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발악
#27
왕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시간의 흐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여덟 장의 날개가 움직임을 멈추고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머리 없는 거구가 구름 아래로 추락했다.
『안 돼···!』
『왕이시여!』
거인들이 경악했다.
일사불란하던 무리의 움직임이 난잡해졌다.
자기들끼리 부딪히고 갑자기 혼자서 추락하는 놈도 제법 있었다.
곰에게 습격당한 꿀벌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꼴 좋다.”
필히 멸종을 직감했기 때문일 터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죽음의 무게를 실감했다.
삶이 끝난다는 공포는 아무리 고고한 종족이라 해도 이겨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목표는 근원을 파괴하는 일 뿐이었다.
힘과 영혼의 집합체는 왕이 지키고 있던 신전 반쪽에 남아 반짝이고 있었다.
‘빈집털이가 따로 없군.’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며 근원으로 향했다.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대머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다.
맨질맨질한 두피를 스무 번쯤 밟았을까.
나는 폐허 위에서 맥동하는 근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끝이다.”
아벨은 마지막까지 근원을 파괴하는 것을 반대했다.
세상을 복구하는 데에도 분명 도움이 될 거라며 나를 설득하려 했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머리 종족의 정수가 담긴 힘은 일단 확보만 하면 어떻게든 사용처가 생길 터였다.
활용법에 따라서 우리가 놈들처럼 우주의 포식자로 거듭날 가능성도 있고.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
‘훔친 건 돌려줘야지.’
결국 힘의 근원은 다른 별에서 빼앗아온 생명이었다.
생계를 위한 도둑질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마련인데 타인의 영혼을 훔쳐서 원동력 삼는 것은 그냥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내가 심판을 위해 검을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갑자기 신전 아래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손이 근원을 움켜쥐었다.
“씨발 뭐야?!”
『그···으···카아아···!』
순식간이었다.
머리 없는 몸이 불쑥 나타났다.
틀림없이 내가 죽였던 거인의 왕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지독한 새끼!”
원래 세상에서 겨뤘을 때와 달랐다.
왕은 참수를 당했음에도 아직 살아 있었다.
잘려나간 머리는 놈의 왼손에 붙들린 채였다.
어차피 얼마 안 남았을 텐데 참 징한 놈이었다.
“어이가 없으려니까 원.”
그럼에도 문제는 없었다.
까짓꺼 다시 썰면 그만이었다.
검격을 막 뿌리려던 차였다.
파아아아아아!
근원을 움켜쥔 손가락 틈새로 강렬한 섬광이 새나왔다.
“윽.”
하늘이 하얗게 물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나무뿌리같은 왕의 팔뚝 혈관을 타고 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왼손에 들려 있던 머리는 목 위에 얹어진 채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는 중이었다.
『그···크가아악···!』
“뭔 개짓거리를····”
느낌이 좋지 않았다.
왕의 몸에 새겨졌던 상처가 급속도로 치유되고 있었다.
베이고 찔린 자리가 아물고 눈에서 쏟아지던 피가 멎었다.
심지어는 목의 절단면마저 거품처럼 부글거리며 재생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크악!』
갑자기 고함을 지른 왕이 주먹을 내질렀다.
아까보다 훨씬 빨랐다.
상추 한 장 간격으로 회피를 성공하는 찰나였다.
정권이 내질러진 경로의 모든 것이 소멸했다.
신전 외벽도 창백한 구름도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던 대머리 수백 명까지.
퍼어어어엉!
뒤늦은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지어졌다.
나는 즉시 몸을 뒤틀어 연이어 날아온 공격을 피했다.
다시 한 번 내질러진 정권과 함께 투명한 터널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역시 머리가 잘리기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채였다.
『크아아악! 그르륵 카악!』
“······마지막까지 추잡하군.”
다만 대가 없는 회복은 아닌 것 같았다.
왕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하늘이 흔들리고 있었다.
두터운 피부 위로는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신의 혈관은 터질 듯 팽창한 채 근원과 같은 백색광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마비되었던 여덟 날개도 정상적이지 않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어색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직감했다.
