 레녹에 버금갈 만큼 초월적인 수준이었다·
관문도시 전역의 침입자를 직접 감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접합할 대상과 감응하여 강제로 술식대상으로 삼을 정도·
단순히 마력을 잘 느끼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재능·
그와 비슷한 재능을 웨이안도 가지고 있음을 레녹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잖나· 왜 그랬지?”
“···?”
물론 접합술주의 감응력과, 웨이안의 감응력이 대등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다·
특질계 술사인 접합술주와, 육체능력자인 웨이안이 감응력을 다루는 방식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니·
두 사람이 살아온 생애, 환경, 인간관계를 비롯해 모든 것이 판이하게 다르다·
하지만-
턱!
“따로 시간을 내서 펠릭스와 함께 나를 찾아와라·”
“헉!”
“앞으로는 내가 직접 네 감응력의 수련 방법을 지도하도록 하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하는 웨이안의 어깨를 짚은 레녹이 말했다·
“내가 새로 배운 술식이 하나 있다· 네 감응력 수련을 지도하면서 연습할 수 있을 것 같군·”
“그, 그건··· 그냥 샌드백이 하나 필요한 거 아닌가····”
할 말은 꿋꿋이 하는 웨이안을 보면서 레녹이 웃었다·
실제로 접합술식을 연습하는데 있어 웨이안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으니·
레녹과 웨이안이 지닌 감응력을 이용하면, 접합술식의 감각을 보다 빠르게 체화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술주와 싸우면서 얻은 감응력에 대한 깨달음을, 웨이안에게 체득시켜 볼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건 앞으로 너 하기에 달린 셈이지·”
팟!!
그 말과 동시에 레녹의 모습이 허공을 뛰어넘어 사라져 버렸다·
용병들이 바라보는 단상 위에 혼자 남아 벌벌 떠는 웨이안의 모습·
“어라·”
그제서야 다른 용병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이거 농담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나?”
* * *
“반, 잘 왔다·”
본사 최상층에 위치한 집무실·
층 하나 전체를 홀로 버질이 공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광대한 공간·
모니터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버질이 레녹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딘가 살짝 미묘하게 급해보이는 듯한 모습·
“회장님께서는 곧 오실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밀린 일정을 처리하느라 바쁘신 듯하군·”
“견뢰·”
집무실에 미리 도착해 있던 클라리스가 레녹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왔어요· 준비는 모두 끝난 건가요?”
“장막의 파편을 직접 건네받은 건 카르텔의 사장단 측이었을 텐데·”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준비는 내가 아니라 카르텔 쪽에서 해야겠지·”
“본사 지하 연구실을 싹 비워두었으니 걱정하지 마라·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끝났으니·”
버질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모니터 화면을 끄고 돌아섰다·
클라리스가 커피를 홀짝이는 사이, 빤히 버질을 바라보던 레녹이 물었다·
“아나테마의 피를 복용했군· 소감은 어떻지?”
짐짓 모른 척 말을 돌려가면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집무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버질의 기척이 굉장히 위험한 형태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몇 년 넘게 알고 지낸 흡혈귀가 전혀 다른 존재로 느껴질만큼 강렬한 이질감·
중앙으로 떠나기 직전 버질에게 선물했던, 아나테마의 피로 인한 결과임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
아르스노바의 귀족· 아나테마의 생존자· 8레벨의 용술사이자 사도로 영락한 괴물·
아르마스 폰 아나테마의 피 안에 담긴 내력과 인과는 레녹이 생각하기에도 범상치 않은 수준이다·
일부라고 해도 그 변절자의 피를 흡혈귀가 복용했다면, 큰 변화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천번을 만나는 자리에 버질이 아닌 마담이 나온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겠지·
“···감도 좋군· 벌써 눈치채고 있었나?”
버질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젖혔다·
목을 타고 드러난 동맥의 핏줄이 희미하게 발광하고 있었다·
“네 말대로야· 마력이 들끓다 못해 폭주하고 있어서, 가라앉히는 것도 쉽지 않을 지경이지·”
“····”
“죽은 자의 피를 흡혈한 건데, 이 정도로 반동이 심한 건 나도 처음이다· 사흘간은 꼼짝없이 앓아누워야 했어·”
셔츠를 정리한 버질이 피곤한 안색으로 몸을 뒤로 기울이며 말했다·
“수혈 과정에서 마담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죽었을 거다· 회장님께서 신경을 쓰시게 만들었으니 면목이 없군·”
“올리비에라가 네 수혈 과정을 도와주었던 모양이군· 그 뒤에 급한 일정이 생겨서 지금 늦고 있는 건가?”
