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미래에서 온 재앙(3)
#30
아카샤가 바다에 처박혔다.
거칠게 솟구친 물기둥이 하늘을 가렸다.
이미 승부가 난 것 같았지만 나바르도제는 분노를 거두지 않았다.
【흐으읍···!】
주변의 공기가 그녀의 입 안으로 세차게 빨려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흉악한 가슴이 터질 듯 부풀었다.
드레스의 원단 너머로 붉은 열기가 엇비칠 즈음이었다.
【내 아이를!】
나바르도제가 입을 벌렸다.
쇳물을 연상케 하는 불길이 바다를 향해 쏟아졌다.
치이이이익!
액체 증발하는 소리가 대기를 찢었다.
격렬하게 터져 나온 수증기가 만(灣)을 가렸다.
“윽!”
잠깐이지만 세상에 낮이 찾아왔다.
절벽에 검을 박고 버티던 내가 눈을 가렸다.
정면으로 쳐다봤다가는 각막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머지않아 빛이 가라앉았다.
다시 드러난 풍경을 목도하자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허.”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본부 앞바다는 거대한 구덩이로 변해 있었다.
물이 모조리 증발하며 드러난 밑바닥은 회갈색을 띠었다.
잔불이 곳곳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아카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처박혔던 것으로 추측되는 균열 하나만이 지면 위에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쏴아아아아···!
허공에 체류하던 바닷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억 개의 물방울이 석양을 반사하며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죽인다.”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바르도제의 전투는 말 그대로 예술이었다.
등장부터 아카샤의 얼굴에 서머솔트 킥을 꽂아 버리는 순간까지 군더더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화끈한 확인 사살까지.
내게 찰싹 들러붙은 채 헤실거리던 누님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오르세가 봤으면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겠군.’
그 깜둥이의 주특기인 비행술마저 압도적으로 우위였다.
이로써 오르세를 비행의 귀재라며 치켜세워준 것은 나바르도제의 순수한 호의였음이 증명되었다.
그것마저 자신에게 밀리면 풀이 죽을 것이 안 봐도 뻔하니까.
쿠구구구!
공중에 떠올랐던 본부가 원래 위치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불길에 삼켜지지 않은 해수가 저 멀리서 몰려오고 있었다.
아카샤는 보이지 않았다.
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야지 씨발.
저런 걸 맞고 멀쩡다면 일단 생물인지부터 의심해 봐야 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살피던 나바르도제가 나를 발견했다.
【세상에 로난!】
“누님.”
붉은 꼬리를 끌며 날아온 그녀가 내 앞에 멈춰섰다.
쿼터 드래곤 상태인 나바르도제는 나보다 훨씬 몸집이 컸다.
그녀는 절벽에 붙어 있던 나를 공주님처럼 안아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포지션은 언제나 내가 안아 주는 쪽이었는데.
【괘 괜찮은 거니? 바깥이 소란스럽길래 나와봤는데 설마 이런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나바르도제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머리카락처럼 붉고 짙은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그제야 몸 상태를 확인했다.
등이 좀 뻐근하기는 했는데 크게 문제가 생긴 곳은 없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아···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울먹거리던 나바르도제가 나를 포옹했다.
늘 그렇듯이 숨이 막혔다.
난로처럼 뜨거운 품 속에서는 불꽃 냄새가 난다.
“으읍.”
답답하면서도 안락하다.
매번 생각하는 건데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나는 질식사의 문턱에 다다르고 나서야 얼굴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푸하···! 저는 정말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은요?”
【다들 무사하단다. 건물이 튼튼해서 안쪽에는 거의 피해가 없었어. 판타시온과 오르세가 상황을 정리하고 있단다.】
“다행이네요.”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든 것 같았다.
아카샤가 본부를 뿌리채로 뽑아올릴 때는 정말 좆된 줄만 알았다.
때마침 나바르도제 누님이 있어서 망정이지 원.
문득 아카샤와의 전투가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건 뭐였지?’
