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2화
이정표(9)
“아이템이나 아티팩트을 너무 많이 챙겨서 곤란해질 지경이군·”
덜컹, 덜컹!!
수복이 거의 끝난 관문도시 대로변을 가로지르는 대형 트럭·
재건 공사에 참여하는 운반차량과 다를 바가 없어서인지, 누구도 오래 시선을 주지는 않는다·
자연스럽게 도시 바깥으로 떠나는 트럭의 짐칸· 암막으로 가려진 공간 아래 물건들을 쑤셔넣던 레녹이 땀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축소마법과 아공간을 모두 사용하고도 공간이 부족한데····”
데드라이즈 4군단장과의 면담을 끝낸 뒤, 레녹은 관문도시를 떠날 준비를 마쳤다·
이틀 동안 병동에서 요양하면서 발칸으로 돌아갈 시기와 방법은 이미 정해둔 상황·
문제는 처음 중앙전선에 왔을 때와는 달리, 떠날 때는 이것저것 챙겨야 할 물건이 많아졌다는 점에 있었다·
접합술주의 생명권역에서 습득했던 온갖 약재와 약품, 장비와 탑주가 남긴 최상급 아티팩트·
가비행이 끝난 뒤 전장에 버려진 장비들· 수색대에서 넘겨준 보급품까지 챙기고 나니 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것·
축소화와 경량화마법을 한계까지 사용하고도 레녹과 앙헬이 짐을 나눠 들어야 할 수준이다·
“그나마 마탑주가 남긴 아티팩트들은 착용이 가능한 물건이라 다행이지만····”
병실에서 요양하는 사이 하릴없이 휴식을 취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마탑주가 놓고 간 로브와 벨트, 장갑· 일련의 아티팩트에 대해 조사를 마치고, 사용법을 숙지했기 때문·
“화염 내성과 동화에 특화된 봉황의 로브· 보석의 마력을 추출해 사용하는 소켓 벨트· 그리고····”
새하얀 장갑의 손등에 그려진 붉은 마법진을 매만진 레녹이 중얼거렸다·
“구세계의 연소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마력을 변이시키는 번연의 장갑인가·”
예열을 통해 위력을 끌어올리는 염열마법과는 달리, 단시간에 빠르게 화력을 내는 폭발력에 중점을 둔 구세계의 연소마법·
오히려 연소마법의 성질만 따지자면, 레녹이 주로 사용하는 전격마법과도 비슷한 구석이 많다·
그렇기에 레녹은 연소마법이 자신에게 잘 맞으리라 확신하고, 터득할 방법을 찾아봤지만····
[아티팩트 하나를 분석해 날로 먹을 수 있는 마법이었다면, 마스터가 탐을 내지도 않았겠죠·]
“····”
다비의 쓸데없이 날카로운 첨언처럼, 당장은 장갑의 능력을 파악하고 보조기구로서 사용하는 것이 고작·
물론 이 장갑의 존재만으로 염열마법의 예열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수확은 있었지만-
“장갑이 아니라 마도서 같은 아티팩트였다면 유의미한 진전이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군요·]
마탑주를 놓친 시점에서 이 정도 아티팩트를 손에 넣은 것은 기대 이상의 수확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연소마법과 흑마법의 ‘가능성’을 손에 넣은 것과는 별개로, 두가지 마법 모두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 아쉬울 뿐·
“연소마법이야 염열마법과 엮어서 숙련도를 올릴 여지가 있다지만, 흑마법은 완전히 경우가 달라·”
다비의 볼을 쭉 잡아당기며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성질변화를 깨우친 뒤로는 반쯤 손을 놓고 있기도 했고, 실력을 끌어올리려면 부단히 노력해야겠지·”
흑마법은 레녹이 익힌 모든 술식을 통틀어 가장 이질적인 마법체계 중 하나·
계통으로 분류할 수 없는 특질계를 포함해도, 모든 계통을 통틀어 가장 술식의 결과값을 계산할 수 없는 힘이다·
1을 넣었는데 10이 돌아오기도 하고, 5를 넣었는데 1이 돌아오기도 하는 교환비 자체를 짐작할 수 없는 술식·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극에 이르면 명왕과 같이 규칙과 운명을 비틀어 비정상적인 힘을 손에 넣을 수도 있는 마법·
어떤 마법체계도 그런 식으로 성장과 교환의 법칙을 완전히 이탈해서 홀로 작동할 수는 없다·
명이 망가져 버린 이유도, 그렇게 강해질 수 있던 이유도 그가 본질적으로 가장 흑마법의 근원에 가까이 다가섰기 때문·
그렇기에 레녹 역시 흑마법을 제대로 익힐 필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명이 남긴 건 결국 가능성이니까· 그걸 분기점으로 개화시키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노력할 수밖에·”
[또 마스터가 저랑 놀아주는 시간이 줄어들고 마는 건가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축 늘어져 툴툴대는 다비의 모습·
레녹이 품 안에서 다비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이, 트럭 짐칸이 벌컥 열리고 수색대원들이 들이닥쳤다·
쿵! 쿵! 쿵!!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큼지막한 소포들을 트럭 짐칸 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에반 님· 수색대 보급창고에서 반년치 보존식량을 꿍쳐왔습니다!”