“아, 그건····”
버질이 망설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로원 측과 관련된 일이다· 회장님께서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안건이 하나 있다더군·”
“원로원? 카르텔 측에서 그쪽과 엮일 안건이 따로 있었나?”
“카르텔보다는 회장님 본인에게 얽힌 비사가 있지·”
레녹이 집무실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소파에 앉자, 맞은 편에 앉은 버질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 반 너와도 관련이 있는 일인 것으로 안다·”
“···나와 관계가 있다고?”
“회장님께서 돌아오시면 설명해 주실테니, 조금만 기다려주면 좋겠군·”
레녹과 클라리스의 앞에 능숙하게 커피를 타온 버질이 말했다·
“그 외에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물어봐도 좋아·”
“····”
“궁금한 부분이라·”
레녹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시선이 책상에 놓인 모니터로 향한 것을 깨달은 버질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럼 방금 전까지 네가 이 집무실에서 뭘 보고 있는지를 확인해도 되겠나?”
“···그건·”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부분이 올리비에라의 일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듯 한데·”
레녹이 집무실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버질은 컴퓨터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답지않게 근면한 이 흡혈귀가 레녹을 만나기 전까지 몰두하던 일이라면, 분명 업무의 연장선상일 터·
그가 컴퓨터로 하던 작업 자체가 지금 이 상황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말해주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확인해도 괜찮겠지?”
“아니,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기엔····”
당황한 버질이 이내 시선을 피하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마치 들켜서는 안되는 것을 들킨 듯한 묘한 반응에, 클라리스 역시 관심을 보였다·
“버질· 당신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분명 켕기는 부분이 있다는 뜻일 텐데요· 설마 원로원의 정보를 전뇌공간에 기록해둔 건가요?”
“아뇨, 아닙니다· 하지만····”
흡혈귀답게 창백해진 표정으로 무어라 변명하는 버질의 모습·
하지만 차마 제 입으로는 이유를 말하지 못한 채 망설인다·
“걱정하지 마라· 여기서 본 것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을 테니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걸음 한번으로 컴퓨터 앞에 내려서며 말했다·
“내가 네 제지를 해치고 억지로 정보를 확인한 걸로 하자·”
“···마음대로 해라·”
눈을 질끈 감는 버질을 뒤로 하고 컴퓨터에 손을 뻗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클라리스를 무시하고 정신을 집중해 위력을 조절·
파직!!
레녹의 손끝을 타고 흘러나온 전격이, 순식간에 컴퓨터 본체에 흘러 들어간다·
‘다비· 할 수 있겠어?’
[그럼요· 어려운 일도 아닌, 데에에····]
다비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다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버질이 방금 보여준 것처럼 미묘하다 못해 살짝 떨떠름한 반응·
[어라라?]
‘···?’
파앗!!
암전되어 있던 모니터가 켜지고, 컴퓨터가 꺼지기 전 열람한 페이지를 복구해 냈다·
“···딥웹?”
