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화
이정표(7)
재건이 거의 다 끝난 관문도시 최외곽 간이 성채·
싸움의 여파로 무너져 내린 성벽을 제외하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풍경·
하늘 위에서 불타는 장막의 장엄한 풍경이 그 모든 정경을 다른 빛으로 비추고 있다·
타닥, 타닥!!
장막을 태우고 떨어지는 무사한 화염의 꽃잎·
마치 반딧불처럼 떨어져 내리는 불꽃이, 관문도시 하늘 위로 흩날리며 발광한다·
작은 별똥별이 무수히 빛을 발하듯이 흩날리는 첫 번째 관문의 새로운 정경·
“아름답군요·”
앞서 걷던 에레디스가 그 모습을 보고 무심코 감탄했다·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술사들을 여럿 만나보았지만, 이 정도 스케일은 저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
“전장의 일부가 아니라, 관문의 형태를 바꾸고 환경을 개변하는 힘이라니··· 역시 마법의 힘에는 한계라는 것이 없군요·”
“입에 발린 소리는 그쯤 하지·”
레녹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정작 그쪽은 이미 마법을 부러워할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선 것 같은데·”
“····”
응접실에서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레녹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앞장서 걷는 에레디스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가공할 정도의 투기(鬪氣)·
레녹을 만나기 위해 아티팩트를 일절 두르지 않았음에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기척·
선천이능과는 별개로, 본신의 무력 자체가 무시무시한 수준에 이른 괴물이다·
이능개화전단에서 가장 뛰어난 살상력을 가졌다는 앙헬의 설명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
이 정도로 흉포한 기척을 지니고도, 그 성격 자체가 점잖다는 것이 쉬이 믿기지 않을 정도·
레녹의 말을 이해한 에레디스가 웃었다·
“신경 쓰이셨다면 죄송합니다· 주변의 눈을 물리려 다소 거친 방법을 쓴지라·”
“눈을 물린다고?”
“상황이 급박해 어쩔 수 없이 제가 시간을 내기는 했지만, 본디 저는 지금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에레디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 중앙의 불문율을 어기고, 세력 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셈이 될 테니까요· 되도록 조용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겠군요·”
“····”
에레디스 자벨린이 관문에 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 이능개화전단의 외교 관계에 문제가 생길 정도라·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히려 이 여자가 중앙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 강자인지 궁금할 지경이다·
“도착했습니다· 마침 준비가 끝난 듯하군요·”
탁!!
관문도시 간이 성채 뒤편에 마련된 공터·
나무토막을 쌓아 만든 화장대 위에, 사망한 초능력자들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레녹을 압송해 아펠리아 영좌에게 끌고 가려던 뢰비드와 산하 척살대원들의 모습·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이미 그 내장 기관은 싸그리 흑마력으로 치환당해 죽은 유해·
하지만 레녹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런 시신들이 아니었다·
“척살대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정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미 화장터가 준비되어 있군·”
“····”
“그쪽 말고도 전단 측에서 사람이 와 있는 건가·”
레녹과 에레디스가 죽은 능력자들을 화장하기로 결정한 것은 대략 10여 분 전의 일·
그사이에 누군가 이 장소와 화장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두고 사라졌다·
에레디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동료들이 도와주었습니다· 준비에 오래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잠깐, 설마 소멸번대가 지금 여기 와 있는 건가?”
버나드가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소멸번대가 뭐지?”
“자벨린이 이끄는 이능개화전단 최정예 근위병단입니다·”
앙헬이 설명했다·
“전단의 선봉을 도맡는 병단인데, 그 무력 때문에 전선 깊숙한 곳에 처박혀 거의 나오는 일이 없죠·”
“····”
“사천사화마경의 공략 때문에라도 소멸번대가 자리를 비우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들이 여기 와 있다는 건····”
레녹에게 설명하던 앙헬의 표정도 서서히 변했다·
방금 자신이 말한 설명의 의미가 무엇인지, 앙헬 역시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정보에 대해서는 당분간 함구를 부탁드립니다·”
에레디스가 몸을 돌렸다·
“마경 공략은 실패했습니다· 현재 전단 주전력은 본부로 후퇴하고 있죠·”
“···아펠리아가 실패한 겁니까?”
“아뇨· 다만, 사천사화마경의 안에····”
담담한 표정으로 답한 에레디스가 말했다·
“인간을 태반으로 삼는 생물이 살고 있더군요·”
“····”
“당장 말씀드릴 수 있는 사실은 이것뿐이군요· 죄송합니다·”
레녹조차도 바로 이해하지 못할 만큼 황당무계한 설명·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천사화마경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그 안에서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인가·
버나드와 앙헬이 침묵하는 사이, 걸음을 돌려 세운 에레디스가 물었다·
“화장 방식은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저로서는 되도록 에반 님께서 직접 불을 지펴주시는 것이 좋을 듯하군요·”
“일 처리가 깔끔하군· 뒷말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인가?”
