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g-Eating Genius Mage Chapter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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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화

이정표(8)

“크로켄 아실러스가 위령탑을 박살 낸 뒤로, 요르타의 영교(靈橋)가 개방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

한 손으로 술병을 들고, 레녹의 잔에 술을 채워준 미르바가 말했다·

“음습한 유령들을 상대하다 보면 나까지 생기가 빨리는 것 같아서,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이 그리워지더군·”

“····”

“로베라이드 중장이 이끄는 3군단의 일도 수습할 겸, 관문도시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탁!

잔이 넘칠만큼 투명한 술을 가득 채워준 그녀가 시가를 뻐끔거리며 웃었다·

“접합술주가 죽고 명왕이 나타나는 걸 살아생전 같이 보게 될 줄이야· 사람이 이렇게 운이 나빠도 되는 건가?”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 군단은 굉장히 이성적으로 움직였던 것 같은데·”

레녹이 그렇게 대꾸하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근처에 있었으면서 마지막까지 전장에 개입하지 않았지· 오히려 병력을 뒤로 물려 상황을 살피려고 했어·”

관문도시 인근에 주둔중인 군단에 대해 듣긴 했지만, 사태가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크게 신경 쓰지는 못했다·

만약 군단이 레녹을 노린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정도만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었을 뿐·

하지만 미르바 네오소토가 이끄는 4군단은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전장에 개입하지도, 후퇴하지도 않고 미묘한 균형을 유지한 채 계속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그리고 레녹은 4군단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역시 알고 있었다·

“관문도시에서 장막 뒤편으로 대피했던 민간인들· 군단 측에서 인솔해서 데리고 있었던 거겠지·”

“····”

“민간인을 대피시킨다는 명분으로 전장을 지켜보다, 여차할 경우에는 개입할 생각이었나?”

“예나 지금이나 전쟁터에서 인명구조는 좋은 명분이 되어주거든· 상황이 뒤틀렸을때 핑계나 버림패로 써먹기도 편하고 말이다·”

미르바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뭐, 하지만 모든 변수를 고려하고 있던 건 아니야· 솔직히 말해 명왕이 나타났을 때는 문제가 커졌다고 생각했지만····”

두꺼운 시가를 깊게 빨아들인 그녀가,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으면서 말했다·

“어느 대마법사께서 목숨을 걸고 가비행을 잠깐 멈춰주신 덕분에, 우리 모두에게 잠깐의 유예가 생겼던 거지·”

“····”

“견뢰에게 패배하고도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는 참모부의 보고서는 받아봤지만, 이렇게 직접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군·”

레녹을 바라보는 군단장의 눈동자가 이채가 감돌았다·

“중장과 싸운 뒤 며칠도 지나지 않아 접합술주를 상대하고, 관문도시 전역을 불태워 버리다니··· 대체 타고난 마력량이 얼마나 되어야 그게 가능한 거지?”

연기를 훅 내뿜고, 손에 든 술잔을 쭉 입가에 기울인다·

잔이 비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간부가 곧바로 술을 채워준다·

흡연과 음주를 반복하면서도 조금의 취기조차 내보이지 않는 군단장의 모습·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레녹을 바라보던 미르바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고위 술사들 중에서도 너처럼 축복받은 마법사는 흔치 않지· 적어도 내가 본 술사 중에서 가장 사람을 잘 태운다는 건 틀림없겠어·”

“그렇군·”

레녹이 웃으면서 술잔을 기울이자, 잔에 담긴 술이 흘러넘쳐 테이블을 적셨다·

젖은 테이블 위로 천천히 손가락을 갖다 댄 레녹이 물었다·

“그걸 알면서 이렇게 나와 대작을 할 생각이 들었나?”

훅-!

순간, 날카로운 시선들이 일제히 이쪽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미르바 네오소토의 등 뒤에 말없이 도열한 4군단의 지휘관과 간부들·

각자 성별과 나이가 다른 여러 초인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

레녹의 앞에서 마력과 의념을 가라앉혀 죽였음에도, 순간적인 반응까지 레녹에게 숨길 수는 없다·

내색하지는 않을지언정, 그들 역시 천번에 대해서 보고 들었기에 가능한 반응·

하지만 미르바는 날카로워진 분위기에도 태연하게 웃으면서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렇지· 천번에 대한 소문이 절반만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

침묵하는 레녹을 향해 미르바가 느긋하게 연기를 흘렸다·

“자신을 죽이려 한 이들까지도 가비행에서 구해주려 한 주시자가, 이런 사람 많은 거리에서 먼저 손을 쓸 리가 있겠나?”

