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미래에서 온 재앙(5)
#32
“···거인의 선왕이라고?”
오르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잔해더미에 등을 기댄 채 비몽사몽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내가 놈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래. 본부 지하 깊숙이 가야 해.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아직 거기 있을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헉 하는 거냐···놈들은 모두 소멸했는데.”
“젠장 잔소리 말고 일어나기나 해.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해 줄 테니까!”
“빌어먹을 놈···! 누구는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줄 아느냐? 몸이 안 움직이는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크학!”
오르세가 재차 피를 토했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다친 것 같았다.
애당초 무모한 짓을 하면 했지 엄살을 부리는 녀석은 절대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지금은 극복해야 하는 때였다.
이걸 어떻게 정신을 차리게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하늘을 쳐다보던 오르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나바르도제···?!”
“아 씨 깜짝이야.”
기다란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이 새끼 봐라 못 움직인다면서?
오르세의 시선은 아카샤가 만들어낸 구체의 중심에 머물러 있었다.
이따끔씩 불길이 터져 나올 때마다 거대한 드래곤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내비치고 있었다.
아카샤와 격전을 치르는 나바르도제였다.
불현듯 오르세의 등 위로 네 장의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크허윽!”
“어쭈?”
날개 또한 끔찍한 상태였다.
군데군데 찢어진 익막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뚝뚝 흘러내리는 선혈은 이미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없어서 모르지만 만약 날개에도 신경이 있다면 죽을 만큼 고통스러울 터였다.
“크악 크아아악!”
그럼에도 오르세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핏덩이를 토하면서도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것이 당장에라도 쏘아져 나갈 기세였다.
다급하게 몸을 날린 내가 그의 허리를 붙들었다.
“얌마 어디 가?!”
“놔라! 나바르도제는 내 손에 죽어야 한다!”
“뭐가 어째?”
이마 위로 핏대가 솟구쳤다.
철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좀 열이 받았다.
콰직!
그대로 허리를 들어올린 내가 오르세를 바닥에 메다 꽂았다.
“으윽 감히····”
“지금 그딴 헛소리가 나오냐? 누님이 지금 뭐랑 싸우고 있는지 알아?”
“그딴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썩 비켜라!”
“이 새끼가 진짜···!”
멱살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싹수는 없어도 심성은 괜찮은 놈이라 생각했는데.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던 오르세가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나바르도제가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다! 아직 받은 걸 돌려주지도 못했단 말이다!”
“뭐?”
극도로 흥분한 오르세의 동공이 세로로 좁혀져 있었다.
한쪽이 부러진 뿔 위로 여느 때보다 격정적인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내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하늘에 떠 있는 구체의 표면이 폭발하며 일부가 떨어져 나왔다.
전체에 비하면 물방울이나 다름없는 아주 작은 덩어리였다.
“저건····”
우리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분리된 파편은 서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아직 어떤 생명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유빙이 떠다니는 수면 위에는 기념비 삼아 남겨놓은 대머리들의 뿌리가 솟아 있었다.
검고 둥근 형체가 바다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수평선을 따라서 검은 벽이 치솟았다.
“뭐.”
“씨발 다들 숙여!”
나는 오르세의 머리를 누르면서 외쳤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허둥거리며 바닥에 엎드렸다.
콰아아아아앙-!!
뒤늦은 폭발음과 함께 터져 나온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끄아아아악!”
“사 살려줫!”
본부 위로 피어나던 흙먼지가 단번에 사라졌다.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바위가 하늘을 날았다.
내 제압을 빠져나온 오르세의 몸이 급속도로 부풀었다.
불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폭풍은 하늘을 깊게 찌른 뒤에야 서서히 흩어졌다.
“씨발···쿨럭 쿨럭!”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관이 따로 없었다.
뿌리는 티끌만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채였다.
난폭해진 파도만이 하얀 손이 있던 자리에서 날뛰고 있었다.
나바르도제를 떠올린 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누님.”
생전 본 적 없는 위력이었다.
거인왕의 폭격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주변에서는 앓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만다행히도 죽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오르세가 날개를 펼쳐 막아준 덕이었다.
“너···!”
【크으으으····】
상처가 더 늘어났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딴 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태도였다.
