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도망자(2)
#38
날이 어둡다.
교정에 드리운 그늘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공기에 더해지는 무게감이 머지않아 비가 내릴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망토를 뒤집어 쓴 사내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슐리펜.”
거리가 멀었지만 확실했다.
능력으로 보나 오줌도 각 맞춰 쌀 것 같은 분위기로 보나 저 자식은 슐리펜이 맞았다.
반가워서 막 손을 흔들려던 차였다.
묵묵히 나를 노려보던 슐리펜이 등을 돌렸다.
“아?”
망설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녀석은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콧수염을 갈아 버린 회오리도 붉은 얼룩만 남긴 채 흩어지고 있었다.
“얌마 어디 가!?”
큰 소리로 불러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뼈다귀를 뺏긴 들개처럼 뛰쳐나갔다.
난간을 뛰어넘었다.
7층에 달하는 높이였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고양이처럼 사뿐한 착지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거기 서!”
곧바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녀석이 작정하고 숨어 버리기 전에 잡아야 했다.
못해도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리가 4초만에 좁혀졌다.
슐리펜이 사라진 모퉁이를 돈 내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에잇 젠장.”
넓고 복잡한 주택가가 펼쳐져 있었다.
열등생들이 지내는 크라티르 관이었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목조 건물들은 유령들이 집으로 삼아도 될 만큼 음산하게 변한 채였다.
수십 채의 오두막은 세는 것이 힘들 정도로 많은 도주로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이래서 실력 없는 놈들은 하등 쓸모가···아니다. 아데샨도 여기 지냈지.”
다행히도 말을 맺기 전에 번복할 수 있었다.
까짓꺼 부진할 수도 있지.
꼴통인 줄 알았는데 그림자의 마나를 타고났을 경우가 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슐리펜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길바닥에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못 잡을 줄 아냐?”
자신 없는 분야였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오감이 증폭됐다.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목재와 곰팡이 바람에 뒤섞인 강물 냄새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예민해진 피부는 공기의 흐름 하나하나를 감지하기에 이르렀다.
머지않아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찾았다.”
성과는 금새 나왔다.
반경 수백 미터 내에 움직이는 사람은 나 말고 한 명 뿐이었다.
사슴의 발자국을 발견한 사냥꾼이 이런 기분일까.
내가 막 추격을 재개하려던 순간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엥?”
“네놈은 정체가 뭐냐. 왜 나를 따라오는 거지?”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던 살기가 뒤통수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눈동자를 조심스레 아래로 떨어뜨리자 내 목에 닿아 있는 서슬 퍼런 칼날이 보였다.
눈보라로 벼려진 그랑시아 가의 보검 페일 로드였다.
“···허 역시 경력직 도망자는 다르다 이건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기척을 탐색하고 감추는 것은 원래 이 자식이 잘 하는 분야였지만 이번에는 정말 기가 막혔다.
나는 경고를 무시한 채 고개를 살짝 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스름히 빛나는 암청색 눈동자였다.
“응? 슐리펜.”
“·······”
슐리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경고를 무시해서인지 불편해하는 기색이 여실했다.
그럼에도 곧장 목을 치지 않는 점이 타고난 선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와 눈이 마주친 내가 눈썹을 치켜떴다.
“뭣.”
고결한 성품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부슬부슬한 수염이.
머리카락처럼 암청색을 띠는 수염이 그의 하관을 덮고 있었다.
몇 초간 벙쪄 있던 내가 겨우 입을 똈다.
“빌어먹을 그 털은 뭐야?”
“말을 돌리지 마라.”
“아니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잖아 썅. 뭔 산적놈마냥····”
반란 소식을 들었을 때에 비견되는 충격이었다.
장담컨데 이 몰골이었으면 우리 누나를 꼬시는 데 실패했을 터였다.
당장에라도 영구 제모를 시켜버리고 싶었지만 슐리펜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페일 로드의 칼날이 한층 가까워졌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정체를 밝혀라.”
“알았다 알았어. 내 이름은 로난이다. 네 적은 아니고 오히려 같은 편이야. 꽉 막힌건 똑같구만.”
“로난이라···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너 정도의 실력자라면 분명 이름이 알려져 있을 텐데.”
“그야 당연하지. 이쪽 세상의 나는 원숭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이쪽 세상?”
“그런 게 있어. 에잇 이걸 또 언제 다 설명하냐.”
전후사정을 다시 설명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나는 그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천천히 운을 뗐다.
“잘 들어 슐리펜. 나는 다른 세상에서 넘어왔어. 여기와 똑 닮았는데 역사가 다른 세계야. 거기서 너는 세상을 구한 영웅이고 주제넘게도 우리 누나한테 청혼했지. 아 갑자기 또 빡치네.”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제기랄 안 믿을 줄 알았다. 시키는대로 대답해 줬으니까 나도 뭐 하나만 물어보자. 섭정 바르카가 혹시 바르카 터르겅이냐? 전대 검성 자이파의 동생.”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뭐지.”
“아.”
슐리펜이 갸웃거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유감스럽게도 예상이 적중하고 말았다.
바르카 터르겅.
자이파의 동생이자 송곳니의 밤을 일으킨 장본인.
네뷸라 클라지에의 주교 중 한 명이자 원래 세상에서는 아데샨에 의해 질식사한 병신.
‘개새끼 대회가 있다면 준우승은 할 자식이지.’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바르카는 제이거라는 꼭두각시를 내세워 북부를 삼키려 했었고 그 과정에서 천인공노할 악행을 밥 먹듯이 저질렀다.
