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이해할 수 없는
#34
구체가 흩어지며 밤하늘이 드러났다.
가려졌던 별의 바다가 머리 위로 펼쳐졌다.
속도를 잃은 아카샤의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절단면에서 터져 나온 피보라가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
놈의 가면 위로 다시금 균열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웃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지옥의 기계가 폭주하는 듯한 괴성이 쩌렁쩌렁하게 터져 나왔다.
『■■■■ ■■■!!』
추정컨데 비명일 터였다.
지옥의 기계가 폭주하는 듯한 괴성이었지만 내게는 그 느 때보다 감미롭게 들렸다.
나는 혀를 깨물며 정신을 다잡았다.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지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아직···멀었어.”
목을 베지 못한 게 실수였다.
뭐가 됐든 이번에 끝을 내야 한다.
소망을 이뤄주는 기적은 벌써 내 몸을 떠난지 오래였으니.
펑!
가슴께에 검을 휘두르자 폭발이 일어났다.
참으로 무식한 방향 전환이었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끝 모르고 상승하던 몸이 아카샤를 향해 강하했다.
“여기서 뒈져라!”
앞머리가 뒤집혔다.
나는 칼자루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불현듯 아카샤가 오른팔을 뻗었다.
『■■!』
“큭?!”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허나 이번에는 공격이 아니었다.
아카샤의 검지와 중지가 교차해 있었다.
처음 보는 손동작이었다.
그때 비처럼 쏟아지던 아카샤의 피가 허공에 정지했다.
‘피를?’
꼭 시타의 능력을 보는 것 같았다.
박제되어 있던 핏방울이 일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추락하는 아카샤의 등 아래로 붉고 기다란 직선이 나타났다.
그가 꼬았던 손가락을 푸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아악!
직선이 아가리처럼 벌어지며 거대한 균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균열이었다.
마력이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내부에는 좁고 기다란 길 하나가 나 있었다.
길의 끝에는 똑같이 생긴 균열이 하나 더 새겨져 있었는데 햇살 내리쬐는 초원이 그 안에 펼쳐져 있었다.
‘평행세계.’
상황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균열은 다음 평행세계로 넘어가는 차원문이었다.
죽음의 위기에 내몰린 아카샤가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지랄 마.”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놈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이제 고작 스무 걸음 안팎이다.
칼자루를 움켜쥐자 검신이 붉게 물들었다.
콰아앙!
한 차례 더 폭발을 일으키며 가속한 내가 검을 휘둘렀다.
“당장 거기 안 서냐 이 새끼야!”
풍경이 흐려진다.
눈알이 짓뭉개질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붉은 꼬리를 끌며 쇄도한 검이 아카샤의 목을 찢어 놓으려던 찰나였다.
『■■■■!!』
“뭐.”
발악하듯 놈의 양팔이 펼쳐졌다.
매끄러운 가면 위로 네 개의 균열이 더 벌어졌다.
중심을 기준으로 원형을 이루는 균열은 하나하나가 눈처럼 보였다.
원래 입처럼 보이던 균열도 방향을 바꾸고 눈동자로 변한 채였다.
흰자와 검은자의 색이 역전되어 있어서 여간 섬뜩한 게 아니었다.
“윽···!”
다섯 개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다섯 개의 내 얼굴이 다섯 망막에 맺힌 채 일렁이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머리가 핑 돌았다.
콰아아아아앙—!!!
강력한 반발력이 아카샤를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크아악!”
목을 파고들던 칼날이 튕겨났다.
내 몸은 철구에 맞은 것처럼 뒤로 날아갔다.
끝끝내 균열이 아카샤를 집어삼켰다.
악에 받힌 포효가 목구멍 깊숙이서 터져 나왔다.
“씨발!!”
간발의 차였다.
더는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쓴 터라 몸에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포물선을 그리며 비행하던 몸이 서서히 추락했다.
“나와 이 개새끼야! 니가 그러고도 재앙이냐!”
아무리 외쳐봐도 아카샤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에는 놓치고 만 것이다.
그대로 떨어지던 내 몸이 에너지로 이루어진 층을 찢으며 빠져나왔다.
구체는 사라졌지만 밤하늘은 여전히 광란의 도가니였다.