불쾌한 손맛이 아직도 선명하다.
놈의 마법은 베어지지 않았다.
나바르도제가 힘으로 찍어 누르지 않았더라면 속수무책으로 패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언젠가 비슷한 힘을 경험해본 것 같기도 한데.
‘젠장. 기억이 안 나.’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갔다.
지금까지 썰어 왔던 마나와는 결 자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찝찝해서일까 아카샤를 죽여야 한다는 가장 큰 임무를 완수했음에도 썩 기쁘지가 않았다.
물론 할 일은 해야 했지만.
앞머리를 쓸어넘긴 내가 입을 뗐다.
“누님. 르탄시에가 죽었어요.”
【······그 아이가?】
“네. 무덤 정도는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마땅치 않네요. 혹시라도 시체를 찾는다면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세요. 악당이라 해도 마지막에는 공익을 위해 싸웠으니까.”
뒷맛이 썼다.
나는 르탄시에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수백 년이 지나서야 갱생했지만 그녀에게 새 삶을 살아갈 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덩그러니 남아 있던 다리 두 짝은 본부가 뽑혀 나오며 소실되어 버렸다.
“무거울 텐데 그만 내려가죠. 마지막으로 다들 얼굴이나 한 번 봐야겠어요.”
【으응. 그래야지···헌데 말하는 투가 어째 곧 떠날 사람 같구나.】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나바르도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카샤가 죽었으니 사실상 임무는 이걸로 끝이었다.
더는 새로운 균열이 만들어지지 않을 테고 미래의 나도 균열을 닫을 수 있었으니 머지않아 미래는 평화를 되찾을 터였다.
게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머지도 지금 처리하고 싶었는데.’
마음만 같아서는 다른 두 평행세계도 구하고 싶었다.
내 자신에게 천국에 있을 대장군님에게 양심의 가책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카샤가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린 이상 그쪽으로 갈 방법이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아카샤의 피 한 병 뿐.
“아데샨이 기다려서요. 염력 쓰는 난쟁이도. 다들 제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건······나도 마찬가지인데.】
“응? 뭐라 하셨어요?”
목소리가 작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 나바르도제가 절벽 위로 솟구쳤다.
“우왓!”
순식간이었다.
겨울의 뿔 정상에 다다른 그녀가 나를 내려놓았다.
나바르도제는 어느새 원래의 크기로 돌아와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물기를 담뿍 머금은 눈망울이 보였다.
“누님.”
“이건···이런 건 용납할 수 없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메어 있었다.
내 뺨을 쓰다듬던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투명한 눈물이 신발 위로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야. 여기서 그냥 나와 살면 안 되겠니?”
“네?”
“나도 안단다. 네게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을.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더는 견딜 수가 없구나.”
심히 당황스러웠다.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나바르도제는 나를 안은 채 말을 이었다.
“너는 이미 내 삶의 일부다. 정원을 가꾸다가도 명령을 내리다가도 네게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심장을 부여잡게 된다······아이야. 나는 네가 침략자들의 세상으로 떠나고 돌아올 때까지 한 숨도 제대로 청하지 못했단다.”
뜨거운 이마가 내 가슴을 콩콩 찍었다.
그녀가 괴로운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괴롭다. 내 아이들이 모두 별이 된 이후 나는 이런 감정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른가···이 기분을 뭐라 불러야할지 모르겠구나.”
“나바르도제.”
“가지 마라.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마. 네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괴로워서 미칠 것 같다······솔직히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저쪽 세상의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가졌는데···!”
목소리가 다소 격해졌다.
갑자기 그녀가 나를 올려보았다.
붉게 상기된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된 채였다.
진홍색 눈동자에는 당황한 내 얼굴이 맺혀 있었다.
쐐기가 날아와 가슴에 박히는 것 같다.
이 별에서 가장 강한 자.
그럼에도 부조리로 인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
어쩌면 나는 이쪽 세계에 너무 정을 준 걸지도 모르겠다.
“누님. 저는···”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내가 막 입을 떼려던 차였다.
