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도망자(5)
#41
“누 누나···이제 그만. 충분히 먹었어.”
“안 돼!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 겨우 그것만 먹어서 어쩌려구. 자 아직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
그 말과 함께 누나가 국자로 내 그릇에 스튜를 부었다.
감자를 베이스로 만든 스튜에는 고기와 다른 야채도 풍성하게 들어 있었다.
집안의 식재료를 모조리 투자한 게 분명하다.
정말 먹음직스러웠지만 딱 하나의 애로가 있다면 내가 막 다섯 번째 그릇을 해치웠다는 점이었다.
“하···하하···고마워.”
“에헤헤 아직도 꿈 같아. 로난이 돌아오다니.”
누나가 생글거렸다.
그녀는 내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가끔씩 콧망울이나 볼을 쿡쿡 찌르는 것이 아직도 환각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더 못 먹겠다 말하라니 나는 못 한다.
나바르도제 누님도 그렇고 왜 연상의 미녀들은 먹을 것을 못 줘서 안달인지.
막 그릇을 비운 슐리펜이 입을 뗐다.
“은혜에 감사하오. 나는 지금껏···이런 진미를 먹어본 적이 없소.”
“앗 입에 맞으세요?”
슐리펜의 그릇에도 스튜가 부어졌다.
질려버린 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 새끼는 벌써 일곱 그릇 째였다.
그나저나 맛있기는 해도 진미라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랑시아에서 나오는 식전빵보다 소박한 메뉴 아니냐?”
슐리펜은 대꾸도 하지 않고 리필된 스튜를 퍼먹기 시작했다.
저 염병을 떠는 와중에도 식사 예절 하나만큼은 세련의 극치였다.
솜털 한 가닥 없이 매끈한 턱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입맛에 맞아 다행이에요. 설마 로난이 친구를 데려올 줄은 몰랐거든요.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데 저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어···그건. 말이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나도 잠깐 잊고 있었다.
지금의 슐리펜은 엄연한 제국의 공적이자 지명수배자였다.
눈을 가늘게 좁힌 채 그의 얼굴을 살피던 누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으으음 역시 아닌 것 같기도. 제가 착각했나 봐요.”
“···그. 렇소?”
“네 확실해요. 마르바스의 수배지에서 봤던 사람은 수염이 덮수룩했거든요! 아주아주 무거운 죄를 저지른 사람 같았는데 이렇게 좋은 분이 그런 악당일 리도 없구요.”
“허억.”
“에헤헤 식사 중에 계속 말 걸어서 죄송해요. 맛있게 드세요!”
누나가 웃었다.
여름날의 과실 같은 미소에 슐리펜의 호흡이 멈췄다.
칠 년이 지났음에도 뽀얀 얼굴에는 잔주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슐리펜은 누나가 잠깐 주방으로 떠날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
“얌마 숨. 쉬어.”
“······천사를 보았다.”
“미치겠군. 하긴 이게 너답기는 해.”
나는 낄낄거리며 스튜를 마저 먹었다.
바늘 근처에만 가도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누나가 정성껏 준비해준 걸 남길 수는 없었다.
누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릇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는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카샤도 대머리도 중요하지 않았다.
누나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다만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로난 이 잡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이쪽 누나의 동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실 만나마자 말하려 했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7년만에 집 나간 동생을 만났는데 나는 사실 가짜고 진짜는 저 변방에서 딸딸이나 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해.
이건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은 안 될 것 같았다.
첫 번째 삶을 돌이켜보건데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지금쯤은 북부에 머물러 있을 터였다.
‘웨어울프 토벌 작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겠지.’
마르야.
아니 아르말렌 백작도 거기서 처음 만났었다.
아래쪽 털도 금색이냐 물어 봤다가 두들겨 맞았을 딱 이 무렵이었다.
골치가 아프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날 사람들이 너무 많다.
물론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것은 단연 아카샤였지만.
멍하니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였다.
“······혈계침.”
천재적인 발상이 뇌리를 스쳤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아카샤를 추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나는 서둘러 코트를 살폈다.
울긋불긋한 핏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분명 몇 개는 아카샤와의 전투 중에 생긴 것이었다.
수저를 내려놓은 내가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누나!”
“히야악! 무 무슨 일이야?!”
누나가 어깨를 움츠렸다.
손에 들려 있던 컵이 떨어졌다.
한달음에 달려간 내가 다리를 뻗었다.
컵은 정확히 발등 위에 안착했다.
나는 누나의 양어깨를 붙잡은 채 말을 이었다.
“놀래켜서 미안해. 그런데 지금 당장 누나에게 부탁할 게 있어. 내 성인식 선물로 아버지가 준비해준 혈계침 가지고 있지?”
“뭐 뭐라고?!”
안 그래도 커다란 누나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벙쪄 있던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혀 혈계침이라니 로난 네가 어떻게 그걸···아빠가 비밀로 하라 했었는데···?”
“미안해. 그런데 설명할 시간이 없어. 꼭 필요한데 지금 바로 줄 수 없을까?”
“······어차피 성인도 되었고 원래 로난 물건이니까 상관없기는 한데에···응 잠깐만.”
끄덕거린 누나가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목소리가 우울한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인가?
방문이 닫히자 쥐를 잡는 것처럼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지않아 먼지투성이가 된 채 돌아온 누나의 손에는 나무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로난! 찾았어!”
“좋아 이리 줘.”
“으응···그런데 잠깐만. 후우····”
갑자기 상자를 끌어안은 누나가 심호흡을 했다.
얼굴의 우울함이 한층 짙어졌다.
