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도망자(4)
#40
부슬비는 옛적에 그쳤다.
숨을 들이내쉴 때마다 새하얀 김이 나왔다.
드높은 바위산이 길의 양 옆으로 빼곡하게 솟아나 있었다.
나는 깎아지른 절벽에 시선을 둔 채 중얼거렸다.
“그리운 풍경이네···그 난쟁이는 살아 있으려나.”
이제는 먼 꿈처럼 느껴지는 일이다.
대륙 서부와 제국을 잇는 로마이라 산악도로.
나는 과거 아셀과 함께 필레온으로 가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갔었다.
옆에서 걷던 슐리펜이 눈썹을 으쓱였다.
“난쟁이?”
“있어 내 친구. 아셀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없냐?”
“처음 듣는 이름이군. 저명한 마법사는 아닌 것 같은데.”
“후우 내 그럴 줄 알았다. 세계적 손해구만.”
나는 담뱃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셀이 재능을 개화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살아 있다면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추측컨데 어디 질 나쁜 놈들한테 붙잡혀서 능력을 악용당하고 있거나 저기 시골짝에서 삽으로 소똥이나 푸고 있을 터였다.
“이상한 변태들한테 잡혀 가지만 않았으면 좋으련만···에휴. 정도껏 유약해야지.”
“레이디였나.”
“아니. 사내자식.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하는지는 그 새끼 얼굴 한 번만 보면 이해가 될 거다.”
수요층이 확실한 외모라 더욱 위험했다.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구불구불한 도로가 시야 끝까지 뻗어 있었다.
느낌상 절반은 넘게 온 것 같았다.
친위대를 해치운 우리는 누나가 있는 님버튼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잠깐만 쉬면서 걷자. 다리에 힘은 남아 있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럼 다행이고. 그런 좆밥들 상대로 쩔쩔 매길래 관절염에라도 걸린 줄 알았지.”
“큭····”
슐리펜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끝내 친위대를 해치우지 못한 점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은 전혀 쪽팔려할 것 없는데 말이지.
“농담이야 인마. 그리고 네가 친위대를 못 잡은 건 단순히 상성 문제니까 안심해. 실력만 놓고 보면 니 발가락이 그 새끼들보다 더 셀걸.”
“상성이라니······도대체 너는 정체가 뭐냐.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는 거지?”
“글쎄다. 기억이 안 나네. 님버튼에 도착하면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크으으····”
슐리펜이 부들거렸다.
역시 놀리는 맛이 있었다.
그는 아직 나를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군말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어찌보면 저번 세상의 오르세와 비슷한 맥락이다.
본인이 뭐 빠져라 고전하던 적수를 단칼에 썰어줬는데 호기심이 안 생기고 배겨?
후우웅!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담배연기를 날려 버렸다.
“에이 추워.”
뼈까지 스며드는 추위에 옷깃을 여몄다.
비교적 온화하던 날씨는 산맥에 들어서는 순간 겨울이 되었다.
겨울 겨울이라.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맞아. 겨울의 마녀는 언제 잡았냐?”
“4년쯤 됐군. 바르카가 섭정이 되기 전의 일이었지.”
“폭풍검도 그때 각성한 거고?”
“그래. 한 발 더 나아가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슐리펜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뒷덜미 아래쪽으로 당시의 싸움에서 입은 듯한 동상이 새겨져 있었다.
산악도로 곳곳에는 여전히 녹지 않는 얼음의 일부가 흉터처럼 남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겨울의 마녀는 이번 세상에서도 강림했다.
완전히 얼어붙었던 로마이라 산악 도로는 화룡 일족의 도움을 받은 뒤에야 녹일 수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숫자를 셌다.
겨울 마녀 사건이나 바르카의 집권 등 슐리펜에게 들은 사건을 기반으로 계산해 보니 지금이 언제쯤인지 얼추 알 수 있었다.
‘대머리 강림까지는 3년정도 남은 건가.’
변수가 없다면 엇비슷할 터였다.
지금은 내가 애새끼일 적 그러니까 회귀한 직후를 시점으로 7년이 지난 뒤였다.
어쩐지 슐리펜이 좀 삭았다 싶었는데 정말로 나보다 나이를 많이 먹었던 것이다.
‘아니야. 더 당겨질지도 모르겠네. 아데샨이 없으니.’