“그건····”

암시장에서 레녹에게 먼저 말을 건 것 자체가, 천번의 성정에 대해 어느 정도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나·

천번의 이름이 현재 중앙에서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군단장이 대놓고 그것을 언급할 줄이야·

관문도시에서 레녹이 했던 모든 일이, 다의적으로 해석되기 좋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행동에 큰 차이를 두지 않았음에도 천번의 신분이 견뢰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생경하다·

“안다· 너에 대한 평가가 자신의 생각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이겠지?”

그런 레녹의 심경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미르바가 씩 웃으며 술병을 쥐었다·

“너 같은 초인을 몇 명 알지·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아· 자신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

“네가 청의 눈을 탈퇴하고 소속을 두지 않은 시점에서 더욱 그렇다· 만약 네가 중앙전선에서 ‘다시’ 시작할 생각이라면-”

쪼르륵···!

반쯤 비어버린 레녹의 술잔에 미르바가 재차 술을 따른다·

술병에서 쏟아진 술이 멈추지 않고 잔을 가득 메우다 밖으로 떨어졌다·

잔에 담긴 술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며 그녀가 무심하게 말했다·

“뭐든지 과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겠지·”

“퍽이나 사려깊은 조언이군·”

손끝을 타고 흘러내리는 술을 털어낸 레녹이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인가?”

“곧 원수께서 복귀하시는 날짜에 맞춰 군단의 열병식이 열릴 거다·”

“뭐?”

“로베라이드 중장을 비롯해 공석이 된 군단장의 자리를 채우고, 정식으로 직급을 인계하는 과정이지·”

데드라이즈 내부의 중요 일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한 미르바가 술잔을 홀짝였다·

“현재 전 군단이 제 2사령부를 향해 복귀하고 있다· 그때쯤이면 예의 ‘토벌작전’에 대한 논의도 본격적으로 이뤄지겠지·”

“····”

“긴말하지 않겠다· 너도 열병식에 참가하도록·”

술상 너머로 군단장과 레녹의 시선이 스쳐 지나가듯 마주했다·

“군단장의 자리를 받아들여· 그럼 사령부에서 네게 최고의 복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줄 거다·”

“복수라·”

레녹이 피식 웃었다·

토벌작전이 과연 누구를 목표로 하는 것인지, 왜 하필 천번을 섭외하려 하는지 역시 그 한마디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

“내가 로베라이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건가?”

“난 로베라이드 중장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군단에 지니고 있던 충성심까지 부정하지는 않아·”

미르바가 술잔을 흔들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대의라는 말을 남발할수록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도 모르는 멍청이에다가, 사령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날뛰던 독불장군이었지만, 의외로 조직이 원활하게 굴러가려면 그런 외골수도 한 명쯤은 필요한 법이거든····”

“····”

“주관이 강한 이들이 모여 머리를 이루기에 군단이다· 그것이 원수와 대장들이 중앙에 진출하며 내세운 기치(旗幟)였고····”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4군단장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본 사령부에서 너를 주시하는 이유이기도 한 거야· 그 멍청한 남자가 그만큼 훌륭한 군인이었다는 증거지·”

“훌륭한 군인이라·”

레녹이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군단에 꽤 소속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이봐, 마르티네스· 난 군인이야· 군인이 군대에 충성을 바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미르바가 껄껄 웃으면서 테이블을 두들겼다·

“군단의 방향성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지휘관의 의무를 잊어버릴만큼 정치에 품을 들일 생각은 없어·”

품 안에서 짤랑거리는 금화 몇 개를 테이블에 올려둔 군단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레녹을 향해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그러니까··· 다음번에 우리가 만나는 곳이 전장이 되지 않기를 바라자고·”

“····”

“원수께서 복귀하시고, 울티마 얼럿이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어질 테니까·”

시가를 뻑뻑 피우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미르바가 말했다·

“그때 네가 사령부의 말살 대상이 되어 있든, 아니면 로베라이드의 뒤를 이어 군단장이 되든· 열병식이 열리기 전에는 결정이 되어 있다면 좋겠군·”

입을 다문 레녹을 내려다보며 미르바가 피식 웃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잠시나마 같이 앉아 술잔을 기울일 수 있던거니까·”

“···장소와 날짜를 관문도시 측으로 보내도록·”

자리에서 일어난 레녹이 미르바와 시선을 마주친 채 말했다·

“시간이 된다면 방문하도록 하지· 하지만 당신의 말대로 원수가 군단에 복귀해 있어야 할 거다·”