“관문도시 상인회에서 의복과 침구류 일체를 보내왔습니다· 어디에 놓아두면 될까요?”
“암시장 유흥가 쪽에서 보낸 값비싼 증류주들입니다· 관리자에게 보내는 의례라는 말이····”
기껏 정리해둔 짐이 무색하게 쌓여가는 물품을 황당한 듯 지켜보던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분명 이 이상 보급품이나 물자를 받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 4군단 측에서 주둔지의 잔여물자를 보내왔는데 그건 받지 말까요?”
“····”
그렇게 말하면서도 차곡차곡 짐칸을 정리하는 대원들의 모습에 레녹이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정리할 생각이니 남은 물건은 가져가라· 들고 갈 손도 마땅치 않아·”
“하지만 에반 님·”
“이대로 도시를 떠나시면, 다시 소속도 없이 대륙을 배회하시는 것 아닙니까·”
수색대원들이 그제서야 진지해진 표정으로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청의 눈을 나오신 뒤로 마땅히 지원을 받을 곳도 없으셨을 텐데, 사양하지 마시지요·”
“····”
수색대는 레녹에게 관문도시를 떠나지 말라는 식의 부탁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관문도시를 이대로 지켜달라거나, 관문의 관리자 역할을 맡아달라거나·
청의 눈을 탈퇴한 주시자에게 그런 부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기에 레녹을 붙잡는 대신 하나라도 더 많은 보급품을 챙겨주려 하는 것이다·
살짝 무거워진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대원들이 금세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 관문도시 안에서 에반 님의 평판이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멋대로 선물을 돌려보내면 오히려 저희 수색대 측이 난감해진단 말입니다·”
“····”
가비행이 휩쓸고 사라진 관문도시는 당분간 어떤 세력의 개입도 없이 소강상태를 유지할 터·
천화만리향의 불꽃이 장막을 불태우는 이상, 장막에 균열을 내는 [관문]의 기능이 사라질 일은 없다·
모든 일이 끝난 시점에서, 접합술주를 죽이고 명과 대면한 천번에 대한 이야기만이 이 도시에 남은 상황·
그렇기에 여기 모인 물자들은 단순한 호의나 보답, 선물의 용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색대가 한 말을 이해한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칸 천장에 묶어 가져갈 수 있는 분량만 더 받기로 하지· 그 이상은 필요 없어·”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일사불란하게 뛰쳐나가는 수색대원들을 바라보던 앙헬이 어깨를 으쓱였다·
“개판이군요· 대충 정리가 된 겁니까?”
“에레디스 자벨린은 떠났나?”
“한참 전에 떠났죠·”
앙헬이 운전석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바쁜 사람입니다· 전 그녀가 관문도시까지 직접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전단 내부에서도 입지가 상당한 모양이군·”
“아펠리아가 가장 신뢰하는 초인 중 한 명입니다· 성격도 그렇고, 전단의 창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죠·”
“····”
물끄러미 앙헬을 바라보던 레녹이, 이윽고 가방의 지퍼를 잠그며 물었다·
“영좌와 꽤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던 모양이군·”
“다 지난 일이니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앙헬이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지금의 아펠리아는, 이제 제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도 하고····”
“····”
“무엇보다 제 상관은 회장님뿐이라구요· 지금 제 애사심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말은 가볍게 하지만, 앙헬이 올리비에라를 거짓으로 섬기고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
에반과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물론이고, 전단의 지인들을 만난 뒤에도 앙헬은 딱히 동요하지 않았다·
이능개화전단을 그리워할지언정, 그들의 방향성에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시간과 장소는 잡혔나?”
“본사 비서실 측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레녹이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앙헬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을 교환하기 위한 위치 좌표를 받았으니, 슬슬 움직이도록 하죠·”
“좌표는 어디지?”