불과 그림자 세니엘이 파괴되며 터져 나온 화려한 색채가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저거 괜찮은 건가?’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보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풍경이었다.
솔직히 내버려 두면 안 될것 같았지만 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추락하는 감각에 슬슬 적응이 되어 갈 무렵이었다.
불현듯 등 아래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뮈—이이이익!”
어디서 많이 들은 기합이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덩치가 내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켁!”
목이 졸린다고 불평할 새도 없었다.
그는 나를 옆구리에 끼운 채 지상으로 낙하했다.
콰아아앙!
착지와 동시에 굉음이 작렬했다.
“크허어억!”
나를 내던진 덩치가 나동그라졌다.
대자로 드러누운 덩치의 머리에는 검소해진 사슴뿔이 돋아나 있었다.
잘려나간 왼팔은 붕대로 칭칭 동여매진 채였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뒤 그에게 다가갔다.
“세상에 씨발 너 괜찮냐?”
“괜찮을 리가···크억 없지 않나····”
판타시온이 숨을 껄떡였다.
몸 상태를 보니 살아 있는게 용했다.
아카샤에게 두들겨 맞은 직후보다 더 악화된 채였다.
핏물로 불어터진 입가에는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이딴 꼴로 그 높이까지 뛰어오르다니 미친 자식.
“일단 고맙다. 오르세는 어디 가고 왜 네가 왔어?”
“그 마룡은···후우 지금 바쁘다.”
“바쁘다고?”
“그래···저기····”
판타시온이 내 뒤로 턱짓했다.
그러고 보니 오르세만 없는 게 아니었다.
지상에 모여 있어야 할 저항군 대다수가 어디론가 사라진 채였다.
고개를 돌린 내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뭔···”
본부와 멀지 않은 곳에 나바르도제가 쓰러져 있었다.
몸을 뉘인 그녀는 생물이 아닌 붉은 산처럼 보였다.
저항군은 그녀의 머리를 둘러싼 채 흐느끼고 잇엇다.
“흐윽! 나 나바르도제 님···!”
“이런 식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리세요 네?”
꼭 임종 직전의 환자를 격려하는 듯한 태도였다.
느낌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본모습으로 돌아온 오르세가 그녀의 육신 위로 불을 뿜고 있었다.
【허어억···젠장 일어나라!】
검붉은 화염이 나바르도제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불에 닿은 그녀의 비늘은 달아올랐다 식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저것이 인공 호흡과 비슷한 행위라는 것을 눈치챘다.
【기껏 그 애송이가 해냈는데 이렇게 떠날 생각이냐!? 눈을 떠라!】
오르세가 포효했다.
한층 더 거세진 불꽃이 나바르도제의 몸 위로 쏟아졌다.
비늘이 아름답게 반짝거렸지만 끝내 감겨진 눈꺼풀은 떠지지 않았다.
“누님.”
나는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라 말하려던 판타시온은 그대로 탈진하며 기절해 버렸다.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경악했다.
“맙소사 로난 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몸이···!”
인파가 좌우로 갈라졌다.
치료를 담당하는 인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나는 나바르도제에게 시선을 둔 채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나바르도제 님은…뭐가 어떻게 된 거에요?”
“크흐흑 그 마법사와의 전투 이후 깨어나지를 못하고 계십니다. 몸에 별다른 부상이 보이지 않는데도요. 오르세 님께서 간신히 추락을 막았는데···!”
늙은 엘프가 눈물을 훔쳤다.
그는 오르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끝에 나바르도제의 몸을 받아냈다고 전했다.
남아 있던 힘을 모조리 끌어낸 오르세는 다섯 살 배기 꼬마가 갑옷으로 무장한 군마를 들어올리는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바르도제는 침묵하고 있었다.
언제나 다정하게 세상을 굽어보던 눈동자는 두터운 눈꺼풀로 가려진 채였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카샤의 짓일 가능성이 컸다.
구체 아래로 추락할 때부터 눈을 감고 있었으니.
그녀를 응시하던 내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안 돼.”
이건 올바르지 못했다.
내 몸 상태도 말이 아니었지만 지금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세니엘도 박살난 마당에 나바르도제까지 죽는다면 모든 게 끝이었다.
나는 검을 뽑아 팔뚝에 대고 그었다.
붉은 피가 왈칵거리며 새나왔다.