오르세는 그저 기다란 목을 쳐들고 나바르도제를 삼킨 구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괴물은 너무 많은 것을 희생했다.】
“엉?”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을 살리기 위해 제 생명을 바쳤지. 하 우습게 보기는···매일같이 혼자 돌덩어리를 찾아간 걸 내가 모를 것 같았나?】
오르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본부를 옮기기 이전의 이야기였다.
나바르도제는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매일같이 세니엘에 생명력을 바쳤다.
그녀는 모두에게 비밀로 했다 말했지만 비밀이 완벽하게 유지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런 뜻이었냐?”
【이건 용납할 수 없다. 저 괴물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런 곳에서 한심한 최후를 맞이해서는 안 돼. 적어도 내 손에 죽을 날까지는 천수를 누려야 마땅하다.】
“죽긴 누가 죽어 병신아. 재수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설핏 웃은 내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하여튼 수컷들은 이래서 문제다.
선의를 베푸거나 애정을 품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니 원.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오르세의 머리 위로 도약했다.
그리고 검지를 뻗어 원래는 본부가 있었던 구덩이를 가리켰다.
“아무도 안 죽는다. 얼른 가자.”
【확실하겠지.】
“나 못 믿냐?”
【흥.】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증명이라면 이미 충분히 했다.
촤아아악!
오르세의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내가 놈의 뿔을 움켜쥐는 순간 거구가 앞으로 쏘아졌다.
“저기다!”
우리는 거대한 구덩이 아래로 강하했다.
통로를 발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사람 겨우 통과할 만한 문이 가파른 내벽에 나 있었다.
오르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딴 걸 어떻게 통과하라는 거냐.】
“안쪽은 넓어. 충돌 직전에 점멸하면 될 거야.”
【젠장 아니기만 해 봐라.】
오르세가 으르렁거렸다.
그가 날개를 조율하자 방향이 바뀌었다.
거대한 머리가 바위로 된 벽에 처박히려던 차였다.
퍼엉!나와 오르세의 몸이 입자로 변하며 흩어졌다.
암전됐던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나바르도제를 제외한 모두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드넓은 얼음 동굴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건···!】
“오랜만이네. 정말로.”
아버지와 함께 온 이후 처음이었다.
향수가 콧잔등을 간질인다.
상하좌우 모든 방향을 뒤덮은 얼음은 어쩌면 이 별과 나이가 비슷할 터였다.
콰르르릉!
불현듯 동굴 전체가 거칠게 흔들렸다.
전방의 천장이 무너지며 집채만한 얼음 덩어리들이 쏟아져 내렸다.
【큭!】
“계속 가!”
구체 파편이 추가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자세를 잡은 내가 검을 휘둘렀다.
콰장창!
산산이 조각난 얼음이 폭발했다.
돌파를 성공한 오르세가 속도를 높였다.
멈춰서는 안 됐다.
구불구불한 통로는 아주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동하는 내내 진동이 작렬하고 천장과 벽면이 무너져 내렸다.
“썅 적당히 좀 해라!”
그때마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오르세도 알 깨던 힘까지 끌어모아 점멸을 사용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놀이기구를 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는 드디어 거대한 석문 앞에 도착했다.
【이건···?】
“이제 인간으로 돌아와. 어차피 못 뚫을 테니까 점멸 쓰지 말고.”
오르세는 그렇게 했다.
나는 기묘한 감정을 느끼며 석문을 올려보았다.기억에 있다.
특수 처리된 문짝은 마법을 비롯한 공격 대부분을 막아냈다.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어야 할 대머리 종족의 반짝거리는 마나가 문 너머에서 새나오고 있었다.
‘남아있어야 할텐데.’
칼날에 손바닥을 문지르자 피가 흘렀다.
그대로 팔을 휘둘렀다.
부채꼴로 뿌려진 피가 석문에 묻었다.
쿠구구구궁···!
천천히 문이 벌어지며 내부의 풍경이 드러났다.
“여전하군. 빌어먹을.”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불어닥쳤다.
두 번째라도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근원이 파괴된 이후라 그런지 반짝거리는 마나는 예전보다 확연하게 줄어 있었다.
복도를 따라 십 분 정도 전진하자 탁 트인 공간이 펼쳐졌다.
한 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드넓은 공터에는 큼직한 얼음덩이 하나가 솟아 있었다.
어찌나 큰지 망령의 바다를 표류하는 빙하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오르세가 눈썹을 치켜떴다.