“위성도시 바이루츠· 운반해온 물자를 그곳에 보관하고, 물건을 교환할겁니다·”
앙헬이 자연스럽게 들고 있던 단말기 화면을 내밀었다·
“듣기로는, 판데모니엄의 접선 장소로도 한 차례 사용된 적이 있던 유령도시라는군요·”
* * *
“경계지대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편하게 중앙전선을 벗어난 감이 있네요·”
부르릉!!
관문도시에서 출발해 중앙전선을 벗어나는 여정은 생각보다 순탄했다·
관문으로 향할 당시 며칠 내내 소란스럽던 것과는 반대의 양상이었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제정신이 박혔다면 지금 이 시기에 약탈이나 살인을 시도할 리가 없지·”
의외라는 듯한 앙헬의 말에,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물고 있던 레녹이 픽 웃었다·
첫 번째 관문에서 발발한 가비행에 대해 들었다면 지금쯤 중앙전선 전역이 납작 엎드리고 있을 터·
나풀대는 초원 사방에서 쥐새끼 하나 얼씬대지 않는 것도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대로 경계지대를 벗어나면 발칸 미개발지구 인근· 위성도시 사이를 거쳐 거대도시로 입성하게 되겠지·
“그럼, 난 여기까지군·”
트럭 위에서 망원경을 든 채로 하품하던 버나드가, 배를 긁으면서 뛰어내렸다·
조수석으로 다가온 버나드가 레녹에게 털이 수북한 손을 내밀었다·
“수고 많았다, 마르티네스· 엿 같은 일만 있었지만, 아무튼 살아남았으면 된 거지· 안 그래?”
“전단으로 복귀할 생각인가?”
“앙헬 놈과는 다르게, 아직은 전단에 묶인 몸이거든· 딱히 벗어날 생각도 없고·”
버나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능개화전단이 초심을 잃었다는 점에는 동의해· 앙헬이 실망한 것도 이해할 수 있지·”
“····”
말없이 고개를 기울인 앙헬을 보며 버나드가 웃었다·
“하지만 영좌가 아니었다면 살아남은 이능력자의 숫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적었을 거다· 적어도 나는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싶지 않아·”
“집체 정신망의 존재가 선천이능력자들을 위한 방향성이라는 점에 대해서 공감하는 모양이군·”
“최소한 아펠리아 영좌 본인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
버나드의 눈빛이 순간 진중하게 변했다·
“대의라는 건 그런 거다· 성전 당시 우리가 목숨을 걸고 교단 총본산의 위치를 찾아낸 것도 같은 이유였지·”
파이오니어의 탐험가로서 살아온 버나드이기에 할 수 있는 대답·
그 역시 성전이 끝난 뒤로 오랫동안 살아가야 할 이유를 고민해 왔던 것일까·
“뭐, 꼭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난 앙헬의 선택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보이거든·”
“····”
“마법을 버리고 이능을 선택한 카르텔의 회장이 범상치 않은 광인이라는 건 틀림없지· 그쪽이 그리는 대답도 나름 꽤 그럴싸한 물건일 거야·”
침묵하는 앙헬을 향해 버나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살고 있다면 그걸로 괜찮아· 그러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
“···버나드·”
고민하던 앙헬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는-”
“교단 총본산의 위치에 대해 듣고 싶군·”
레녹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비탄의 협곡· 대륙 어디에 숨겨져 있는 건지 알려줄 수 있나?”
“····”
레녹의 태연한 질문에, 앙헬과 버나드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황당한 듯이 시선을 돌린 버나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도살해자답군· 지금 이 훈훈하게 마무리하려는 분위기에서 그런 걸 꼭 물어봐야 했나?”
“가비행이 떠난 뒤에도 7사도의 시체는 결국 발견되지 않았지·”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만지작거리며 레녹이 대꾸했다·
“그 흡혈귀가 이번 사태에서 목숨을 건졌다는 건 확실해· 나는 그것이 10사도의 사도술식으로 인한 일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
“교단 총본산이 멀쩡히 유지되는 한, 사도를 토벌해도 그들의 사도술식은 계속해서 계승되고 이어지겠지·”
레녹의 말을 이해한 앙헬과 버나드의 표정 역시 긴장감 어린 얼굴로 변했다·
교단 10사도· 암리타 프라우벨을 직접 토벌했던 천번 본인이 전하는 말의 무게감·
그것이 한없이 진실에 가까운 추론이라는 사실을, 두 초능력자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군·”
버나드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성전을 멈춘 조약의 내용은 협곡의 위치를 ‘지우는’ 것이었어· 파이오니어 멤버 전원이 그 작업에 협조했지·”
“지운다라····”
“기억을 비롯해 물리적인 입구의 장소와 위치좌표를 말소하는 거다· 우리가 총본산을 찾아낸 작업을 반대로 수행해서, 그 사실 자체를 지워 버린 거지·”
버나드의 표정이 일견 씁쓸하게 변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탐험이었지만, 이제 그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야· 미안하다·”
“····”
“뭐, 더 말해봤자 술맛만 떨어질 것 같군· 트럭 뒤쪽에서 술병만 몇개 챙겨서 바로 떠나지·”
레녹의 어깨를 두들긴 버나드가 걸음을 돌렸다·
“아, 그리고 영좌와 만나보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라·”
“영좌를?”