“아뇨· 제 능력은 발화(撥火)와는 거리가 좀 멀어서·”
“····”
아까부터 느꼈지만, 이능개화전단의 2인자는 여러모로 특이한 사람임은 확실해 보였다·
한숨을 내쉰 레녹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화륵!!
손가락 끝으로 불꽃을 피운 레녹이 화장대 앞에 서서 에레디스를 돌아보았다·
“의식병기의 계승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의식병기는 아펠리아 영좌께서 구축한 집체 정신망을 ‘추출’하여 만들어낸 독립적인 영능보조기구입니다·”
에레디스가 답했다·
“사용자의 의식을 특수한 형태로 소모시켜 현현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기 때문에, 선천이능의 폭발적인 증강을-”
“결론만 듣지· 계승 방법을 말해·”
“···집체 정신망에 공백이 발생하면 의식병기의 보유자가 그것을 타인에게 넘겨줄 수 있습니다·”
살짝 풀이 죽은 기색으로 에레디스가 말했다·
“정신망에 소속된 초능력자의 시신을 화장하고 나면, 영좌께서도 정신망의 공백을 인지하시겠지요·”
미칼 젤리히가 말했던, 전단원의 죽음이 의식병기 계승에 필요하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던 건가·
화륵!!
손에 쥔 불꽃을 화장대 위에 떨어뜨린 레녹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시신들이 놓인 화장대 위로 불길이 옮겨붙으며, 순식간에 나무와 살점을 같이 불태우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타오르는 불길이 무너진 성채를 넘어 솟구치며, 한 줌의 재가 되어 흩날린다·
“비능력자에게는 가혹했지만, 전단의 동료들을 위해 헌신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지켜보던 앙헬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한 사이, 에레디스가 심장에 손을 얹었다·
“영좌의 아래서도 뜻은 달랐지만, 먼저 간 동포들과 안식에 닿기를 바랍니다·”
“흠·”
버나드가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하는 사이, 에레디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쿵!!
동시에 그녀의 발아래 뇌의 반쪽이 담긴 수조가 떨어졌다·
수조 안에 담긴 젤리히의 좌뇌를 향해 에레디스가 말했다·
“미칼 젤리히· 당신이 에반 님께 공언했던 약속을 이행할 차례입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자벨린···? 자네였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젤리히가, 보기 드물게 놀란 기색으로 정신파를 흘렸다·
[믿을 수가 없군· 자네가 관문도시 근처까지 나왔다가는 틀림없이 문제가 생길 텐데·]
“그만큼 이번 사태가 심각한 사안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에레디스가 담담하게 답했다·
“아직 관문도시가 혼란스러운 탓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듯하지만, 현재 천번의 평판은 중앙전선에서도 비정상적으로 긍정적인 수준입니다·”
[····]
“접합술주를 죽이고, 가비행을 멈춰 세운 마법사를 상대로 당장 날을 세울 수는 없다고 본부 측에서 결론을 내린 바· 에반 님과의 약속을 지켜주셨으면 좋겠군요·”
레녹이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것을 아는데도 그 얼굴에 금칠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대놓고 천번의 명성이나 평판을 언급하면서 ‘당장은’ 대립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필요 이상으로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여기까지 와서도 레녹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인지·
[그런가· 자네와 버나드, 앙헬리오까지····]
“···젤리히 님·”
굳은 얼굴로 수조를 바라보는 버나드와, 앙헬의 정신파를 감지한 젤리히가 침음성을 흘렸다·
[모두들, 미안하다· 아펠리아 영좌께선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겠지····]
“····”
[영좌를 믿지 못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젤리히 삼좌·”
에레디스가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본부로 돌아간 뒤에 하겠습니다·”
[····]
“집체 정신망에 공백이 생긴 사이 계승을 마쳐야 하니, 일단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젤리히가 전단을 배신하고 연맹에 붙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에레디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억지로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분노를 별로 느끼지도 않는 듯한 반응·
감정이 없는 기계가 아니라, 애초에 감정의 폭 자체가 크지 않은 것뿐인가·
볼수록 특이한 에레디스의 반응을 레녹이 주시하는 사이, 젤리히의 정신파가 레녹을 향하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지직···!!