이건 진지하게 부활을 노린 것이 아니라 근원을 이용한 최후의 발악에 불과하다는 것을.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냐 몇 번이고 죽여주마.”
더는 발판이 없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노면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왕의 주먹이 신전을 박살냈다.
놈은 나를 어떻게든 붙잡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스각!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이 넓은 반달을 그렸다.
여덟 날개 중 오른쪽 네 개가 일격에 잘려 나갔다.
검기를 발치에 폭발시켜 가속한 내가 놈의 가슴팍에 검을 박아넣었다.
『그하아악!』
“죽어 보자.”
추락이 시작됐다.
포효하는 바람 너머로 거인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구름을 찢으며 떨어졌다.
두터운 구름층을 뚫고 나오자 탁 트인 공간이 펼쳐졌다.
거인들의 도시가 존재하는 구름 바다의 틈새였다.
“뒈져 버려 이 새끼야!”
『그윽! 그으윽!』
왕은 난동을 부렸지만 나를 떨쳐내지는 못했다.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완전히 해체할 필요가 있었다.
검을 찌르거나 휘두를 때마다 빛나는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혈액보다는 수은처럼 보이는 피는 증발하듯 분해되며 종국에는 하얀 기체가 되어 흩어졌다.
즉 영혼이 되어서.
‘이거 진짜 내버려 두면 큰일 나겠는데.’
왕의 몸이 근원과 결합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놈의 피 한 방울에는 못 해도 수만 명 분량의 영혼이 응축되어 있었다.
나는 최대한 피를 많이 뽑아내기 위해 근면히 검을 휘둘렀다.
피 자체는 원활하게 나왔지만 상처가 곧바로 낫고 있어서 진행에 애로가 있었다.
“제기랄 좀 잘려라.”
단번에 끊어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떨어지던 우리는 결국 아래쪽의 구름 바다까지 뚫고 내려갔다.
화아아아악!
백색뿐인 지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득히 먼 곳에 울퉁불퉁한 산맥들이 등뼈처럼 솟아나 있었다.
별이 커서 그런지 산도 더럽게 높았다.
못해도 하나가 만 미터는 넘는 것 같은데.
마구잡이로 뒤엉키며 칼질에 몰두하던 와중이었다.
불현듯 왕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크르륵···네놈이 감히!』
“뭐?”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놈의 주먹이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피하기에는 늦은 거리였다.
나는 검을 눕혀 공격을 방어했다.
콰직!!
눈앞이 하얘지는 충격과 함께 몸이 튕겨나갔다.
“커억!”
『신성한 근원에 손을 대게 하다니···! 그륵 선왕과 일족의 명예를 걸고 너만큼은 소멸시키겠다!』
웅혼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집혔던 방향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까스로 눈을 뜨자 거인의 왕이 네 장의 날개를 완전히 접은 채 수직으로 강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속도가 어마어마한 것이 머지않아 내게 닿을 것 같았다.
“에잇 젠장.”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이빨 한두 개가 부러진 것 같았다.
저딴 걸 흡수하고도 이성을 되찾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왕이라 그런지 역시 생존력도 왕이었다.
쭉 뻗어 움켜쥔 놈의 주먹은 눈보라를 연상케 하는 광채로 휩싸여 있었다.
“···저력을 보여주겠다 이거냐?”
저딴 걸 맞았다가는 흔적도 없이 분해될 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근원을 흡수한 왕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서운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붕괴될 것 같던 육체는 안정되는 중이었고 피부 위로 유실되던 영혼 또한 눈에 띄게 줄은 채였다.
생각난다.
저거 비슷한 걸 원래 세상에서도 본 적 있다.
근원의 힘을 흡수한 아벨.
자타가 공인하는 내 최악의 적이었다.
“크크···뭐든지 쉽게 넘어가는 게 없구만.”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어째서인지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립다면 그리운 감각이다.
이렇게 몰린 게 얼마만인지.