“영좌는 인간과는 많이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기억이나 판단까지 맛이 간 건 아니거든·”
짐칸에서 술병을 여럿 챙긴 버나드가 관자놀이를 두들겼다·
“너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건 거짓말이 아닐 거다· 다만 그 수단 자체는 어떤 식으로든 상관없다 생각한 거겠지·”
“····”
“뢰비드 그놈이 하려던 식이 아니라도, 에레디스를 통하면 초대받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씩 웃은 버나드가 손을 흔들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 같은 마법사와 같이 일할 수 있어서 재밌었다· 다음에는 살아서 보자고·”
파이오니어· 개척자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날린 탐험가·
레녹과 관문도시에서 함께한 순간조차 탐험의 일부로서 치부하고 즐기는 사람이었나·
사명보다 호기심을 좇아 살아왔다면, 그 삶의 방식에 대해 레녹도 첨언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아아앙!!
경계지대에 남아 술을 들이켜는 버나드의 모습을, 사이드미러로 말없이 지켜본다·
운전대를 잡은 앙헬이 힐끗 레녹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펠리아와 만나고 싶다면····”
“아니·”
레녹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야· 벌써부터 기약 없는 약속을 잡을 필요는 없겠지·”
장막의 파편을 얻기 위해 에반의 신분으로 움직인 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외겁도시 쿤다라로 향하기 위해 시작했던 준비가 예정보다도 더 뒤로 미뤄진 상황·
영좌의 초대· 군단의 열병식· 중요한 일이라는 건 틀림없지만, 다시 중앙전선에 방문할 때 생각해 볼 일이 되겠지·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 어둠 속에서 위성도시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비춰보이기 시작했다·
위성도시 바이루츠·
빅터의 신분으로 판데모니엄의 중간결산에 참여했을 당시 방문했던 위성도시·
카르텔 측에서 접선장소를 잡은 것이겠지만, 하필 위성도시 중에서 그곳을 고른 것은 아이러니하다·
끼익!!
오래지 않아 위성도시 시내에 진입한 트럭이 천천히 멈춰 섰다·
브레이크를 밟은 앙헬이 차 키를 뽑아 레녹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가져가시죠· 당신 겁니다·”
“바로 움직이지·”
트럭에 실린 물자들은 전원 에반 마르티네스의 신분으로 습득한 물건들·
당연하지만 여기서 대외적으로 견뢰에게 넘길 수 있는 물건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접합술주의 수술도구를 조든에게 선물해 주는 정도일까·
사악···!!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위성도시의 텁텁한 공기· 먼지와 시멘트 가루가 어두워진 밤하늘을 가린다·
“저도 발칸 출신이 아니라 처음 알았는데, 암거래 장소로 이용되는 도시라 합니다·”
앙헬이 묵직한 가방을 짊어지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도시 전역에 버려진 철도가 깔려있어서 탈출구가 많다더군요·”
“····”
앙헬의 설명을 듣는 사이, 두 사람은 금세 도시 중심부의 철도역에 도착했다·
레녹의 기억에도 남아있는 반파된 기차역의 형상·
판데모니엄의 중간결산 당시, 버려진 열차를 강제로 작동시켜 탈출을 시도했던 기억이 있다·
“이쪽입니다·”
매점과 벤치, 열차 시간표와 전광판이 늘어서 있는 휴게실 광장·
그 안으로 레녹을 안내하던 앙헬이 문을 열자마자 곤란한 기색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역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에 레녹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군가 있군·”
“····”
달빛이 비추는 넓은 휴게실을 중심으로, 아주 강렬한 기척들이 이쪽을 둘러싸는 것이 느껴졌다·
창을 쥔 채 매점 가판대에 걸터앉은 소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선 청년·
창문 밖에서 이쪽을 향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과, 은은하게 느껴지는 마법진의 존재까지·
레녹을 직접 죽이려 하지는 않지만, 극도로 경계하고 감시하는 듯한 싸늘한 의념·
“어라?”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경직된 분위기에, 앙헬이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장단 일부에 이사진까지··· 비서실 측에서 이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
레녹은 그런 앙헬을 대신해서 말없이 시선을 휴게실 끝으로 돌렸다·
일렬로 쭉 늘어선 대기석 끝에, 안경을 쓴 호리호리한 체격의 청년이 서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에반 마르티네스·”
품이 넓은 도복을 입은 채, 양 손을 모으고 인사를 건네는 모습·
“연락을 받고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만, 예상보다 많이 늦으셨습니다·”
“저주술사·”
싱글싱글 웃고는 있지만, 표정을 읽기 어려운 그 얼굴을 레녹 역시 알고 있었다·
