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화
이정표(6)
“첫 번째 관문을 뚫고 상승한 가비행이 서부전선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이동 중·”
창을 넘어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 틈새로 불어오는 산들바람·
격렬한 전투와 혼란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적막·
관문도시 인근에 자리한 수색대 군사병동·
침상에 기대앉은 레녹이 버나드가 전해주는 설명을 듣고 있었다·
“1048% 마나 압적률· 추산 시속 120㎞ 이상· 관문도시를 빗겨간 뒤로는 생존자를 일절 남기지 않고 있어·”
“····”
“현재 가비행의 인근 20㎞ 이내 모든 세력과 전선이 강제로 후퇴 및 대피 중· 청의 눈 측에서 등대를 사용해 협조하고 있다는군·”
전신에 붕대를 덕지덕지 감은 버나드가,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슥 넘기면서 말했다·
“패러독스 블루 근방 생태계는 이미 절멸 상태에 돌입했다고 해· 이 정도면 관문도시의 학살은 명왕 스스로 자제한 결과물이라 봐야겠어·”
관문에서 레녹을 뒤쫓는 모든 초인을 가리지 않고 학살한 명이 떠나고 이틀 뒤·
레녹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관문도시에 아직 남아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대피했던 민간인들이 도시로 복귀하고, 수색대가 관문 인근을 경계하며 순찰을 돈다·
버나드가 바깥에서 물어오는 정보만이 중앙전선의 동향을 전해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
“가비행이 떠난 뒤에도 아직 정보 수집을 멈추지 않은 모양이군·”
“파이오니어의 멤버들 중 하나랑 연락이 닿았거든·”
버나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몇 년 넘게 연락조차 없던 사람인데, 이번 일에 흥미가 생기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쪽이랑 관문의 정보를 교환하며 알게 된 정보야·”
“····”
“실낙원의 경계선에 진입하면 그때부터는 관측 자체가 어려워질 거야· 가비행의 종점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건 지금이 마지막이겠지·”
태블릿을 끄고 침상에 내려놓은 버나드가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명왕은 처음부터 진와의 개입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승천자의 존재마저 수단으로 삼을 줄은 몰랐지만, 그 흑마법사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지도·”
“그런가····”
“뭐, 가비행을 잠깐이나마 멈춰 세운 대마법사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말이었나?”
명의 가비행이 떠난 자리에 살아남은 생존자가 없던 것이 아니다·
그 전장에 있던 이들이라면, 레녹이 강제로 [관문]을 열어 가비행을 멈춰 세운 순간을 지켜보았을 터·
명왕이 자행한 학살과는 별개로, 가비행을 막아선 천번의 명성은 이미 비할 데 없이 커져 나가고 있었다·
“네가 목숨을 걸고 가비행을 막아섰던 걸 수천 명이 넘는 사람이 지켜봤어·”
양손을 맞잡은 버나드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사태와 직간접적으로 엮인 세력은 그 피해와는 별개로 당분간 관문에 손대지 못하겠지· 네 행적과 대비되는 명분 때문에라도 여론을 살필 수밖에 없을 테니까·”
“····”
“관문도시의 수복도 절반 가까이 끝났어· 며칠만 더 지나면 거의 마무리가 되겠지·”
쿠구궁···!!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고 손을 뻗자, 반파되어 있던 건물이 중심을 잡고 일어선다·
수색대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두꺼운 철근을 수십 개씩 짊어지고 언덕 위를 오른다·
접합술주와의 전투, 그리고 명왕의 가비행으로 인해 쑥대밭이 된 폐허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관문도시의 절반 가까이 되는 면적이 정상적으로 수복이 끝난 기묘한 풍경·
초인의 근력과 마법의 힘이라면, 수용 인구 수십만 정도의 소도시 하나를 수복하는 데는 며칠이면 충분한 것이다·
“가비행은 떠난 자리에 다시 찾아오는 일이 없으니, 당분간은 명왕에게도 안전할 테고· [관문]이 기능하는 이상, 도시는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겠지·”
버나드가 그렇게 말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일이 편해진 셈이야·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군·”
“운이라····”
과연 그것을 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접합술주와 싸우고 소모된 레녹을 쫓던 강적들을 대신 죽이고, 스스로 가비행의 방향을 틀어 사라진 명이·
과연 이 모든 결과를 예상하지 않고 레녹에게 선물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가비행의 종점마저 바꾸어가며 다음을 남기려 했던 명의 대답이, 며칠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선명하다·
명의 말이 틀리지 않다·
수백 번의 설명보다 한 번의 깨달음이 중요했기에, 레녹이 스스로 찾아낸 대답이 그토록 빛날 수 있던 것이었으니·
다른 사람의 소망과 비원에 기대 내린 대답이었다면, 레녹의 만화경이 그렇게 무구할 수 있었을까·
레녹 자신의 힘으로 직접 그리는 답이기에 가치와 의미가 있다·
처음부터 대답은 레녹의 내면에 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에반· 일어났습니까?”