“로 로난 님?!”
“꺄아악!”
사람들이 경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바르도제에게 다가갔다.
내 피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었지만 할 수 있는 짓은 모조리 해봐야 했다.
나바르도제의 이빨은 하나가 거의 사람만 했다.
내가 그녀의 입 안으로 피를 흘려넣으려던 차였다.
쿠구구구구구···!
갑자기 하늘 높은 곳에서 범상치 않은 폭음이 울려 퍼졌다.
“끼아아악!”
“흐아악! 뭐 뭐야?!”
이건 무시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공중에 체류해 있던 에너지가 한 곳에 모여들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밤하늘을 뒤덮은 소용돌이가 심상치 않았다.
힘의 흐름은 얼키고설키며 또 다른 구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카샤가 만들어낸 것보다는 훨씬 크기가 작았지만 밀도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검은색과 적색 녹색 푸른색 황금의 색채를 띤 입자가 뒤엉킨 채 점멸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개짓거리가 벌어지려는 거지?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대처할 수 있게 칼자루를 쥐고 있던 차였다.
느릿하던 힘의 응집이 미친 듯이 가속했다.
하늘을 가리던 입자가 단번에 소멸했다.
탁 트인 하늘 위로 별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아아—!
구체가 대폭발을 일으키며 색채 화려한 파동이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끄아아아악!”
【뭐.】
세상이 밝아졌다.
파동은 구체를 이루던 형형색색의 입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이한 입자는 사방천지로 뻗어 나가며 자신과 닿는 모든 것에 변화를 일으켰다.
척박해진 땅 위로 풀과 꽃이 자라났다.
칙칙한 서리가 내려앉은 흙은 당장에라도 농작물을 심어도 될 만큼 기름지게 변했다.
흙탕물이 되어 요동치던 바다가 단번에 맑아졌다.
눈에 닿은 모든 것이 생기를 되찾기까지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벙찐 채 수평선을 바라보던 누군가 펄쩍 뛰어오르며 외쳤다.
“저 저기 봐! 범고래다!”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어?”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에 회답하듯 앞바다의 수면 위로 범고래 세 마리가 편대를 이루며 뛰어 올랐다.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정어리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던 바다였다.
“물고기 떼가···!”
심지어 범고래들은 다른 물고기의 군집을 뒤쫓고 있었다.
원래는 흔하디 흔했지만 거인들에게 별을 점령당한 이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멸종당한 어종이었다.
기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륙 쪽에 솟아 있는 산 너머에서 새하얀 갈매기 수백 마리가 날아올랐다.
“생명이····”
다시금 인파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채 핏기가 돌아오는 세계를 감상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세니엘에 힘을 불어넣어도 생물만큼은 돌아오지 않았었는데.
아직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줄곧 침묵하던 나바르도제가 잠에서 깬 아이처럼 움찔거렸다.
【······아.】
【나 나바르도제?!】
오르세가 헛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불을 쏟아 부어도 일어나지 않던 변화였다.
이윽고 나바르도제가 눈을 떴다.
크고 맑은 진홍색 눈동자에서는 어떤 고통이나 피로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눈동자가 내게 고정되었다.
【로난.】
나는 할 말을 잃고 주춤거렸다.
별안간 그녀가 눈을 감았다.
거대한 육신이 빛에 휩싸이며 소멸했다.
파아아아···!
텅 빈 공터에 인간으로 변한 나바르도제가 모습을 드러냈다“···윽.”
“누님!”
나는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했다.
나바르도제의 몸에는 상처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나를 잡고 몸을 지탱한 그녀가 눈웃음쳤다.
“응 고맙구나.”
“괜찮은 거에요?”
“그래···보다시피.”
“하아아···다행이다. 놀랐잖아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눈을 뜨지 못할 때는 정말로 큰일이 나는 줄만 알았다.
나는 물고기가 돌아온 바다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런 일을 해내다니 진짜 끝내주네요. 어떻게 한 거에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예?”
“이해할 수가 없구나. 도대체 그 마법사는····”
나바르도제가 혼잣말했다.
그녀는 혼란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로난.”
“듣고 있어요.”
갑자기 중얼거림을 멈춘 그녀가 내 손을 꼭 쥐었다.
“아카샤를 쫓아 가거라.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