“어떻게···!”
“하아···다행이다. 아직 있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하얗고 맨질거리는 거대한 머리통이 얼음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몸통과 팔다리 날개 등.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위는 모조리 사라진 채였다.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됐어.”
아버지를 업고 찾아왔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다.
얼음 위로 뛰어오른 내가 머리통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 또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얼음에 갇힌 목 아래 부분이 서서히 빛의 입자로 변하며 소멸하는 중이었다.
오르세가 입을 뗐다.
“······설명해라.”
“예전에 말했던 거인 종족의 선왕이야. 머나먼 과거에 세니엘과 싸우다 죽어서 여기 추락했지. 보존 환경이 좋아서 다른 대머리들처럼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은 것 같아.”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세니엘이라면 그 돌멩이 아닌가?”
“맞아.”
푹.
검을 뽑아든 내가 빛이 꺼진 눈동자를 찔렀다.
새파란 피 한 줄기가 힘겹게 흘러내렸다.
평범한 소년이었던 아버지를 불멸자로 만든 이 세상에서 가장 진한 피가.
‘멀쩡하지는 못하겠지.’
심호흡을 한 뒤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과거 놈의 피를 마셨을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상에 떠 있는 구체 다음으로 강렬했던 힘의 정수는 내 몸에 남아 있던 저주를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아버지는 분명 이런 말을 했었다.
장난으로라도 더 마실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저주가 완충 작용을 해줬기에 네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거라고.
“나라고 이럴 날이 올 줄 알았겠수?”
나도 모르게 실소가 머금어졌다.
나는 팔을 뻗어 피를 받았다.
오목한 손바닥에 고인 액체는 놀랍게도 뜨거웠다.
숨죽인 채 나를 지켜보던 오르세가 경악했다.
“잠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그걸 왜···!”
“지금 방법은 이것 뿐이야.”
“기다려라!”
오르세가 만류했지만 무시했다.
푸른 피가 내 목구멍 안으로 흘러들었다.
역시 뜨겁다.
불쾌한 액체는 내 식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한 방울까지 뱃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아.”
갑자기 시야가 핑 돌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엉덩이가 바닥을 찍었다.
오르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후우···후우우···!”
왜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으로 술을 마셨을 때보다 역겨운 느낌이다.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날 수가 없다.
몸 안에서 뭔가 맥동하는 것 같기도 한데 제대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진짜···후우 거지 같구만····”
그래도 일어나야 했다.
검을 지팡이 삼아 기립한 내가 입을 뗐다.
“위로···돌아가자.”
【미친 자식!】
오르세는 어느새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시커먼 몸이 부풀었다.
인간 형태를 유지한 채 뿔과 꼬리 날개가 솟았다.
쿼터 드래곤이 된 오르세가 나를 등에 태웠다.
그가 막 석문을 향해 비상하려던 차였다.
“거기가···아니야····”
【뭐라고?】
“시간이 어딨냐···다들 그 고생을 하고 있는데···한 번 죽은 사람은 되돌아오지 않아·······”
슬슬 어지럽기까지 하다.
나도 내가 뭐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역겨운 감각은 전신의 혈관을 불태우는 듯한 통증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화가 난다.
고통은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도 안다.
그럼에도 떨쳐내야 한다.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후우우읍···!”
휘청거리며 허공을 겨냥한 내가 검을 휘둘렀다.
반듯한 직선이 얼음으로 된 천장을 가로질렀다.
적막이 찾아왔다.
그리 길지는 않았다.
역할을 마친 검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천장의 선이 벌어지며 붉은 빛이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앙-!!!
시야를 가로막던 어둠이 반으로 갈라졌다.
【무슨···!】
오르세의 눈이 커졌다.
벌어진 천장의 양 옆으로 대지의 단면도가 펼쳐져 있었다.
아득히 먼 곳에 밤하늘이 보였다.
하늘을 메운 구체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채였다.
녹색과 푸른색 금빛이 뒤섞인 채 격동하는 힘의 덩어리는 우주에서 바라본 이 별을 연상케 했다.
왜 저 꼬라지가 됐는지는 모른다.
지금부터 알아봐야 하는 일이겠지.
나는 목젖까지 올라온 핏물을 삼키며 읊조렸다.
“올라가자.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