벌컥!
병실 문을 연 앙헬이 목발을 짚은 채로 걸어 들어왔다·
버나드와 마찬가지로 온몸에 붕대를 감은 파리한 안색·
앙헬 역시 그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지간히 고생을 했다는 증거겠지·
짚고 있던 목발을 내려놓은 앙헬이 벽에 기대면서 어깨 위로 손짓했다·
“이능개화전단 측에서 사람이 와 있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 할 말이 있다더군요·”
“전단 측에서?”
현재 중앙전선의 일각을 이루는 초대형 세력들이 관문도시에서 입은 피해는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수준·
하지만 관문도시에서 벌어진 일이 중앙전선 전역으로 알려진 이 시점에서, 다시 관문에 개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연맹이나 전단이 먼저 움직이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전단 측에서 대처에 나선 것인가·
생각에 잠겨 있던 레녹이, 미묘하게 굳은 앙헬의 표정을 눈치채고 물었다·
“아는 사람이군· 그렇지?”
“예· 안다면 아는 사람이기는 한데····”
앙헬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쪽은 아닐 겁니다· 다만··· 예전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던 사람이라·”
“····”
“앙헬, 전단이 아니라 발칸과 연락할 거라고 하지 않았냐?”
“그게 말입니다····”
버나드의 질문에 앙헬이 뺨을 긁적였다·
“회장님이랑 파트너가, 각자 연구 중이라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더군요·”
“파트너?”
듣고 있는 의료진을 고려해 일부러 견뢰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인가·
하지만 앙헬이 대충 어떤 뜻으로 말을 꺼냈는지는 짐작이 간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팔뚝에 붙인 커넥터를 떼고 일어섰다·
“하루만 더 관문도시에서 머물도록 하지· 지금 바로 이능개화전단을 만나러 간다·”
* * *
버나드와 앙헬을 앞세우고 곧바로 병동 개인실을 나섰다·
복도를 순찰하던 수색대원들이 레녹을 보자마자 경례를 건넸다·
“에반 님· 응접실에 손님이 와 있습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그런데····”
수색대원들의 미묘하게 경직된 얼굴을 바라보던 레녹이 물었다·
“이번에 전단에서 찾아온 손님이, 꽤 유명한 인사인 모양이군·”
“····”
병동을 지키는 대원들이 표정을 숨기지 못할 만큼 긴장감이 역력하다·
단순히 마력이나 의념으로 찍어 눌렀다면 이런 반응이 아니었을 터·
오히려 명성이나 사회적인 위상에 간접적으로 기가 눌린 듯한 모습·
그만큼 지금 병동을 방문한 손님이, 수색대가 압도당할 만큼 상당한 거물이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에반 님께서는 중앙에서 활동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잘 모르시겠지만····”
살짝 눈치를 보던 대원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능개화전단에서 가장 유명한 능력자들 중 한 명입니다·”
“대외적인 평판은 나쁘지 않지만, 능력이 굉장히 잔인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철컥!