쓴웃음이 지어졌다.
이번에도 내 부인 될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애초에 여기를 비롯한 평행세계는 아데샨이 죽고 회귀하면서 남겨진 세상이었으니.
잠시 뜸을 들이던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아데샨이라는 이름은 들어 봤어?”
“전 대장군을 말하는 건가. 아칼루시아 출신의.”
“맞아. 이때부터 아칼루시아에 들어갔나 보네?”
“당연히 알고 있다. 내가 봤던 군인 중에 가장 뛰어났던 사람이었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제국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도 그녀가 죽은 뒤부터군.”
슐리펜은 아데샨이 원정 도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설명했다.
워낙에 여건이 좋지 않아서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는 말을 덧붙여서.
“능력과 별개로 기묘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매번 가공할 성과를 이루면서도 만족하지 못했고 언제나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어. 만약 대장군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바르카 같은 머저리가 섭정이 되지는 못했을 거다.”
“······그렇군.”
고추냉이를 먹은 것처럼 코끝이 시큰거렸다.
대머리들의 강림은 보지 못했을지라도 그 과정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새나왔다.
“여기서도 열심히 했구나.”
입술을 질겅이던 내가 마른세수를 했다.
역시 연인의 부고를 전해 듣는 것은 할 짓이 못 된다.
하늘이 밝아지는 걸 보니 머지않아 날이 갤 것 같았다.
“후우우우···됐어. 슬슬 출발하자.”
심호흡한 내가 슐리펜을 돌아보았다.
식사 시간에 맞춰 가기 위해서는 이쯤에서 박차를 가하는 게 좋을 듯했다.
아카샤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이상 지금은 누나에게 집중하는게 맞았다.
“준비됐다.”
슐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허벅지 위로 푸른 마나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눈이 마주치는 것이 신호였다.
콰아아앙!
동시에 땅을 박찬 나와 슐리펜의 몸이 질풍처럼 쏘아졌다.
걸음마다 향수가 묻어나 있는 해묵은 산길의 풍경이 양 옆으로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
“···도착했다.”
발걸음이 멎었다.
예상외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맑게 갠 하늘 아래로 비의 잔향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님버튼.”
언덕 아래로 작은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자라난 사이프러스가 아름다웠다.
제국이 반쯤 망한 와중에도 마을을 굽이도는 강물은 표표하게 흐르고 있었다.
“여긴 뭐 변한 게 없네.”
우중충한 제도와는 전혀 달랐다.
소박한 차림새의 주민들이 비가 그친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원래 세상과 다를 게 없는 오히려 멀쩡한 고향의 풍경에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감상이 한창이던 차였다.
뒤따라오던 슐리펜이 내 옆에 멈춰섰다.
“허억···커허억!”
그는 멈춰서기 무섭게 거친 숨을 토해냈다.
상놈처럼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헉헉거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힘든 모양이었다.
슐리펜에게 시선을 돌린 내가 혀를 끌끌 찼다.
“짜식이 엄살은. 반란죄로 쫓기는 놈이 그거밖에 못 뛰어서 되겠어?”
“헉 후우우···닥쳐라···!”
슐리펜은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대리석처럼 새하얬던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된 채였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사흘이 걸렸을 거리를 세 시간만에 주파한 셈이었으니.
“바로 누나한테 갈 거니까 강에서 세수라도 하고 와. 이참에 좆같은 수염도 싹 밀고.”
“이건···후우 내가 투쟁한 나날의 상징이다···당분간 밀 생각은 없어.”
“아오 똥고집은. 얼굴이 아깝지도 않냐? 진짜 어디 동굴에서 사는 산적 같다니까?”
수염에 맺힌 땀방울이 역겨웠다.
답답해서 가슴을 쾅쾅 쳤지만 슐리펜은 굳건했다.
미역도 다림질해서 먹을 것 같던 깍쟁이가 어쩌다가 이런 터프가이가 됐는지 원.
“그러고 보니 너 수선화는?”
“후우···챙겨지 않았다.”
“미쳤냐? 필레온에서부터 말했잖아.”
“네 누이가 좋아하는 꽃을 내가 챙겨야 할 이유는 없다. 격조했다 만나는 거라면 오히려 네가 챙기는게 맞지 않나.”
