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미래에서 온 재앙(4)
#31
폭발은 고요했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세니엘이 파괴되며 터져 나온 생명력은 무지개처럼 화려했다.
그릇을 잃은 힘의 파동이 넘실거리며 퍼져 나갔다.
“세니엘이···!”
나바르도제의 날갯짓이 멎었다.
그녀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세니엘의 몸체를 이루던 바위는 흔적도 없이 바스라진 채였다.
한참을 벙쪄 있던 내가 칼을 내려봤다.
“오러가····”
검신은 여전히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아름답다.
다시 한 번 아카샤를 겨냥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놈의 형체는 노을에 휩싸일지언정 물들지 않았다.
내 간격으로 끌려오지 않았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긴장한 린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로난. 뭔가 이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오러를 거두자 노을이 사그라졌다.
정신을 다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와중이었다.
세니엘에만 집중하던 아카샤가 처음으로 내 쪽을 돌아 보았다.
“······!”
나바르도제의 화염에 휩쓸린 탓인지 가면에 붙어 있던 천쪼가리는 모두 사라진 채였다.
장식 없는 가면은 티끌 하나 없는 백색을 띠었다.
다만 평범한 백색이 아니었다.
거울처럼 미끈거리는 표면에는 아카샤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엇비치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황혼 살아 있는 것처럼 꾸무럭거리는 세니엘의 생명력.
멍청하게 굳어 있는 내 면상까지.
불현듯 아카샤의 가면 위로 길고 얇은 균열이 그어졌다.
‘입?’
양쪽 꼬리가 위로 올라간 모양새가 초승달을 연상케 했다.
여지껏 본 적 없는 모습에 긴장하던 차였다.
『■ ■ ■ ■ ■ ■ ■ ■ !』
두 번의 삶을 통틀어서도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음색이 울려 퍼졌다.
“별 좆같은····”
반사적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지옥의 기계가 작동하며 낼 법한 괴성이었다.
본부에서 빠져나오던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흐아아악!”
“뭐 뭐야?! 우욱···!”
누군가는 그대로 주저앉거나 구토를 하기도 했다.
십수 년을 대머리들과 맞서 싸운 저항군도 속수무책이었다.
도저히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괴음은 단순히 불쾌한 것을 넘어 정신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우리를 비웃고 있어.”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저것이 아카샤의 웃음소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저 가면 뒤편에서 웃어젖히고 있을 놈의 면상이 눈에 선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목과 이마 위로 핏대가 치솟았다.
혼을 쏙 빼놓는 광소는 모순적이게도 내가 정신을 차리게 해 주었다.
“이 개새끼야! 뭐가 그렇게 우스워!”
“로 로난!”
나바르도제가 외쳤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아카샤를 향해 발사된 뒤였다.
바람의 포효가 고막을 두드린다.
세니엘의 생명력은 여전히 허공에 체류하고 있었다.
오러가 통하지 않는다면 까짓꺼 직접 베면 그만이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내가 검을 휘둘렀다.
“뒈져라!”
아카샤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입처럼 생긴 균열이 아물며 사라졌다.
놈이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내 검이 훨씬 빨랐지만 별로 기뻐할 일은 되지 못했다.
카가가가각!
허공을 가르던 참격이 급속도로 느려지기 시작했다.
“크으으으으···!”
팔의 근육이 부푼다.
거칠어진 맥박이 가슴팍을 뚫고 울려 퍼진다.
일전에 느꼈던 그 감각이다.
보이지 않는 힘이 검을 붙들고 있었다.
아무리 힘을 줘봐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끝내 아카샤에게 닿지 못한 칼날이 허공에 멈춰섰다.
“씨발.”
가면 위로 다시금 균열이 드리웠다.
아카샤의 앙상한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검지와 중지.
날려버리는 일격이다.
“또 이거냐···!”
알면서도 대처법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거지같다.
검을 거둔 내가 방어 자세를 취하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운석처럼 떨어진 충격파가 나를 내리찍었다.
“크학!”
눈앞이 핑 돈다.
등의 근육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든다.
극도로 발달한 운동신경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지금 같은 상황이다.
찰나에 가까운 추락 속에서도 나는 미래의 통증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제 곧 충돌과 함께 굉음이 울려 퍼질 터였다.
뼈에 정을 박는 듯한 고통이 나를 겁탈하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퍼억-!
지면과 비교하면 푸딩이나 다름없는 충격이 척추를 타고 전해져 왔다.
천둥 같은 굉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나를 끌어안은 채 주저앉아 있는 근육 사슴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씨발 판타시온!”
“그으으윽···괜찮나?”
판타시온이 안부를 물었다.
솔직히 멀쩡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비하면 멀쩡한 편이었다.
왼팔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르탄시에의 종아리처럼 깔끔한 절단이었다.
먼젓번에 아카샤에게 당한 몸뚱어리는 산사태에 휩쓸린 짐마차처럼 엉망이 된 채였다.
판타시온까지 개죽음을 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튕겨나듯 몸을 일으킨 내가 손을 뻗었다.
“고맙다. 자 일어나.”
“아니···극 나는 여기까지다···르탄시에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저지른 악행을 심판받는 거겠지······그윽. 난 됐으니 저기 파묻혀 있는 마룡이나 구해 다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어나 인마. 못 움직일 것 같으면 적어도 안전한 곳에라도···”
내가 미처 말을 맺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폭음이 작렬했다.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든 나와 판타시온이 얼어붙었다.
“저게 뭐야 시발.”
“생명력이····”
아카샤가 무언가 저지르고 있었다.
놈은 기다란 팔을 하늘 높이 뻗은 채 알아듣지 못할 단어를 읊조리고 있었다.