군단장의 자리를 이미 맡겨둔 것처럼 말하는 미르바의 말도, 그 결정을 묵인하는 4군단의 간부들도·

비틀린 질서와 체계 아래 존재하는 군단의 규율 역시 레녹에게 그렇게 와닿지는 않는다·

카이세를 배신한 데드라이즈와, 그 아들인 에단 바쥬르를 중심으로 세워진 군단·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의 자리가, 그들이 말하는 것 만큼의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인지·

“스스로 부활했다는 데드라이즈의 주인에게 직접 대답을 들을 수 없다면, 지금 이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니·”

“훌륭한 배짱이군·”

미르바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원수님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그것도 나름 기대가 되는데·”

일말의 미련도 없이, 그대로 술집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는 미르바의 모습·

호위대에 둘러싸인 그녀의 신형이 인파를 헤치고 순식간에 등불이 비추는 거리 뒤로 사라진다·

“····”

레녹은 반쯤 남은 술잔을 쥔 채로, 발코니에 기대 그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미르바 네오소토· 데드라이즈 4군단장· 7군단의 데이머스와 쌍벽을 이루는 사령관이라 했던가·

위령탑이 무너지자마자 도시를 포위하고 압박을 가할 정도로 탁월한 정치감각·

중앙전선 안팎을 오가며 무수한 전투를 치르면서도 쇠하지 않는 기력·

가비행의 학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상황을 관망하던 판단까지·

철저하게 전쟁과 집단전에 특화되어 있는 지휘관의 자신감인가·

차후 군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까다로운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죽여야 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이내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발코니에서 돌아섰다·

4군단의 간부들이 오직 레녹 하나만을 경계하고 주시하던 상황·

여기서 군단장을 죽이려 했다면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겠지·

천번에 대한 미르바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내린 결론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군단과 척을 지는 것보다도, 사령부에서 열린다는 열병식에 흥미가 이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무엇보다, 그 에단 바쥬르가 마침내 군단에 복귀했다면 레녹 역시 그를 만나볼 의사가 있다·

카이세 바쥬르의 아들· 군단의 주인· 죽음에서 돌아온 부활자·

역천의 마력을 강하게 지니고 태어나, 죽은 뒤에야 오히려 그 재능을 강하게 손에 넣은 초인·

천번의 신분으로 오히려 그에게 가까워졌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조차 결국 레녹 자신이 만든 연쇄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청의 눈을 탈퇴한 에반 마르티네스의 이름이, 중앙에서 다시금 이유를 얻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에반 마르티네스의 신분으로 움직인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군단의 열병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는데다, 당장 견뢰의 신분으로 해야 할 일을 앞두고 있는 상황·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조차, 외겁도시를 향한 여정의 일부라는 사실을 레녹은 잊지 않았다·

암시장 거리 저편에서 다가오는 앙헬과 버나드의 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지금쯤이면 올리비에라 측에도 중앙전선의 소식과 여파가 전해졌을 터·

발칸으로 다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휘오오오···!!

메말라 죽어버린 황량한 고원·

초목이 풍성했던 녹지가 색채를 잃고, 생명이 가득했던 평야에 죽음만이 감돈다·

판데모니엄의 명왕·

대륙 최고(崔古)의 흑마법사가 직접 이끄는 가비행이 휩쓸고 떠난 폐허·

에레디스 자벨린은 그런 가비행의 자취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다·

부우웅···!!

전단의 십좌(十座)에게만 허락된 비공정, 능화(能華)가 황무지를 따라 느릿하게 부유한다·

지상에 아로새겨진 죽음의 기운에는 일체 접촉하는 일 없이, 명왕이 남긴 흔적을 따라 움직이는 비공정의 모습·

그런 비공정의 선두에 선 에레디스의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에레디스 님·”

에레디스의 등 뒤에 무릎을 꿇은 무표정한 인상의 남성이 물었다·

“의식병기 형혹성(熒惑星)· 이대로 천번에게 넘겨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

“젤리히 삼좌의 독단이 있었다고는 하나, 본래 같은 십좌 사이에서도 계승이 허락되지 않는 물건입니다·”

많은 것을 보지 못한 척, 듣지 못한 척 하며 관문도시를 돌아 나오기는 했지만·

에레디스 자벨린과 그녀가 이끄는 소멸번대는 결코 우둔하지 않다·

접합술주를 죽이면서 중앙전선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천번, 에반 마르티네스·

예의 대마법사가 자신들의 앞에서 타고난 소질을 숨길 생각조차 없었음을, 그들 역시 알고 있던 것이다·

“천번의 태도를 보면 그는 분명 선천이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물며 의식병기가 실체화했던 그 모습은····”