자이파의 아들인 아라단을 되살려서 부려 먹는다거나 기형아가 태어나는 저주를 내리는 말뚝을 북부 전역에 박는다거나····
어디서 많이 본 오러도 콧수염의 입에서 눈동자가 나온 것도 이해가 됐다.
바르카는 전사에 걸맞는 피지컬을 타고난 주제에 흑마법을 전공한 놈이었으니.
그 야심 넘치는 고양이가 기어코 제국의 심장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하 씨발···그 새끼가 결국에는 성공했다 이건가.”
혈압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진정제를 투여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담뱃대를 꺼내기 위해 품을 뒤적거리자 슐리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내가. 움직이지 말라 했을 텐데.”
“한 번만 봐주라. 이거라도 안 빨면 어디 혈관 하나가 파열할 것 같단 말야.”
“네놈.”
슐리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듯 했다.
칼자루를 뒤집은 그가 검을 휘둘렀다.
“오.”
역시 깔끔한 검로다.
이런 사소한 동작 하나만으로 경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원래 세상의 슐리펜보다는 못하지만 첫 번째 인생에서 만난 슐리펜과는 엇비슷한 것 같았다.
상체를 숙여 피한 내가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어서 페일 로드를 쥔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걸로 사람을 어떻게 죽이시려고?”
“무슨···!”
낄낄거리며 질문하자 슐리펜이 얼어붙었다.
그는 자신을 붙들고 있는 내 손을 괴물의 촉수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반대편 손으로 담뱃대를 입에서 빼냈다.
숨을 내쉬자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어서 허공에 머물러 있는 살상력이 없는 칼등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역시 넌 그대로야 슐리펜. 마음이 좀 놓인다.”
“젠장 놔라!”
슐리펜이 팔꿈치를 휘둘렀다.
나는 가볍게 뒷걸음질치며 물러났다.
자유를 되찾은 슐리펜은 곧바로 칼자루를 두 손으로 쥐며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검을 뽑아라!”
“진정해 인마. 너랑 싸울 생각 없어.”
“너는 도대체 정체가 뭐냐. 왜 필레온 아카데미에 침입한 것이고 왜 금군과 맞선 거지?!”
“아카데미는 뭐라도 있을 것 같아서 들어온 거고 그 자식이 금군인지는 몰랐어. 아직 나눌 이야기가 많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진 것 같아서 좋네.”
“확실해졌다고?”
“그래. 황제 폐하를 죽인 건 네가 아니야.”
“······!”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당장에라도 검기를 발사할 것만 같던 기세가 누그러졌다.
이렇게 마주보고 있자니 초췌해진 녀석의 몰골이 더 잘 보인다.
수염뿐만이 아니었다.
짙어진 눈그늘과 푹 파인 뺨은 슐리펜이 지금껏 해온 고생을 대변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다려진 옷이 아니면 입지 않던 놈의 몸에는 거적이나 다름없는 망토가 둘러진 채였다.
‘별로 보기 좋지는 않군.’
쏴아아아···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피어오른 안개가 시야를 좁힌다.
풍경 대부분이 회백색에 삼켜진다.
삭막한 교정 위로 빗소리가 번지고 있었다.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대치가 이어지던 찰나.
“···엉?”
“······!!!”
스산한 기운이 한파처럼 덮쳐왔다.
수업용 첨탑이 모여 있는 방향이었다.
나와 슐리펜이 거의 동시에 몸을 뒤로 빼는 순간이었다.
콰광!
쾅!
안개를 찢으며 날아온 무언가 우리가 있던 자리에 박혔다.
“이건 또 뭐야.”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잘 빠진 창 두 자루가 지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먼젓번에 봤던 바르카의 오러가 창대를 불처럼 휘감고 있었다.
슐리펜이 혀를 찼다.
“쯧 쓸데없는 대화에 시간을 너무 빼앗겼군.”
“어떤 새끼가 어른 말하시는 걸 방해해?”
나와 슐리펜이 고개를 돌렸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 위로 일곱 개의 첨탑이 솟아 있었다.
그 뾰족한 끄트머리 위로 제복을 입은 괴한들이 각각 한 명씩 서 있었다.
“···제국군?”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코트는 제국군 장교의 정복이었다.
얼굴은 무도회에서나 쓸 법한 가면으로 완전히 가려진 채였다.
놈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쪽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슐리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도망쳐라.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뭔데 그렇게 진지하게 굴어?”
“바르카의 친위대다. 귀찮은 놈들이 붙었어.”
푸른 눈동자가 진지해졌다.
페일 로드의 검신 위로 한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확실히 어깨 위로 스며나오는 기운을 보아하니 다들 상당한 실력자기는 했다.
‘저 새끼들은 뭔데 남의 학교 건물을 밟고 있어?’
물론 그건 내 알바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저들이 우리의 대화를 방해한 걸로 모자라서 내 모교를 더럽히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라 한 마디 하려던 순간 슐리펜이 외쳤다.
“온다!”
일곱 괴한이 일제히 뛰어올랐다.
놈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쇄도했다.
슐리펜이 넓은 검격을 뿌렸다.
거대한 초승달 형상의 검기가 스무 걸음 앞의 바닥에 적중했다.
콰아아아아아!!
회오리로 이루어진 장벽이 포석을 부수며 솟구쳤다.
……!
선두에 있던 두 명이 그대로 바람에 삼켜졌다.
살을 찢는 역겨운 소리와 함께 장벽 일부가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