수색대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서자,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바람이 몰아쳤다·
환자복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레녹이 시선을 돌리자, 안쪽에 앉아 있던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오셨군요·”
어깨까지 자른 금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여성·
대원들을 긴장하게 만든 소문의 당사자라기에는 꽤나 간소한 차림새다·
레녹이 물끄러미 여성을 바라보는 사이, 여성이 레녹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에반 마르티네스· 관문도시의 영웅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아뇨, 진심입니다·”
레녹이 맞은편에 앉자, 여성 역시 웃으면서 소파에 앉았다·
“접합술주를 죽인 실력자를 상대로 허언 따위를 할 생각은 없거든요·”
“····”
“제 소개를 드리지요·”
여성이 손가락을 튕긴 순간, 레녹의 무릎 위에 작은 명함이 팔락거리며 떨어졌다·
“이능개화전단 2석· 에레디스 자벨린이라고 합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여성이 조용히 말했다·
“부족하지만 이능개화전단에서 아펠리아 영좌를 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흥미롭긴 하군·”
레녹이 명함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2석이라는 건, 그쪽이 이능개화전단에서 세 번째로 강한 선천이능력자라는 말인가?”
“아펠리아 영좌께서는 현장에 직접 나서지 않으신 지 꽤 오래되셨지요·”
에레디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전단의 no·2 입니다·”
“····”
인정을 했다고 해야 할지, 반박을 했다고 해야 할지·
이능개화전단의 2인자를 자처하는 것치고는 굉장히 정중하고 차분한 말투다·
레녹이 버나드를 힐끗 바라보자,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나도 파이오니어에 있을 때는 교류가 많진 않아서· 아마 맞을걸?”
“····”
아무런 말도 없이 버나드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에레디스의 반응·
버나드가 그 모습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사이, 레녹의 뒤에 서 있던 앙헬이 말했다·
“에레디스는 이능개화전단에서 가장 뛰어난 살상력을 가진 능력자입니다· 거짓말은 아니겠죠·”
“지인이었나?”
“지인이라기보단····”
앙헬이 쓴웃음을 지었다·
“같이 몇 번 싸우다 보면 싫어도 알게 될 수준이었죠·”
“····”
전단 내부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의 무력을 지닌 강자라는 말인가·
에레디스 역시 앙헬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앙헬, 오랜만입니다·”
“그렇네요·”
“발칸은 어떻습니까· 잘 지낼 만한가요?”
“글쎄요····”
앙헬이 말끝을 흐렸다·
에레디스라는 이 여자에게 감상을 별로 밝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인가·
빤히 앙헬을 바라보던 에레디스가 다시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죠· 오늘 제가 찾아온 것은 이능개화전단을 대표해 에반 님께 사죄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사죄?”
그렇게 말한 에레디스가 벌떡 일어나 레녹을 향해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전단 13석 뢰비드 아울러와 산하 척살대의 독단적인 일탈 행위· 이능개화전단의 이름으로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개 들지·”
뻣뻣하다고 해야 할지, 굉장히 공무적이라고 해야 할지·
감정이 없는 기계 같지는 않은데, 이건 이것대로 꽤나 특이한 부류의 인간이다·
굳이 따지자면 초능력자보다는····
“혹시 카바힘 출신인가?”
“예?”
두 눈을 끔벅이던 에레디스가 뒤늦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건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니, 흘려 넘겨도 좋다·”
레녹이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사과 한마디 하려고 직접 나를 찾아온 건가?”