카르텔의 6사장 라우더· 제약사업부를 맡고 있는 사장이자, 일전에 한번 싸워본 적이 있는 상대다·
천번의 신분으로 발칸 음지를 돌파할 당시, 앙헬과 함께 레녹의 앞을 막아섰던 저주술사·
인간을 혐오하는 듯한 언동과 독특한 저주술식 때문에 레녹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중이 과하군· 카르텔에서 이 정도로 환영을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라우더를 빤히 바라보던 레녹이 픽 웃자, 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중앙전선의 소식을 들은 저희로서는, 그쪽이 대체 어떤 상태일지 짐작조차 불가능했었던지라·”
“····”
겉으로는 미소짓고 있지만, 레녹을 이전보다 더욱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카르텔의 사장단과 이사진을 비롯한 주요 전력이 레녹에게 오직 물건 하나를 전해 받기 위해 움직인 것인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삼엄한 조치였으나, 레녹은 이 상황을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었다·
데드라이즈 군단장과 접합술주에게 승리한 에반 마르티네스가, 사실상 처음으로 전선 밖에서 얼굴을 보이는 자리·
관문도시의 일에 대해서 전해 들었다면, 누구라도 천번을 대하는데 있어 태도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
견뢰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뒤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번의 위상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거쳤는지·
당장 레녹의 호흡이나 손짓 한번을, 주위에 선 초인들이 극도로 집중해서 주시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천천히 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은 레녹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물건은 그쪽에게 넘기면 되는건가?”
“물론 제가 이번 일에서 전권을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라우더가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천번의 이름값을 저희 혼자서 맞춰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
“본사의 새로운 외부고문께서 이번 일을 협력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고문이라·”
올리비에라가 이끄는 카르텔이 이상할 정도로 인재 수급에 능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천번의 이름과 맞댈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던 것인가·
하지만 현재 발칸 인근에서 그 정도 내력을 지닌 강자라면, 레녹이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을 터·
“이쪽입니다·”
천천히 걸음을 올긴 라우더가, 휴게실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레녹을 안내했다·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한걸음 물러서고, 레녹이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 차려진 작은 테이블과 간소한 의자 두 개·
맞은 편에 앉아서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는 여성의 모습····
얼굴을 가리는 검은 면사포와, 새카만 트렌치코트· 손목에 걸고 있는 작은 양산 손잡이까지·
[올리비에라가 하는 부탁은 언제나 번거롭고 듣기 싫어지는 이야기들뿐이었죠·]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커피를 홀짝이던 여성이, 천천히 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젖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간만에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겠네요· 이래서 악연이라도 함부로 끊어둘 이유는 없다는 거죠·]
“···너는·”
[직접 얼굴을 뵙는 건 처음이군요, 에반 마르티네스·]
면사포 너머로 붉은 안광을 흘리며 여성이 조용히 미소지었다·
[엘레브라 트리바이어라고 해요· 마담이라고 불러도 좋고·]
“····”
거대도시 발칸에서 가장 오래된 브로커·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에도 참가했던 관계자이자 고위계 흡혈귀·
마담이 카르텔의 새로운 임원으로서 레녹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로 해야 할 말이 많으니, 앉아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면사포 너머로 눈웃음을 지은 마담이 속삭였다·
[당신이 가져온 ‘선물’을 두고, 카르텔에서도 합당한 대가를 준비해 두었거든요·]
“····”
[라리아타 아르무슈· 그 여자에 대해 같은 흡혈귀로서, 사도살해자에게 해줄 말도 있는데· 어떤가요?]
침묵하던 레녹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담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