“좋아. 끝을 보자.”
나는 칼자루를 두 손으로 고쳐 쥐었다.
그리고 누워서 떨어지는 자세 그대로 놈을 겨냥했다.
당장 떠오르는 대처법은 이거밖에 없었다.
아마 오랫동안 고민해도 달라지지 않을 테고.
파아아아아···!
검신을 타고 노을빛이 차올랐다.
상대를 끌어당기는 내 오러였다.
시야 양 옆으로 펄럭거리는 코트는 꼭 검은 불꽃처럼 보였다.
대머리들이 살아가는 모성의 상공.
천천히 가까워지던 산맥의 형체가 한층 뚜렷해지는 순간이었다.
“흐읍.”
칼자루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칼날 안쪽에서 머물던 오러가 단번에 전방으로 터져 나갔다.
거인의 왕이 노을에 휩싸였다.
워낙에 체급 차이가 많이 나는지라 오러는 양쪽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
왕이 내게로 끌려온다.
동시에 추락하던 내 몸이 놈을 향해 솟구쳤다.
“큭···!”
이를 악물었다.
검기 폭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가속이었다.
한순간이나마 우리는 빛 다음으로 빠른 존재가 되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놈은 나를 인지하지 못했지만 나는 분노에 휩싸인 채 주먹을 내지르고 있는 놈을 볼 수 있었다.
아주 가깝다.
검을 휘두르면 바로 닿을 만큼.
그제야 나를 인식한 왕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무슨···!』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소름을 느낀다.
근원을 흡수하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감각이 발달해 있었다.
기특해서 두피 마사지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럴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
검을 수직으로 내려 벤다.
주홍색으로 이글거리는 칼날이 놈의 얼굴을 파고든다.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기에 힘을 줄 필요도 없다.
목을 양단한 검은 이어서 흉곽과 척추 종국에는 골반뼈를 베며 빠져 나온다.
우리가 교차함과 동시에 노을은 저문다.
세로 방향으로 갈라진 왕의 몸이 내 양 옆으로 추락했다.
『······!』
파육음은 없었다.
유언도 남지 않았다.
두 개의 선명한 절단면에서 빛나는 액체가 터져 나온다.
콰아아아아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빛줄기가 하늘 저편으로 솟구쳤다.
하나하나가 얽매여 있던 영혼이었다.
아무래도 심장이 갈라지며 근원도 함께 파괴된 것 같다.
『크아아아악!』
『소 소멸한다···!』
그때 머리 위에서 처절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시선을 옮기자 구름 아래로 내려오는 수백만의 거인이 눈에 들어왔다.
왕에게 가세하기 위해 온 놈들의 몸은 모조리 하얀 입자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썩 유쾌하다.
나는 낄낄거리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잘 가라. 병신들아.”
그리고 엄지를 아래로 꺾었다.
몇몇이 내게 빛의 창을 던졌지만 그조차 얼마 가지 못해 흩어져 버렸다.
눈을 잠시 감았다 떴을 때는 하늘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거인 종족의 패배.
그리고 작전의 완전한 성공을 의미하는 광경이었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이제 내 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 뿐이었다.
“좆됐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힐끔 아래를 쳐다보았다.
제법 가까워졌다지만 아직도 수천 미터는 남은 것 같았다.
끔찍한 미래가 머릿속을 스친다.
갈가리 찢긴 내 육편이 산맥을 붉게 물들이겠지.
이 와중에도 지상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린이 미친 듯이 진동하며 경고를 보내던 와중이었다.
파아악!
보이지 않는 무언가 내 몸을 낚아챘다.
“자 잡았어요! 오르세 님 제가 잡았다고요!”
【시끄러워 나도 봤다!】
동시에 요란스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굉장히 익숙하다.
하늘에 드러누운 채 위를 올려보았다.
검은 용 한 마리가 낯익은 면면을 태운 채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긴장이 탁 풀린다.
경직되어 있던 입꼬리 한쪽이 씩 올라갔다.
“빨리도 온다.”