미칼 젤리히의 유해를 회수하기 위해 레녹과 버나드가 맺었던 거래·
하지만 접합술주를 죽이는 것과 동시에 뢰비드의 개입으로 전단이 레녹을 배신했고·
명이 나타나 관문도시를 모조리 쓸어버리면서 사태가 강제로 일단락이 되어버렸다·
접합술주의 사망· 가비행의 재시작·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천 명이 넘는 마력사용자의 사망까지·
두 가지 악재가 겹치면서 발생한 피해로 인해, 현재 관문을 장악하려는 세력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이 상황·
하지만 이능개화전단이 이번 일에서 완전히 발을 뺀 것은 아니었다·
뢰비드와는 반대로 비능력자에게 우호적인 파벌 측에서 접촉해서 화해를 주선하려 했기 때문·
에레디스는 전단 내부에서도 비능력자들에게 우호적인 파벌의 소속으로서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선, 전 삼좌(三座) 미칼 젤리히의 유해를 회수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에레디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의 배신과는 별개로, 그가 지닌 특질계 선천이능은 전단의 입장에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힘··· 어떠한 경우에도 접합술주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이능이었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 듣고 싶은 설명이 있는데·”
레녹이 손목에 꽂은 링거 바늘을 조정하며 말했다·
“술주가 젤리히의 우뇌를 자신에게 ‘접합’할 수 있었던 건, 결국 젤리히 본인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뇌의 거부반응을 최소한으로 억눌렀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였지·”
우로보로스를 통해 접합술식을 해체해 본 레녹은, 접합술식이 지닌 잠재력과 한계를 비교적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접합술식이란 자신이 접합하려는 대상을 비교적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어야만 작동하는 술식·
접합술주 아베스타 채프먼이 외과의사로서 탁월했던 이유이자, 접합술식의 작동 원리가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가 아마 그것이겠지·
만약 인체를 접합하고 싶다면, 그만큼 접합하려는 신체 부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이 세계의 과학이나 의학으로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복잡한 장기·
그렇기에 젤리히 본인의 협조 없이는 접합술주도 불사 능력을 그리 쉽게 손에 넣지 못했으리란 사실을 레녹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 미칼 젤리히는 스스로 이능개화전단을 배신한 거지? 그가 진정으로 죽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전단에서는 모르고 있었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젤리히 삼좌는 전단의 창립 멤버가 아닙니다· 그는 여러 조직과 세력에 몸담으면서 자신의 능력을 실험당하고 고통받아 왔지요·”
에레디스가 답했다·
“그를 전단에 묶어둘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삼좌 본인에게 전단 측에서 크게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미칼 젤리히를 잡아둬야 할 만큼, 전단 측의 전력이 부족했다는 뜻인가?”
“아뇨· 반대입니다·”
레녹의 날카로운 질문에 에레디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귀찮은 속박으로 그를 묶어두지 않아도, 현재 전단의 전력에는 큰 누수가 없기 때문이었지요·”
“····”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해 보일 만큼 확신 어린 대답·
하지만 레녹은 그런 에레디스의 대답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하고는 있었다·
레녹이 상대해 본 전단의 간부들 대부분이 중앙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들임은 틀림없었으니·
발락 오에돈의 저력이야 그렇다고 쳐도, 13석에 불과한 뢰비드의 실력은 레녹으로서도 예상 밖이었으니·
명의 손에 잡혀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 혼잡한 전장에서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마지막에 명이 레녹을 대신해 지상을 쓸어버리지 않았다면, 뢰비드와 산하 척살대가 전력을 추슬러 생환했을 가능성도 꽤 높다·
그렇다면 지금 레녹을 찾아온 것은 비능력자를 우호하는 에레디스가 아니라, 그 반대가 되었을수도 있겠지·
혼잡하고 격렬했던 첫 번째 관문의 회전·
그 마지막에 등장한 명이 휘둘러 안배한 가능성이 얼마나 광대한 것이었는지를 되새기는 사이, 에레디스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이해하셨다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듣지·”
침묵이 생각 이상으로 길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그걸 감안해도 레녹을 대하는 태도가 꽤 조심스럽다·
이 반응이 단순히 부상자를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접합술주를 죽인 천번을 대우하는 것인지·
“현재 사망한 뢰비드 아울러와 척살대원들의 유해는 저희 측에서 회수하였습니다· 본래라면 사망한 전단원은 본부로 데려가 화장을 치러주는 것이 관례입니다만····”
레녹과 시선을 마주한 에레디스가 말했다·
“관문도시의 일이 일이니만큼 저희 전단의 관례대로만은 처리할 수 없겠지요·”
“····”
“척살대는 전단 예하에서 해체 후 재편성될 예정입니디만, 에반 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들의 시신을 넘겨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흠····”
죽은 전단 초능력자들의 시체인가·
솔직히 말해 시체를 다루는 금술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런 술식에서 파생되는 가능성을 크게 의식해 본 적도 없고·
하지만 지금 죽은 뢰비드와 초능력자들의 시체 중에는, 명의 흑마법에 직접 당한 이들이 섞여 있을 터·
가비행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고는 하지만, 그 흔적을 전단에게 고스란히 넘겨야 할 이유가 있을까·
“본부로 데려가 유해를 화장하는 것이 관례라고 했었나?”