노이즈가 끼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정신파를 타고 ‘무언가’가 넘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형태가 없음에도 실체가 존재하는 유무형의 힘· 영성을 통해서만 그것을 인지하고 소유할 수 있다·
의식의 형태로 존재하고 계승되며, 영성을 통해 소유하는 의식병기 형혹성·
레녹의 의념을 먹이 삼은 염상이, 급격하게 부풀어 오르며 바깥으로 튀어나오려 한다·
“물러서라·”
“···물러서라구요?”
앙헬이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버나드가 냉큼 그의 멱살을 쥐고 잡아당겼다·
동시에 손을 앞으로 뻗은 레녹이 허공에서 무언가를 움켜쥐는 시늉을 한 순간·
타오르는 불길로 이루어진 거대한 창대가 레녹의 손안에서 피어올라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앙!!
“우와아아악!!”
그제야 앙헬이 기겁하며 온몸을 서리로 바꾸어 후다닥 도망쳤다·
휘오오오···!!
크기만 해도 장장 십 미터를 가뿐하게 뛰어넘는 엄청난 크기·
레녹의 키보다도 더 커서 운반조차 어려워 보이는 크기다·
막대 끝에서 휘감긴 불길이 형태를 갖추고 있음을 깨달은 레녹이 눈을 가늘게 떴다·
“창···? 아니, 깃발인가?”
길쭉한 창대를 휘감은 불길이, 마치 깃발처럼 펄럭이면서 형태를 갖춘다·
쥐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땅에 꽂아 넣고 상징물로 사용하는 쪽인가·
레녹의 눈앞에 떠오른 화염 깃발을 보며 에레디스가 말했다·
“의식병기는 사용자의 의식을 소모해 현현하는 영능보조기구·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의념을 통해 실체화를 거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
“다만 의식병기의 실체화가 이 정도로 큰 스케일로 완성된 것은 저도 처음 보는군요· 대체 의식의 크기가 얼마나 광대해야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지·”
흥미로운 듯 레녹을 돌아본 에레디스가 물었다·
“이제 막 계승을 받아서 조작이 미숙한 상태로도 이 정도라니··· 관문을 불태운 불꽃도 그렇지만, 염열계 대종사답게 하나같이 스케일이 엄청나군요·”
“···그래서, 이건 정확하게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레녹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깃발을 움켜쥐었다·
깃발에는 무게가 없어서, 수미터에 달하는 길이임에도 레녹의 힘으로 수월하게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이능에 대해서는 보고 들은 것이 많지 않아서 조작이 어렵군· 듣기로는 위상영역을 강제로 각성시킬 수 있는 물건이라던데·”
“글쎄요?”
“뭐?”
그 무책임한 대답에 레녹이 황당한 기색으로 시선을 돌리자, 에레디스가 턱을 짚었다·
“저는 젤리히 삼좌의 약속을 대신 이행해 드린 것뿐· 왜 삼좌께서 형혹성을 넘겨 드린 건지는 모릅니다·”
“····”
“애초에 형혹성은 사용자의 의식을 불태워 이능의 증강을 꾀하는 신기· 왜 에반 님의 손에서 그런 형태로 변질된 것인지도 이해하기 어렵-”
키이이이잉···!!!
귓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파공음· 시간이 한없이 느려지는 듯한 기묘한 위화감·
동시에 레녹과 에레디스의 안색이 그 자리에서 싹 변했다·
“···!!!”
에레디스가 손을 꿈틀거리고, 튀어나오려는 헤일로를 억누른 레녹이 즉시 깃발에서 손을 떼버렸다·
타오르는 거대한 깃발이 레녹의 강대한 의식 안에 찍어 눌리며 실체화가 풀린 그 순간·
가벼운 충격파와 동시에 거짓말처럼 주변의 속도감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파아앙!!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 돌아선 에레디스와 레녹의 모습·
날카롭게 일어선 주변의 공기 속에서 팽팽하게 떨리는 의념·
“····”
“뭐, 뭐야?”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는 버나드와, 굳은 표정으로 레녹을 바라보는 에레디스의 상반된 반응·
하지만 레녹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 했는지 깨닫고 있었다·
‘아나테마의 팔괘법진이 강제로 발동하려 했다· 에레디스가 그걸 읽고 반응했군·’
현재 레녹이 실질적으로 보유하고 사용하는 선천이능은 두 가지·
올리비에라의 마안을 모방한 가능성의 마안과, 아나테마에게 인계받은 팔괘법진·
만물의 변화를 다룬다는 팔괘법진 중에서도 시간의 변화를 다루는 선천이능이다·
에반의 신분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선천이능이, 방금 의식병기의 실체화와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발동하려 했던 것·
단순히 레녹 자신만의 체감 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 일대까지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그렇기에 에레디스 역시 그 위화감을 놓치지 않고 반응하기 직전까지 갔었던 것·
레녹이 그 자리에서 강제로 팔괘법진의 발동을 억누르지 않았다면, 에레디스가 레녹을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설마 의식병기 형혹성의 능력은··· 선천이능 적용 대상의 확장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건가·’
체감 시간을 늘리는 식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던 팔괘법진이,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건 이능의 증강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수준이다·
레녹이 그 뜻밖의 능력에 생각에 잠긴 사이, 뒤늦게 경계심을 푼 에레디스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실례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듯하군요·”
“····”
팔괘법진의 이능이 주변에 영향을 미친 것은 순간조차 되지 못한 찰나·
하지만 에레디스는 그 아주 미묘한 시간선의 변화를 인지하고 반응하려 했다·
그건 에레디스 본인이 그만큼 초월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터·
“사과드리는 의미로, 의식병기의 조작에 도움이 될 법한 약재와 촉매를 가르쳐 드리도록 하지요·”
하마터면 이 자리에서 전투에 돌입할 뻔했다는 사실이 그녀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던 것일까·
고개를 끄덕인 에레디스가 앞장서서 화장터를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아마 암시장에 괜찮은 물건이 있을 겁니다· 함께 가시지요·”
“암시장?”