불현듯 오싹한 마력의 기척이 저 멀리서 터져 나왔다.
“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바르도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슨···!】
나와 같은 곳을 쳐다본 그녀가 눈썹을 치켜떴다.
본부가 있는 방향이었다.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본부의 상공에 길쭉한 그림자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아카샤!”
구토를 하듯 탄식을 뱉었다.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아닌 아카샤였다.
나바르도제에게 당한 녀석은 대면했을 때와 생김새가 많이 달라진 채였다.
사지는 부러져서 기괴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불에 그을린 망토는 이미 넝마보다 못한 쓰레기로 변한 채였다.
“···어떻게?”
그럼에도 놈은 살아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바르도제와 내가 눈치채지 못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무슨 틈을 타서 저기까지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드는 것은 생존 여부만이 아니었다.
무너진 본부 위로 회백색 덩어리가 천천히 부상하고 있었다.
겉모습은 평범한 바위에 불과했지만 내용물은 완전히 달랐다.
나바르도제가 절규했다.
“세 세니엘?!”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놈을 향해 부상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세니엘이었다.
생명력을 넘어 세계의 미래를 품고 있는 돌멩이는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에서 은은한 광채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절벽을 박차며 뛰어 올랐다.
“누님!”
별도의 지시는 필요 없었다.
날개를 펼친 나바르도제가 나를 잡아챘다.
마음만 같았다면 공간 마법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세니엘의 마력 방해 때문에 불가능했다.
콰아아아아!
우리는 두 개의 혜성이 되어 본부로 쇄도했다.
나바르도제가 불꽃을 폭발시키며 점멸할 때마다 거리가 빠른 속도로 좁혀지고 있었다.
“당장 그거 내려놓지 못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카샤가 저걸로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른다.
다만 전신을 와류하는 불길함이 놈을 막아야 한다 외치고 있었다.
불현듯 본부의 천장이 부서지며 두 개의 그림자가 솟구쳤다.
“뮈이익!”
【너는 뭐냐 버러지 놈!】
판타시온과 쿼터 드래곤 형태의 오르세였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우리보다 훨씬 더 빨랐다.
눈 깜짝할 새 아카샤의 목전에 도달한 그들이 무기를 뽑아들었다.
오르세의 창이 찔러졌다.
판타시온의 새 도끼가 초승달을 그렸다.
“·······”
하지만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아카샤는 귀찮다는 듯 검지를 빼들었다.
퍼억-!
새하얀 균열이 하늘 위로 그어졌다.
판타시온의 왼팔이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사슴···!】
“윽.”
오르세의 눈이 커졌다.
붉은 피가 하늘을 적셨다.
하지만 판타시온은 왼팔이 잘렸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나머지 손으로 도끼를 바꿔든 그가 다시 한 번 일격을 내리찍었다.
아카샤는 검지에 이어 중지를 빼들었다.
콰아아아앙!!
허공에서 내리꽂힌 무형의 힘이 두 사람을 강타했다.
“뮈릭!”
【크학!】
나바르도제와는 달리 피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본부에 처박힘과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그 둘에게 시선을 옮길 수 없었다.
세니엘의 표면 위로 서서히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놈이 손가락을 하나씩 뽑아들 때마다 균열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안 돼!”
우리는 이 와중에도 간격을 빠르게 좁히고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오 초도 남지 않은 거리였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닿았다.
파아아아아!
칼자루를 움켜쥐자 검신을 타고 노을이 차올랐다.
“내려 와 이 새끼야!”
검을 뻗었다.
직선으로 쏘아진 오러가 아카샤를 휘감았다.
하지만 놈은 끌려오지 않았다.
마치 일광욕을 하듯 평온하게 노을빛을 쬐고 있을 뿐.
“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카샤는 나를 무시한 채 할 일을 계속했다.
놈의 오른 손가락 다섯 개가 완전히 펴지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균열로 뒤덮이던 세니엘이 폭발하며 생명 에너지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