창과 깃대가 일체화한 장장 십미터 크기의 거대한 화염깃발·

소멸번대의 주인인 에레디스가 지닌 의식병기조차 그렇게 무식할 만큼 거대하지 않다·

새로운 의식병기의 보유자가 된 천번의 의식이 대체 얼마나 아득하게 광대한지·

그렇게 완성된 의식병기의 유효범위와 사정거리가 대체 어느 정도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차후 천번과 대립하게 된다면, 이번 일이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겁니다· 차라리 에레디스 님의 능력으로 의식병기를 소멸(消滅)시켰다면-”

“유토·”

에레디스가 입을 열자, 남자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에레디스가 유토라 불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사망한 13석과 동기라고 하였으니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

“····”

“하지만 고작 형혹성 하나를 넘겨주고 이번 사태를 무마할 수 있었다면, 저는 설령 접합술주가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했을 겁니다·”

“에레디스 님·”

“아베스타 채프먼· 그 편집증 환자가 그렇게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는 않지만, 천번이 술주와 싸워 승리를 거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에레디스의 담담한 시선이 비공정의 아래쪽으로 향했다·

“가비행이 다시 시작되며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관문의 소유권은 물론이고, 교단과 연맹의 전쟁조차도 영향을 받을 법한 중대한 사태입니다·”

“····”

“중앙의 판세가 당장 천번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면, 저는 굳이 그 흐름을 거스르고 싶지는 않군요·”

죽음만이 가득한 황무지를 바라보는 에레디스의 눈에 싸늘한 한기가 섞였다·

“그러한 흐름조차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자들이, 이 전장에 개입하고 있다면 더더욱 말입니다·”

“···그건·”

아르스노바로 향하는 머나먼 여정에서 한 사람이 모든 상황과 인과를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생명이 꽃처럼 피어났다 시들어가며, 법칙과 상리를 뛰어넘는 괴물들이 날뛰는 중앙전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편법과 우회로 위에서 초월자들의 의지가 교차하고 있다면, 그것은 흐름이 아니더라도 흐름이 되어야 한다·

명왕의 도래와 진와의 개입· 그리고 마지막 순간 발생한 가비행의 변향·

그 모든 안배를 어렴풋하게나마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에레디스 역시 같은 시선에서 대국을 논할 수 있는 초인이기 때문일 터·

“소멸번대 전원· 지금부터는 가비행의 추적을 그만두고 본부로 복귀하겠습니다·”

철컥!!

비공정의 선두에서 내려온 에레디스가, 곧바로 갑판으로 향했다·

흐릿한 안개 속에서 내려앉은 수십에 달하는 대원들이 줄지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명왕이 진정으로 진와의 실낙원을 거쳐 갈 생각이라면, 이다음부터는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무의미해지겠지요· 마경 공략이 실패한 지금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암시장에서 구입하신 촉매와 약재의 가공을 마쳤습니다· 바로 미칼 젤리히에게 ‘시술’할까요?”

“아뇨· 영좌를 만나는 것이 우선입니다· 십좌에 공백이 생기면서 집체 정신망이 많이 느슨해졌어요·”

에레디스가 그렇게 말하며 장갑 안에서 손을 빼 대원에게 내밀었다·

쩌저적···!!

손톱 끝에서부터 피부가 갈라지며 강제로 소멸(消滅)하고 있다·

대원들이 침묵하는 사이, 대수롭지 않게 장갑을 다시 손에 낀 에레디스가 말했다·

“정신망이 불안정해지면서 제 능력도 필요 이상으로 강해져 버렸으니,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겁니다·”

아펠리아 영좌가 구축하는 집체 정신망은, 선천이능력자들의 힘을 증강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통제할 수 없는 재능의 부담을 대신 떠안고, 그들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취해진 조치·

이능개화전단의 2석· 에레디스 자벨린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태어나면서부터 압도적인 이능을 지니고 태어나, 끊임없이 ‘소모’시키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괴물·

과함이 모자람보다 못하다는 오래된 격언을 평생동안 체득하고 상징해온 결과물이 이곳에 있다·

“서두르죠· 본부에 복귀한 뒤, 군단 사령부에서 온 전언에 대해서도 답변을 해야 하니까요·”

“···사령부 측에서 전언을 보냈다면, 원수의 복귀와 관련된 이야기입니까?”

“아뇨, 발칸 쪽의 일입니다·”

지평선 끝자락을 물들인 어둠을 바라보는 에레디스의 시선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쪽 사령부는 이번 일로 인해서··· ‘토벌 대상’을 완전히 확정 지은 듯하더군요· 저희 측의 참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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