슐리펜이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새 숨을 골랐는지 평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답답한 새끼야. 기껏 점수 딸 기회를 주려 했더니···난 후회해도 몰라.”
“그랑시아는 그런 걸로 후회하지 않는다. 강에 다녀오겠다.”
“그래. 대충 추적해서 와.”
본인이 싫다는데 별 수 없었다.
슐리펜과 찢어진 나는 곧바로 우리 남매가 살던 집으로 향했다.
주민 몇몇이 내 얼굴을 보고 수군거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말을 걸어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이쪽 세상의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아직 살아 있나?’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뭔가 굉장한 발상의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지만 지금은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누나를 만난다.
그것도 동생을 떠나보낸지 칠 년이 지난 시점의 누나를.
길을 따라간지 머지않아 작은 오두막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굴뚝 위로 연기가 나오는 걸 보아 집에 있는 것 같았다.
문앞에 멈춰선 내가 숨을 깊게 들이내쉬었다.
“후우우우···대머리 왕이 각성할 때보다 더 긴장되는구만····”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면 나는 이쪽 세상 누나의 동생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두 번째라 그런지 처음보다는 용기가 났다.
“그래. 별 거 있겠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드린 내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경첩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나무로 된 문이 열렸다.
그리운 냄새가 확 몰려왔다.
빠르게 실내를 둘러본 내가 미간을 좁혔다.
“어?”
어두컴컴한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의 다 탄 장작만이 벽난로에 남아 빛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원래 세상에서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누나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성녀로 추대받기 위해 아벨에게 납치를 당했었다.
“안 돼.”
몸을 순환하는 피가 두 배로 빨라진 것 같았다.
신발에 묻은 흙을 털 생각도 못하고 집에 돌입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 누구세요?!”
“······!!”
“거 거기는 저랑 동생 집이에요. 마을 분은 아닌 것 같은데···저희 남매에게 볼일이 있으신가요?”
겁에 질린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의 준비를 한 뒤 몸을 돌린 내가 입을 뗐다.
“···나야. 누나.”
“어?”
거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은백색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허름한 앞치마를 입고 양손에는 감자가 잔뜩 들려 있었지만 그 따위 소품으로는 미모를 감출 수 없었다.
나와 똑 닮은 노을색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진 채였다.
“······로난?”
“응.”
“장난치지 마···정말 로난이야?”
툭.
감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누나는 그걸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꿈이라면 깨지 말아 주세요···제발.”
큼직한 눈망울에 물기가 맺히고 있었다.
덩달아 내 시야가 부옇게 변했다.
아 진짜.
절대 안 울려고 했는데.
결국 한 방울을 흘려보낸 내가 싱긋 웃음지었다.
“나 맞아. 누나.”
“···흑.”
결국 저쪽의 눈에서도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감자를 내팽겨치고 달려온 누나가 나를 끌어안았다.
“으윽···흐으윽···흐아아앙!”
“오래 기다렸지.”
추가 누수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나는 떨려오는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세상이 떠나가라 울던 누나가 메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 지금까지 어디 있던 거야···누나는 흐윽. 누나는 로난이 잘못된 줄만 알고···!”
“미안해.”
“아니야. 응 로난은 하나도 안 미안해 해도 돼. 우리 어서······웅?”
흐느끼던 누나가 말을 멈췄다.
시선이 고정된 걸로 봐서 뭔가를 발견한 눈치였다.
나는 누나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돌렸다.
수선화 한 송이를 쥔 슐리펜이 벙찐 채 서 있었다.
“어음. 저.”
“훌쩍···크흥! 누구세요? 안 보여····”
누나가 눈을 부비적거렸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듯했다.
그 순간 슐리펜의 칼자루가 잠시 잠시 뽑혔다 돌아왔다.
면도날처럼 예리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핥듯이 스쳐지나갔다.
펑!
하관을 뒤덮던 수염이 폭발하듯 흩어졌다.
병신이 진짜.
투쟁이 뭐 어째?
이윽고 눈물을 닦아낸 누나가 고개를 들었다.
“으웅···역시 처음 뵙는 분이네요. 그런데 분명 수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착각. 이시겠지요. 레이디.”
딱딱 끊어 말하는 악센트가 등신같았다.
한참이나 얼어 있던 슐리펜의 입이 천천히 떼어졌다.
“저는 그런 걸 기른 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