이제 막 관문도시가 절반 정도 수복되었는데, 암시장이 멀쩡하게 남아 있단 말인가·
“음, 아직 모르셨습니까?”
에레디스가 웃으면서 레녹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원래 돈이 가장 많이 오가는 지역부터 손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거든요·”
* * *
반파된 광석 채굴장 위로 드리운 눈부신 등불· 여느 때와 같이 북적이는 사람들·
레녹과 블레이버 마탑주· 접합술주와 발락 오에돈이 암시장에서 벌인 싸움이 무색하게·
암시장의 풍경은 레녹이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완벽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암시장 유흥가에서 오가는 돈이 워낙 많아서, 가장 먼저 수복된 지역 중의 하나였다는 건가····”
“불편하지만 응당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이지요·”
에레디스가 웃으면서 얼굴을 가리는 로브를 뒤집어썼다·
“의식병기의 조작에 도움이 되는 촉매와 약재를 구해 드릴 생각인데, 따라오시겠습니까?”
“···아니, 그쪽에게 필요한 물건만 받고, 오늘 안으로 관문도시를 떠날 생각이다·”
힐끗 시간을 확인한 레녹이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오늘 안으로 도시를 떠나려면 미리 필요한 물건을 구비해 둬야겠지·”
레녹의 대답에 에레디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침 저도 이 암시장에 볼일이 있었던지라·”
먼저 떠난 에레디스를 두고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이틀 동안 쉬면서 관문도시의 수습과 재건을 지켜본 상황· 이제 여기서 더 이상 볼일은 남아 있지 않다·
병동에 남겨두고 온 앙헬과 버나드가 준비를 마치는 즉시 떠나면 시간이 맞을 터·
오늘 안으로 관문도시를 떠나 발칸으로 복귀한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암시장 번화가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 순간·
“이런, 이게 대체 누구야·”
레녹의 등 뒤에서 칼칼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려한 장식물로 장식한 술집 발코니· 군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 레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어깨에는 두꺼운 털코트를 망토처럼 걸치고, 입에는 두꺼운 시가를 물었다·
규모가 큰 술집 발코니 한편을 혼자 차지한 채, 시가와 술잔을 번갈아서 음미하는 여성의 모습·
그런 그녀의 군복 어깨 위 견장에는, 세 개의 별이 보란 듯이 빛나고 있었다·
“본 군단에 아주 시원하게 망신을 주신 대마법사님 아니신가·”
“···그쪽은·”
데드라이즈의 장성· 레녹이 일전에 상대했던 로베라이드와 동급의 계급장이다·
아니, 애초에 레녹은 이 여자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군령도시 요르타의 일을 끝낸 직후 득달같이 도시로 달려온 데드라이즈 4군단·
그 군단의 수장이라 스스로를 칭하면서 요르타의 점유를 주장했던 지휘관·
데드라이즈 4군단장· 중장 미르바 네오소토·
모든 이변이 끝나고 재건된 관문도시 암시장 유흥가 거리에, 데드라이즈의 군단장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뭐 해? 올라와·”
미르바 중장이 한 손으로 술잔을 들고 레녹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로베라이드 중장을 그리며 술이나 같이 한잔하지·”
“····”
“명왕의 가비행과, 군단장의 일이 겹치면서 꽤 빠르게 앞당겨진 일정이 하나 있거든·”
침묵하는 레녹을 바라보는 미르바의 미소가 싸늘하게 변했다·
“원수와 만나게 해줄 수 있는데· 듣고 싶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