“예·”
“그럼 화장하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링거 거치대를 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단, 모든 공정을 내 눈앞에서 직접 처리한다·”
“예?”
“전단의 관례를 지켜줄 테니,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말이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지·”
에레디스를 내려다보며 레녹이 물었다·
“동의하겠나?”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에는 저도 동의합니다만····”
말끝을 흐리던 에레디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습니다· 에반 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면, 삼좌의 약속까지 함께 처리하도록 하지요·”
“약속?”
“젤리히 삼좌가 에반 님께 약조하신 물건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에레디스가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의식병기 형혹성(熒惑星)· 이 자리에서 바로 에반 님께 인계하도록 하겠습니다·”
* * *
형형색색의 정령들이 뛰어노는 영계·
호수 위에 자리한 거대한 물의 궁전·
“끝났네·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잖아·”
화려한 궁전의 알현실 한복판에 드러누워 하품을 하던 여성이 중얼거렸다·
아직 성인도 되어 보이지 않는 앳된 얼굴·
하지만 그 표정이나 몸짓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극도로 나른해 보였다·
여성이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로봇에 불이 들어왔다·
[첫 번째 관문의 교전이 끝난 듯하군·]
대답 없이 궁전 복도로 걸음을 옮기는 여성을 따라, 인간 형태를 한 로봇이 물었다·
[요정술주· 결과는 어떻게 됐지?]
“채프먼이 졌어· 아예 화력 대결에서 밀린 것 같은데?”
[음·]
답이 느려진 로봇을 향해, 요정술주라 불린 여성이 나른하게 말했다·
“권역 안에서 싸운 것 같은데도 결과가 이렇게 되다니, 좀 의외인걸· 주시자 출신이라 했었나?”
촤악!!
여성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물의 길이 펼치며 그녀의 걸음을 보조한다·
궁전 중심에 위치한 호수 위를 맨발로 걸은 여성이 중얼거렸다·
“라피스 팔시어가 괴물을 키우고 있었던 모양이야· 이러면 청의 눈을 상대로 대응 방식을 좀 바꿔봐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전투 데이터는? 네 술식이라면 요정의 눈을 이용해 기록할 수 있지 않나?]
“일단 녹화를 해두기는 했는데, 쓸모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심드렁하게 대꾸한 요정술주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것보다 이쪽 일부터 먼저 처리하자고, 아터마이어· 물건은 준비됐지?”
휘오오오!!
물의 중전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
그 호수의 중심에 위치한 신비로운 형상의 수조·
수조 안에는 누군가의 것으로 보이는 [우뇌]가 둥둥 떠 있었다·
로봇이 조심스럽게 우뇌가 담긴 수조를 꺼내 든 사이, 팔짱을 낀 여성이 물었다·
“박사, 그쪽이 왔다는 건 이미 소체 준비가 끝났다는 거겠지?”
[아베스타 채프먼은 동급의 술주들 중에서도 비할 데가 없는 재능과 소질을 지닌 개체였지·]
로봇이 대답했다·
[그래서 그의 정신과 혼을 담을 육체를 오랫동안 찾아봤지만···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그 후보를 찾을 수 있었어·]
“가까운 곳이라고?”
[그가 대륙 각지에 남겨둔 ‘수술실’에 보관되어 있던 환자들· 그중에서 굉장히 적합한 소체가 하나 있었던거지·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하겠지만, 분명 적응에는 문제가 없을 거야·]
“그러니까, 그 소체라는 게 누구인데·”
[주스마스터라고· 들어본 적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