VIP 회원들만이 게시물을 작성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 등급 게시판·
그중에서 무려 수천 개가 넘는 댓글이 달린 게시물 여러 개가 동시에 펼쳐져 있었다·
[견뢰에게 패배했던 천번이 중앙전선에서 세운 전공·txt] +2323
[접합술주 < 천번 < 견뢰] +1342 [솔직히 다시 붙어보면 싸워볼만 하다 ㅇㅈ?] +4644 [그냥 견뢰한테 쪽도 못쓰고 압살당할 것 같으면 추천] +6501 “····” 게시물의 제목을 확인한 레녹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 * * 거대도시 전역을 크게 뒤흔들었던 견뢰와 천번의 결전· 견뢰가 거둔 승리과, 천번의 겪은 패배가 발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추산하기란 불가능하다· 청문회 이후 사태가 일단락되었음에도, 두 마법사의 행적이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만큼 견뢰와 천번이 이 거대도시에 아로새긴 충격과 파괴가 강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8레벨의 마법사가 목숨을 걸고 싸웠음에도 둘 다 멀쩡하게 살아남은 전례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후 전문가들의 분석을 통해, 결전 당시 두 대마법사 모두가 각자의 영역을 전개한 것이 확실시되는 만큼· 자성영역을 충돌시켜 승부를 본 두 사람의 행보가 어떻게 이어질지 관심을 가진 이들이 늘어난 것도 자명한 사실· 하지만 설마 버질조차 이런 화제에 관심을 가지고 딥웹을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설마 네가 이런 화제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군·” 말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레녹이 피식 웃으면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기업 경영을 맡고 있어도 본질은 초인이라는 건가·” “···반·” 딥웹을 몇 번 들여다본 레녹은, 그 안에서 오가는 많은 정보들을 걸러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버질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을 텐데, 굳이 이쪽 게시물을 둘러보고 있다는 사실· 그만큼 버질 역시 이런 화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겠지· “이해한다· 원래 다른 사람의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지·” “미안하군· 너와 천번의 일을 두고 워낙에 반응이 격해서····” 버질의 표정이 축 가라앉았다· “중앙전선의 일을 확인하려면 상대적으로 딥웹 쪽이 편해서 자료를 찾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사과할 것까진 없지·”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따지자면 이번 일에 천번을 끌어들인 건 내 쪽이다· 그 뒤의 일까지 통제하고 싶지는 않군·” “····” “헤에··· 호오····” “사장단 측에서 천번을 상대한 적이 있던 걸 생각하면, 분석자료를 확보하고 싶은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 “흐으음····” “···클라리스 리첼렌· 아까부터 뭘 하고 있는 거지?” 레녹이 놓은 마우스를 대신 잡고, 신기한 표정으로 딥웹을 구경하는 클라리스의 모습· 게시물을 열람하는 클라리스의 입에서 연신 묘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마치 자연인이 도시에 내려와 처음으로 문물을 마주한 듯한 반응· 클라리스의 정체를 생각하면 아주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은 아니지만···· “이 도시의 인간종들은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군요·” 클라리스가 홀린 듯이 딥웹의 게시물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마법사 둘을 비교하는 단순한 화제를 두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거죠?” “····” 정말 진심으로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반응에, 레녹마저 순간 무안해질 지경· 버질 역시 그러한 순수한 반응을 참을수가 없었는지, 컴퓨터를 향해 한걸음을 옮겼다· “클라리스 님· 송구스럽지만 이만····” “아뇨·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볼게요·” 버질의 저항을 단호하게 쳐낸 클라리스가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번 사태로 천번이 견뢰보다 강한 것이 증명된 이유··· 견뢰가 천번을 완전히 봐줬다는 증거····” “큭···!!”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하는 게시물 두개 다 댓글이 엄청 달려 있어요· 이 정도로 많은 인간들이 의견을 내고 있다면, 진지하게 논의할 만한 토론거리임이 분명해요·” 열람한 게시물의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 정신적인 타격을 받는 듯한 버질의 반응· 하지만 차마 클라리스를 만류하지도 못한 채, 어깨를 떨면서 버티고만 있을 뿐이다· [이 괘씸한 유기체들 같으니·] 레녹의 품 안에서 다비가 콧김을 씩씩 내뿜었다· [감히 저를 빼놓고 이런 재미있는 일을 딥웹에서 벌이고 있었다니···!] “····” [용서할 수 없어요· 마스터· 출격을 허락해 주세요!] “어처구니가 없군·” 한숨을 쉰 레녹이 머뭇거리는 버질을 지나쳐 클라리스에게서 마우스를 뺏어 들었다· “아앗!” “적당히 걸러보고 그만둬라· 그쪽이 생각하는 진지한 논의와는 분명 거리가 먼 정보들일 테니까·" “견뢰· 그렇지만 이걸 좀 보세요·” 클라리스가 포기하지 않은 채 모니터를 가리켰다· “이 제목을 보고도 정말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구요?” 그 말에 레녹 역시 결국 클라리스가 보고 있던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목 : 천번의 자성영역, ‘화염꽃’의 만개 최종분석· 그를 통한 견뢰의 자성영역과 2차전 결과 예측·] +26634 “····” 지금 딥웹에서 화제가 될 법한 모든 주제를 한 줄에 압축해 담아낸 제목· 레녹이 그 황당하기 그지없는 어그로에 말을 잃은 사이, 다비가 먼저 움직였다· [에잇·] 딸깍· 소리와 함께 게시물이 눌리고 곧바로 본문의 내용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