어딘지 모르게 상자를 주기 꺼려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로난. 혈계침이 뭐 하는 물건인지는 알고 있지?”
“응. 피의 주인을 가리키는 마도구잖아.”
“맞아. 그럼 여기에···누구 피가 묻어 있는지도 알아?”
“그야 당연히 아버지······설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누나가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상자를 받아들자마자 조심스레 개봉했다.
혈계침을 본 내가 눈썹을 치켜떴다.
“젠장.”
바늘은 차갑게 식은 채 굳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피의 주인을 따라서 움직여야 할 바늘이 멎은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추격 대상의 사망.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누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로난. 아빠는···”
“아니야. 설명 안 해도 돼.”
예상했던 범주 내의 일이다.
나는 혈계침을 내려놓고 누나를 끌어안았다.
가냘픈 어깨가 떨려오고 있었다.
“누나가 누나가 미안해.”
“그러지 마. 어쩔 수 없었잖아.”
“다 다들 너무 보고 싶어서···로난을 위한 선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 번 꺼내 봤어···그런데 그런데 이미 저렇게 변해서····”
투명한 눈물이 나무바닥 위로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댁은 여기서도 못 만나는구만.”
중상을 입은 카인에게 칠 년은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내 아버지는 가족 상봉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떠나 버리고 말았다.
다시 한 번 내가 천하의 개자식이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지금껏 누나가 어떤 마음고생을 해 왔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내가 미안해.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이를 악물었다.
누나가 몰래 상자를 열어본 이유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집에 들어올 때 봤던 식탁 위에 준비되어 있던 두 사람 분의 식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처음에는 손님 용으로 준비해 놓은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방금까지 스튜를 퍼먹었던 그릇과 숟가락은 아주 옛날부터 내 전용으로 쓰던 것이었다.
‘씨발.’
오래된 물건이었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먼지 한 톨 쌓여 있지 않았다.
누나는 매일매일 그걸 닦으면서 기다렸던 것이다.
사랑하는 동생이 돌아오는 날을.
다시 둘이서 밥을 먹는 순간을.
“···이릴 양.”
슐리펜은 세상 참혹한 얼굴로 누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추측컨데 자기 가문이 망할 때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았을 터였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내가 누나와 이마를 맞댄 채 속삭였다.
“이제 다 잘 될거야. 약속해.”
“으엥···으에에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할 것이다.
저번 평행세계와 마찬가지로 이곳 또한 지나가는 비를 겪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 또한 내 사명 중 하나였다.
조심스레 누나와 떨어진 내가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핏자국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린. 이 중에 아카샤의 피가 있어?”
“응. 한번 볼게.”
회답하듯 하얀 검신이 빛을 발했다.
나는 린의 부탁에 따라 검으로 코트 위를 서너 차례 휘적였다.
시타가 있다면 훨씬 더 편했겠지만 이런 간단한 일은 내 동반자도 할 수 있었다.
머지않아 대답이 돌아왔다.
“있어. 왼쪽 옷깃에 묻은 건 전부 그 마법사의 피야.”
“좋았어.”
주먹을 움켜쥐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용도의 혈액을 개봉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식탁에 있는 물 한 컵을 들어 옷깃에 부었다.
쥐어짜듯 비벼주니 붉은 액체가 배어 나왔다.
서둘러 혈계침을 개봉한 내가 바늘에 핏물을 묻혔다.
파르르르···!
무채색이었던 바늘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공회전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돌아가던 바늘의 끄트머리가 동쪽에 고정되었다.
“찾았다.”
나도 모르게 읊조렸다.
짙은 안개 너머로 등대의 불빛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혈계침은 아카샤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디에 있건 간에 이걸 따라가면 놈이 나온다는 뜻이었다.
“바 방금 뭐 한거야 로난? 누구의 피를····”
“잠깐만 누나. 잠깐만.”
“우아아 이제 막 누나 머리를 만지고!”
나는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침음을 흘렸다.
생각할 게 많아져서 이마가 뜨거웠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바늘을 따라 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 지켜야 할 것이 잔뜩 남아 있었다.
‘더 잃어버릴 수는 없어.’
당장 살아있는 사람의 수가 달랐다.
혹시라도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네뷸라 클라지에가 준동했다가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건 별로 좋은 흐름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악을 몰아내더라도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희생이 벌어져서는 안 됐다.
가장 안전하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슐리펜과 누나를 번갈아 보면서 한참을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쿵쿵!
갑자기 현관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응? 누구지?”
“······!”
누나가 귀를 쫑긋 세웠다.
슐리펜이 반사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집중이 깨진 내가 문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뭐야? 누나. 올만한 사람 있어?”
“우웅 글쎄? 딱히 약속은 없었는데. 앞집 사는 링겔 씨가 또 고구마를 갖다주러 오신 건가?”
“기다려 봐.
내가 나가볼 테니까.”
별다른 살기는 감지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검은 챙겼다.
저벅저벅 걸어간 내가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순간이었다.
검은 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엥?”
검은 벽은 금속성 재질을 띠고 있었다.
불룩한 철판 위로 벙찐 내 얼굴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뒤에야 그것이 벽이 아닌 사람이 입고 있는 갑옷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온몸에 검은 털이 부숭부숭하게 난 거한의 오른손에는 기둥처럼 거대한 언월도가 쥐어진 채였다.
“······!”
고개를 들자 호랑이의 머리가 보였다.
시커먼 웨어타이거의 눈동자는 거성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 미간이 좁혀졌다.
“자이파?”
“맞군.”
대답은 단촐했다.
자이파가 들고 있던 언월도를 내리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