『■■■■···■■···■■■■.』
흩어지던 세니엘의 생명력이 놈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중이었다.
수억 개의 입자가 와류하며 모여드는 광경은 꼭 태풍의 탄생을 보는 것 같았다.
나바르도제에게 당해서 망가졌던 사지는 이미 원상 복구를 마친 뒤였다.그렇게 입자가 모이던 어느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
하늘을 수놓던 생명력이 모조리 검은색으로 변모했다.
노을 저물던 세상에 밤이 찾아왔다.
소용돌이의 형태가 변했다.
한 점의 빛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칠흑의 구(球)가 아카샤의 위로 떠올랐다.
“···아.”
판타시온이 탄식했다.
중상을 입었음에도 투지로 이글거리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소란스럽던 사람들도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들의 시선은 모조리 하늘에 나타난 구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게 뭔지는 알 수 없엇다.
다만 모두가 직감했다.
절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세니엘의 생명력에서 말미암은 어둠은 미친 듯이 빠르게 회전하며 파괴적인 에너지를 주변에 발산하고 있었다.
아카샤의 시선은 아래쪽으로 향해있는 걸로 봐서 아마도 저걸 지상에 떨어뜨릴 생각인 것 같았다.
입꼬리 한 쪽이 저절로 올라갔다.
“일진 한 번 사납네.”
이쯤 되면 놀랍지도 않다.
이미 마법이 베어지지 않고 오러가 통하지 않는 시점에서 받을 충격은 다 받았다.
아마 저 덩어리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잘 베어지지 않겠지.
역청처럼 끈적하게 검에 들러붙으며 나를 죽이려 들 터였다.
그럼에도 해야 하는 일은 변하지 않는다.
“가자. 린.”
“응.”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승산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저걸 반드시 베어내야 한다.
지금껏 그래왔듯 사람들에게 베지 못하는 건 없다는 걸 알려줘야 했다.
뒤에서 판타시온의 만류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뛰어오를 준비를 마친 허벅지가 터질 듯이 부풀었다.
막 노면을 박차며 도약하려던 찰나였다.
【아카샤-!】
시야 저편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릴 틈도 없었다.
검은색이던 세상이 붉은색으로 가려진다.
하늘을 가릴 만큼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아카샤를 향해 비상하고 있었다.
“누님!”
【더 이상의 패악질은 용납하지 않겠다!】
본모습의 나바르도제였다.
저 형태를 보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두 장의 날개는 이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벌어진 아가리 틈새로 이글거리는 겁화는 작은 태양이나 다름없었다.
『······!』
구체를 키우던 아카샤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한 번에 다섯 손가락이 펼쳐졌다.
퍼어어엉!
세니엘마저 부숴 버렸던 충격이 나바르도제에게 가해졌다.
그녀의 아가리 안쪽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하지만 나바르도제는 멈추지 않았다.
끝내 체급으로 밀어붙인 그녀가 아카샤를 무는 데 성공했다.
그대로 아카샤와 함께 날아간 나바르도제가 구체에 삼켜졌다.
화르륵!
어둠으로 이루어진 구체 곳곳에서 진홍색 불길이 터져 나왔다.
“누님!”
나는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풀어 오른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젠장 왜 저런 짓을···!”
뜨거워진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옥에 몸을 내던진 격이었다.
어둠의 구체 내부는 아카샤와 세나엘의 힘을 고려했을 때 결코 평온하지는 않을 터였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나만 들이박는 거면 몰라도 누님이 끼어 있으면 이야기가 달랐다.
불현듯 내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하려 했는지 실감이 되었다.
잠시 사명감에 머리가 이상해졌던 것 같았다.
‘내가 실패하면 끝이다.’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근성으로 해결될 문제면 벌써 해결됐을 터였다.
아카샤는 지금까지 상대한 적 중에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언가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확실한 공략법을 찾거나 더 강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과부하가 온 머리가 어지러웠다.
뇌세포 하나하나가 쉬지 않고 타오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을 삼킨 구체 속에서는 여전히 어둠과 불꽃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옹알이를 한 이래 지금까지 모든 기억을 되짚던 와중이었다.
북부의 어느 장소가 섬전처럼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아!”
“···로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절망에 빠져 있던 판타시온이 당혹성을 흘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까전에 판타시온이 가리킨 방향이었다.
머지않아 잔해더미에 파묻힌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쿼터 드래곤 상태인 오르세는 눈을 까뒤집은 채 졸도해 있었다.
“오르세! 오르세!”
“크억···쿨럭 쿨럭···!”
“젠장 일어나 이 새끼야!”
시간이 없었다.
그대로 검을 뽑아든 내가 검격을 뿌렸다.
콰아아앙-!
오르세를 누르고 있던 잔해더미가 수십 토막이 나며 폭발했다.
따귀를 몇 차례 후려치자 그의 눈동자가 제 위치를 되찾았다.
“크으윽···제기랄 내가 어떻게 된 거냐….”
“어떻게 된 거기는. 저 요술쟁이한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여기 처박힌 거지. 당장 죽을 정도만 아니면 나 좀 도와주라.”
“쿨럭! 쿨럭! 도와 달라고···?”
“그래. 네가 필요해. 내가 말하는 곳으로 날아가 줘.”
나는 반강제로 오르세를 일으켰다.
기침할 때마다 핏덩이를 토하는 걸 보니 부상이 꽤 깊은 것 같았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다.
저 암흑 속에서 나바르도제 누님이 어떤 싸움을 벌이고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본부가 뽑혀나온 구덩이를 가리킨 내가 말을 이었다.
“거인들의 선왕에게 갈 거다. 여기서 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